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가슴에 온통 먹먹한 감정이 뭉클거리는 것은 김애란이 만들어 낸 인물들의 한없는 막막함 탓이다. <침이 고인다> 이후 5, 그 동안 이 작가가 많은 변모를 겪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단순한 시간의 경과 또는 성숙이라는 진부한 표현만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문학적 변화. 이것이 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김애란의 세계가 맞단 말인가.

 

앞선 두 권의 작품집이 내게 남긴 김애란의 특성은 경쾌함과 싱싱함이었다. 중하층의 별 볼일 없는 서민들의 일상사를 그리면서도 결코 궁상맞다는 느낌을 주지 않고 바탕에 삶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주의를 깔고 있는. 여기서도 앞선 특성의 흔적은 사뭇 남아있다. 작심하고 쓴다면 여전히 과거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테지만 그는 일부러 그 세계에서 떠나려고 한다.

 

작중 인물은 여전히 힘겹고 팍팍하다. 현실의 많은 사람들처럼 그네들의 삶도 여전히 밝은 전망이 비치지 않나 보다. 작가는 인물의 궁핍함을 정면으로 돌파하고자 한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하지만 다부진 결의가 문장 곳곳에 드러난다. 제아무리 희망을 가지고 싶으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고 나날이 가라앉기만 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 분위기는 한결 잿빛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비관적 공기가 팽배하다.

 

작품집의 평론가도 언급했듯이 표제는 명백히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일반인은 알기 어려운 비행운(飛行雲)과 비교적 쉽게 다가오는 비행운(非幸運). 표제와 연결시키자면 작중 인물들은 모두 후자에 속하는 인물이다. 삶의 행로에서 운이 따라주지 않는 이들. 그들은 로또 당첨 같은 거창한 행운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한 바램, 즉 남들처럼 보통 수준의 삶을 누리고 싶다는 정도의 행운이면 그들은 충분히 만족스럽다. 그렇지 않기에 그들은 비행운(非幸運)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비행운적 인물들이 사회 내에 그리고 주변에 점점 많아진다는데 있다. 사회적 양극화니 청년실업이니, 고용 없는 성장 등이 다 이를 지칭하는 용어들이다.

 

그들은 바로 여기에 정착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삶의 목표와 방향을 잃어버렸다. “수천 개의 표지판 아래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고아 같은 얼굴”(P.198, <하루의 축>)을 하고 있는 기옥 씨처럼. 갈 수도 안갈 수도 없는 엉거주춤한 태도의 처량한 처지, 그러다가 결국은 마지못해 쫓겨나는 사람들.

 

그렇게 오래 여행 가방 옆에 있자니 어쩐지 우리가 떠나온 사람 떠나갈 사람이 아니라 멀리 쫓겨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꽤 오래전부터 그렇게 커다란 가방을 이고 다녔던 것 같은 기분도.”(P.244, <큐티클>)

 

여건이 그러하다 보니 그네들의 인간관계도 악화일로를 치닫는다. 대학선배에게 속임과 이용을 당하고, 사귀던 남자친구와는 헤어지고, 옛 애인에게는 사기를 당한다. 가족과 친지들마저 그의 곁을 떠난다. 고독과 불행은 서로를 부추겨 악순환으로 몰고 간다.

 

그네들의 현재 상황을 개인적 결함으로 귀인 시키는 것은 무책임한 소산이다. 그네들도 못지않게 부지런하고 총명하고 열심히 살았다.

 

부푼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저는 제가 뭔가 창의적이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며 살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지금 이게 나예요. 누군가 저한테 그래서 열심히 살았느냐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다, , 이런 사람이 됐는지 모르겠어요.”(P.316, <서른>)

 

여기에 항변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단계에 빠져서 살아남기 위해 학원 제자를 사지로 팔아넘긴 나이 서른의 여성.

 

수록된 여덟 편 중 <너의 여름은 어떠니>, <큐티클>, <호텔 니약 따>는 그래도 비교적 과거 김애란의 풍에 가깝다. 나머지 작품에서는 작가의 변화의 방향과 정도를 예감케 한다. 연령적 스펙트럼과 표현의 깊이와 강도가 훨씬 더해지고 있다. 게다가 개인적, 주변적 관심을 유지하면서도 관찰의 눈을 사회 전반에까지 직접적으로 아우르고 있어 작가의 또 다른 일면으로의 전환도 추단케 한다.

 

개인적으로 <물속 골리앗><서른>이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이 처절할 정도로 나락에 떨어지는 비극적 상황에 맞닥뜨린다. 전자의 비극성이 유례없는 폭우라는 비일상성을 배경으로 하기에 현실미는 덜한 반면 극도의 환상성이 오히려 소년의 고통과 비극을 생생하게 부각시킨다. 후자는 극히 간결하고 나직한 어조로 체험을 수기화한 것인 양 누구나 빠져들기 쉬운 불법 다단계 업종의 위험성과 폭력성을 고발하여 사회구조적 문제와 결부시키고 있다. 일종의 고발문학이라고도 할 정도로 평범한 젊은 여성이 지옥의 밑바닥에 떨어지는 과정이 절제된 톤으로 낮은 목소리로 읊조려지고 있다.

 

서양 신화에서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것은 희망이라고 한다. 희망이 있다면, 기대할 수 있다면 눈앞의 불행을 감내하고 헤쳐 나갈 용기를 낼 수 있다. 희망이 없다면 그때는 기약할 수 없는 행복을 기다린다는 것은 몹시 지겨울 것이다. 삶이 말이다. 그걸 알기에 독자의 가슴은 먹먹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