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이 소설은 반전?이 있는 소설이고 이 리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를 서술자로 하는 소설은 믿을 게 못 된다.
다 읽고 나서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가 딱 생각났다.

이 책의 주인공 스티븐스는 너무나 점잖은, ‘품위 있는’ 진짜배기 영국식 집사인데,
심지어 ‘집사론’ 이라는 책을 써도 될 만큼 위대한 집사가 무엇인지 평생 심사숙고하고 토론했으며, 자기 스스로 생각하기에 최고의 지위에 오른 품격 있는 집사인데.
사실 그것은 다 거품이었고, 무의미한 일이었다.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억제하고, 무시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대의를 위해서 ‘봉사’했지만,
역사는 그를 엄정하게 심판했다. 너는 나치를 위해 봉사한 주인을 섬긴 집사라고.
주인의 인격이 어떤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인이 실제로 어떤 일에 몸담고 있는지라고.
유명인사를 만나고 극비리에 회담을 무사히 진행하고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회담에서 다루어지고 결정된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라고.

이 책에서 내가 던진 질문은 다음의 두 가지였다.
1. 인류사의 중대한 결정은 몇몇 지도자의 손에 맡겨져야 하는가, 아니면 지금처럼 대의 민주주의에 맡겨놓아도 되는 것인가. 배웠다는 자들의 눈에 ‘무식하게 보이는’ – 우리나라에서는 이들을 개돼지라 부른다 ㅠ – 민중들의 손으로 나라의 중대한 일들을 결정하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지금 우리나라 대통령만 보아도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지도자의 현명한 의사결정과 그 결정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란 ‘결과’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과 ‘절차’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국민들의 뜻에 따르는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절차를 확립해 두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한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잘못된 길로 가더라도, 그러한 의사결정에 이르는 과정이 민주적이었고, 다수의 합의를 통해 얻어낸 것이라면 그 결과에 대해서는 어떻게 되든 함께 책임지고 또 수정해 나가면 되는 것 아닐까. 사람들의 마음이나 이성이란 워낙 흔들리기 쉽고 비이성적이고 깨지기 쉬운 것이라는 걸 알지만, 게다가 그 틈새를 노리는 교묘한 심리전이 많다는 것도 알지만.
내가 너무 이상주의적인 걸까.

2. 스티븐스의 ‘실패한’ 인생을 두고 과연 스티븐스를 비난할 수 있을까?
사실 이 책에서 스티븐스는 꽤나 매력적인 캐릭터다. 마구마구 응원해 주고 싶고 미워할 수 없는. 그가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는 것이 뻔히 보일 때에도, 꼰대짓을 하거나 돌아가는 상황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위장하고 있는 것을 뻔히 알고 있을 때에도 왠지 그를 비난하거나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아마 ‘노인’이자 ‘집사’라는 위치가 ‘약자’의 위치임을 은연중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이 소설에서는 성공적인 집사의 인생을 살았던 스티븐스의 아버지 이야기가 제법 비중 있게 다뤄진다. 몇십 년 동안 품위를 지키며 집사로 살았지만, 말년에는 아들의 주인집에 얹혀 사는 아버지의 모습. 말년에 이르러서까지도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쉼없이 몸을 놀려야 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스티븐스의 미래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모습은 많은 ‘나’, 우리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멈춰서서 평가 내리고 반성하고 항상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방향 키를 조정해 가며 사는 사람이 우리들 중 과연 몇이나 될까? 그냥 열심히 하면 뭐든 될 거라고 생각하며 무턱대고 열심히 노력만 하거나, 또는 여러 가지 경로로 설정된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결정을 내리며 사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나는 열심히 살았노라고. 나는 인정받았노라고.
악독한 독재자나, 유명한 전범, 고문 기술자가 회고록을 내는 이유도 그래서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들을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고 싶어하니까. 그러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존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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