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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88
토머스 모어 지음, 김남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명저로 알려진 만큼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본이 나왔다. 그 중에서 김남우 번역본을 택한 이유는 유일한 원전 번역본이기 때문이다. 토머스 모어는 라틴어로 이 작품을 저술하였는데, 시중의 번역본은 모두 영문판을 저본으로 삼고 있다. 내용 이해에 큰 차이는 없을지라도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원전에 신뢰감이 간다.
에라스무스를 통하여 토머스 모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고 이 책을 펴보게 되었다. 르네상스 후기 인문주의자들의 이상과 좌절이 마음에 깊은 공명을 울려주었다. 비록 역사적 한계는 초월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제약을 극복하고 현실에 자신들의 이상 사회를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엄혹한 현실이 더해질수록 그들의 꿈은 한층 깊어만 갚으니, 토머스 모어의 이 고전이 바로 그러한 사례다.
콜럼버스의 소위 신대륙 탐험과 이후 무수한 탐험가들의 덕택으로 르네상스 유럽인들의 지리학적 시계는 비약적으로 확대되었으며, 대중들은 미지의 땅과 섬의 발견 소식에 열광하였다. 모어의 유토피아 섬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진 연유도 또 다른 신기한 나라의 문물 소개로 비추어진 게 아니었을까.
자고로 이상국가 내지 이상사회에 대한 논의는 한 가지 전제를 포함한다. 당대의 현실이 이상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미래의 또는 미지의 가상 국가 내지 사회를 설정하고 여기에 저자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을 그대로 투영한다. 따라서 이 작품에 투영된 유토피아의 모습은 곧 토머스 모어를 비롯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지향하던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여러 인문학자들이 서신을 주고받으며 헌시를 덧붙인 연유가 이러하다.
1권은 도입부의 성격을 지니며 모어가 라파엘 휘틀로다이우스 씨를 만나게 된 계기와 그로부터 유토피아 나라의 문물과 습속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기술하였다.
무엇보다도 당대 군주에 대한 휘틀로다이우스의 지적은 통렬하다. 그는 국가와 군주의 기본적 역할과 책임이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왕들은 하나같이 군사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평화를 위한 기술을 돌보지 않으며, 어떻게 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새로운 영토를 얻을 것인가에 몰두할 뿐 지금 가지고 있는 나라를 어떻게 잘 다스릴 것인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P.83)
이런 관점을 갖고 2권에서 소개되는 유토피아의 면면은 확실히 당대에서 보면 매우 혁신적이고 이상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 유토피아의 도시국가들은 선출직 총독에 의해 통치된다는 점에서 세습적 봉건 군주제나 귀족제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남녀 모두 생업에 종사해야 하는 점에서는 무위도식하는 봉건지배층의 허위와 무용을 지적한다. 의복에 있어 사치와 허식을 배격하며, 화폐거래를 지양하고 공동생산과 공동분배를 추구한다. 즉 사유재산제를 부정한다.
모어가 보기에 사유재산제는 인간의 탐욕을 부추긴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제반 사회악이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인식한다. 소수가 독과점하는 부를 다수가 나누어 가지면 모두가 부족함 없이 살 수 있다는 지론이다. 이 또한 극소수의 절대 부유층과 대다수의 절대 빈곤층으로 양극화된 사회적 모순에 대한 통렬한 각성에 기반을 둔 것이리라.
국가의 제일 책무는 국민의 평화와 안녕이다. 그래서 유토피아 정부는 전쟁을 극도로 회피한다. 가능하다면 모든 여유 재화를 주어버려서 전쟁을 사고자하며, 필요하다면 적대국가 정치권에 뇌물도 마다하지 않는다. 불가피할 경우 값비싼 용병을 고용하기도 한다. 이들의 선택이 반드시 도덕적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확실한 것은 자국민의 보호에 최우선 순위를 둔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요즘 시대의 국가들도 반성할 점이 많이 있을 것이다. 국민의 생명을 초개같이 정부와 정권이 얼마나 많은가!
유토피아의 자국 우선주의는 때로 독선적이기까지 하다. 자국의 과잉 인구 해소를 위하여 토지 제공에 협력하지 않는 이웃 지역은 무력을 행사하여 받아들이게 한다.
평생을 법조계에 투신하였던 모어이니만치 법률 제도에서도 제법 볼만한 게 많다.
“그들은 사람들이 다 읽을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수의 법률들로, 그리고 사람들이 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규칙들로 사람들을 옭아매는 것은 오히려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P.212)
그는 법률은 쉽고 적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장 단순한 법률 해석이 가장 정의로운 해석”이라고 판단하므로 유토피아에서는 교묘한 궤변을 난무하는 변호사 제도를 전혀 도입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지배층의 입맛에 맞도록 폭압의 수단으로 전락한 당대 법률과 법조인의 위상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더불어 여전히 논란이 되는 현대의 사법계와도 별로 거리가 멀어 보이지 않으니 이상할 따름이다.
종교는 어떠한가? 모어가 이 책을 쓴 시기는 바야흐로 격동과 폭풍의 시절이었다. 마르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이 얼마 안 있어 개시될 즈음이니 당대의 부패한 종교에 의한 피해와 반감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모어 자신도 결국 종교적 죄목으로 처형당하고 마니 역사의 비극이다.
“누구도 종교적인 이유에서 핍박받지 않는다는 것이 유토피아에서 가장 오래된 원칙 가운데 하나입니다.”(P.236)
“자신이 참이라고 믿는 것을 다른 모든 사람들도 참으로 믿으라고 강요하고 위협하는 것은 참으로 오만하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P.237)
모어의 제언은 이처럼 선구적이다. 에라스무스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관용의 정신을 지고의 가치로 평가하였다. 그것은 마르틴 루터 및 후대의 사상가들이 오랫동안 외면하였던 미덕이기도 하다. 모어의 종교관은 에라스무스와 흡사한 측면을 보인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과 진보 가능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밑바탕에 드리우고 있다. 그들의 견해가 비록 시대적 제약으로 다소간의 한계를 노정하고 있지만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바로 ‘인간에 대한 긍정’이다.
2권의 마지막에서 휘틀로다이오스 씨의 어조는 격앙되어 있다. 이것은 정부와 법조계의 오래된 모순과 비리에 분노를 금치 않았던 토머스 모어 자신의 분노의 목소리일 것이다.
“소위 귀족들과 자본가들, 그리고 이와 유사한 유한계급 혹은 그 추종자 등, 헛된 쾌락의 탐닉자들에게 그렇게 큰 보상을 가져다주는 국가가 도대체 정의롭고 훌륭한 국가라고 하겠습니까?”
에라스무스의 반짝반짝 재기가 넘치는 글에 비하면 모어의 글은 직선적이고 투박한 편이다. 유머와 해학이 넘실거리는 에라스무스와 달리 모어는 보다 진지하고 심각하다. 이에는 타고난 성격 못지않게 직업적 영향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순전한 재미로 다가섰다가는 의외로 실망을 할 수도 있음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문득 토머스 모어가 현대에 와서 우리네 국가를 관찰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가 보기에 21세기의 대한민국은 유토피아에 가까워졌을지 아니면 오히려 더 멀어졌을지. 그가 새롭게 쓰는 유토피아의 이상향은 과거와 얼마나 어떻게 다를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