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행운의 여인 록새너 ㅣ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다니엘 디포 지음, 김성균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5년 8월
평점 :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의 맘에 들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라고 칭한다. 선악(善惡)은 쉽사리 호오(好惡)로 치환되기 일쑤다. 디포의 여주인공 록새너는 분명 ‘나쁜 여인’이다. 그녀의 캐릭터에 대한 좋고 싫음은 논외로 치고 말이다. 몰 플랜더스라는 디포의 또 다른 ‘나쁜 여인’이 있지만, 록새너에 비하면 그나마 착한 편이다.
디포는 탁월한 이야기꾼이자 인물창조자이다. 로빈슨 크루소와 잭 대령, 록새너와 몰 플랜더스처럼 사이부동(似而不同)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들을 비슷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집필하였다. 각각의 인물과 작품들은 저마다의 재미와 매력을 뽐내고 있으니 천부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록새너가 기아를 면하기 위해 자식을 버린 것은 안타깝지만 이해 불가능하지 않다. 호구지책이 없어 보석상의 첩이 된 것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부자의 첩이 되어 프랑스에서 호사스럽게 생활하고 보석상의 사고사 후 다시 모 귀족의 첩이 된 것은 어차피 들어선 인생길이 그럴 수도 있다. 최소한 이때까지 록새너는 성적으로 순결했다. 한 남자에게만 충실하였다는 점에서. 외관상 화려와 사치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록새너의 검소함과 재화에 대한 관심은 당연하다. 수년 전 뼈저린 체험이 의식에 잠재되어 있었을 테니.
이제 나는 악마의 대리인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나만큼 악하게 만드는 일이 나의 임무였다. (P.80)
그러나 나는 이미 여성의 미덕을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악마는 나의 내부로 침입할 수 있는 약점을 발견하고 쉽게 나를 제압했다. (P.111)
록새너는 자신을 비하하고 사악함을 자탄하지만, 실질적 악녀성은 이후 부도덕과 범죄행각에서 드러난다. 커다란 재산과 탁월한 재테크로 그녀는 거부가 되지만, 여러 남자들에게 계속 자신의 몸을 파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화대 수입뿐만 아니라 행위 자체의 쾌락에 깊이 빠져든 것이다. 또한 영국에서 유럽에서 낳고 방치한 아이들에 대해서는 일절의 관심도 갖지 않으며 스스로 모성애의 약점을 인정한다.
록새너의 하녀 에이미는 또 하나의 주인공에 가깝다. 그녀는 록새너와 영욕을 같이하며 록새너를 위한 무조건적 충성을 바치는 인물이다. 에이미는 록새너의 수족이자 친구이며 자매와도 같다. 독립하여 가정을 꾸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록새너를 떠나지 않는데 록새너의 분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에이미는 록새너의 심중을 샅샅이 헤아리고 있기에 록새너의 불안의 근원을 꿰뚫고 있다. 자신의 가면과 허위가 탄로나 일순간에 세인의 지탄을 받고 몰락하며, 영국에서 재회하여 마침내 부부가 된 더치 사업가와의 관계도 끝장날 것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 그 뿌리는 록새너의 정체를 의심하고 서서히 접근하여 신분을 확인하려는 버려진 딸이다.
그 딸의 심경과 진의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누군지 모른 채 적당한 경제적 원조를 받아 남들처럼, 남들보다 오히려 더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면 감사하고 만족하면 안 되었을까. 수십 년을 버리고 방치해 둔 생모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그토록 깊은 것인지. 아니면 록새너의 막대한 부를 노린 것은 아니었을까. 록새너의 실체가 별 볼일 없는 평범한 부인네였다면 그 딸은 여전히 생모의 정체에 집착했을까 등등.
록새너의 극적인 삶의 여정과 화려한 탕녀의 묘사에 눈을 떼지 못한 독자가 어느덧 지위와 부와 남편을 갖게 된 록새너에 싫증이 났을 즈음부터 디포는 작품의 줄기를 확 틀어버린다. 록새너가 생모라는 사실을 추적하는 딸과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도피하는 록새너의 치열한 대결 구도. 해결사로 개입하는 에이미.
록새너는 에이미를 저주하고 내쫓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록새너의 잠재된 내심을. 록새너는 일시적으로 에이미를 원망하지만 가슴 한켠에는 해방감과 안도감이 자리 잡고 있다. 에이미와 화해는 불가피하다. 딸은 없어져도 상관없지만 에이미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므로.
록새너를 집필한 디포의 생각이 문득 궁금해진다. 몰 플랜더스의 말을 빌린다면 같은 악행에 빠지지 않도록 악행을 충실히 기술함으로써 잘못된 삶을 반면교사로 삼기를 바란다. 몰과 록새너 모두 노경에 이르러 잘못을 회개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물론 록새너는 성공적이지 못하였지만.
악녀의 매력과 악행의 재미에 몰입하여 본질을 놓칠까 우려한 작가는 잊지 않고 이따금씩 주인공의 입을 빌어 스스로를 원망하고 저주하는 말을 늘어놓게 한다. 여자를 유혹하고 망치는 지배계층의 타락상도 제법 날카롭게 지적한다. 모두가 독자들에 대한 주의환기이자 검열관을 위한 자기변론일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이 이야기를 자세히 했는데 그것은 지체높은 남자들이 곤경에 처한 여자를 망치는 수법이 어떤지를 보이기 위해서였다. 빈곤과 궁핍은 가난한 여자를 망치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지만, 허영과 화려한 생활에 대한 꿈도 마찬가지다. (P.110)
나는 살아 있는 표본이 되어 사탄과 같은 오만과 어리석음이 일으키는 광기와 정신착락은 어떠하며, 과욕이 인간을 어떤 존재로 만드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릇된 야심의 충동대로 행동하면 얼마나 엄청난 화를 당하는지를 보여 줄 것이다. (P.279)
이상하게도 내 모든 부정한 행위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거대한 재산도 모았지만 어떤 독자도 내가 행복했다거나 마음 편안했다고 속단하지 않기 바란다. 절대로,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양심의 화살은 나의 폐부를 깊이 찔렀다. 겉으로는 우리의 기쁨이 최고도에 달했을 때에도 내 가슴속은 항상 남모르는 지옥이었다. (P.455)
옮긴이는 50면에 달하는 작품해설과 작가해제를 통해 디포가 단순한 문필가가 아님을 소개한다. 그는 일생에 걸쳐 끊임없이 사회개선과 부조리를 지적한 저널리스트였다. 이쯤에서 우리 자신에게 되묻고 싶다. 이 작품의 피카레스크 요소에 주목한다면 작가는 타락의 길에 빠져서 부도덕과 환락의 세계에 헤어나지 못하는 한 여인의 삶을 통해 당대의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서술하고 있는 게 아닌지를.
록새너는 프랑스에서 더치 사업가의 도움을 받아 재산을 갖고 영국으로 돌아온다. 이때 더치 사업가와 동거하면서 그의 구혼을 받지만 그녀는 거절한다. 거절의 변은 장황하지만 재산을 빼앗길 우려와 속박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렇더라도 당대로서는 파격적인 견해를 서슴지 않고 토로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록새너답다.
또 결혼 계약이라는 것은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한마디로 여자의 자유와 재산과 인권 등 모든 것을 남자에게 바친다는 약속이며 여자는 결혼을 하면 그저 한낱 여자 즉 노예일 뿐이라고 했다. (P.255)
여자가 독신으로 살면 모든 사회적 권익을 보장받고, 자기 소유의 재산은 완전히 자의로 쓸 수 있고, 무슨 일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남자가 자신의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듯이 여자도 독자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했다. (P.256)
더치 사업가의 파격적 양보와 배려에도 록새너는 그와 헤어지고 마는데 이후 그녀의 삶에서 잠재된 그녀의 욕망을 알 수 있다. 성적으로 신분 면에서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삶. 정식 부인이 됨으로써 얻게 될 안정과 사회적 인정은 그녀에게 덜 중요한 가치였다.
작가는 딱딱한 논설에 의존하지 않고 대중성과 흥미성을 절묘하게 섞어 실로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악녀 록새너의 캐릭터를 창조하였다. 그의 다른 작품과 당대를 비교하더라도 이만큼이나 적극적이며 자기주도적인 여성은 찾기 어렵다. 그것이 읽는 내내 주인공을 향한 독자의 애증이 교차하는 심리적 갈등을 유발하는 연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