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이 혹은 추방된 기사들
애프러 벤 지음, 홍유미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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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직업 여성 작가로 평가받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된 최초의 여성 작가인 애프러 벤의 대표 희곡 작품이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벤이 활동하던 왕정복고 시기에는 여성 작가와 창녀를 동일시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대놓고 음란한 희곡을 쓰고 성에 대한 자유분방한 태도를 보여주며 전업 작가로 살아갔던 벤은 독특한 인물이다.

 

표제의 떠돌이는 청교도혁명 당시 왕당파로 추방당한 영국의 기사들을 지칭한다. 이들이 스페인 치하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그곳 귀족 아가씨들과 벌이는 사랑의 로망스를 다루고 있다. 세 명의 여성 인물이 제각각 영국 신사들과 우여곡절은 있지만 결국 결혼으로 맺어지므로 한바탕의 유쾌한 희극이라 하겠지만 여기서 작가는 사랑과 결혼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고 있다.

 

플로린다와 헬레나의 아버지와 오빠는 언니는 다른 귀족과 혼인시키려 하며, 동생은 수녀로 만들려 한다. 이들의 의사결정에 있어 자매 당사자의 의사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이건 당시 관습이었으므로 이들을 일방적으로 비난함은 온당치 않다. 사실 결혼의 핵심 동기가 사랑으로 정립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하지만 플로린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플로린다의 사안이 누구와 결혼하는가라는 선택의 문제라면, 헬레나의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서 수녀가 될 운명을 받아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녀의 성격은 언니보다도 훨씬 적극적이며 사랑을 갈구하는 정도에는 더욱 대담하다. 그녀는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고자 한다. 윌모어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집시 아가씨와 시종으로 변신을 거듭하는 그녀의 적극성은 극중에서 가장 돋보인다.

 

(헬레나) 세상과 영원한 작별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서 말이야. 그리고 난 사랑받을 거야. [3막 제1]

 

당대 작품에는 매춘부, 즉 창녀가 자주 등장한다. 사랑과 욕정은 구별되어야 하므로 남성 인물들의 진실한 감정과 태도를 검증하는 역할을 여기서는 안젤리카와 루체타가 담당한다. 벨빌과 프레드릭은 이 점에서는 의연하지만, 블런트와 윌모어는 앞뒤 가리지 않고 휩쓸린다. 블런트가 루체타의 속임수에 넘어가 돈과 의복마저 빼앗기고 길거리를 배회하는 대목은 희극적 캐릭터로 그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윌모어는 안젤리카와 헬레나가 단번에 사랑에 빠져들 정도로 매력적인 인물이지만 철저한 바람둥이다. 그가 두 여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헬레나를 선택하는 장면이 순수한 사랑의 추구가 아님을 우리는 알아차린다. 한 여자에게 얽매이기 꺼리는 그에게 창녀 안젤리카가 아닌 여인 안젤리카의 사랑은 부담스러운 것이다.

 

(윌모어) (방백) 이렇게 풀려나서 기쁘군. 이제 내 집시 아가씨에게로 가 봐야지. 우리가 더 나쁘게 바뀌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친절한 새로운 아가씨에게서 새로운 즐거움들을, 새로운 매력들을 찾거든. [4막 제2]

 

해피엔딩의 관점에서 볼 때 안젤리카가 남는다. 그녀는 금전에 사랑을 파는 고급 창부이지만 윌모어에게 진실한 사랑을 품고 헌신하려 한다. 윌모어의 변심에 배신감을 느낀 그녀가 그를 죽이려고 윌모어에게 총구를 겨눈 채 제5막 제1장에서 구구절절하게 풀어놓는 대사는 독자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창녀에게서 발견한 사랑의 진정함이라니. 역설적이기에 더욱 순수함이 빛난다자칫 남녀 인물간의 가벼운 짝짓기 소동에 머물 수 있는 작품이 안젤리카의 등장으로 감정의 심층을 건드리는 수준으로 심화되었다. 안젤리카가 비록 윌모어에게 버림받지만 안토니오와 좋은 인연으로 이어지길 평범한 일개 독자는 바란다. 여성 인물들의 사랑과 남성 인물들의 본능적인 호색성이 작중에서 대비되지만 윌모어와 블런트는 심하다. 그들의 막무가내식 호색은 플로린다를 거의 강간까지 몰아갈 정도이지만 작중에서는 별것 아닌 걸로 가볍게 용서받는다. 이 점은 도덕적 비판의 여지가 충분한데, 다만 여성 작가가 써낸 작품이기에 판단의 기준이 애매한 점도 있다.

 

안젤리카는 벤이 영향을 받은 작품에서 유일하게 훔쳐온 대상”(P.259)이라고 후기에서 밝히고 있듯이 작가가 매혹을 느낀 인물로서 어쩌면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동질감을 느낀 작가의 분신이라고 평할 수 있겠다. 플로린다와 헬레나로 이루어진 한 축과 안젤리카로 대변되는 다른 한 축은 머나먼 대척점에서 출발하지만 사랑이라는 한곳에서 접점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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