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눈물 사용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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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글에서는 욕망의 냄새가 풍긴다. 심리학에서 흔히 사용하는 이성과 감성으로 걸러지고 정제된 욕구와는 다른 의미다. 보다 원초적이고 본능과 맞닿아 있으며 육체적이다. 그것의 일단은 말초신경인 반면 다른 일단은 생명의 본질로 연결된다.

 

욕망은 물과 같아야 한다. 맑고 투명해야 하며 언제나 흘러서 고이거나 막힘이 없어야 한다. 욕망은 생명체에 내재적인 것이기에 충족도 자연스러워야 한다. 무슨 연유로 욕망의 충족이 방해를 받아서 좌절되거나 억압될 때 인간의 심리적, 신체적 반응도 왜곡되고 만다. 즉 정상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천운영의 글에서 맡을 수 있는 욕망이 바로 이런 유형이다. 그리고 이 작품집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 소설은 좌절된 욕망이 인간과 사회에 미치는 다양한 장면과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는 표제가 낯익은데 확인해 보니 2007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작품이다. 내용을 읽다 보니 확실히 기억이 새롭다. 당시에 적은 촌평을 보니 작가의 작품세계를 폭넓게 조감하지 못하고 단지 단편 하나만으로 섣부른 예단을 할 수 밖에 없는 한계가 명확하게 노정된다. 사진사인 그와 아내의 관계는 순탄치 못하다. 노쇠해지는 자신을 절감하는 그. 젊음을 유지하려 발버둥치는 아내의 행동을 보면서 그는 젊음을 시기하고 질투한다. 늙음은 살아있는 존재에게는 언젠가 닥쳐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인정하지 못한다. 문제는 아내가 아니라 오히려 그 자신에게 있다. 여자의 벗은 몸에 아무런 감동도 없이 냉소적인 그의 열등감과 패패주의. 그래서 후반에 녀석과 노파의 누드 사진 장면을 보면서 늙음이 더 이상 안쓰럽고 추악한 것이 아님을 발견하는 그의 변화는 놀랍기만 하다.

 

<그녀의 눈물 사용법>에 등장하는 가족 구성원의 관계도 그다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모녀와 허구한 날 눈물로 하소연하는 부자. 낳자마자 곧 죽게 된 미숙아 동생의 넋이 가족 간 문제의 출발로 외견상 인식되지만 실상 이는 구실에 불과하다. 어긋난 세상과 단절된 가족이 눈물을 빼앗아갔다. 눈물을 감정의 늪으로, 굴복의 다른 이름으로 간주하는 그녀. 그녀는 눈물 대신 차라리 오줌을 싼다. 눈물과 오줌은 모두 생리적 측면에서 동일한 배설작용이다. 그럼에도 양자는 분명한 차이를 지닌다. 오줌은 순전한 신체적 반응이지만 눈물은 정서적 반응이다. 눈물은 감정의 지각과 교환의 의미를 지닌다. 작품에서 천도제의 효과는 죽은 넋을 달래어 돌려보냄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막혔던 감정의 교류를 트이게 해주고 있다.

 

<알리의 줄넘기>의 주인공 소녀 알리는 건강한 인물이다. 흑인 혼혈아라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회적 치부를 슬그머니 지상으로 끌어올린다. 언론에서 계속 다문화를 외치지만 우리네는 여전히 단일민족의 신화에 익숙하다. 하다못해 혼혈이라도 백인이라면 대접이 다르다. 알리의 할머니 제니는 슬픈 역사의 당사자이며, 알리의 사라진 아버지는 피해자이다. 흑인 혼혈아가 갈 수 있는 길은 다양하지도 넓지도 않다. 여기서 작가는 편견과 선입견에 젖은 우리네들이 그들을 어떻게 얼마나 좌절시키는지 깨닫게 한다. 그럼에도 알리는 움츠러들거나 옆길로 새지 않는다. 그녀는 의연하고 당당하게 내일을 꿈꾸고 대비한다. 새로운 기술을 연습하면서.

 

<내가 데려다줄게>는 신화적이다. 여제자를 성폭행했다고 비난받고 쫓겨난 남자 교수. 그는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늪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가 눈을 뜬 후 맞이하게 된 사람들과 장소는 현실적이면서도 몽환적이다. “시간은 문제되지 않았다.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계획 따위는 필요 없었다”.(P.118) 그곳에서 그는 노파와 계집애, 그리고 여자와 함께 자연스러운 일상을 누린다. 그곳의 생활이 실제인지 환상인지, 아니면 그 중간인지 명확하지 않다. 노인의 말처럼 그들이 끔찍한 여자들인지도 모른다. 모든 게 그러하다. 이는 그의 진실도 마찬가지다. 그가 마지막까지 고민한 결백은 뱀의 실체일까 아니면 허물에 불과한 것인가. 오랜 기러기 생활이 이혼으로 끝난 후 견딜 수 없는 욕정의 발현이 힘과 권력과 지위를 전혀 쓰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일까? 스스로 옷을 벗도록 사내가 종용한 것은 아니었을까?”(P.131) 이제 사내의 진실은 늪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다.

 

<백조의 호수>의 주인공은 겉으로는 우아하고 품위 있지만 내적으로는 속물적 욕망으로 가득 찬 위선적 여성. 최고급푸드스타일리스트답게 화려하고 풍성한 테이블 세팅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어 작가의 현장 조사의 충실성을 떠올리게 한다. 백조는 호수에서 우아하게 수면을 떠다닌다. 반면 수면 아래에서는 가라앉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발을 놀린다고 한다. 여자에게 있어 삶은 유사하다. “화려하고 완벽한 식탁은......좀더 아름다운 화면을 선사할 스토리이며 연기일 뿐이었다.”(P.203) 그래서 여자는 혈통 좋은 비숑 프리제와 잡종견의 달콤한 신혼을 용인할 수 없다. 게다가 네 마리의 새끼라니. 소설이 여자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비극과 비참으로 종결됨은 당연하다. 삶은 연기가 아니다.

 

<내가 쓴 것>의 주인공은 <백조의 호수>과 다소간 유사하다. 소설 속 소설 형식을 차용하여 작가이자 교수인 여성의 허위를 사정없이 까발리고 있다. 1부에서 화자인 나는 여교수를 노련한 창녀로 표현한다. 마치 그녀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것처럼. 2부에서 여교수는 젊은 애인과의 이별을 수용하지 못한다. 남자의 집에 숨어들어가 그의 체온과 체취를 느끼지만 결국 얻게 되는 젊은 애인과 새 여자친구 간의 대화에서 듣게 된 모멸감 뿐. 3부는 여교수의 외도를 알게 된 남편의 자살 이야기다. 재밌는 것은 작가 후기다. 여기서 작가는 스스로가 소설 속의 주인공인 여교수임을 밝힌다. 그리고 소설쓰기란 죄의식을 갖고 빚을 갖는 행위임을 역설한다.

 

<후에>는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세계다. 자매의 교차적 진술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참다운 행복의 조건이 무엇인지 자성해 보게 한다. 이혼 및 사별로 인한 결손 가정은 구성원에 상당한 나쁜 영향을 끼친다. 사랑하고픈 욕망과 사랑받고픈 욕망이 정상적으로 실현되지 못하여 감정 교류에도 지장을 준다. 어쨌든 작중에서 애비가 떠난 이후 엄마와 자매는 나름대로 낙원의 삶을 살았다. 불결한 위생이 원인이 되어 방송의 집중 조명을 받은 이후 가족의 삶은 분리된다. 외부의 개입에 반응하는 각자의 대처는 모두 다르다. 현재의 구질구질함을 각성하고 걸림돌로 전락한 가정을 버리고 밖으로 날아가 버린 엄마, 현상에 순응하고 열심히 청소하는 언니, 그리고 과거의 지저분하지만 안온한 삶을 포기하지 못하는 동생. 행복의 잣대에 대한 동생의 논평은 이중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작중과 같이 하나의 관점에서만 평가받는 것에 대한 부당성의 제기. 한편 그네들의 행복하였다고 느낀 나날이 진정 행복하였던 것일까에 대한 의문.

 

말미의 해설에서 평론가는 작가 천운영의 작품세계의 변화를 욕망에서 사랑으로라는 표제로 파악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이 <노래하는 꽃마차>이다. 이것은 소외와 상실, 그로 인한 상처는 물론 나아가 상처의 이해와 보듬음이 잘 나타나 있다. 거인가족의 찬양사역단에서 작은 아이는 환영받지 못한다. 오빠에게 신체를 유린당한 계집아이. 몸과 영혼이 상처투성이가 된 그녀를 갖고 싶고 사랑하고 싶어 하게 된 그. 작품은 그녀와 그의 이야기가 역시 교차 진행한다. 부재한 부모의 사랑과 좌절된 사랑의 욕망은 그녀의 육신에 봄이 오면 꽃을 피게 만들었다. 그는 비로소 그녀를 알게 된다. 이제 그녀를 만나러 간다.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문득 이 단편의 묘미는 내용보다도 표현에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유랑극단의 변사를 연상시키는 낭송 스타일의 운율적 대사체. 삶의 슬픔도 고난도 모두 별것 아닌 양 설렁설렁하게 넘어가는 어조에서 사랑조차도 노래하는 꽃마차마냥 진정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아직 사랑은 시기상조인 듯.

 

이 책은 천운영의 세 번째 작품집이다. 장편소설도 한 편 있다. 작가의 이전 작품을 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섣부른 단언은 금물이다. 하지만 적어도 욕망이라는 어휘가 수록작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임은 분명하다. 이것이 전작들과 어떤 차이점을 보이는지 변화의 모색 도상에 있는지 여부는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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