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악마
존 웹스터 지음, 고현동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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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미니오는 악한이다. 그는 시종일관 작품의 중심에 서서 사건의 현장에 있거나 사건 자체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작품의 동력원이기도 하다. 그의 바람은 오직 자신의 출세뿐이다.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면 어머니에게도 폭언을 퍼붓고 동생조차 칼로 찔러 죽일 정도로 비정하다. 플라미니오는 누이를 공작과 간음시킴으로써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려 시도했다. 종국적으로 누이는 공작부인이 되었으나 자신은 공작에게 개와 뚜쟁이로 천시 받는 존재가 되자 양자에 대한 원한을 깊이 품는다.

 

(플라미니오) 이제 승진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린 기회를 잡은 제가 아직도 창백한 얼굴의 나약한 남자로 남아 있기를 바라시나요? 아니죠, 부끄러움과 죄의식을 못 느끼도록 독한 포도주로 저의 이 얼굴을 무장시켜 굳건하게 만들 것입니다. (P.46-47) [1막 제2]

 

플라미니오라는 인물은 작품 내에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언제나 뜻 모를 철학적 대사를 냉소적으로 읊조리는 그를 보면 출세를 위해 악의 방향으로 지성을 타락시킨 인물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항상 실패의 길만을 선택하여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가는. 그렇기에 그는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인 면모로 독자에게 묘한 자신만의 매력을 풍기고 있다.

 

제재로 볼 때 정욕에 지배당하여 살인을 저지른 자에 대한 복수로 가볍게 볼 수 있지만 그들의 지위가 각자 나라를 다스리는 공작의 신분이라는 점, 비토리아의 살해당한 남편의 숙부가 후반부에 로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정치적 의미 부여도 가능하다. 프란치스코가 여동생의 복수를 쉽사리 감행하지 못한 이유도 자칫 국가 간 전쟁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하였기에 브라치아노 공작이 비토리아와 결혼하여 명예를 떨어뜨리고 로도비코 백작을 이용한 개인적 복수 방식을 취한 것이다.

 

비토리오는 악녀다. 하지만 플라미니오가 그녀의 악녀적 잠재성을 유도하고 발현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평범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남편에 대한 성적 불만과 신분 상승에 대한 화려한 기대를 품은 채 그녀는 자신의 본능이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 이후의 행적을 보면 그녀가 공작부인 역할을 수행할 만한 지성과 태도를 지닌 인물임을 알 수 있다. 3막 제2장에서 남편 살인과 간음 혐의로 각국 대사들 앞에서 추기경으로부터 심문받는 그녀의 당당한 태도와 어찌 보면 횡설수설하는 추기경의 대비되는 장면이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작품해설에서는 비토리아를 당대의 남성 중심적 가치관을 위협하는 매우 도전적인 여성상으로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수동적이고 역할에 헌신적인 이사벨라와 대조를 이루는 그녀의 자기중심적이고 위악도 의연하게 감수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현대적 여성상과 부합하는 면을 발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비토리아라는 인물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 마지막 막의 제6장에서 비토리아와 플라미니오의 대치는 죽은 공작의 유지를 따르는 동시에 토사구팽 차원에서 손절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매지간인 악한과 악녀의 대결이 흥미진진하다.

 

이 작품은 수십 년 전 이탈리아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을 거의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고 한다. 언제나 그러하듯 현실이 상상의 세계보다 훨씬 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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