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의 향기
제임스 힐튼 / 정민미디어 / 1994년 10월
평점 :
절판


원작보다는 영화 <마음의 행로>로 더 유명한 작품이다. 잘 알려진 영화의 타이틀을 배제하고 굳이 표제를 달리한 연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영화의 인상과 흔적을 지워버리고 순수한 소설 자체를 음미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에 발표되었고, 작중 시대적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부터 당대의 현재까지 즉 양차 세계대전의 불안한 태풍 전야이다. 따라서 작중의 시대 상황과 인식은 과거형이 아니라 진행형이 될 수밖에 없다. 당대인의 시각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대한 태도와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뭔가 대책을 세우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거의 마비된 채 있었으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절망적인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P.157)

작가는 반전과 불변의 사랑을 동시에 다루고 있다. 전쟁의 참혹한 상처와 이로 인해 육체적 및 정신적으로 피폐해가는 사람들은 직접적 체험을 통해 반전의 당위성을 입증한다. 한편 전쟁을 통해 말살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치유책으로 지순한 사랑의 힘을 강하게 드러낸다. 사랑, 진부하고 상투적이지만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사랑의 이야기에 솔깃하고 감동을 받게 된다.

이 소설에서 작가의 필치는 비교적 단순하다. 복잡한 기교를 부리기보다는 기억을 상실한 찰스 레이니어가 잃어버린 기억의 단초를 찾으려고 괴로워하는 심경을 자신의 입으로, 또는 주변인의 입으로 증언한다. 또한 헤어진 남녀의 재결합을 위해 굳이 서두르지도 않는다. 오히려 조금씩 주변부를 탐색해 나가면서 아첼레란도가 아닌 알라르간도의 수법을 사용하여 독자들의 애간장만 태운다.

찰스가 기억 상실에 연연하는 것은 단지 상실된 인생의 한 대목을 되찾고자 하는 열망만은 아니다. 사실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잃어버린 기억, 놓친 기억을 지니고 있다. 그래도 아무 문제 없이 다들 잘 살고 있다. 그것이 각자의 인생에 매우 중대한 기억이 아닌 한. 그렇다. 찰스는 무의식 속에 그 대목의 중요성은 자각하고 있음이다. 내게 있어 가장 소중한 그 무엇, 그것이 없기에 그는 세속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뭔가를 찾는 듯한 공허한 시선을 먼 하늘에 고정시키고는 한다. 그 표정과 눈빛에 키티는 자신이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떠났던 게 아니었는가?

폴라를 갈구하는 그의 심정은 이 한 마디에 녹아들어 있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살아 있다면, 그리고 그녀를 찾을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나를 막을 수는 없어. 사회적인 명성도, 정치가로서의 지위도......” (P.330)

한편 찰스 즉, 스미스에 대한 폴라의 사랑도 변함없다.
“아니에요, 얼마나 근사한 일이에요. 그는 그녀만 찾게 된다면 모든 걸 다 버릴 거예요. 그의 미래도 야망도 모두 말예요...그이가 느끼고 있는 지금의 그 기분만이 진실인지도 몰라요. 그 대신 지금까지 그가 느꼈던 다른 기분은 모두 거짓이구요.”(P.347)

사건의 전개는 극적인 반전을 이루는 만큼 개연성은 많이 떨어진다. 포탄에 맞아 기억상실증에 걸릴 경우의 수, 그리고 재차 사고로 인해 기억이 되돌아올 가능성. 게다가 우연한 만남과 사랑, 그리고 두 번의 결혼. 부인의 참모습을 알지 못한 채 거리를 두는 남편, 그리고 기억 회복과 극적인 재회.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상투적으로 써먹는 눈물 짜내기에 적합한 소재가 아니겠는가? 수년 전 TV에서 유동근, 엄정화, 김희애가 출연했던 드라마에서 이와 비슷한 소재를 다루기도 하였다. 기억 상실과 사랑의 이별과 재회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후대 유사 품목의 비조라고 칭할 수 있겠다.

궁금하다. 아무리 기억 상실에 걸렸다 하더라도 예전 사랑하던 여인을 비서로 두고 또 법적으로 결혼까지 하였는데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을까? 또 폴라는 자신의 신분을 굳이 감추고 살았던 연유는 무엇인지? 찰스가 스스로 기억을 되찾고 스미스가 되기를 기다렸다면 만약 기억 회복이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 오랜 기간의 그녀의 기다림을 무슨 결과를 가져왔을까?

작가 제임스 힐튼은 길잃은 세대 작가의 일원으로서 독자적 방식으로 작품 정신을 이끌어나갔다.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동양적 사상을, <굿바이 미스터 칩스>에서 전통적 중용의 미덕을 주창하였다. 이제 그는 여기서 삭막한 인간 세상에서 사랑이 가장 중요함을, 그것만이 폐허가 되고 또다시 전운에 휩싸인 서구 사회에서 사람들의 비극을 치유할 수 있는 길임을 부르짖느다.

아마도 그것은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절의 향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것이 또한 폴라와 스미스가 스위칭 오버에서 찾은 안식처이다.
“우리의 미래도 여기에서 펼쳐질 거예요. 과거로 돌아가죠, 좀더 평화로운 영국, 옛날의 영국으로...” (P.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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