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 박사의 섬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87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한동훈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웰스의 공상과학 소설은 기술문명의 찬가가 아니다. 그는 과학기술 발전 이면에 드리운 어두운 미래를 응시한다. 자연을 정복하고 신의 영역에 도달할 것을 자부하는 인류 문명의 오만과 독선을 냉엄한 시각으로 전망한다. 대표적 일련의 작품인 <우주전쟁><타임머신> 그리고 이 소설도 주제의식을 공유한다.

 

생체실험. 마루타로 대변되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인체실험이 떠오른다. 당연 불법이면서 비도덕, 비윤리, 비인간적인 처사이므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행위. 그렇다면 동물실험은 어떨까? 꽤 많은 사람들이 학창 시절 수업 시간에 개구리 해부를 해본 경험을 가지고 있다. 거창하게 실험이란 전문용어를 언급할 필요도 없이 식용 목적으로 사육 및 도축되는 무수한 동물의 시한부 생명들을 보라. 나아가 요즘은 생체실험조차도 불필요하다. 유전자 조작이란 보다 편리하고 효과적인 작업 기술이 있으니. 웰스는 의도하지 못하였지만 생체실험은 현대의 유전자 조작을 비추는 거울이다.

 

전에 그들은 짐승이었고 환경에 본능을 맞추면서 하나의 생명으로서 나름대로 행복했으리라. 그런데 지금은 인간성이란 족쇄에 묶여 몸부림친다. 결코 사그라들지 않는 두려움 속에 산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법 때문에 불안해한다. 고통으로 시작된 그들 가짜 인간으로서의 삶은 하나의 긴 내적 몸부림이자 모로에 대한 기나긴 공포에 다름 아니다. 무엇을 위해? (P.139)

 

모로 박사는 과학기술 종교를 신봉하는 현대인의 전형이다. 자연은 인간 존재를 위한 부속물에 불과하므로 언제든지 개조하거나 정복해야 할 대상이다. 인간은 자연을 마음대로 할 무소불위의 당연한 권리를 지녔다는 오만. 모로 박사는 연구윤리를 상실한 과학자의 표본이다. 과학자는 지적 호기심을 위해 과학 연구에만 매진할 뿐 그 이외의 것은 외면하는 게 당연하다는. 과학기술이 인간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증대할수록 과학자에 대한 책임성의 요구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심장이 쫄깃쫄깃 하는 스릴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모로 박사의 실험에 대한 주인공의 오해와 공포. 낯설기 그지없는 동물 인간들의 기괴한 형체와 습성. 미지의 세계와 문명에 접촉하는 긴장과 모험. 본질적 정체를 알 수 없기에 더욱 공포스러운 동물인간들의 행동양식.

 

완벽한 동물의 자세를 취하고서 눈빛을 번쩍이며 공포에 뒤틀린 그 불완전한 인간 얼굴을 보면서 나는 녀석이 인간과 다를 바 없음을 새삼 깨달았다. (P.137)

 

동물 인간의 본성 회귀는 사필귀정이자 인간 능력의 한계를 명시한다. 독자는 괴물화된 동물인간에 두려움을 품지만 동물 자체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품는다. 동물적 야만은 명백하기에 오히려 덜 두렵다. 가면 아래 은폐된 인간화된 야만성은 한층 무섭다. 주인공이 문명세계에 복귀하고 군중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공포에 휩싸이는 까닭이다. 우리 자신이 동물 인간이 될 수 있다.

 

나는 내 동포들을 둘러보고는 두려움에 빠져든다. 날렵하고 밝은 얼굴들, 무표정하고 위험스런 얼굴들, 단정치 못하고 불성실한 얼굴들을 지켜본다. 그들 중 이성적 정신의 차분한 소유자는 아무도 없다. 그들에게 동물성이 휘몰아치는 듯 보인다. 머잖아 여기 섬나라 사람들의 퇴화가 대규모로 재연될 것처럼 보인다. (P.190)

 

후대 전 세계를 휩쓴 전체주의 광풍과 종교적 광신은 웰스를 조지 오웰에 앞선 예언자로 각인시키기에 충분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명정 40년 - 4판 범우문고 20
변영로 지음 / 범우사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음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날로 차가워진다. 음주운전 처벌은 계속 강화되며, 소위 주폭(酒暴) 단속도 엄격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음주 후 사고를 치더라도 관대히 용서 받았다. 술 먹고 그런 건데 뭐. 아니면 사람은 좋은데 술이 웬수지 하면서 말이다. 수주 변영로의 명정기(酩酊記)도 요새라면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글들이다.

 

참으로 대담하면서 일견 낯 두꺼운 글들이다. 명정(酩酊)이란 한마디로 곧 술주정이다. 글쓴이가 술 마신 내력의 자술서인 동시에 대취하여 술주정을 부린 광태를 기술한 글이다. 이 수필집이 출간된 연도가 1953년이며, 대다수의 수록글들이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하물며 글쓴이가 당대의 저명한 시인이라면 한구석의 조금이나마 탐탁지 않은 심정마저 스러진다.

 

아무나 명정기를 쓰지는 못한다. 적어도 글쓴이처럼 5, 6세부터 시작한 음주 내력에 술을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그 이상의 주량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제아무리 담대한 인물이라도 자신의 술주정을 사회에 드러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너무나도 부끄러운 치부인 동시에 대체적으로 도덕적으로도 떳떳치 못한 법이다. 그럼에도 명정기를 거침없이 써내려가는 글쓴이라면 겉과 속이 한결같고 가식 없는 인품임을 알게 해준다. 스스로 도덕군자인양 위선을 부리지 않는다.

 

이른바 혼술이 아닌 바에야 술친구가 있을 것이며 술자리 전후로 맞닥뜨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대의 저명한 문인, 학자들의 드러나지 않은 일화를 알게 되는 재미도 남다르다. 겨울밤 길바닥에 뻗어있던 수주의 목숨을 홍난파가 구해 준 일. 시인 황석우가 접시를 던져 뺨에 큰 상처가 났던 사건. 위당 정인보를 위하여 그의 아버지에게 술동무를 해드린 일. 오상순, 염상섭 등과 통음한 후 나체로 소를 타고 시내로 향하던 황당한 사건은 물론 염상섭과 대취한 후 취한들과 3 1의 난투를 벌인 일대 사건 등 무수한 사건과 사고.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낯부끄러운 일조차도 그는 솔직담백하다.

 

술 먹는 사람만이 술의 해와 폐를 참으로 가슴 쓰리게 느끼고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술 깨인 뒤에 치르고 겪는 그 고통 그 비참은 필설로 표현할 길이 없다. 때때로 자살까지도 염에 두어 본 적이 한두 번 아니었다. (P.84~85)

 

술 먹는 사람에게는 이런 종류의 기록이 종종 유지(有之)하나 지내 보면 턱없기 그지없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도덕적 추태감을 골수 깊이 느끼게 되는 것이다. (P.100)

 

때로는 대취하면 일경(日警)의 뺨마저 후려갈기던 당당한 기세의 그였지만, 음주의 폐해를 완전히 외면하지는 못한다. 애주가치고 금주, 애연가치고 금연을 생각해보지 않고 실행해보지 않은 이는 드물 것이다. 이에 그는 금주패를 몸에 차고 무려 수년간이나 금주를 결행하였으며, 수년 지나서 재차 금주를 결의하고 일간지에 금주 단행론을 공표하기도 하였다. 그가 여기서 초지일관하였다면 이 책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지만, 사기 결혼(?)으로 재혼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정신이 말짱한 사람이 술 취한 인물을 바라보는 심경은 복합적이다. 당황스러우면서도 흥미롭다. 이 사람이 술 마시면 이렇게 변하는구나. 새삼 신기하다. 게다가 술주정이 그다지 민폐를 끼치지 않을 정도면 구경의 재미도 쏠쏠하다. 일견 부럽기조차 하다. 명정에 이를 정도의 정신적 여유와 애주에 이르는 몰입, 그것을 담아낼 주량과 체력. 속물들은 자칫 속내가 드러날까 봐 마시는 둥 마는 둥 술잔을 입에 댈 뿐이다.

 

수주의 명정기를 읽다 보면 그래도 그는 참으로 깨끗한 인물임을 알게 해준다. 가난한 시인이자 영문학자로서 시속과 세태에 물들거나 굴하지 않고 의연함을 견지하였다. 그의 연보를 통해 독립선언서를 일찍이 영어로 번역하였거나 해방 후 영시집을 발표하고 영문 일간지를 발간하는 등 당대 현실에서 위민과 애국의 길을 나아갔다. 이는 명정기의 마지막 편 나의 음주벽에서도 선명히 드러난다.

 

아는 이는 아다시피 나는 호주를 지나 탐주를 하였고 그간 금주 연한 몇 해를 빼어 놓고는 무일불취(無日不醉)하였으나 의롭지 않고 떳떳치 않은 술은 되도록 사퇴했다......(중략)......나는 불의와 악수는커녕 타협하여 본 적이 없음을 50이 지난 오늘날 자허(自許) 삼아 말하여 두는 동시에 어느 권세나 금력 앞에 저두평신(低頭平身)하여 본 적조차 없다. (P.141~1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운의 여인 록새너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다니엘 디포 지음, 김성균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의 맘에 들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라고 칭한다. 선악(善惡)은 쉽사리 호오(好惡)로 치환되기 일쑤다. 디포의 여주인공 록새너는 분명 나쁜 여인이다. 그녀의 캐릭터에 대한 좋고 싫음은 논외로 치고 말이다. 몰 플랜더스라는 디포의 또 다른 나쁜 여인이 있지만, 록새너에 비하면 그나마 착한 편이다.

 

디포는 탁월한 이야기꾼이자 인물창조자이다. 로빈슨 크루소와 잭 대령, 록새너와 몰 플랜더스처럼 사이부동(似而不同)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들을 비슷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집필하였다. 각각의 인물과 작품들은 저마다의 재미와 매력을 뽐내고 있으니 천부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록새너가 기아를 면하기 위해 자식을 버린 것은 안타깝지만 이해 불가능하지 않다. 호구지책이 없어 보석상의 첩이 된 것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부자의 첩이 되어 프랑스에서 호사스럽게 생활하고 보석상의 사고사 후 다시 모 귀족의 첩이 된 것은 어차피 들어선 인생길이 그럴 수도 있다. 최소한 이때까지 록새너는 성적으로 순결했다. 한 남자에게만 충실하였다는 점에서. 외관상 화려와 사치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록새너의 검소함과 재화에 대한 관심은 당연하다. 수년 전 뼈저린 체험이 의식에 잠재되어 있었을 테니.

 

이제 나는 악마의 대리인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나만큼 악하게 만드는 일이 나의 임무였다. (P.80)

 

그러나 나는 이미 여성의 미덕을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악마는 나의 내부로 침입할 수 있는 약점을 발견하고 쉽게 나를 제압했다. (P.111)

 

록새너는 자신을 비하하고 사악함을 자탄하지만, 실질적 악녀성은 이후 부도덕과 범죄행각에서 드러난다. 커다란 재산과 탁월한 재테크로 그녀는 거부가 되지만, 여러 남자들에게 계속 자신의 몸을 파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화대 수입뿐만 아니라 행위 자체의 쾌락에 깊이 빠져든 것이다. 또한 영국에서 유럽에서 낳고 방치한 아이들에 대해서는 일절의 관심도 갖지 않으며 스스로 모성애의 약점을 인정한다.

 

록새너의 하녀 에이미는 또 하나의 주인공에 가깝다. 그녀는 록새너와 영욕을 같이하며 록새너를 위한 무조건적 충성을 바치는 인물이다. 에이미는 록새너의 수족이자 친구이며 자매와도 같다. 독립하여 가정을 꾸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록새너를 떠나지 않는데 록새너의 분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에이미는 록새너의 심중을 샅샅이 헤아리고 있기에 록새너의 불안의 근원을 꿰뚫고 있다. 자신의 가면과 허위가 탄로나 일순간에 세인의 지탄을 받고 몰락하며, 영국에서 재회하여 마침내 부부가 된 더치 사업가와의 관계도 끝장날 것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 그 뿌리는 록새너의 정체를 의심하고 서서히 접근하여 신분을 확인하려는 버려진 딸이다.

 

그 딸의 심경과 진의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누군지 모른 채 적당한 경제적 원조를 받아 남들처럼, 남들보다 오히려 더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면 감사하고 만족하면 안 되었을까. 수십 년을 버리고 방치해 둔 생모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그토록 깊은 것인지. 아니면 록새너의 막대한 부를 노린 것은 아니었을까. 록새너의 실체가 별 볼일 없는 평범한 부인네였다면 그 딸은 여전히 생모의 정체에 집착했을까 등등.

 

록새너의 극적인 삶의 여정과 화려한 탕녀의 묘사에 눈을 떼지 못한 독자가 어느덧 지위와 부와 남편을 갖게 된 록새너에 싫증이 났을 즈음부터 디포는 작품의 줄기를 확 틀어버린다. 록새너가 생모라는 사실을 추적하는 딸과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도피하는 록새너의 치열한 대결 구도. 해결사로 개입하는 에이미.

 

록새너는 에이미를 저주하고 내쫓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록새너의 잠재된 내심을. 록새너는 일시적으로 에이미를 원망하지만 가슴 한켠에는 해방감과 안도감이 자리 잡고 있다. 에이미와 화해는 불가피하다. 딸은 없어져도 상관없지만 에이미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므로.

 

록새너를 집필한 디포의 생각이 문득 궁금해진다. 몰 플랜더스의 말을 빌린다면 같은 악행에 빠지지 않도록 악행을 충실히 기술함으로써 잘못된 삶을 반면교사로 삼기를 바란다. 몰과 록새너 모두 노경에 이르러 잘못을 회개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물론 록새너는 성공적이지 못하였지만.

 

악녀의 매력과 악행의 재미에 몰입하여 본질을 놓칠까 우려한 작가는 잊지 않고 이따금씩 주인공의 입을 빌어 스스로를 원망하고 저주하는 말을 늘어놓게 한다. 여자를 유혹하고 망치는 지배계층의 타락상도 제법 날카롭게 지적한다. 모두가 독자들에 대한 주의환기이자 검열관을 위한 자기변론일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이 이야기를 자세히 했는데 그것은 지체높은 남자들이 곤경에 처한 여자를 망치는 수법이 어떤지를 보이기 위해서였다. 빈곤과 궁핍은 가난한 여자를 망치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지만, 허영과 화려한 생활에 대한 꿈도 마찬가지다. (P.110)

 

나는 살아 있는 표본이 되어 사탄과 같은 오만과 어리석음이 일으키는 광기와 정신착락은 어떠하며, 과욕이 인간을 어떤 존재로 만드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릇된 야심의 충동대로 행동하면 얼마나 엄청난 화를 당하는지를 보여 줄 것이다. (P.279)

 

이상하게도 내 모든 부정한 행위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거대한 재산도 모았지만 어떤 독자도 내가 행복했다거나 마음 편안했다고 속단하지 않기 바란다. 절대로,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양심의 화살은 나의 폐부를 깊이 찔렀다. 겉으로는 우리의 기쁨이 최고도에 달했을 때에도 내 가슴속은 항상 남모르는 지옥이었다. (P.455)

 

옮긴이는 50면에 달하는 작품해설과 작가해제를 통해 디포가 단순한 문필가가 아님을 소개한다. 그는 일생에 걸쳐 끊임없이 사회개선과 부조리를 지적한 저널리스트였다. 이쯤에서 우리 자신에게 되묻고 싶다. 이 작품의 피카레스크 요소에 주목한다면 작가는 타락의 길에 빠져서 부도덕과 환락의 세계에 헤어나지 못하는 한 여인의 삶을 통해 당대의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서술하고 있는 게 아닌지를.

 

록새너는 프랑스에서 더치 사업가의 도움을 받아 재산을 갖고 영국으로 돌아온다. 이때 더치 사업가와 동거하면서 그의 구혼을 받지만 그녀는 거절한다. 거절의 변은 장황하지만 재산을 빼앗길 우려와 속박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렇더라도 당대로서는 파격적인 견해를 서슴지 않고 토로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록새너답다.

 

또 결혼 계약이라는 것은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한마디로 여자의 자유와 재산과 인권 등 모든 것을 남자에게 바친다는 약속이며 여자는 결혼을 하면 그저 한낱 여자 즉 노예일 뿐이라고 했다. (P.255)

 

여자가 독신으로 살면 모든 사회적 권익을 보장받고, 자기 소유의 재산은 완전히 자의로 쓸 수 있고, 무슨 일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남자가 자신의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듯이 여자도 독자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했다. (P.256)

 

더치 사업가의 파격적 양보와 배려에도 록새너는 그와 헤어지고 마는데 이후 그녀의 삶에서 잠재된 그녀의 욕망을 알 수 있다. 성적으로 신분 면에서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삶. 정식 부인이 됨으로써 얻게 될 안정과 사회적 인정은 그녀에게 덜 중요한 가치였다.

 

작가는 딱딱한 논설에 의존하지 않고 대중성과 흥미성을 절묘하게 섞어 실로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악녀 록새너의 캐릭터를 창조하였다. 그의 다른 작품과 당대를 비교하더라도 이만큼이나 적극적이며 자기주도적인 여성은 찾기 어렵다. 그것이 읽는 내내 주인공을 향한 독자의 애증이 교차하는 심리적 갈등을 유발하는 연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방망이 깎던 노인 - 5판 범우문고 104
윤오영 지음 / 범우사 / 1976년 3월
평점 :
품절


‘방망이 깎던 노인’ 그리고 ‘마고자’, 학창시절 교과서로 친숙한 수필들이다. 명작도 손때가 묻으면 진부하고 식상해질 위험성을 내포한다. 이 글들은 시대에 뒤처진 고리타분한 옛 시절 이야기와 감상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방망이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많지도 않을뿐더러 방망이에 뒤이어 죽기와 약재로 이어지는 작가의 소회에 동감하기엔 너무 낯설어진 풍경이다. 한복 자체를 입는 풍속도 소멸되는 판국에 하물며 마고자이겠는가. 작위적 교훈성은 은근한 거부감마저 야기한다.

 

생경한 한문투의 어휘와 인용문, 1960~70년대 발표된 탓에 수십 년의 시간적 간극이 지닌 문화적 생소함은 신기함과 동시에 불편함이 사실이다. 이 얄팍한 문고판에 실린 25편의 짤막한 글들에서 풍기는 지은이의 감수성은 반면 오늘에도 유의미한 정서를 나타낸다. 가식 없는 가운데 고상한 기품이 배어나오는 글들은 따뜻한 정감마저 드리운다. ‘측상락(廁上樂)’의 소탈과 분방함은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울 정도다.

 

하정소화(夏情小話)’ 서두에서 더위를 기쁨으로 참는다는 글쓴이의 엉뚱함은 야트막한 동산에서 월하미인과 조우하며 찌는 듯한 무더운 여름밤이 훈훈한 추억으로 자리 잡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달밤의 정서도 여기서 멀지 않다.

 

찰밥말미의 문장은 중년이 된 일개 소시민이라면 가슴 한켠이 저릿할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솔직하다.

 

어머니! 야망에 찼던 어머니의 아들은 이제 찰밥을 안고 흰 터럭을 바람에 날리며, 손등으로 굵은 눈물을 닦습니다.” (P.40)

 

우리네 고유문화에 대한 애정과 사라져 가는 아쉬움을 제재로 하는 글들이 제법 분량을 차지한다. 앞선 대중적 수필 두 편 외에 촌가의 사랑방’, ‘오동나무 연상’, 무엇보다 수록작 중 최장인 한국적 유머와 멋이 여기에 속한다. 그는 멋을 인생의 맛으로 파악하고, 우리네 멋은 슬픔과 결부되어 있다고 밝힌다. ‘생활과 행복에서 미적 균형과 조화를 잃고 있는 현대 생활에 대한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향기를 거두고 품()을 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수필이란 거기서 우러난 다향(茶香)이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진실을 깨치고, 그것을 아끼고 또 음미하고 기뻐하고, 눈물과 사랑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즐길 수 있는 글이다. (P.65)

 

수필은 재()로 쓰는 것이 아니고 정()으로 쓰는 것이다. (P.120)

 

엽차와 인생과 수필’, 글쓴이의 수필관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와병수감(臥病隨感)’에서도 한 대목 적고 있다. ‘오동나무 연상에서는 나아가 문장관마저 드러낸다.

 

글을 사랑하는 사람은 문정(文情)과 문사(文思)에서 잠시도 떠나지 아니함으로써 속기(俗氣)를 떨치고 문아(文雅)한 품성(品性)을 기른다. (P.111)

 

최만년의 글이라고 짐작되는 와병수감은 보다 인간적 면모가 약여하다. 인생의 외로움과 고독 속의 한줄기 정, 그리고 행복. 피천득과의 돈독한 우정이 여기서 언급된다. 짤막짤막한 단편들이 두서없이 나열되어 정서한 시간마저 갖지 못한 연민마저 느낀다. 이 글들은 자신과 자신을 알던 이들에게, 나아가 세상을 향한 유언에 다름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145
윌라 캐더 지음, 윤명옥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윌라 캐더의 글쓰기 특징은 비교적 확연하다. 인물 내면과 주변에만 집착하지 않고 그들이 자리한 문화적, 자연적 배경을 폭넓게 드러내면서 역사화 내지 풍경화를 보는 듯한 착시마저 들게 한다. 읽는 이는 대개 주된 인물의 내면에 동참하여 함께 호흡하고 감정을 공유하기 마련인데 캐더의 작품에서는 그러하지 않다. 과도한 몰입과 숨 가쁜 질주는 여기서 찾아보기 어렵다. 마치 한 지방의 민담 혹은 전설을 듣는 듯한 차분하고 느긋한 진행과 개개의 미세한 묘사를 뛰어넘은 대범하고 관조적인 기술이 두드러진다.

 

캐더의 작품에서 배경을 삭제한다면 얼마나 삭막해질 것인가를 우리는 알고 있다. 전작의 네브라스카는 물론 이 작품의 뉴멕시코 지역은 단순한 배경을 떠나 인물의 성격과 작품의 전개, 그리고 주제의식과도 치밀하게 연계되어 있어 작품의 특징적 매력에 깊게 관여하고 있다.

 

하늘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구름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 밑에 있는 사막은 단조롭고도 여전히 똑같아 보였다. 광대한 하늘은 바다보다 더 넓고 세상 그 어느 곳보다도 더 컸다. 평원이 그곳에, 사람의 발치 아래 있었지만 주변을 살펴보면 보이는 것은 찌르는 듯한 눈부신 파란 하늘과 움직이는 구름뿐이었다. 산들마저도 하늘 아래에서는 단지 개미 언덕으로 보였다. 다른 곳에서는 하늘이 세상의 지붕이었지만 이곳에서는 땅이 하늘의 바닥이었다. 누군가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을 때 그리워하는 풍경은 모든 것들 중에 단 하나, 사실 그 안에서 살고 있는 하나의 세상인 하늘, 하늘이었다! (P.259)

 

이번 소설에서 작가는 두 가톨릭 사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다지만 아마도 단순 모티브 역할 정도일 뿐 작품 내 라투르 주교와 바일랑 신부는 전적으로 작가의 펜끝에서 생명을 얻었을 것이다.

 

광활한 뉴멕시코 지역의 관구 관리와 포교를 위해 파견된 신부들 이야기. 소설이든 영화이든 선교사들을 다룬 작품은 제법 많다. 대개는 현지인의 냉대와 부정한 지방정권의 탄압에 굴하지 않는 인간적, 종교적 감동을 선사하기 위함이다. 개인적으로 현지 문화를 배척하고 획일적인 서구 중심적 가치관을 강요하는 선교 사업에 썩 동의하는 편이 아니기에 이 책을 읽을까말까 망설이기도 했다는 점을 언급한다.

 

두 사제는 이미 여러 곳에서 선교활동을 같이 하였으며 학창시절부터의 친구이므로 상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라투르 주교는 차분하고 지적이며 온화한 반면 바일랑 신부는 감정과 행동의 진폭이 크다. 두 사람이 정반대 성향이라는 점은 선교활동에서 득으로 작용하는데, 바일랑 신부는 남다른 친화력으로 현지인들 사이에 쉽사리 융화되어 개척 사업에 커다란 성과를 보인다. 라투르 주교는 가톨릭 본부와의 관계 및 현지 가톨릭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정착될 수 있도록 관리하는데 주력한다.

 

두 인물의 사고와 행동방식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는 올리바레스 부인, 즉 도나 이사벨라 재판 건이다. 죽은 남편의 유산은 합법적으로 물려받기 위해 본인의 나이를 밝혀야 하는 입장에 처한 부인. 하지만 그녀는 유산을 포기할지언정 나이를 밝히기를 거듭 거부한다. 딱한 그녀를 돕고자 하는 심정을 동일하지만 바일랑 신부는 유산을 놓쳤을 때의 암담한 현실을 강조하며 그녀를 윽박지른다. 라투르 주교는 다르다.

 

라투르 신부가 엄격하게 주교 대리를 흘낏 보았다. 그만 두세요.그가 재빨리 말했다. 그는 요셉 신부가 놓아준 부인의 작은 손을 잡고 몸을 숙여 정중하게 손에 입을 맞추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더 이상 강요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이 문제는 올리바레스 부인과 그분 자신의 양심에 맡겨 두도록 합시다.(P.215)

 

이렇게 말하다보면 꽤나 지루할 것 같지만 읽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것은 우선 이 둘을 그려내는 작가의 필치가 상당하다. 이국적인 뉴멕시코 지역의 자연환경과 인디언들, 멕시코인들의 문화와 관습이 주는 흥미로움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며, 작가가 이따금씩 삽입하는 현지인들의 전래담도 양념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전혀 이질적이지 않고 작품 본래의 전개에 이바지한다면 과장일까.

 

바일랑 신부의 은근슬쩍 술수에 넘어가 졸지에 노새 두 마리를 사제들에게 바치게 된 루혼 씨는 현지인들의 순진한 신앙과 인성의 한 본보기다. 노새를 잃게 된 걱정과 슬픔은 품지만 그것이 사제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이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의 공여로 사제들이 선교활동을 더 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자긍심을 품는 대목은 눈물겹기조차 하다.

 

발타차 신부에 대한 전설은 초기 가톨릭 사제들의 선교와 그네들이 현지인들에 대해 품은 종교적 인종적 우월감과 지배욕을 잘 보여준다. 가톨릭이 서구 유일의 지위에서 몰락하여 종교개혁의 된서리를 맞은 것은 결국 종교인들의 타락과 부패가 원인이었던 것처럼. 역사를 돌이켜보아도 신앙 자체가 문제시 된 경우는 별로 없다. 라투르 주교가 폐허가 된 수도원 자취에서 품었던 감상도 여기서 멀지는 않았으리라.

 

그는 초목 하나 없는 사막의 바위산 위에서 석기 시대에 있던 그 자신과 같은 종족, 그 자신의 시대에 대한 향수, 유럽인에 대한 그의 영광스러운 욕망과 꿈의 역사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있었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그 자신의 일부가 동틀 무렵의 하늘처럼 변화하는 모든 세기 동안 내내 그러고 있는 것 같았다...... (P.119-120)

 

성선설에 따르면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지만 환경에 물들어 점차 악하게 된다. 성경의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도 비슷한 입장이다. 세상사가 대개 그러하다. 의도와 취지의 순수성에 힘입어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어느 순간 이해가 개입하고 갈등이 발생하여 본래 진로에서 벗어나 엉뚱한 곳을 향해 달려가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마티네즈 신부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는 가톨릭 사제이지만 로마 가톨릭을 거부하고 독자적 세력화를 추구한다.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도 있다. 새로운 종교 내지 분파는 이렇게 생기는 법이니까. 다만 마티네즈 신부는 종교적 변질과 함께 개인적 탐욕과 타락으로 이어졌기에 라투르 주교가 고민하였던 것이다.

 

조국과 수만 리 떨어진 낯선 이방의 외딴 곳. 주위에 유럽인이라고 눈을 씻고 찾아봐도 달랑 요셉 신부 하나뿐인데, 그나마도 근자엔 이웃 교구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느라 얼굴을 못 본 지가 수개월도 넘었다. 겸허하면서 의연한 소신을 갖고 교구 관리에 헌신하지만 주교도 인간인 이상 고뇌와 번민에 무관하지 못하다. 그 점이 오히려 더욱 인간적이다.

 

그의 영혼은 불모지가 되어 있었다. 그는 그의 교구 사제들과 교구민들에게 마음으로부터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하는 일은 피상적인 것처럼 보여서 모래 위에 짓는 집 같았다. 그의 거대한 대주교는 아직도 이교도의 지방이었다. 인디언들은 공포와 어둠의 옛길을 여행하며 악의 징조와 옛날 미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었다. 멕시코인들은 종교를 갖고 장난을 치는 아이들이었다. (P.236-237)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그는 오랜 친구가 조금도 주저 없이 자기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약간 마음이 아팠다. 그에게는 이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그들의 삶이 여기서 헤어지고 말지도 모른다는, 그들이 결코 다시는 함께 일을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마치 계시처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집에서 그런 준비를 하느라 야단법석을 떠는 것이 그에게는 고통스러웠다. 그는 밖으로 나가 교구들을 돌아다니는 게 차라리 더 나았다. (P.281)

 

젊은 주교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늙은 대주교가 되어 은퇴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여생도 오래 남지 않았음을 스스로 의식한다. 선교사가 된 이후 고국보다는 타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지닌 그가 뉴멕시코로 귀향을 선택함은 자못 당연하다. 그곳은 친구도 추억도 있는 진정한 고향이므로.

 

그곳에는 부드러우면서도 야생적이고 자유로운 어떤 것이 있었다. 베개 위에서 귀에 대고 살며시 속삭이며 마음을 가벼이 해주고 슬그머니 열쇠를 돌려 빗장을 빼내고 감금된 정신을 바람 속으로, 파란색의 금빛 대기 속으로, 아침 속으로, 아침 속으로 풀어 놓아 주는 그 어떤 것이! (P.307)

 

반평생을 뉴멕시코 사제로 바친 라투르 대주교의 삶은 시종일관 올곧다. 삶은 감동적일지언정 소설적 형상화로서는 단조롭고 지루할 수도 있는 우려가 있지만, 작가의 다양한 노력에 힘입어 대단히 다채롭고 풍성한 문학적 향유를 누릴 수 있다. 가톨릭 사제의 사고와 삶, 원주민들의 기이하고 이채로운 토속적 신앙과 문화상이 대비를 이루는 가운데 이미 언급했다시피 뉴멕시코 지방의 독특한 자연환경과 결부되어 폭과 깊이가 한층 심화되었다.

 

무엇보다 두 사제의 문화적 다원성에 대한 관용이 인상적이다. 유럽 선교사들이 세계 각지에서 문화적 갈등과 충돌을 일으키는 주된 원인은 문화적 오만성과 배타주의라는 것을 감안하면 특히 주교의 문화상대주의적 사고는 한층 두드러진다. 참다운 신앙과 순수한 자연의 원리는 같은 곳을 지향하는 게 아닐까.

 

표제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만을 놓고 볼 때 언뜻 죽음과는 무관하게 영생과 부귀를 누릴 줄 알았던 대주교도 죽게 된다는 식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기 마련인데 굳이 대주교로 한정지을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한 사람의 일생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올바로 평가받는다. 면할 수 없는 죽음이지만 기꺼이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삶과 세속에 미련이 남아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삶. 대주교는 분명 전자의 삶을 살았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7-02-14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읽고 싶다고 생각해오던 책이었는데
리뷰로나마 만나게 되어 반갑네요.

멋진 리뷰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