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망이 깎던 노인 - 5판 범우문고 104
윤오영 지음 / 범우사 / 1976년 3월
평점 :
품절


‘방망이 깎던 노인’ 그리고 ‘마고자’, 학창시절 교과서로 친숙한 수필들이다. 명작도 손때가 묻으면 진부하고 식상해질 위험성을 내포한다. 이 글들은 시대에 뒤처진 고리타분한 옛 시절 이야기와 감상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방망이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많지도 않을뿐더러 방망이에 뒤이어 죽기와 약재로 이어지는 작가의 소회에 동감하기엔 너무 낯설어진 풍경이다. 한복 자체를 입는 풍속도 소멸되는 판국에 하물며 마고자이겠는가. 작위적 교훈성은 은근한 거부감마저 야기한다.

 

생경한 한문투의 어휘와 인용문, 1960~70년대 발표된 탓에 수십 년의 시간적 간극이 지닌 문화적 생소함은 신기함과 동시에 불편함이 사실이다. 이 얄팍한 문고판에 실린 25편의 짤막한 글들에서 풍기는 지은이의 감수성은 반면 오늘에도 유의미한 정서를 나타낸다. 가식 없는 가운데 고상한 기품이 배어나오는 글들은 따뜻한 정감마저 드리운다. ‘측상락(廁上樂)’의 소탈과 분방함은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울 정도다.

 

하정소화(夏情小話)’ 서두에서 더위를 기쁨으로 참는다는 글쓴이의 엉뚱함은 야트막한 동산에서 월하미인과 조우하며 찌는 듯한 무더운 여름밤이 훈훈한 추억으로 자리 잡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달밤의 정서도 여기서 멀지 않다.

 

찰밥말미의 문장은 중년이 된 일개 소시민이라면 가슴 한켠이 저릿할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솔직하다.

 

어머니! 야망에 찼던 어머니의 아들은 이제 찰밥을 안고 흰 터럭을 바람에 날리며, 손등으로 굵은 눈물을 닦습니다.” (P.40)

 

우리네 고유문화에 대한 애정과 사라져 가는 아쉬움을 제재로 하는 글들이 제법 분량을 차지한다. 앞선 대중적 수필 두 편 외에 촌가의 사랑방’, ‘오동나무 연상’, 무엇보다 수록작 중 최장인 한국적 유머와 멋이 여기에 속한다. 그는 멋을 인생의 맛으로 파악하고, 우리네 멋은 슬픔과 결부되어 있다고 밝힌다. ‘생활과 행복에서 미적 균형과 조화를 잃고 있는 현대 생활에 대한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향기를 거두고 품()을 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수필이란 거기서 우러난 다향(茶香)이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진실을 깨치고, 그것을 아끼고 또 음미하고 기뻐하고, 눈물과 사랑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즐길 수 있는 글이다. (P.65)

 

수필은 재()로 쓰는 것이 아니고 정()으로 쓰는 것이다. (P.120)

 

엽차와 인생과 수필’, 글쓴이의 수필관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와병수감(臥病隨感)’에서도 한 대목 적고 있다. ‘오동나무 연상에서는 나아가 문장관마저 드러낸다.

 

글을 사랑하는 사람은 문정(文情)과 문사(文思)에서 잠시도 떠나지 아니함으로써 속기(俗氣)를 떨치고 문아(文雅)한 품성(品性)을 기른다. (P.111)

 

최만년의 글이라고 짐작되는 와병수감은 보다 인간적 면모가 약여하다. 인생의 외로움과 고독 속의 한줄기 정, 그리고 행복. 피천득과의 돈독한 우정이 여기서 언급된다. 짤막짤막한 단편들이 두서없이 나열되어 정서한 시간마저 갖지 못한 연민마저 느낀다. 이 글들은 자신과 자신을 알던 이들에게, 나아가 세상을 향한 유언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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