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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죽음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8
아서 밀러 지음, 강유나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평점 :
윌리 로먼은 진정 세일즈맨이었는가?
그는 분명 ‘세일즈맨’임이 틀림없으련만 극 중의 허술하고 제멋대로인 언행을 보면 과연 성공적인 세일즈가 가능했을까에 대해 의심이 든다. 그의 언행은 시종 모순으로 가득하다. 자신의 차 셰비를 최고라고 칭송하다 이내 빌어먹을 차라고 악담하며, 비프가 올리버 사장에게서 과거에 대단한 신임을 얻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그걸 받아들이도록 아들을 윽박지른다. 찰리의 제안을 단번에 거절하며 자신은 직장이 있다고 하면서도 이내 자신이 빈털터리임을 밝힌다. 그의 전성기 시절에 대한 성공담조차도 하워드 사장에게 인정받지 못하며 독자조차도 의심을 품을 정도다.
그가 외도 현장을 들킨 후 비프에게 한 변명에 따르면 자신이 외로웠다고 한다. 세일즈맨의 본질적 속성을 의미하는 표현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외근을 전전하는 별 볼 일 없는 처량한 신세의 고백으로 들린다. 찰리와 윌리의 대화를 보면 윌리의 시대착오적 사고를 알게 된다. “인상이 좋고 인기가 있다면 뭐든지...”(P.116), 즉 판매 물품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는. 고전적 세일즈 방식이 그렇지 않았을까?
애초에 윌리가 세일즈맨을 직업으로 택한 동기조차 불순하다. 호텔 방에서 전화만 돌리면 비즈니스를 성사시켜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다는 안이함. 알래스카로 가서 도전해 보자는 형의 제안을 수용하지 못한 나약함. 윌리의 장례식에서 찰리는 “세일즈맨은 꿈꾸는 사람”(P.173)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세일즈맨은 물품을 생산 및 제조하지 않는다. 판매에 성공하리라는 믿음과 꿈으로 매일 길을 나서지 못한다면 그는 실패한 세일즈맨이다.
(찰리) 윌리는 세일즈맨이었어. 세일즈맨은 인생의 바닥에 머물러 있지 않아. 볼트와 너트를 짜 맞추지도 않고, 법칙을 제시하거나 치료약을 주는 것도 아니야. 세일즈맨은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하늘에서 내려와 미소 짓는 사람이야. 사람들이 그 미소에 답하지 않으면, 그게 끝이지. 모자가 더러워지고, 그걸로 끝장이 나는 거야. 이 사람을 비난할 자는 아무도 없어. 세일즈맨은 꿈꾸는 사람이거든. 그게 필요조건이요. (P.173)
윌리 로먼을 통해 독자는 하나의 시대가 지나가 버렸음을 발견한다. 윌리는 사실을 직시하기를 거부하고 허상을 좇다가 스러지는 인물이다. 자신의 낡은 주택 주위에 높다란 아파트가 에워싸고 있으며, 삼십여 년을 봉직하지만 내근직도 얻지 못한 채 고정급 없이 커미션으로 버텨야 하는 처지. 두 아들은 각각 텍사스 목장의 일꾼으로, 판매 보조 바람둥이로 실망만을 안기는 현실. 게다가 미식축구 선수로 대성을 기대했던 비프의 장래가 자신으로 인해 뒤틀려 버렸다는 자책감. 나름 소시민으로서 성실하게 살아왔던 자신이 지쳐 무력한 존재로 퇴락하고 있음에 대한 절망감 등등.
저녁 식당에서 두 아들에게조차 버림받는 윌리가 열렬히 간구하는 것은 바로 ‘관심’이다. 가정과 세상에서 쓸모없고 무시당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자괴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러한 그를 유일하게 감싸 안는 이가 아내 린다다. 윌리가 린다에게 대하는 태도에 자식들은 격분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개의치 않는다. 이미 윌리를 이해하고 있기에.
(린다) 그이는 한 인간이야. 그리고 무언가 무서운 일이 그에게 일어나고 있어. 그러니 관심을 기울여 주어야 해. (P.64)
(윌리) 오렌지 속만 까먹고 껍데기는 내다 버리실 참입니까. 사람은 과일 나부랭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잠시 후) 관심을 좀 기울여 주세요. (P.97)
이미 현실에 자리를 상실한 윌리가 기댈 곳은 추억과 회고뿐이다. 극 중에 벤이 자주 출몰하는 것은 윌리의 놓쳐버린 기회에 대한 아쉬움의 반복적 표현인 동시에 고독한 윌리가 정신적으로 의지할 존재를 과거에서 찾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가 벤에게 좋았던 그 시절-가족 간에 사랑과 믿음이 돈독하며 꿈과 희망이 미래에 드리워져 있던-로 돌아가고 싶은 심경을 토로하는 대목은 이 작품에서 극적인 결말을 향하기 위한 일순간의 예고이자 숨 고르기라고 하겠다.
마지막 린다의 흐느낌은 현대인의 비참한 삶을 역설적으로 웅변한다. 겨우 빚을 다 갚고 온전히 내 집이 되었건만 정작 사람은 간곳없고 건물은 허름하게 변한다. 그래도 윌리로서는 다행이다. 비프와 해피가 허상의 늪에서 벗어나 올바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작가는 윌리의 보험금이 나올지 여부를 언급하지 않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제 두 아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설 수 있게 되었으므로.
최근에 읽던 고전 희곡과 비교하면 무대 세팅과 조명, 배우의 동선 지정 등에서 매우 정치함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이 현대희곡의 특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