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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ㅣ 열림원 이삭줍기 2
뱅자맹 콩스탕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0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들 중에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관계도 있으며, 불행히 만났다면 빨리 헤어질수록 좋은 관계도 있다. 특히 남녀 관계는 더욱 그러하다. 서로 간의 사랑의 결과로 인간적, 사회적 발전에 이를 수 있는 관계는 권장할 만하다. 시대를 초월하여 신분과 기타 제약조건을 뛰어넘은 사랑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그만큼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사람들의 찬미가 크다는 증거이다.
뱅자맹 콩스탕의 이 짤막한 경장편은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서로 간에 파국으로 귀결되는 씁쓰름한 사랑의 이면을 보여준다. 일종의 연애소설로 보기에는 만남과 사랑에 비해 고뇌와 이별에의 열망이 지나치게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아돌프의 엘레노르에 대한 구애는 확실히 순수하지 못하고 일종의 유희 내지 심심풀이 유혹이라고 할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어쨌든 아이가 있는 사실혼 관계에 있는 유부녀를 안온한 가정의 뜰 밖으로 끌어낸 것이므로. 이후 그녀에 대한 그의 심경과 태도가 비록 사랑은 아니었음에도 나름대로 성실과 책임을 보여주었다고 하여도 불의가 경감되지는 않는다.
남성의 사랑과 여성의 사랑은 근원적 차이를 두고 있다. 남성은 사랑에 전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반면, 사랑에 빠진 여성에게 사랑은 전부 그 자체이다. 엘레노르가 그러하듯이. 그녀는 아이도, 남편(법적이지는 않지만)도, 그리고 사회적 체면도 모두 던져버리고 아돌프에게 달려갔다. 솔직히 엘레노르를 비난하고 싶지 않다. 그녀는 아돌프의 사랑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여기에 올인 한 것이므로.
사랑이든 아니면 사랑의 착각이든 부부와 연인 간의 관계가 장기간 지속되려면 뜨거운 열정만으로는 오히려 부족하다. 흔히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표현되지만 이것이 불가능함을 재빨리 인식할수록 좋다. 상호간에 개인적 고유 영역이 존재함을 인정해야 한다.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을 항상 같이 있을 수는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각자가 잠깐이지만 나름 자신의 생활을 처리하고 재회할 때 짧은 이별이 가져오는 반가움과 그리움의 감정은 사랑을 더욱 증폭시킨다. 대체로 여인의 사랑에서 이 점이 부족하다, 엘레노르처럼. 그녀의 걱정은 아돌프에게는 감시로 비쳤으며, 한시라도 함께 있고자 하는 열망은 권태와 우울을 유발하였다.
반면 아돌프에게 결여된 점은 의지와 결단력이다. 사랑의 부재를 깨달았음에도 그는 머뭇거렸다. 과감한 이별을 감행하든가 여러 면에서 불가능함을 알았다면 차라리 그녀와의 관계를 공식화했다면 양자의 파국은 막았을 것이다. 그네들의 나날은 수렁에 빠졌음에도 나올 줄을 몰라 괜한 몸부림만 치는 사람들과 같다. 상대방을 꼭 안은 채 골짜기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모습과 흡사하다.
이 작품에는 사랑의 감미로움이 등장하지 않는다. 시종일관 사랑의 고뇌와 쓰라림이 주조를 이룬다. 두 남녀 외에 다른 인물들은 잠깐씩 나타났다 사라지는 부수적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남녀 간의 사랑을 둘러싼 갈등이 주된 사건이며, 특히 아돌프의 심리상에서의 무쌍한 변화가 치열하게 전개된다.
재미로 하는 연애는 진실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유희이기에는 너무 압도적이고 과중하다. 사랑은 동정도 아니다. 동정심은 호혜적이지 않으므로 일방에게 부담을 가중시킨다. 일방적 사랑은 상호 발전을 끌어내지 못한다. 아돌프는 알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엘레노르는 너무 늦게야 깨달았다.
“나는 불가능한 일을 바라고 있었어요. 사랑은 내 인생의 전부였지만, 당신에게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지요.”(P.139)
우리가 아돌프를 비난하기는 쉽다. 자신의 일이 아니면 남을 단죄하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게 마련이다. 그의 성실함과 고상한 품성 등 존중할 만한 미덕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랑의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였다. 작가는 아돌프에 대하여 무자비하다. 아돌프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성격이라고 밝힌다.
“환경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타고난 자신의 성격인 것입니다. 외부의 사물이나 사람과는 그 관계를 끊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기 자신과는 관계를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P.157)
우리는 확실히 아돌프에게 조금의 성실을, 용기를 기대한다. 그러면 양자가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과연 엘레노르도 여기에 동의할까? 사랑 외에 모든 것을 포기한 그녀에게 아돌프와의 헤어짐은 감내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그렇다면 작가의 성격론은 차라리 엘레노르에 대한 아돌프의 허영에 찬 유혹의 시도에 대한 본원적 비판에 해당할 것이다.
작가는 반성 없이 맺어진 관계는 고통 없이 깨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세간의 인식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서문에서 지적한다. 깊은 애정의 뿌리를 끊는 과정에서 영혼의 일부를 죽이고 가장 좋은 성질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밝힌다.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어 애정 관계를 정리해봤자 그에게 남는 게 무엇이겠는가.
뱅자맹 콩스탕의 집필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다. 자신의 개인적 체험에 바탕을 둔 것인지, 또는 당대의 경박한 일반적 사회 풍조를 비판적 시각에서 보여주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진실한 남녀의 사랑의 조건과 태도는 어떠한지를 역설적으로 표현하기 위함인지.
다만 이 점은 분명하다. 아돌프의 사랑을 가장한 동정, 엘레노르의 맹목적 사랑의 관계는 현대의 연인 또는 부부 관계에 비추어 볼 때 여전한 적시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아돌프의 통렬한 자기 분석과 처절한 고뇌와 절망은 시간의 간극에도 마음을 아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