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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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가슴에 온통 먹먹한 감정이 뭉클거리는 것은 김애란이 만들어 낸 인물들의 한없는 막막함 탓이다. <침이 고인다> 이후 5, 그 동안 이 작가가 많은 변모를 겪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단순한 시간의 경과 또는 성숙이라는 진부한 표현만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문학적 변화. 이것이 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김애란의 세계가 맞단 말인가.

 

앞선 두 권의 작품집이 내게 남긴 김애란의 특성은 경쾌함과 싱싱함이었다. 중하층의 별 볼일 없는 서민들의 일상사를 그리면서도 결코 궁상맞다는 느낌을 주지 않고 바탕에 삶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주의를 깔고 있는. 여기서도 앞선 특성의 흔적은 사뭇 남아있다. 작심하고 쓴다면 여전히 과거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테지만 그는 일부러 그 세계에서 떠나려고 한다.

 

작중 인물은 여전히 힘겹고 팍팍하다. 현실의 많은 사람들처럼 그네들의 삶도 여전히 밝은 전망이 비치지 않나 보다. 작가는 인물의 궁핍함을 정면으로 돌파하고자 한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하지만 다부진 결의가 문장 곳곳에 드러난다. 제아무리 희망을 가지고 싶으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고 나날이 가라앉기만 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 분위기는 한결 잿빛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비관적 공기가 팽배하다.

 

작품집의 평론가도 언급했듯이 표제는 명백히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일반인은 알기 어려운 비행운(飛行雲)과 비교적 쉽게 다가오는 비행운(非幸運). 표제와 연결시키자면 작중 인물들은 모두 후자에 속하는 인물이다. 삶의 행로에서 운이 따라주지 않는 이들. 그들은 로또 당첨 같은 거창한 행운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한 바램, 즉 남들처럼 보통 수준의 삶을 누리고 싶다는 정도의 행운이면 그들은 충분히 만족스럽다. 그렇지 않기에 그들은 비행운(非幸運)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비행운적 인물들이 사회 내에 그리고 주변에 점점 많아진다는데 있다. 사회적 양극화니 청년실업이니, 고용 없는 성장 등이 다 이를 지칭하는 용어들이다.

 

그들은 바로 여기에 정착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삶의 목표와 방향을 잃어버렸다. “수천 개의 표지판 아래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고아 같은 얼굴”(P.198, <하루의 축>)을 하고 있는 기옥 씨처럼. 갈 수도 안갈 수도 없는 엉거주춤한 태도의 처량한 처지, 그러다가 결국은 마지못해 쫓겨나는 사람들.

 

그렇게 오래 여행 가방 옆에 있자니 어쩐지 우리가 떠나온 사람 떠나갈 사람이 아니라 멀리 쫓겨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꽤 오래전부터 그렇게 커다란 가방을 이고 다녔던 것 같은 기분도.”(P.244, <큐티클>)

 

여건이 그러하다 보니 그네들의 인간관계도 악화일로를 치닫는다. 대학선배에게 속임과 이용을 당하고, 사귀던 남자친구와는 헤어지고, 옛 애인에게는 사기를 당한다. 가족과 친지들마저 그의 곁을 떠난다. 고독과 불행은 서로를 부추겨 악순환으로 몰고 간다.

 

그네들의 현재 상황을 개인적 결함으로 귀인 시키는 것은 무책임한 소산이다. 그네들도 못지않게 부지런하고 총명하고 열심히 살았다.

 

부푼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저는 제가 뭔가 창의적이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며 살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지금 이게 나예요. 누군가 저한테 그래서 열심히 살았느냐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다, , 이런 사람이 됐는지 모르겠어요.”(P.316, <서른>)

 

여기에 항변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단계에 빠져서 살아남기 위해 학원 제자를 사지로 팔아넘긴 나이 서른의 여성.

 

수록된 여덟 편 중 <너의 여름은 어떠니>, <큐티클>, <호텔 니약 따>는 그래도 비교적 과거 김애란의 풍에 가깝다. 나머지 작품에서는 작가의 변화의 방향과 정도를 예감케 한다. 연령적 스펙트럼과 표현의 깊이와 강도가 훨씬 더해지고 있다. 게다가 개인적, 주변적 관심을 유지하면서도 관찰의 눈을 사회 전반에까지 직접적으로 아우르고 있어 작가의 또 다른 일면으로의 전환도 추단케 한다.

 

개인적으로 <물속 골리앗><서른>이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이 처절할 정도로 나락에 떨어지는 비극적 상황에 맞닥뜨린다. 전자의 비극성이 유례없는 폭우라는 비일상성을 배경으로 하기에 현실미는 덜한 반면 극도의 환상성이 오히려 소년의 고통과 비극을 생생하게 부각시킨다. 후자는 극히 간결하고 나직한 어조로 체험을 수기화한 것인 양 누구나 빠져들기 쉬운 불법 다단계 업종의 위험성과 폭력성을 고발하여 사회구조적 문제와 결부시키고 있다. 일종의 고발문학이라고도 할 정도로 평범한 젊은 여성이 지옥의 밑바닥에 떨어지는 과정이 절제된 톤으로 낮은 목소리로 읊조려지고 있다.

 

서양 신화에서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것은 희망이라고 한다. 희망이 있다면, 기대할 수 있다면 눈앞의 불행을 감내하고 헤쳐 나갈 용기를 낼 수 있다. 희망이 없다면 그때는 기약할 수 없는 행복을 기다린다는 것은 몹시 지겨울 것이다. 삶이 말이다. 그걸 알기에 독자의 가슴은 먹먹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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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열림원 이삭줍기 2
뱅자맹 콩스탕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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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중에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관계도 있으며, 불행히 만났다면 빨리 헤어질수록 좋은 관계도 있다. 특히 남녀 관계는 더욱 그러하다. 서로 간의 사랑의 결과로 인간적, 사회적 발전에 이를 수 있는 관계는 권장할 만하다. 시대를 초월하여 신분과 기타 제약조건을 뛰어넘은 사랑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그만큼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사람들의 찬미가 크다는 증거이다.

 

뱅자맹 콩스탕의 이 짤막한 경장편은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서로 간에 파국으로 귀결되는 씁쓰름한 사랑의 이면을 보여준다. 일종의 연애소설로 보기에는 만남과 사랑에 비해 고뇌와 이별에의 열망이 지나치게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아돌프의 엘레노르에 대한 구애는 확실히 순수하지 못하고 일종의 유희 내지 심심풀이 유혹이라고 할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어쨌든 아이가 있는 사실혼 관계에 있는 유부녀를 안온한 가정의 뜰 밖으로 끌어낸 것이므로. 이후 그녀에 대한 그의 심경과 태도가 비록 사랑은 아니었음에도 나름대로 성실과 책임을 보여주었다고 하여도 불의가 경감되지는 않는다.

 

남성의 사랑과 여성의 사랑은 근원적 차이를 두고 있다. 남성은 사랑에 전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반면, 사랑에 빠진 여성에게 사랑은 전부 그 자체이다. 엘레노르가 그러하듯이. 그녀는 아이도, 남편(법적이지는 않지만), 그리고 사회적 체면도 모두 던져버리고 아돌프에게 달려갔다. 솔직히 엘레노르를 비난하고 싶지 않다. 그녀는 아돌프의 사랑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여기에 올인 한 것이므로.

 

사랑이든 아니면 사랑의 착각이든 부부와 연인 간의 관계가 장기간 지속되려면 뜨거운 열정만으로는 오히려 부족하다. 흔히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표현되지만 이것이 불가능함을 재빨리 인식할수록 좋다. 상호간에 개인적 고유 영역이 존재함을 인정해야 한다.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을 항상 같이 있을 수는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각자가 잠깐이지만 나름 자신의 생활을 처리하고 재회할 때 짧은 이별이 가져오는 반가움과 그리움의 감정은 사랑을 더욱 증폭시킨다. 대체로 여인의 사랑에서 이 점이 부족하다, 엘레노르처럼. 그녀의 걱정은 아돌프에게는 감시로 비쳤으며, 한시라도 함께 있고자 하는 열망은 권태와 우울을 유발하였다.

 

반면 아돌프에게 결여된 점은 의지와 결단력이다. 사랑의 부재를 깨달았음에도 그는 머뭇거렸다. 과감한 이별을 감행하든가 여러 면에서 불가능함을 알았다면 차라리 그녀와의 관계를 공식화했다면 양자의 파국은 막았을 것이다. 그네들의 나날은 수렁에 빠졌음에도 나올 줄을 몰라 괜한 몸부림만 치는 사람들과 같다. 상대방을 꼭 안은 채 골짜기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모습과 흡사하다.

 

이 작품에는 사랑의 감미로움이 등장하지 않는다. 시종일관 사랑의 고뇌와 쓰라림이 주조를 이룬다. 두 남녀 외에 다른 인물들은 잠깐씩 나타났다 사라지는 부수적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남녀 간의 사랑을 둘러싼 갈등이 주된 사건이며, 특히 아돌프의 심리상에서의 무쌍한 변화가 치열하게 전개된다.

 

재미로 하는 연애는 진실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유희이기에는 너무 압도적이고 과중하다. 사랑은 동정도 아니다. 동정심은 호혜적이지 않으므로 일방에게 부담을 가중시킨다. 일방적 사랑은 상호 발전을 끌어내지 못한다. 아돌프는 알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엘레노르는 너무 늦게야 깨달았다.

 

나는 불가능한 일을 바라고 있었어요. 사랑은 내 인생의 전부였지만, 당신에게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지요.”(P.139)

 

우리가 아돌프를 비난하기는 쉽다. 자신의 일이 아니면 남을 단죄하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게 마련이다. 그의 성실함과 고상한 품성 등 존중할 만한 미덕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랑의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였다. 작가는 아돌프에 대하여 무자비하다. 아돌프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성격이라고 밝힌다.

 

환경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타고난 자신의 성격인 것입니다. 외부의 사물이나 사람과는 그 관계를 끊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기 자신과는 관계를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P.157)

 

우리는 확실히 아돌프에게 조금의 성실을, 용기를 기대한다. 그러면 양자가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과연 엘레노르도 여기에 동의할까? 사랑 외에 모든 것을 포기한 그녀에게 아돌프와의 헤어짐은 감내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그렇다면 작가의 성격론은 차라리 엘레노르에 대한 아돌프의 허영에 찬 유혹의 시도에 대한 본원적 비판에 해당할 것이다.

 

작가는 반성 없이 맺어진 관계는 고통 없이 깨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세간의 인식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서문에서 지적한다. 깊은 애정의 뿌리를 끊는 과정에서 영혼의 일부를 죽이고 가장 좋은 성질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밝힌다.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어 애정 관계를 정리해봤자 그에게 남는 게 무엇이겠는가.

 

뱅자맹 콩스탕의 집필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다. 자신의 개인적 체험에 바탕을 둔 것인지, 또는 당대의 경박한 일반적 사회 풍조를 비판적 시각에서 보여주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진실한 남녀의 사랑의 조건과 태도는 어떠한지를 역설적으로 표현하기 위함인지.

 

다만 이 점은 분명하다. 아돌프의 사랑을 가장한 동정, 엘레노르의 맹목적 사랑의 관계는 현대의 연인 또는 부부 관계에 비추어 볼 때 여전한 적시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아돌프의 통렬한 자기 분석과 처절한 고뇌와 절망은 시간의 간극에도 마음을 아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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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F/B1 일층, 지하 일층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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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대표적인 허구의 문학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소설이 갖는 허구성의 양대 연원은 현실과 상상이다. 현실에 기반을 두고 치밀한 관찰과 체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은 굳이 리얼리즘 계열이냐를 떠나서 소설 문학의 주류를 형성해 왔다. 사람은 자신에게 익숙한 이야기에 공감을 표시한다. 더구나 개인과 사회에서 벌어지는 실제의 드라마틱한 사건은 어지간한 소설이라면 이름도 못 내밀만큼 흥미진진하지 않는가. 비주류이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한 분야, 즉 상상을 외면할 수 없다. 멀리는 신화에서부터 비롯하여 동화와 판타지 문학을 아우르는 작지만 강력한 영역을 구축하였다. 더구나 영상 미디어가 주도하는 현대에서 판타지는 무수한 파생물을 낳을 정도로 상품성이 뛰어나 한층 각광을 받고 있다.

 

김중혁의 이 작품집은 대별하면 상상에 치우쳐 있다. 일전의 <핸드메이드 픽션>의 경우도 사실성을 그다지 추구하지 않았는데 김중혁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수록작 중 일부는 환상문학이니 장르문학이니 하는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을 정도다.

 

나는 이 속된 도시가 좋다. 여기에서 살아갈 것이다.”(P.304)

말미의 작가의 말이 이채롭다. 옆쪽의 그림은 책상 위에 노트북 컴퓨터가 놓여 있고 그 뒤로 다양한 도시의 건물 모형들이 세워져 있는 풍경이다. 차례는 어떠한가. 7편의 작품들은 고층 건물의 층수를 알려주는 듯 한 배치로 늘어서 있다.

 

작가는 도시를 정말 제대로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다. 그의 도시는 외관이 번지르르한 마천루가 아니다. 땅속으로 깊이 내려간 주야의 구분을 없앤 코엑스 류의 아케이드도 아니다. 고층 아파트들로 넘실거리지도 않는다. 그의 도시는 일상에서 숨겨진 뒷골목이며, 지하의 또는 후면의 음영이 짙은 공간이다.

 

<C1+y=:[8]:>은 미로와도 같은 도시의 후미진 골목이다. <냇가로 나와>는 도시화되기 이전 교외의 냇가를 배경으로 한다. <바질>의 경우 도시의 야산이 공포의 무대로 등장한다.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는 미래의 도시를 다룬다. <1F/B1><유리의 도시>는 각각 빌딩을 소재로 하지만 전자는 빌딩 관리인, 후자는 빌딩에 부착된 대형유리의 숨겨진 세계가 실체를 드러낸다. <크랴샤>의 경우 퇴락한 도심지역이 화려한 마술과 결부된다.

 

작가는 도시 탐험가다. 그는 익숙한 도시의 낯선 풍경을 오지를 탐험하듯이 찾아 헤맨다. 도시에서 그가 마주치는 인물과 사물은 사실적이며 동시에 공상적이다. 작가는 가공의 존재를 실제인 것 마냥 슬그머니 작중에 집어넣는다. 독자는 긴허리아기말원숭이에 호기심을 보이며, 하마까 형님의 슬픔을 동정하며, 괴물 바질에 공포를 느낀다. 날 때부터 생존시간이 운명 지어진 여자아이 99에 안타까워한다. 슬래시 매니저들의 비밀본부와 알루미노코바륨도 놓쳐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것들을 작가는 미지의 자연과 동식물을 탐험하여 대중에게 소개하듯이 독자에게 보여준다.

 

작가는 뛰어난 여행 가이드다. 골목을 지나칠 때면, 블록을 통과할 때마다, 언덕을 넘어서는 매번 그는 특유의 기발한 착상과 재치 넘치는 입담으로 독자의 귀를 매료시킨다. 그는 장르를 넘나든다. 소시민적 휴먼 드라마에서 공포물, SF, 다큐, 탐정물은 물론 매혹적인 마술의 영역까지도 포괄한다. 소설의 본질이 이야기에 있다고 한다면, 독자를 솔깃하게 하는 재미난 이야기를 창작할 수 있는 천부적 재질이야말로 소설가의 제일 미덕이 아니겠는가.

 

신기한 탐험과 흥미진진한 여행만이 김중혁의 도시 탐사의 목적은 아닐 것이다. 그의 도시는 삶과 죽음이 엇갈린다. 새것이 옛것을 대체한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이어진다. 외로움을 사랑이 다독인다. 빛과 그늘이 상존하며, 지상과 지하가 병존한다. 삭막한 미래가 현재를 투영한다. 이처럼 도시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넘쳐난다.

 

무엇보다 도시에는 사람들이 많다. 북적이는 인파에 짜증을 내며 일탈과 자연을 꿈꾸지만 막상 자연에서는 두려움과 방황을 겪는 사람. 도시의 번잡함에 오히려 안도하며 편리함에 길들여져 있으며, 혼탁한 공기에 편안한 호흡으로 숨 쉬는 도시인. 낮은 지붕과 꼬불꼬불한 골목 대신 하늘에 치솟은 초고층 타워에 열광하며, 아파트를 싫어하면서도 선호하는 이율배반적 존재.

 

작가는 스러져 가는 도시의 옛 흔적을 천착한다. 화려함에 깃든 고독과 삭막함, 생경함을 끄집어낸다. 이면과 사이에서 주목받지 못하지만 도시가 제대로 기능하도록 헌신하고 있는 존재의 가치를 재음미한다. “아주 미미하지만 꼭 필요한 존재들”(P.203). 이들은 점차 소멸되고 있다. 그런데 소멸된 것들은 되살아날 수 없다. 그리고 찢어진 것들은 절대 다시 붙지 않는다.”(P.273) 이들이 없다면 당신의 도시는 행복할까? 이것이 작가의 질문이다. 그리고 작가의 답변은 아래의 토로에 있다.

 

내가 만들고 싶은 도시가 있었다. 모든 골목과 골목이 이어져 있고, 미로와 대로의 구분이 모호하고, 골목을 돌아설 때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또 다른 풍경이 이어지며, 자신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기도 쉽지 않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 갈래길이 존재하는 도시를 만들고 싶었다.“(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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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88
토머스 모어 지음, 김남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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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저로 알려진 만큼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본이 나왔다. 그 중에서 김남우 번역본을 택한 이유는 유일한 원전 번역본이기 때문이다. 토머스 모어는 라틴어로 이 작품을 저술하였는데, 시중의 번역본은 모두 영문판을 저본으로 삼고 있다. 내용 이해에 큰 차이는 없을지라도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원전에 신뢰감이 간다.

 

에라스무스를 통하여 토머스 모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고 이 책을 펴보게 되었다. 르네상스 후기 인문주의자들의 이상과 좌절이 마음에 깊은 공명을 울려주었다. 비록 역사적 한계는 초월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제약을 극복하고 현실에 자신들의 이상 사회를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엄혹한 현실이 더해질수록 그들의 꿈은 한층 깊어만 갚으니, 토머스 모어의 이 고전이 바로 그러한 사례다.

 

콜럼버스의 소위 신대륙 탐험과 이후 무수한 탐험가들의 덕택으로 르네상스 유럽인들의 지리학적 시계는 비약적으로 확대되었으며, 대중들은 미지의 땅과 섬의 발견 소식에 열광하였다. 모어의 유토피아 섬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진 연유도 또 다른 신기한 나라의 문물 소개로 비추어진 게 아니었을까.

 

자고로 이상국가 내지 이상사회에 대한 논의는 한 가지 전제를 포함한다. 당대의 현실이 이상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미래의 또는 미지의 가상 국가 내지 사회를 설정하고 여기에 저자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을 그대로 투영한다. 따라서 이 작품에 투영된 유토피아의 모습은 곧 토머스 모어를 비롯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지향하던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여러 인문학자들이 서신을 주고받으며 헌시를 덧붙인 연유가 이러하다.

 

1권은 도입부의 성격을 지니며 모어가 라파엘 휘틀로다이우스 씨를 만나게 된 계기와 그로부터 유토피아 나라의 문물과 습속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기술하였다.

 

무엇보다도 당대 군주에 대한 휘틀로다이우스의 지적은 통렬하다. 그는 국가와 군주의 기본적 역할과 책임이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왕들은 하나같이 군사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평화를 위한 기술을 돌보지 않으며, 어떻게 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새로운 영토를 얻을 것인가에 몰두할 뿐 지금 가지고 있는 나라를 어떻게 잘 다스릴 것인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P.83)

 

이런 관점을 갖고 2권에서 소개되는 유토피아의 면면은 확실히 당대에서 보면 매우 혁신적이고 이상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 유토피아의 도시국가들은 선출직 총독에 의해 통치된다는 점에서 세습적 봉건 군주제나 귀족제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남녀 모두 생업에 종사해야 하는 점에서는 무위도식하는 봉건지배층의 허위와 무용을 지적한다. 의복에 있어 사치와 허식을 배격하며, 화폐거래를 지양하고 공동생산과 공동분배를 추구한다. 즉 사유재산제를 부정한다.

 

모어가 보기에 사유재산제는 인간의 탐욕을 부추긴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제반 사회악이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인식한다. 소수가 독과점하는 부를 다수가 나누어 가지면 모두가 부족함 없이 살 수 있다는 지론이다. 이 또한 극소수의 절대 부유층과 대다수의 절대 빈곤층으로 양극화된 사회적 모순에 대한 통렬한 각성에 기반을 둔 것이리라.

 

국가의 제일 책무는 국민의 평화와 안녕이다. 그래서 유토피아 정부는 전쟁을 극도로 회피한다. 가능하다면 모든 여유 재화를 주어버려서 전쟁을 사고자하며, 필요하다면 적대국가 정치권에 뇌물도 마다하지 않는다. 불가피할 경우 값비싼 용병을 고용하기도 한다. 이들의 선택이 반드시 도덕적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확실한 것은 자국민의 보호에 최우선 순위를 둔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요즘 시대의 국가들도 반성할 점이 많이 있을 것이다. 국민의 생명을 초개같이 정부와 정권이 얼마나 많은가!

 

유토피아의 자국 우선주의는 때로 독선적이기까지 하다. 자국의 과잉 인구 해소를 위하여 토지 제공에 협력하지 않는 이웃 지역은 무력을 행사하여 받아들이게 한다.

 

평생을 법조계에 투신하였던 모어이니만치 법률 제도에서도 제법 볼만한 게 많다.

 

그들은 사람들이 다 읽을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수의 법률들로, 그리고 사람들이 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규칙들로 사람들을 옭아매는 것은 오히려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P.212)

 

그는 법률은 쉽고 적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장 단순한 법률 해석이 가장 정의로운 해석이라고 판단하므로 유토피아에서는 교묘한 궤변을 난무하는 변호사 제도를 전혀 도입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지배층의 입맛에 맞도록 폭압의 수단으로 전락한 당대 법률과 법조인의 위상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더불어 여전히 논란이 되는 현대의 사법계와도 별로 거리가 멀어 보이지 않으니 이상할 따름이다.

 

종교는 어떠한가? 모어가 이 책을 쓴 시기는 바야흐로 격동과 폭풍의 시절이었다. 마르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이 얼마 안 있어 개시될 즈음이니 당대의 부패한 종교에 의한 피해와 반감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모어 자신도 결국 종교적 죄목으로 처형당하고 마니 역사의 비극이다.

 

누구도 종교적인 이유에서 핍박받지 않는다는 것이 유토피아에서 가장 오래된 원칙 가운데 하나입니다.”(P.236)

 

자신이 참이라고 믿는 것을 다른 모든 사람들도 참으로 믿으라고 강요하고 위협하는 것은 참으로 오만하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P.237)

 

모어의 제언은 이처럼 선구적이다. 에라스무스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관용의 정신을 지고의 가치로 평가하였다. 그것은 마르틴 루터 및 후대의 사상가들이 오랫동안 외면하였던 미덕이기도 하다. 모어의 종교관은 에라스무스와 흡사한 측면을 보인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과 진보 가능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밑바탕에 드리우고 있다. 그들의 견해가 비록 시대적 제약으로 다소간의 한계를 노정하고 있지만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바로 인간에 대한 긍정이다.

 

2권의 마지막에서 휘틀로다이오스 씨의 어조는 격앙되어 있다. 이것은 정부와 법조계의 오래된 모순과 비리에 분노를 금치 않았던 토머스 모어 자신의 분노의 목소리일 것이다.

 

소위 귀족들과 자본가들, 그리고 이와 유사한 유한계급 혹은 그 추종자 등, 헛된 쾌락의 탐닉자들에게 그렇게 큰 보상을 가져다주는 국가가 도대체 정의롭고 훌륭한 국가라고 하겠습니까?”

 

에라스무스의 반짝반짝 재기가 넘치는 글에 비하면 모어의 글은 직선적이고 투박한 편이다. 유머와 해학이 넘실거리는 에라스무스와 달리 모어는 보다 진지하고 심각하다. 이에는 타고난 성격 못지않게 직업적 영향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순전한 재미로 다가섰다가는 의외로 실망을 할 수도 있음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문득 토머스 모어가 현대에 와서 우리네 국가를 관찰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가 보기에 21세기의 대한민국은 유토피아에 가까워졌을지 아니면 오히려 더 멀어졌을지. 그가 새롭게 쓰는 유토피아의 이상향은 과거와 얼마나 어떻게 다를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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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눈물 사용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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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글에서는 욕망의 냄새가 풍긴다. 심리학에서 흔히 사용하는 이성과 감성으로 걸러지고 정제된 욕구와는 다른 의미다. 보다 원초적이고 본능과 맞닿아 있으며 육체적이다. 그것의 일단은 말초신경인 반면 다른 일단은 생명의 본질로 연결된다.

 

욕망은 물과 같아야 한다. 맑고 투명해야 하며 언제나 흘러서 고이거나 막힘이 없어야 한다. 욕망은 생명체에 내재적인 것이기에 충족도 자연스러워야 한다. 무슨 연유로 욕망의 충족이 방해를 받아서 좌절되거나 억압될 때 인간의 심리적, 신체적 반응도 왜곡되고 만다. 즉 정상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천운영의 글에서 맡을 수 있는 욕망이 바로 이런 유형이다. 그리고 이 작품집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 소설은 좌절된 욕망이 인간과 사회에 미치는 다양한 장면과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는 표제가 낯익은데 확인해 보니 2007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작품이다. 내용을 읽다 보니 확실히 기억이 새롭다. 당시에 적은 촌평을 보니 작가의 작품세계를 폭넓게 조감하지 못하고 단지 단편 하나만으로 섣부른 예단을 할 수 밖에 없는 한계가 명확하게 노정된다. 사진사인 그와 아내의 관계는 순탄치 못하다. 노쇠해지는 자신을 절감하는 그. 젊음을 유지하려 발버둥치는 아내의 행동을 보면서 그는 젊음을 시기하고 질투한다. 늙음은 살아있는 존재에게는 언젠가 닥쳐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인정하지 못한다. 문제는 아내가 아니라 오히려 그 자신에게 있다. 여자의 벗은 몸에 아무런 감동도 없이 냉소적인 그의 열등감과 패패주의. 그래서 후반에 녀석과 노파의 누드 사진 장면을 보면서 늙음이 더 이상 안쓰럽고 추악한 것이 아님을 발견하는 그의 변화는 놀랍기만 하다.

 

<그녀의 눈물 사용법>에 등장하는 가족 구성원의 관계도 그다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모녀와 허구한 날 눈물로 하소연하는 부자. 낳자마자 곧 죽게 된 미숙아 동생의 넋이 가족 간 문제의 출발로 외견상 인식되지만 실상 이는 구실에 불과하다. 어긋난 세상과 단절된 가족이 눈물을 빼앗아갔다. 눈물을 감정의 늪으로, 굴복의 다른 이름으로 간주하는 그녀. 그녀는 눈물 대신 차라리 오줌을 싼다. 눈물과 오줌은 모두 생리적 측면에서 동일한 배설작용이다. 그럼에도 양자는 분명한 차이를 지닌다. 오줌은 순전한 신체적 반응이지만 눈물은 정서적 반응이다. 눈물은 감정의 지각과 교환의 의미를 지닌다. 작품에서 천도제의 효과는 죽은 넋을 달래어 돌려보냄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막혔던 감정의 교류를 트이게 해주고 있다.

 

<알리의 줄넘기>의 주인공 소녀 알리는 건강한 인물이다. 흑인 혼혈아라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회적 치부를 슬그머니 지상으로 끌어올린다. 언론에서 계속 다문화를 외치지만 우리네는 여전히 단일민족의 신화에 익숙하다. 하다못해 혼혈이라도 백인이라면 대접이 다르다. 알리의 할머니 제니는 슬픈 역사의 당사자이며, 알리의 사라진 아버지는 피해자이다. 흑인 혼혈아가 갈 수 있는 길은 다양하지도 넓지도 않다. 여기서 작가는 편견과 선입견에 젖은 우리네들이 그들을 어떻게 얼마나 좌절시키는지 깨닫게 한다. 그럼에도 알리는 움츠러들거나 옆길로 새지 않는다. 그녀는 의연하고 당당하게 내일을 꿈꾸고 대비한다. 새로운 기술을 연습하면서.

 

<내가 데려다줄게>는 신화적이다. 여제자를 성폭행했다고 비난받고 쫓겨난 남자 교수. 그는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늪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가 눈을 뜬 후 맞이하게 된 사람들과 장소는 현실적이면서도 몽환적이다. “시간은 문제되지 않았다.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계획 따위는 필요 없었다”.(P.118) 그곳에서 그는 노파와 계집애, 그리고 여자와 함께 자연스러운 일상을 누린다. 그곳의 생활이 실제인지 환상인지, 아니면 그 중간인지 명확하지 않다. 노인의 말처럼 그들이 끔찍한 여자들인지도 모른다. 모든 게 그러하다. 이는 그의 진실도 마찬가지다. 그가 마지막까지 고민한 결백은 뱀의 실체일까 아니면 허물에 불과한 것인가. 오랜 기러기 생활이 이혼으로 끝난 후 견딜 수 없는 욕정의 발현이 힘과 권력과 지위를 전혀 쓰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일까? 스스로 옷을 벗도록 사내가 종용한 것은 아니었을까?”(P.131) 이제 사내의 진실은 늪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다.

 

<백조의 호수>의 주인공은 겉으로는 우아하고 품위 있지만 내적으로는 속물적 욕망으로 가득 찬 위선적 여성. 최고급푸드스타일리스트답게 화려하고 풍성한 테이블 세팅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어 작가의 현장 조사의 충실성을 떠올리게 한다. 백조는 호수에서 우아하게 수면을 떠다닌다. 반면 수면 아래에서는 가라앉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발을 놀린다고 한다. 여자에게 있어 삶은 유사하다. “화려하고 완벽한 식탁은......좀더 아름다운 화면을 선사할 스토리이며 연기일 뿐이었다.”(P.203) 그래서 여자는 혈통 좋은 비숑 프리제와 잡종견의 달콤한 신혼을 용인할 수 없다. 게다가 네 마리의 새끼라니. 소설이 여자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비극과 비참으로 종결됨은 당연하다. 삶은 연기가 아니다.

 

<내가 쓴 것>의 주인공은 <백조의 호수>과 다소간 유사하다. 소설 속 소설 형식을 차용하여 작가이자 교수인 여성의 허위를 사정없이 까발리고 있다. 1부에서 화자인 나는 여교수를 노련한 창녀로 표현한다. 마치 그녀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것처럼. 2부에서 여교수는 젊은 애인과의 이별을 수용하지 못한다. 남자의 집에 숨어들어가 그의 체온과 체취를 느끼지만 결국 얻게 되는 젊은 애인과 새 여자친구 간의 대화에서 듣게 된 모멸감 뿐. 3부는 여교수의 외도를 알게 된 남편의 자살 이야기다. 재밌는 것은 작가 후기다. 여기서 작가는 스스로가 소설 속의 주인공인 여교수임을 밝힌다. 그리고 소설쓰기란 죄의식을 갖고 빚을 갖는 행위임을 역설한다.

 

<후에>는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세계다. 자매의 교차적 진술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참다운 행복의 조건이 무엇인지 자성해 보게 한다. 이혼 및 사별로 인한 결손 가정은 구성원에 상당한 나쁜 영향을 끼친다. 사랑하고픈 욕망과 사랑받고픈 욕망이 정상적으로 실현되지 못하여 감정 교류에도 지장을 준다. 어쨌든 작중에서 애비가 떠난 이후 엄마와 자매는 나름대로 낙원의 삶을 살았다. 불결한 위생이 원인이 되어 방송의 집중 조명을 받은 이후 가족의 삶은 분리된다. 외부의 개입에 반응하는 각자의 대처는 모두 다르다. 현재의 구질구질함을 각성하고 걸림돌로 전락한 가정을 버리고 밖으로 날아가 버린 엄마, 현상에 순응하고 열심히 청소하는 언니, 그리고 과거의 지저분하지만 안온한 삶을 포기하지 못하는 동생. 행복의 잣대에 대한 동생의 논평은 이중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작중과 같이 하나의 관점에서만 평가받는 것에 대한 부당성의 제기. 한편 그네들의 행복하였다고 느낀 나날이 진정 행복하였던 것일까에 대한 의문.

 

말미의 해설에서 평론가는 작가 천운영의 작품세계의 변화를 욕망에서 사랑으로라는 표제로 파악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이 <노래하는 꽃마차>이다. 이것은 소외와 상실, 그로 인한 상처는 물론 나아가 상처의 이해와 보듬음이 잘 나타나 있다. 거인가족의 찬양사역단에서 작은 아이는 환영받지 못한다. 오빠에게 신체를 유린당한 계집아이. 몸과 영혼이 상처투성이가 된 그녀를 갖고 싶고 사랑하고 싶어 하게 된 그. 작품은 그녀와 그의 이야기가 역시 교차 진행한다. 부재한 부모의 사랑과 좌절된 사랑의 욕망은 그녀의 육신에 봄이 오면 꽃을 피게 만들었다. 그는 비로소 그녀를 알게 된다. 이제 그녀를 만나러 간다.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문득 이 단편의 묘미는 내용보다도 표현에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유랑극단의 변사를 연상시키는 낭송 스타일의 운율적 대사체. 삶의 슬픔도 고난도 모두 별것 아닌 양 설렁설렁하게 넘어가는 어조에서 사랑조차도 노래하는 꽃마차마냥 진정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아직 사랑은 시기상조인 듯.

 

이 책은 천운영의 세 번째 작품집이다. 장편소설도 한 편 있다. 작가의 이전 작품을 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섣부른 단언은 금물이다. 하지만 적어도 욕망이라는 어휘가 수록작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임은 분명하다. 이것이 전작들과 어떤 차이점을 보이는지 변화의 모색 도상에 있는지 여부는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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