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위대한 전쟁 1 - 이덕일의 천하통일 영웅대전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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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대중역사가인 이덕일의 신작이다. 이전 작인 <오국사기>의 개정판이다. 부제가 '이덕일의 영웅천하'로 중국 수나라 통일이후 여수전쟁에서 시작하여 신라의 삼국토일과 일본의 성립까지 격동의 동아시아사를 다루고 있다.

요즘 SBS에서 방영주인 드라마 '연개소문'과 왜국을 제외한 내용에서는 상당 부분 시기적으로 중첩되므로 비교하여 읽어나가면 많은 도움이 된다.

약 100년 간의 기간이지만 어마어마한 격랑이 휘몰아쳤던 시기인지라 그 복잡다단한 사건들을 2권으로 축약하다 보니 약사(略史)도 전사(全史)도 아닌 애매한 성격의 저작이 되었다는 점이 아쉽게 생각된다. 이를 나관중처럼 대하역사소설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작가가 나타난다면 참으로 좋으련만.

일찍부터 나름대로 우리고대사에 관심이 있어서 관련 서적을 몇 권 읽었던터라 내용 자체가 참신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다만 일본 당대사를 통해 우리민족과 일본의 관계를 이해하고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데 참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소위 '위대한 전쟁'이란 가능한가?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대량으로 뺏는 사건이 전쟁이다. 어떤 생명체가 제 정신으로 동종의 생명체를 멸절시키지 못해 안달일까? 이렇게 보면 인류는 뇌구조의 근본적 흠결을 지닌 이상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위대한 전쟁은 있을 수 없으며, 인류의 자유와 행복에 대한 억압 시도에 대하여 필요 최소한도의 무력 사용이 그나마 어느 정도의 정당성을 확보한다고 생각한다. 전쟁의 명분으로 함부로 '국익'을 논하지 말라. 당사자 개인에게 그것은 하나뿐인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것이며, 그것은 생물체의 가장큰 존재이유인 것이다.

한편 '영웅'은 어떠한가? 우리는 어려운 시기에 영우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혜성같이 등장하여 민족과 국가의 영광을 위하여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초인적 존재. 그를 믿고 따르기만 하면 만사가 오케이다. 다소간의 강압과 폭력과 부정과 잘못은 눈감아주자. 성과만 위대하다면 제도와 법규는 무시해도 좋다. 그래야 진정 영웅이 아닌가? 후훗, 인간은 이렇게 나약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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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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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이라는 매춘부이야기
다니엘 디포우 지음 / 세계문학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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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로 유명한 다니엘 디포의 다소 이색적인 소설 작품이다. 여기서 이색적이라 함은 <로빈스 크루소>로만 작가를 알고 있는 독자에게는 의외로 다가올 수 있음이다. 물론 디포 자신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무인도 표류기가 특이한 유형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은 책의 해설과 같이 사회 소설로 분류될 수 있으며, 또한 피카레스크 소설로 규정할 수도 있다. 이 작품은 몰 플랜더즈라고 불리는 한 여인의 일생의 회고담 형식을 빌리고 있다. 몰 플랜더즈의 삶은 전형적인 피카라, 즉 여성 피카로의 그것이다.

작품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부분은 몰의 출생과 어린 시절을 다룬다. 중간 부분은 하녀로 들어간 지주 집안에서 연애와 결혼으로 시작되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남성 편력(?). 셋째 부분은 드디어 몰 플랜더즈라는 유명한 도둑으로 명성을 날리는 시기이며, 마지막 부분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유배길에 오르는 장면이다.

남성 피카로의 일탈 행위는 초기에 가난, 나중에는 사회적 반발심에 기인한다. 즉 그는 피카로의 삶을 떨쳐버릴 수 있음에도 능동적으로 피카로의 삶을 선택한다. 여기서 베티 부인이 몰로 전락하는 과정도 가난에 기인한다. 특히 그녀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으로서 경제적 궁핍에 대처할 수 있는 수단이 미약하다. 그녀가 가진 것이라곤 남들보다 우월한 몸뚱아리, 그래서 그는 자신의 외모를 수단으로 경제적 안정을 가져다줄 남자를 끊임없이 구한다. 그 기간은 수년에서 짧게는 한 번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옮긴이는 몰을 매춘부로 낙인찍는다. 몰 자신도 스스로를 매춘부라고 인정한다.

형무소에서 죄수의 딸로 태어나 보육원에서 자란 그녀에게 사회적 도덕관념과 높은 양심 기준을 요구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그녀는 너무나 일찍 사회의 밑바닥을 경험하였고 자신의 정조보다 금화에 얼굴이 환해지고 시선이 향하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는 기대를 품고 몸을 맡겼던 장남 대신 그의 동생과 결혼한다. 비록 금전의 유혹으로 시작되었지만 장남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자못 순수하였다. 다만 자신의 말마따나 그 사랑은 과도하고 무절제하였다(P.66). 어쨌든 동생과의 결혼 생활이 길게 이어졌다면 그녀는 평범한 여인의 삶을 살았을 터이지만 남편의 죽음으로 그녀는 외톨이가 되었다. 돈 많은 젊은 미망인으로.

이후 그녀의 삶은 결혼이라는 사회적 안전판을 마련하려는 처절한 분투의 노력이다. 단순히 정부와 남편의 품을 그리워하는 차원이 아니라 남편 없는 삶은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솔직히 많은 재산을 은행에다 맡겨두고 이자만으로도 편하게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을 텐데도. 제인 오스틴이 젊은 여성들이 좋은 결혼에 목매다는 당시의 경향을 고전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이 거의 일백 년 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몰이 살았던 당대를 보면 여성의 남성에 대한 예속적 관념은 거의 종교적 신념이었다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 작품이 사회 소설로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는 작품 곳곳에 나타나는 페미니즘적 시각에도 연유한다. 작가는 몰의 입을 통해 남성 편의적 사회구조를 비판하며, 여성의 낮은 사회적 대우를 질타한다.
“...여자의 위치는 이미 너무나 처참한 것이다. 여자들은 스스로 보통 이하로 자신의 위치를 낮추고 있다. 예전부터 그들 스스로를 비하시킴으로서 남자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수치를 겪어오고 있다.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P.81)

몰의 인생은 원제의 타이틀처럼 행운과 불운의 연속이다. 세 번째 남편과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행복한 삶을 살았다. 여기서 그들의 행복을 깨뜨릴 외적 요인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내부에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친남매 간임을 알게 된 것이니 그야말로 운명의 장난에 놀아난 셈이다. 따라서 그들은 서로 사랑함에도 헤어지고 만다. 다섯 번째 남편인 은행가와도 그녀는 비교적 평화로운 결혼 생활을 누렸지만 결국 남편의 죽음으로 나름 안온한 삶도 완전히 깨지고 만다.

이렇듯 그녀는 끊임없이 생활의 안정을 갈구하였지만 운명과 사회는 그녀의 삶이 평온하게 꾸려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은행가와의 결합에 앞서는 그녀는 자신의 무절제한 삶을 반성한다.
“가난이라는 악마의 가장 악랄한 유혹에 의해 나는 다시 타락의 생활로 돌아가 아름다움을 이용하여 나의 필요성을 채우는 타락한 매춘 뚜쟁이가 되었던 것이다.” (P.187)

이제 질식한 것 같은 가난으로 몰락한 그녀에게 남은 길은 무엇인가? 우리말에도 사흘 굶으면 남의 집 담장을 넘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녀는 힘겹게 삼년의 시간을 버티어내었고 더 이상은 견딜 여력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미 나이도 오십을 넘겨 미모에 기댈 수도 없는 형편. 결국 몰 플랜더즈의 길로 자연스레 이끌리게 된 것이다.

이쯤해서 작품의 구조적 측면을 생각해보면 무척 흥미롭다. 오십년에 걸친 그녀의 생을 기술하는데 소요된 분량은 180면 정도이다. 그런데 이중 상당량은 그녀의 성적인 무절제와 자칭 부도덕하다고 일컫는 어두운 면에 할애되어 있다. 첫 남편과의 결혼 생활은 몇 줄에 지나지 않고, 행복했던 셋째 남편과의 경우도 근친상간 관계임을 알고 절망하며 다투는 장면에는 많은 공을 들이고 있음에도 유복한 결혼생활에는 한두 면을 할애할 정도로 인색하다. 이후에도 밝고 행복한 대목보다는 어둡고 부정한 대목의 묘사에 작가는 노력을 경주한다. 이 작품이 몰 플랜더즈의 일생의 어두운 잘못을 회고하고 있기에 그렇다고 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후의 전설적인 도둑 겸 소매치기로 유명하게 되기까지의 그녀의 잇따른 성공담에 대한 상세한 보고의 함의가 궁금하다. 장장 70면에 걸친 그녀의 갖가지 도둑질 장면은 마치 대도가 자신의 성공담을 의기양양하게 술회하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이를 작가의 내밀한 의도라고 해석할 수 있다. 외관상 당대의 도덕률과 검열을 의식하여 몰의 부도덕과 불법을 지탄하고 있지만 작가는 내심 그녀에게 자신을 한껏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소설적 재미를 배가시키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그녀의 도둑질을 통해 당대 런던 사회와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장면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효과를 노리기도 한 게 아닐까?

피카레스크 소설의 주인공들은 결코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없는 하층민이다. 상류층은 자신들 이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중하류층은 목을 치켜세우고 끊임없이 높은 곳만 바라본다. 세상은 왕과 귀족, 지주들만 사는 게 아니라는 단순하지만 간과된 사실을 일깨우는 것,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삶도 충분히 인식되고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낮은 목소리. 그것이 피카레스크의 본령이며, 사회소설의 출발이기도 하다.

작가는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독자들도 허구보다는 교훈적인 사실에 그리고 단지 이야기로 생각하기 보다는 현실 적용에 그리고 주인공의 인생보다는 작가의 결론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주기를 희망해 본다.” (P.13)

또한 작품 말미에도 이렇게 몰의 입을 통해 술회하고 있다.
“나의 인생의 이야기를 이렇게 출판하는 것은 생의 모든 부분에 대한 도덕성을 위해서이다. 혹은 모든 독자들에게 교훈, 주위, 경고, 혹은 성장을 주기 위해서이다.” (P.314)

정말로 이 소설은 교훈을 주기 위하여 창작되었을까? 몰은 이따금씩 자신의 행동에 대해 주저와 후회의 상념을 슬쩍 비춘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멈추지 않고 절제되지 않는다. 몰은 결국 뉴게이트 형무소에 잡혀가 교수형이 선고되었음에도 용케 처형을 모면한다. 가벼운 도둑질도 목숨을 대가로 바치는 판국에 그녀는 참회와 회개의 눈물로 목사를 감동시켜 ‘유명한’ 도둑이자 상습범임에도 유배형으로 형량이 낮추어진다. 이것이 도덕성과 교훈에 부합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더구나 그녀의 유배 생활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그녀는 도둑질로 마련한 돈으로 땅을 사고 농장을 꾸려서 오히려 지주, 즉 농장주가 된다. 여기다 결합하지 못했던 제미, 즉 랭커셔 남편과 재결합을 하고 많은 돈을 벌며 행복한 여생을 보내다 늘그막에 영국으로 돌아온다.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도 이것이 정말로 회개의 삶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물론 작가는 마지막까지도 방어막을 치는데 소홀하지 않는다.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가 살았던 죄많은 생을 진정으로 회개하며 여생을 살기로 했다.” (P.329)

디포의 <몰 플랜더즈>는 부도덕한 피카라를 주인공으로 전면에 내세워 개인의 부정과 불운한 삶은 물론 여성으로서 가지는 사회적 취약성으로 인한 세상의 풍파를 도덕성이라는 외피에 숨겨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있다. 몰 플랜더즈가 나면서부터 창녀이자 매춘부가 아니었음은 자명하다. 몰에게만 책임을 전가하기에는 너무 낯간지럽다. 이것이 디포가 노리는 숨은 의도라고 해석이 가능하다.

이 소설은 당대는 물론 현대적 관점에서도 굉장한 문제작이다. 이러한 작품이 세상에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는 게 오히려 의아스럽다. 재평가가 필요하다.

현재 있는 유일한 번역본은 그나마 절판된 지 오래인지라 시중에서 구하기 어렵다. 게다가 번역 자체도 솔직히 추천할 정도가 못 된다. 단순히 영한사전을 펼쳐놓고 글자 대 글자, 문장 대 문장으로 번역한 듯 하며, 번역투도 매끄럽지 못하고 딱딱하여 전문번역가의 작업치고는 함량 미달이다. 보다 좋은 번역, 제대로 된 대우를 절실히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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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우세븐 2014-07-09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 때가 영국 빅토리아 시대 아닌가요? 우리나라로는 영조 시대쯤일텐데, 저런 제목으로 책을 냈다니 놀랍군요.
 
내마음의 향기
제임스 힐튼 / 정민미디어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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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보다는 영화 <마음의 행로>로 더 유명한 작품이다. 잘 알려진 영화의 타이틀을 배제하고 굳이 표제를 달리한 연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영화의 인상과 흔적을 지워버리고 순수한 소설 자체를 음미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에 발표되었고, 작중 시대적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부터 당대의 현재까지 즉 양차 세계대전의 불안한 태풍 전야이다. 따라서 작중의 시대 상황과 인식은 과거형이 아니라 진행형이 될 수밖에 없다. 당대인의 시각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대한 태도와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뭔가 대책을 세우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거의 마비된 채 있었으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절망적인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P.157)

작가는 반전과 불변의 사랑을 동시에 다루고 있다. 전쟁의 참혹한 상처와 이로 인해 육체적 및 정신적으로 피폐해가는 사람들은 직접적 체험을 통해 반전의 당위성을 입증한다. 한편 전쟁을 통해 말살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치유책으로 지순한 사랑의 힘을 강하게 드러낸다. 사랑, 진부하고 상투적이지만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사랑의 이야기에 솔깃하고 감동을 받게 된다.

이 소설에서 작가의 필치는 비교적 단순하다. 복잡한 기교를 부리기보다는 기억을 상실한 찰스 레이니어가 잃어버린 기억의 단초를 찾으려고 괴로워하는 심경을 자신의 입으로, 또는 주변인의 입으로 증언한다. 또한 헤어진 남녀의 재결합을 위해 굳이 서두르지도 않는다. 오히려 조금씩 주변부를 탐색해 나가면서 아첼레란도가 아닌 알라르간도의 수법을 사용하여 독자들의 애간장만 태운다.

찰스가 기억 상실에 연연하는 것은 단지 상실된 인생의 한 대목을 되찾고자 하는 열망만은 아니다. 사실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잃어버린 기억, 놓친 기억을 지니고 있다. 그래도 아무 문제 없이 다들 잘 살고 있다. 그것이 각자의 인생에 매우 중대한 기억이 아닌 한. 그렇다. 찰스는 무의식 속에 그 대목의 중요성은 자각하고 있음이다. 내게 있어 가장 소중한 그 무엇, 그것이 없기에 그는 세속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뭔가를 찾는 듯한 공허한 시선을 먼 하늘에 고정시키고는 한다. 그 표정과 눈빛에 키티는 자신이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떠났던 게 아니었는가?

폴라를 갈구하는 그의 심정은 이 한 마디에 녹아들어 있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살아 있다면, 그리고 그녀를 찾을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나를 막을 수는 없어. 사회적인 명성도, 정치가로서의 지위도......” (P.330)

한편 찰스 즉, 스미스에 대한 폴라의 사랑도 변함없다.
“아니에요, 얼마나 근사한 일이에요. 그는 그녀만 찾게 된다면 모든 걸 다 버릴 거예요. 그의 미래도 야망도 모두 말예요...그이가 느끼고 있는 지금의 그 기분만이 진실인지도 몰라요. 그 대신 지금까지 그가 느꼈던 다른 기분은 모두 거짓이구요.”(P.347)

사건의 전개는 극적인 반전을 이루는 만큼 개연성은 많이 떨어진다. 포탄에 맞아 기억상실증에 걸릴 경우의 수, 그리고 재차 사고로 인해 기억이 되돌아올 가능성. 게다가 우연한 만남과 사랑, 그리고 두 번의 결혼. 부인의 참모습을 알지 못한 채 거리를 두는 남편, 그리고 기억 회복과 극적인 재회.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상투적으로 써먹는 눈물 짜내기에 적합한 소재가 아니겠는가? 수년 전 TV에서 유동근, 엄정화, 김희애가 출연했던 드라마에서 이와 비슷한 소재를 다루기도 하였다. 기억 상실과 사랑의 이별과 재회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후대 유사 품목의 비조라고 칭할 수 있겠다.

궁금하다. 아무리 기억 상실에 걸렸다 하더라도 예전 사랑하던 여인을 비서로 두고 또 법적으로 결혼까지 하였는데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을까? 또 폴라는 자신의 신분을 굳이 감추고 살았던 연유는 무엇인지? 찰스가 스스로 기억을 되찾고 스미스가 되기를 기다렸다면 만약 기억 회복이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 오랜 기간의 그녀의 기다림을 무슨 결과를 가져왔을까?

작가 제임스 힐튼은 길잃은 세대 작가의 일원으로서 독자적 방식으로 작품 정신을 이끌어나갔다.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동양적 사상을, <굿바이 미스터 칩스>에서 전통적 중용의 미덕을 주창하였다. 이제 그는 여기서 삭막한 인간 세상에서 사랑이 가장 중요함을, 그것만이 폐허가 되고 또다시 전운에 휩싸인 서구 사회에서 사람들의 비극을 치유할 수 있는 길임을 부르짖느다.

아마도 그것은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절의 향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것이 또한 폴라와 스미스가 스위칭 오버에서 찾은 안식처이다.
“우리의 미래도 여기에서 펼쳐질 거예요. 과거로 돌아가죠, 좀더 평화로운 영국, 옛날의 영국으로...” (P.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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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미스터 칩스 에버그린북스 6
제임스 힐튼 지음, 김기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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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노교사의 삶을 통해 진정한 교육의 가치와 견해, 그리고 교육자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이 작품의 정조(情調)는 대체로 회고조의 애상미가 전편에 은은히 넘쳐난다. 그 독특한 조용히 곱씹는 듯한 문체와 나직한 어조, 질박한 표현은 고지식하고 구태세적이며 촌스럽기조차 한 칩스 노교사의 은근한 삶을 조명하는데 과부족 함이 없다.

솔직히 그렇게 기대하고 읽은 작품은 아닌데 뜻하지 아니한 감동은 배가 되는 법인가. 눌변의 능변, 무기교의 기교라는 찬사는 우리 고전미에 대한 찬미에만 쓰는 어구는 아니리라. 호손의 <큰 바위 얼굴>과 주제 정신에서는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과욕을 삼가고 일상에 충실하는 주인공의 공통적 미덕이 한층 크게 우러러보이게 한다.

칩스는 빅토리아 여왕 시기의 대영제국의 문화적 배경을 살아간 인물이다. 그에게서는 우아하고 화려하지만 최전성기에서 서서히 쇠잔의 기미가 엿보이는 장중한 서글픔이 문득 배어있다.

칩스의 삶에서 변모의 계기는 캐서린과의 만남과 짧았지만 행복했던 결혼 생활이었다. 그녀의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사고와 태도는 온건한 보수주의자인 칩스를 바꿔놓았다. 결혼 전 무미건조한 어느 정도 존경받을만한 교사에서 생기가 감돌고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교육자로 극적인 변화를 보이게 된다. 교사가 학생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의 중요성만큼이나, 인생의 반려자가 배우자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음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좋은 교사 못지않게 훌륭한 배필과의 만남도 중요하다.

캐서린과의 사별 후 칩스는 다시 외견상 고리타분한 노인네가 되었지만, 더 이상 과거의 칩스가 아니었다. 그녀로 말미암아 그의 내면은 깊이 있는 ‘지대하고도 완전무결한 자기 완성’(P.62)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후임 교장 랠스턴과의 언쟁에서 명확해진다. 그가 진정 중시하는 것은 ‘시험을 치르고 증서를 수여하는 것으로는 테스트 할 수 없는 균형잡힌 중용의 사고를 배양’(P.82)하는 데 있다.

이는 칩스는 물론 작가 자신의 바램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지만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세계는 여전히 불길하고 어두운 전쟁의 전조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인생의 가치와 방향을 상실하였다. 이것이 문학상 소위 ‘길잃은 세대’이다. 제임스 힐튼 역시 이들 세대의 일원이다. 그에게 당대는 고상한 전통의 미덕을 상실하고 균형을 잃은 채 제멋대로 비틀거리고 있다.
“중용의 도를 지키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P.101)

그렇다면 작가가 찾고자 하고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노교사의 삶에서 잃어버린 옛 가치를 재발견하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욕심을 권하고 성공을 꿈꾸는 사회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그는 변함없이 자기 사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이렇게 미친 세상에서 점점 희귀해지는 위엄과 관용의 사상을.” (P.102)
칩스가 브룩필드 사람들에 존경받고 인기 있는 이유는 단순히 나이가 많기 때문은 아니다. 그의 농담은 꾸미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것이다. 그는 삶에 진실하였고 그 안에서 성숙해졌다. 앞서 말했지만 캐서린이 그를 변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제임스 힐튼은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동양 사상을 통해 서구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시도하였다. 이제 그가 재발견한 것은 비물질적 가치, 즉 칩스의 사상으로 대변되는 과거 서구의 뛰어난 전통적인 정신적 가치에 대한 재인식이다. 이는 한낱 박물관에 박제된 유물이 아니다. 현재와 미래의 인간 세상을 더 근사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부족하므로 절실히 필요로 하는 가치다.

이 작품은 짤막한 중편이지만 깊이에 있어서는 대하소설을 능가한다. 그 점에서 의미를 반추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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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 세계문학의 숲 3
토머스 드 퀸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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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사 작은사전>(김희보 편저)에 따르면, 이 작품은 “아편의 꿈의 공포를 묘사한 화려한 문장으로 낭만주의자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켰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표현상 문체의 화려함이 두드러지며, 여기에 내용상 아편 중독의 증상이 주는 호기심 충족이 덧붙여진다.

기실 이 작품에 무슨 교훈적 의미를 찾는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비록 작가 본인은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에 이 측면을 중시하지만.

“나는 이 글이 단순히 흥미로운 기록에만 머물지 않고 상당히 유익하고 교훈적인 글도 되리라고 믿는다. 내가 이 글을 쓴 것도 바로 그런 소망을 품었기 때문이다.” (P.9)

“이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 독자들의 관심이 맴도는 진짜 중심은 아편쟁이가 아니라 아편이다. 이 이야기의 목적은 쾌락을 가져오든 고통을 가져오든, 아편의 불가사의한 작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목적이 달성되면 이 글의 역할도 끝난 것이다.” (P.164)

전 2부로 구성된 작품에서 제1부는 작가 자신의 어린 시절의 회고담이다. 가출 이후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며 방랑하던 소년 시절, 이로 인하여 후일 육체적 질병의 계기가 되었던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아편 복용이 단순히 쾌락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면이 있음을 정당화하고자 한다. 흥미로움과 지루함의 반응이 모두 가능하다.

제2부는 본격적으로 아편의 쾌락과 고통을 다룬다. 일단 당시는 아편이 금지약물이 아니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오늘날의 마약과는 입장이 다르다. 누구나 약국에서 약을 사듯이 아편을 구입하여 복용할 수 있었다.

작가는 일단 아편의 기능을 소개하면서 이를 포도주에 비교한다. 그에 따르면 아편이 복용자에게 보다 긍정적인 효과를 준다고 한다. 게다가 “어떤 분량의 아편도 중독을 일으키지 않으며, 일으킬 수도 없다.”(P.89)고 단언한다.

그의 아편 찬미는 한없다.
“그대는 낙원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 오, 공정하고, 교묘하고, 강력한 아편이여!” (P.106)

이러한 예찬은 곧이어 고통의 체험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제 작별이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행복과도 오랫동안 작별이다! 미소와도 웃음과도 작별이다! 마음의 평화와도 작별이다! 희망과도 평온한 꿈과도 축복받은 잠의 위안과도 작별이다!” (P.130)

아편과 같은 약물 중독을 다룬 이 책은 내게 전에 읽었던 책을 상기시킨다. <해시시 클럽>에서 네르발, 고티에, 보들레르 같은 이들은 나름 약물의 효과에 대하여 긍정적, 부정적 글을 쓰고 있다. 나아가 네르발의 <실비>와 <오렐리아>는 정신착란에 의한 것이므로 약물과는 다소 다르지만, 환상과 몽상을 담고 있는 점에서 기본 정신은 유사하다.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과 호수와 넓게 펼쳐진 은빛 수면의 꿈에서 오렐리아를 연상시킨다. 드 퀸시는 네르발의 선구자인가? 아니다. 네르발에서는 현실과 환상이 화학적으로 융합되어 진실로 초현실주의라고 할 만하지만, 드 퀸시는 현실과 꿈이 날카롭게 대립되어 이것이 작가의 정신에 혼란과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드 퀸시는 왜 이렇게 적나라하게 자신을 고백하고 있을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글을 쓰는 방식은 소리 내어 생각하는 것, 그리고 내 기분에 따르는 것이다...나 자신 말고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모든 역사의 기록을 갖고 싶어서, 내가 지금 쏟을 수 있는 노력을 모두 기울여 최대한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다.” (P.133)

작가는 이야기의 주인공을 아편이라고 생각하였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당대인들에게는 미지와 금지의 약물인 아편의 효과가 어떠한지 드 퀸시의 글을 통해 간접체험을 할 수 있다. 한편 오늘날 우리들은 더 이상 아편의 효과에 별로 관심 없다. 오히려 아편쟁이로서 드 퀸시의 개인사가 궁금할 따름이다.

드 퀸시가 아편쟁이의 삶을 얼마나 화려한 문장으로 고백하고 있는 지 알 수 없다. 다만 후대 작가들에게 인간 내면의 무의식적인 환상과 꿈을 양지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자못 기여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보들레르가 남긴 말이 드 퀸시에 대한 진정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아편쟁이가 인류에게 실제적인 봉사를 하나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도대체 어쨌단 말인가. 그의 책이 ‘아름답다’면, 그것만으로도 그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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