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F/B1 일층, 지하 일층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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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대표적인 허구의 문학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소설이 갖는 허구성의 양대 연원은 현실과 상상이다. 현실에 기반을 두고 치밀한 관찰과 체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은 굳이 리얼리즘 계열이냐를 떠나서 소설 문학의 주류를 형성해 왔다. 사람은 자신에게 익숙한 이야기에 공감을 표시한다. 더구나 개인과 사회에서 벌어지는 실제의 드라마틱한 사건은 어지간한 소설이라면 이름도 못 내밀만큼 흥미진진하지 않는가. 비주류이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한 분야, 즉 상상을 외면할 수 없다. 멀리는 신화에서부터 비롯하여 동화와 판타지 문학을 아우르는 작지만 강력한 영역을 구축하였다. 더구나 영상 미디어가 주도하는 현대에서 판타지는 무수한 파생물을 낳을 정도로 상품성이 뛰어나 한층 각광을 받고 있다.

 

김중혁의 이 작품집은 대별하면 상상에 치우쳐 있다. 일전의 <핸드메이드 픽션>의 경우도 사실성을 그다지 추구하지 않았는데 김중혁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수록작 중 일부는 환상문학이니 장르문학이니 하는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을 정도다.

 

나는 이 속된 도시가 좋다. 여기에서 살아갈 것이다.”(P.304)

말미의 작가의 말이 이채롭다. 옆쪽의 그림은 책상 위에 노트북 컴퓨터가 놓여 있고 그 뒤로 다양한 도시의 건물 모형들이 세워져 있는 풍경이다. 차례는 어떠한가. 7편의 작품들은 고층 건물의 층수를 알려주는 듯 한 배치로 늘어서 있다.

 

작가는 도시를 정말 제대로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다. 그의 도시는 외관이 번지르르한 마천루가 아니다. 땅속으로 깊이 내려간 주야의 구분을 없앤 코엑스 류의 아케이드도 아니다. 고층 아파트들로 넘실거리지도 않는다. 그의 도시는 일상에서 숨겨진 뒷골목이며, 지하의 또는 후면의 음영이 짙은 공간이다.

 

<C1+y=:[8]:>은 미로와도 같은 도시의 후미진 골목이다. <냇가로 나와>는 도시화되기 이전 교외의 냇가를 배경으로 한다. <바질>의 경우 도시의 야산이 공포의 무대로 등장한다.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는 미래의 도시를 다룬다. <1F/B1><유리의 도시>는 각각 빌딩을 소재로 하지만 전자는 빌딩 관리인, 후자는 빌딩에 부착된 대형유리의 숨겨진 세계가 실체를 드러낸다. <크랴샤>의 경우 퇴락한 도심지역이 화려한 마술과 결부된다.

 

작가는 도시 탐험가다. 그는 익숙한 도시의 낯선 풍경을 오지를 탐험하듯이 찾아 헤맨다. 도시에서 그가 마주치는 인물과 사물은 사실적이며 동시에 공상적이다. 작가는 가공의 존재를 실제인 것 마냥 슬그머니 작중에 집어넣는다. 독자는 긴허리아기말원숭이에 호기심을 보이며, 하마까 형님의 슬픔을 동정하며, 괴물 바질에 공포를 느낀다. 날 때부터 생존시간이 운명 지어진 여자아이 99에 안타까워한다. 슬래시 매니저들의 비밀본부와 알루미노코바륨도 놓쳐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것들을 작가는 미지의 자연과 동식물을 탐험하여 대중에게 소개하듯이 독자에게 보여준다.

 

작가는 뛰어난 여행 가이드다. 골목을 지나칠 때면, 블록을 통과할 때마다, 언덕을 넘어서는 매번 그는 특유의 기발한 착상과 재치 넘치는 입담으로 독자의 귀를 매료시킨다. 그는 장르를 넘나든다. 소시민적 휴먼 드라마에서 공포물, SF, 다큐, 탐정물은 물론 매혹적인 마술의 영역까지도 포괄한다. 소설의 본질이 이야기에 있다고 한다면, 독자를 솔깃하게 하는 재미난 이야기를 창작할 수 있는 천부적 재질이야말로 소설가의 제일 미덕이 아니겠는가.

 

신기한 탐험과 흥미진진한 여행만이 김중혁의 도시 탐사의 목적은 아닐 것이다. 그의 도시는 삶과 죽음이 엇갈린다. 새것이 옛것을 대체한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이어진다. 외로움을 사랑이 다독인다. 빛과 그늘이 상존하며, 지상과 지하가 병존한다. 삭막한 미래가 현재를 투영한다. 이처럼 도시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넘쳐난다.

 

무엇보다 도시에는 사람들이 많다. 북적이는 인파에 짜증을 내며 일탈과 자연을 꿈꾸지만 막상 자연에서는 두려움과 방황을 겪는 사람. 도시의 번잡함에 오히려 안도하며 편리함에 길들여져 있으며, 혼탁한 공기에 편안한 호흡으로 숨 쉬는 도시인. 낮은 지붕과 꼬불꼬불한 골목 대신 하늘에 치솟은 초고층 타워에 열광하며, 아파트를 싫어하면서도 선호하는 이율배반적 존재.

 

작가는 스러져 가는 도시의 옛 흔적을 천착한다. 화려함에 깃든 고독과 삭막함, 생경함을 끄집어낸다. 이면과 사이에서 주목받지 못하지만 도시가 제대로 기능하도록 헌신하고 있는 존재의 가치를 재음미한다. “아주 미미하지만 꼭 필요한 존재들”(P.203). 이들은 점차 소멸되고 있다. 그런데 소멸된 것들은 되살아날 수 없다. 그리고 찢어진 것들은 절대 다시 붙지 않는다.”(P.273) 이들이 없다면 당신의 도시는 행복할까? 이것이 작가의 질문이다. 그리고 작가의 답변은 아래의 토로에 있다.

 

내가 만들고 싶은 도시가 있었다. 모든 골목과 골목이 이어져 있고, 미로와 대로의 구분이 모호하고, 골목을 돌아설 때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또 다른 풍경이 이어지며, 자신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기도 쉽지 않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 갈래길이 존재하는 도시를 만들고 싶었다.“(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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