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 탐정 - 법의인류학자 다이앤 프랜스 거침없이 도전한 여성 과학자 시리즈 7
로렌 진 호핑 지음, 한국여성과총 교육홍보출판위원회 옮김 / 해나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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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인류학자라는 용어 자체가 매우 생소하다. 죽은 사람의 뼈를 해석하여 뼈 주인의 신원을 확인하는 역할이다. 이때 죽은 사람은 오래전 유골일 수도 있고 직전에 사망한 사람일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 자연사한 사람보다는 사고사가 많을 테니 엉망이 된 시신의 살과 뼈를 분리하는 썩 내키지 않는 작업도 감수해야 한다. 일반인보다는 감정 면에서 매우 단단해야 하겠다. 이 책의 주인공인 다이앤 프랜스는 마음속에 상자를 두고 개인적 감정을 상자에 담아 보관한 후 나중에 열어보는 방식으로 마음을 다스린다고 밝힌다.

 

이 책은 거침없이 도전한 여성 과학자시리즈로 기획되었다. 따라서 성공이라는 관점에서 다이앤 프랜스로부터 두 가지 두드러진 사항을 발견할 수 있는데, 먼저 보수적인 문화와 관습을 극복했다는 점이다. 전반부는 그녀의 유년기로 거슬러 올라가 가족 관계, 성장 환경 및 학창 시절을 연대기적으로 다룬다. 의외로 1960년 미국 사회와 가정이 남녀의 성역할에 대해 보수적이었음을 그녀의 부모로부터 알게 된다. 또 하나 여성의 한계라는 편견을 극복하고자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는 점이다. 단지 지적 능력이 뛰어나서는 충분치 않다. 그것이 치열한 경쟁심과 호응해야 비로소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 고등학교 차석 졸업으로 이어진 그녀의 학업 노력이 이를 보여준다. 한편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여성이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결혼보다는 독신이 유리할 수 있음도 생각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 책의 흥미로움은 후반부에서 나온다. 그녀의 직업적, 학자적 역량이 발휘되는 사례를 통해 우리는 법의인류학의 실제 면모를 알 수 있다. 범죄를 입증하기 위해 살인사건의 피해자를 확인하는 범죄 수사로부터 오래된 무덤에서 발굴된 뼈의 특징과 미세한 흔적을 통해 그 사람을 유추하는 인류학적 관찰에 이르기까지. 참혹하지만 긴급한 필요를 요구하는 대규모 사망 사건은 더욱 그러하다. 이 책에서 소개된 글렌우드 가스 폭발 사고, 대한항공 여객기 괌 추락사고, 그리고 2001911일의 사건 등. 수십 명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희생자들의 폭발이나 추락으로 산산조각이 나서 사방으로 흩어진 사체를 하나하나 수집해서 짝을 맞추는 과정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열대지방인 경우 사체가 금방 부패하는데 사체를 먹는 벌레들과 익숙해져야 한다니.

 

생존 인물을 다루고 있으므로 통상적 전기물과 같은 결말 구조로 되어 있지 않다. 사생활에 관한 언급도 필요한 최소한만 언급한다. 독자들이 궁금한 건 주인공의 개인사 자체보다 그네들이 처한 환경과 역경을 극복하고 해당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과정일 것이므로. 다이앤 프랜스가 첫 남편과 헤어지게 된 상황은 그녀로서는 불가피했을 것이다. 자신의 커리어를 지키자면 가정의 제약을 탈피해야 하므로. 그녀로서는 말 그대로 삶을 바꾼 결정이다. 주인공을 남성으로 바꾸어 놓고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일을 계속 하려면 집에서라도 마음의 안정을 찾아야 한다”(P.172)는 명제는 유효하다.

 

상당히 생소한 직업 분야를 다루고 있으므로 이해하기에 애를 먹기에 십상이었을 텐데, 다행히 풍부한 사진 자료와 도판, 부가적 해설의 도움으로 재미있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기획과 편집이 중요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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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8
아서 밀러 지음, 강유나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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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 로먼은 진정 세일즈맨이었는가?

그는 분명 세일즈맨임이 틀림없으련만 극 중의 허술하고 제멋대로인 언행을 보면 과연 성공적인 세일즈가 가능했을까에 대해 의심이 든다. 그의 언행은 시종 모순으로 가득하다. 자신의 차 셰비를 최고라고 칭송하다 이내 빌어먹을 차라고 악담하며, 비프가 올리버 사장에게서 과거에 대단한 신임을 얻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그걸 받아들이도록 아들을 윽박지른다. 찰리의 제안을 단번에 거절하며 자신은 직장이 있다고 하면서도 이내 자신이 빈털터리임을 밝힌다. 그의 전성기 시절에 대한 성공담조차도 하워드 사장에게 인정받지 못하며 독자조차도 의심을 품을 정도다.

 

그가 외도 현장을 들킨 후 비프에게 한 변명에 따르면 자신이 외로웠다고 한다. 세일즈맨의 본질적 속성을 의미하는 표현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외근을 전전하는 별 볼 일 없는 처량한 신세의 고백으로 들린다. 찰리와 윌리의 대화를 보면 윌리의 시대착오적 사고를 알게 된다. “인상이 좋고 인기가 있다면 뭐든지...”(P.116), 즉 판매 물품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는. 고전적 세일즈 방식이 그렇지 않았을까?

 

애초에 윌리가 세일즈맨을 직업으로 택한 동기조차 불순하다. 호텔 방에서 전화만 돌리면 비즈니스를 성사시켜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다는 안이함. 알래스카로 가서 도전해 보자는 형의 제안을 수용하지 못한 나약함. 윌리의 장례식에서 찰리는 세일즈맨은 꿈꾸는 사람”(P.173)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세일즈맨은 물품을 생산 및 제조하지 않는다. 판매에 성공하리라는 믿음과 꿈으로 매일 길을 나서지 못한다면 그는 실패한 세일즈맨이다.

 

(찰리) 윌리는 세일즈맨이었어. 세일즈맨은 인생의 바닥에 머물러 있지 않아. 볼트와 너트를 짜 맞추지도 않고, 법칙을 제시하거나 치료약을 주는 것도 아니야. 세일즈맨은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하늘에서 내려와 미소 짓는 사람이야. 사람들이 그 미소에 답하지 않으면, 그게 끝이지. 모자가 더러워지고, 그걸로 끝장이 나는 거야. 이 사람을 비난할 자는 아무도 없어. 세일즈맨은 꿈꾸는 사람이거든. 그게 필요조건이요. (P.173)

 

윌리 로먼을 통해 독자는 하나의 시대가 지나가 버렸음을 발견한다. 윌리는 사실을 직시하기를 거부하고 허상을 좇다가 스러지는 인물이다. 자신의 낡은 주택 주위에 높다란 아파트가 에워싸고 있으며, 삼십여 년을 봉직하지만 내근직도 얻지 못한 채 고정급 없이 커미션으로 버텨야 하는 처지. 두 아들은 각각 텍사스 목장의 일꾼으로, 판매 보조 바람둥이로 실망만을 안기는 현실. 게다가 미식축구 선수로 대성을 기대했던 비프의 장래가 자신으로 인해 뒤틀려 버렸다는 자책감. 나름 소시민으로서 성실하게 살아왔던 자신이 지쳐 무력한 존재로 퇴락하고 있음에 대한 절망감 등등.

 

저녁 식당에서 두 아들에게조차 버림받는 윌리가 열렬히 간구하는 것은 바로 관심이다. 가정과 세상에서 쓸모없고 무시당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자괴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러한 그를 유일하게 감싸 안는 이가 아내 린다다. 윌리가 린다에게 대하는 태도에 자식들은 격분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개의치 않는다. 이미 윌리를 이해하고 있기에.


(린다) 그이는 한 인간이야. 그리고 무언가 무서운 일이 그에게 일어나고 있어. 그러니 관심을 기울여 주어야 해. (P.64)

 

(윌리) 오렌지 속만 까먹고 껍데기는 내다 버리실 참입니까. 사람은 과일 나부랭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잠시 후) 관심을 좀 기울여 주세요. (P.97)

 

이미 현실에 자리를 상실한 윌리가 기댈 곳은 추억과 회고뿐이다. 극 중에 벤이 자주 출몰하는 것은 윌리의 놓쳐버린 기회에 대한 아쉬움의 반복적 표현인 동시에 고독한 윌리가 정신적으로 의지할 존재를 과거에서 찾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가 벤에게 좋았던 그 시절-가족 간에 사랑과 믿음이 돈독하며 꿈과 희망이 미래에 드리워져 있던-로 돌아가고 싶은 심경을 토로하는 대목은 이 작품에서 극적인 결말을 향하기 위한 일순간의 예고이자 숨 고르기라고 하겠다.

 

마지막 린다의 흐느낌은 현대인의 비참한 삶을 역설적으로 웅변한다. 겨우 빚을 다 갚고 온전히 내 집이 되었건만 정작 사람은 간곳없고 건물은 허름하게 변한다. 그래도 윌리로서는 다행이다. 비프와 해피가 허상의 늪에서 벗어나 올바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작가는 윌리의 보험금이 나올지 여부를 언급하지 않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제 두 아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설 수 있게 되었으므로.

 

최근에 읽던 고전 희곡과 비교하면 무대 세팅과 조명, 배우의 동선 지정 등에서 매우 정치함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이 현대희곡의 특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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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루노코 - 고귀한 영혼의 노예 동안 더 빅 북 The Big Book
애프라 벤 지음, 최명희 옮김 / 동안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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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에 소개되었을 때만 해도 개인적으로 시큰둥하였는데, <떠돌이>의 작가라니 급 관심이 생겼다. 여기서 작가는 남아메리카의 수리남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들은 내용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택하고 있다. 따라서 사건과 인물의 진실성에 대한 기대감이 높지만 결국 소설이므로 사실 여하는 알 수 없다.

 

독자는 이 작품에서 두 가지 사항에 흥미를 갖게 될 텐데 우선적으로 주인공인 오루노코와 이모인다의 비극적인 삶에 강하게 이끌리게 된다. 제아무리 노예무역이 성행한 당대이지만 일국의 왕자인 오루노코가 속임수에 빠져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하는 대목은 놀라움을 안겨준다. 더욱이 가증스러운 위선자 영국 선장의 배신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서구인과 서구 문명에 대한 작가의 날 선 비판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자를 비참한 상태로 버려두는 악덕은 기독교도의 나라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그곳에서 종교란 다만 이름에 지나지 않으며, 미덕이나 도덕성은 없을지언정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P.31)

 

왕자와 이모인다의 사랑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면 아름답지만, 늙은 왕이 이모인다에 욕심을 내고 권력으로 쟁탈하는 대목도 이해 불가능은 아니다. 봉건사회에서 절대적 권력자에게 불가능은 없으며 그것을 현대적 가치관으로 재단하는 게 타당하지 않으므로. 오루노코 또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전면적으로 반항하지 않았으리라.

 

오루노코는 비록 노예 신분이지만 우아한 외모와 훌륭한 인품을 지닌 왕자로서 백인들에게도 존중받았다고 한다. 이쯤에서 묻고 싶다. 그가 영어와 프랑스어를 구사하여 백인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하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과연 그렇게 대우받았을까를.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수많은 흑인이 모두 태생적 노예에 적합하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다. 그에 대한 대우의 허상은 그가 뜻밖에 재회한 이모인다와 결혼하고 자유를 요청했을 때 갖은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는 모습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들에게 있어 오루노코와 이모인다는 고귀하지만 역시 노예일 뿐이다.

 

사건이 파국으로 치닫기 전에 작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독자에게 색다른 흥미를 안겨주기 위한 장치를 설정한다. 바로 수리남의 이국적 풍경과 오루노코와 아마존 인디언과의 만남 장면이다. 이 작품은 1688년에 출간되었는데 당시만 해도 남미는 여전히 낯설고 머나먼 지역이었고 그곳의 풍토와 식생 또한 유럽과는 전연 상이했으므로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그와 이모인다는 자신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절감하기에 그들의 선택은 필연이자 숙명이었다. 낯선 땅, 장비와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오루노코는 저항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게 내몰린 것이다. 정직하고 고매한 인간성이 존중받지 못하며 거짓과 배신이 판을 치는 세상을 그는 감당할 수 없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왕자로서 예우받고 존중받았다면 굳이 저항하지 말고 적당히 타협해서 살아갔으면 그런 비극은 피할 수도 있었을 터라고. 오루노코의 말을 듣자.

 

시저는......노예 신분의 비참성과 치욕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무거운 짐과 힘든 노역에 시달리며 뼈가 빠지게 일하고 있는 노고를 하나씩 꼽으면서 노예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며, 영혼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분별이 없는 야수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P.127)

 

미국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2백 년 전에 이미 애프러 벤은 노예제도의 실태와 참상을 생생하게 적시하고 있다. 노예제도는 부림을 당하는 노예만이 아니라 부리는 사람 자체의 인간성도 파멸시킨다. 사람을 물건으로 취급하는 부도덕성과 저항을 무력화하기 위한 폭력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비윤리성이 그것이다. 독자는 동족 문명인의 기만적인 언행에 분개하고 오루노코에게 동정과 공감을 표하는 작가의 목소리에 소설을 읽는 내내 귀 기울이게 된다. 그것이 단지 오래전 소설 속 상황에 그치지 않음을 모두가 다 같이 인식하고 있음이다. 그것이 이 작품이 단지 이국적인 인물과 배경의 로망스 소설에 그치지 않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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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 혹은 추방된 기사들
애프러 벤 지음, 홍유미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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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직업 여성 작가로 평가받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된 최초의 여성 작가인 애프러 벤의 대표 희곡 작품이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벤이 활동하던 왕정복고 시기에는 여성 작가와 창녀를 동일시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대놓고 음란한 희곡을 쓰고 성에 대한 자유분방한 태도를 보여주며 전업 작가로 살아갔던 벤은 독특한 인물이다.

 

표제의 떠돌이는 청교도혁명 당시 왕당파로 추방당한 영국의 기사들을 지칭한다. 이들이 스페인 치하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그곳 귀족 아가씨들과 벌이는 사랑의 로망스를 다루고 있다. 세 명의 여성 인물이 제각각 영국 신사들과 우여곡절은 있지만 결국 결혼으로 맺어지므로 한바탕의 유쾌한 희극이라 하겠지만 여기서 작가는 사랑과 결혼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고 있다.

 

플로린다와 헬레나의 아버지와 오빠는 언니는 다른 귀족과 혼인시키려 하며, 동생은 수녀로 만들려 한다. 이들의 의사결정에 있어 자매 당사자의 의사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이건 당시 관습이었으므로 이들을 일방적으로 비난함은 온당치 않다. 사실 결혼의 핵심 동기가 사랑으로 정립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하지만 플로린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플로린다의 사안이 누구와 결혼하는가라는 선택의 문제라면, 헬레나의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서 수녀가 될 운명을 받아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녀의 성격은 언니보다도 훨씬 적극적이며 사랑을 갈구하는 정도에는 더욱 대담하다. 그녀는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고자 한다. 윌모어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집시 아가씨와 시종으로 변신을 거듭하는 그녀의 적극성은 극중에서 가장 돋보인다.

 

(헬레나) 세상과 영원한 작별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서 말이야. 그리고 난 사랑받을 거야. [3막 제1]

 

당대 작품에는 매춘부, 즉 창녀가 자주 등장한다. 사랑과 욕정은 구별되어야 하므로 남성 인물들의 진실한 감정과 태도를 검증하는 역할을 여기서는 안젤리카와 루체타가 담당한다. 벨빌과 프레드릭은 이 점에서는 의연하지만, 블런트와 윌모어는 앞뒤 가리지 않고 휩쓸린다. 블런트가 루체타의 속임수에 넘어가 돈과 의복마저 빼앗기고 길거리를 배회하는 대목은 희극적 캐릭터로 그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윌모어는 안젤리카와 헬레나가 단번에 사랑에 빠져들 정도로 매력적인 인물이지만 철저한 바람둥이다. 그가 두 여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헬레나를 선택하는 장면이 순수한 사랑의 추구가 아님을 우리는 알아차린다. 한 여자에게 얽매이기 꺼리는 그에게 창녀 안젤리카가 아닌 여인 안젤리카의 사랑은 부담스러운 것이다.

 

(윌모어) (방백) 이렇게 풀려나서 기쁘군. 이제 내 집시 아가씨에게로 가 봐야지. 우리가 더 나쁘게 바뀌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친절한 새로운 아가씨에게서 새로운 즐거움들을, 새로운 매력들을 찾거든. [4막 제2]

 

해피엔딩의 관점에서 볼 때 안젤리카가 남는다. 그녀는 금전에 사랑을 파는 고급 창부이지만 윌모어에게 진실한 사랑을 품고 헌신하려 한다. 윌모어의 변심에 배신감을 느낀 그녀가 그를 죽이려고 윌모어에게 총구를 겨눈 채 제5막 제1장에서 구구절절하게 풀어놓는 대사는 독자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창녀에게서 발견한 사랑의 진정함이라니. 역설적이기에 더욱 순수함이 빛난다자칫 남녀 인물간의 가벼운 짝짓기 소동에 머물 수 있는 작품이 안젤리카의 등장으로 감정의 심층을 건드리는 수준으로 심화되었다. 안젤리카가 비록 윌모어에게 버림받지만 안토니오와 좋은 인연으로 이어지길 평범한 일개 독자는 바란다. 여성 인물들의 사랑과 남성 인물들의 본능적인 호색성이 작중에서 대비되지만 윌모어와 블런트는 심하다. 그들의 막무가내식 호색은 플로린다를 거의 강간까지 몰아갈 정도이지만 작중에서는 별것 아닌 걸로 가볍게 용서받는다. 이 점은 도덕적 비판의 여지가 충분한데, 다만 여성 작가가 써낸 작품이기에 판단의 기준이 애매한 점도 있다.

 

안젤리카는 벤이 영향을 받은 작품에서 유일하게 훔쳐온 대상”(P.259)이라고 후기에서 밝히고 있듯이 작가가 매혹을 느낀 인물로서 어쩌면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동질감을 느낀 작가의 분신이라고 평할 수 있겠다. 플로린다와 헬레나로 이루어진 한 축과 안젤리카로 대변되는 다른 한 축은 머나먼 대척점에서 출발하지만 사랑이라는 한곳에서 접점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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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악마
존 웹스터 지음, 고현동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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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미니오는 악한이다. 그는 시종일관 작품의 중심에 서서 사건의 현장에 있거나 사건 자체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작품의 동력원이기도 하다. 그의 바람은 오직 자신의 출세뿐이다.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면 어머니에게도 폭언을 퍼붓고 동생조차 칼로 찔러 죽일 정도로 비정하다. 플라미니오는 누이를 공작과 간음시킴으로써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려 시도했다. 종국적으로 누이는 공작부인이 되었으나 자신은 공작에게 개와 뚜쟁이로 천시 받는 존재가 되자 양자에 대한 원한을 깊이 품는다.

 

(플라미니오) 이제 승진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린 기회를 잡은 제가 아직도 창백한 얼굴의 나약한 남자로 남아 있기를 바라시나요? 아니죠, 부끄러움과 죄의식을 못 느끼도록 독한 포도주로 저의 이 얼굴을 무장시켜 굳건하게 만들 것입니다. (P.46-47) [1막 제2]

 

플라미니오라는 인물은 작품 내에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언제나 뜻 모를 철학적 대사를 냉소적으로 읊조리는 그를 보면 출세를 위해 악의 방향으로 지성을 타락시킨 인물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항상 실패의 길만을 선택하여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가는. 그렇기에 그는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인 면모로 독자에게 묘한 자신만의 매력을 풍기고 있다.

 

제재로 볼 때 정욕에 지배당하여 살인을 저지른 자에 대한 복수로 가볍게 볼 수 있지만 그들의 지위가 각자 나라를 다스리는 공작의 신분이라는 점, 비토리아의 살해당한 남편의 숙부가 후반부에 로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정치적 의미 부여도 가능하다. 프란치스코가 여동생의 복수를 쉽사리 감행하지 못한 이유도 자칫 국가 간 전쟁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하였기에 브라치아노 공작이 비토리아와 결혼하여 명예를 떨어뜨리고 로도비코 백작을 이용한 개인적 복수 방식을 취한 것이다.

 

비토리오는 악녀다. 하지만 플라미니오가 그녀의 악녀적 잠재성을 유도하고 발현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평범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남편에 대한 성적 불만과 신분 상승에 대한 화려한 기대를 품은 채 그녀는 자신의 본능이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 이후의 행적을 보면 그녀가 공작부인 역할을 수행할 만한 지성과 태도를 지닌 인물임을 알 수 있다. 3막 제2장에서 남편 살인과 간음 혐의로 각국 대사들 앞에서 추기경으로부터 심문받는 그녀의 당당한 태도와 어찌 보면 횡설수설하는 추기경의 대비되는 장면이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작품해설에서는 비토리아를 당대의 남성 중심적 가치관을 위협하는 매우 도전적인 여성상으로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수동적이고 역할에 헌신적인 이사벨라와 대조를 이루는 그녀의 자기중심적이고 위악도 의연하게 감수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현대적 여성상과 부합하는 면을 발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비토리아라는 인물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 마지막 막의 제6장에서 비토리아와 플라미니오의 대치는 죽은 공작의 유지를 따르는 동시에 토사구팽 차원에서 손절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매지간인 악한과 악녀의 대결이 흥미진진하다.

 

이 작품은 수십 년 전 이탈리아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을 거의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고 한다. 언제나 그러하듯 현실이 상상의 세계보다 훨씬 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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