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범을 사랑한 군인 - 역사에 남을 위대한 야생 동물들 시튼의 동물 이야기 9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이한중 옮김 / 궁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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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역사에 남을 위대한 야생 동물들

 

궁리에서 발간한 시튼 동물기 시리즈의 가장 마지막 편인 동시에 작가로서도 최 말년의 작품에 해당한다. 수년 후에 그의 자서전이 출간되었으니. 부제에 걸맞은 이야기는 <식인 늑대 라베트><프랑스 늑대 왕 쿠르토> 정도로 봐야 하리라. 이걸 포함해서 절반 정도의 이야기가 늑대를 다루고 있는데, 작가는 서문에 늑대에 대한 나의 연민과 관심이 그만큼 컸기 때문”(P.9)이라고 밝힌다.

 

<식인 늑대 라베트><프랑스 늑대 왕 쿠르토>는 인간 세계를 압도하는 최고 포식자로서의 늑대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둘 다 거대한 크기, 사냥꾼을 따돌리는 명석한 두뇌, 그리고 사람고기에 대한 집착으로 역사적 명성을 남겼다. 인간은 거대한 포식자에 열광하는 습성이 있다. 공룡에 대한 애정은 비단 아이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라베트와 쿠르토의 삶과 영광, 그리고 죽음을 서술하는 작가의 필치에는 흡사 영웅의 생애를 다루는 것과 동일한 찬사와 탄식이 함께 배어 있다.

 

거대한 늑대는 그렇게 쓰러졌다. 끝까지 싸우다 숨을 거둔 것이다. 무쇠 창을 물어뜯으며 저항하면서 당당하게 죽어 갔다.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시체더미 위에 쓰러진 것이다. 그렇다! 이제는 죽었다. 그렇지만 승자는 그였다. 라베트는 그렇게 죽었다. (P.302)

 

라베트가 식인 늑대로 악명을 떨쳤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 개체로서 그러할 뿐이었다. 쿠르토는 스케일이 남다르다. 늑대 무리를 이끌고 파리시를 장기간 포위할 지경이었다고 하니 글을 보면서도 이게 과연 실제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쿠르토가 활약하던 때는 잔 다르크와 동시대라고 하니 시대적 배경을 보면 그러할 수도 있겠다 싶다. 세상과 자연이 모두 어지러우면 자고로 역사상에 언제나 비상식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법.

 

온 땅에 무정부 상태와 기근과 질병이 난무했다. 소작농들은 힘없이 죽어 나갔고 비옥한 농지들 황폐해지기 시작했다.

시절 탓인지 늑대들은 무리 지어 탐욕스러운 약탈을 일삼았다. (P.306)

 

그해 프랑스는 학살의 해였다. 외국의 적들과 도적 떼들이 쓸 만한 땅은 모조리 황폐화시키자고 작정이라도 한 듯했다. (P.318)

 

이 이야기의 흥미로운 대목은 루브르의 어원을 알게 되었으며, 수비대장의 고귀한 희생을 잔 다르크의 그것과 동일시한 점이다.

 

그밖에 <아일랜드 늑대의 최후>, <하얀 늑대와 용감한 아들><늑대의 법>은 늑대와 인간의 대결 과정에서 드러나는 늑대의 고귀성과 불굴성, 그리고 인간과 늑대의 교감 등을 두루 다루고 있다. <소녀와 늑대>는 인간을 두려워하는 법을 학습한 현대의 늑대를, <러닝보드의 늑대>는 길들여진 늑대를, <린컨과 밤의 부름>은 야성을 상실하고 가축화된 개에게 남겨진 태곳적의 끈질긴 야성의 편린을 알게 해 준다.

 

시튼이 많은 늑대 이야기를 전한 까닭은 늑대에 대한 애정과 아울러 늑대가 유럽과 미국에 그토록 맹위를 떨쳤던 사실을 반영하였기 때문이다. 두뇌와 야수성을 갖추었고 무엇보다 집단 사냥을 즐겨한 그들에게 대항할 맹수가 없었기에 아마도 인간의 개입이 없었다면 늑대는 여전히 최고의 지위를 누렸을 것이다.

 

인간에게 최고의 친구 동물은 누가 뭐래도 개다. 이 책에서도 <전달병 캐럿><행크와 제프>를 통해 인간과 진실한 유대와 공감을 주고받는 개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개의 도움을 얻어 목숨을 구한 인간의 숫자가 얼마나 많으며, 단지 가축이 아닌 영혼의 동반자에 가까울 정도로 교감을 나누는 사람과 개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서로 떨어져 살아갈 수 없는 행크와 제크의 슬픔에 동감하게 된다.

 

행크는......개였어요. 그러지...말았어야 했는데. 나를 용서한 것처럼...나도 용서를 했어야 하는데. 행크는 내 개였어요. ...내 개였어요.” (P.264)

 

그럼에도 시튼은 야생 동물의 가축화에 부정적 입장을 취한다. 야생 동물의 순수성과 도덕성을 잃는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가 방울뱀과 혈투를 벌이는 쥐(<쥐와 방울뱀의 혈투>)를 옹호하는 건 쥐를 좋아해서가 아니다. 그의 불굴의 용기에 감탄해서다. 경탄 어린 어조로 묘사하는 사막의 요정 캥거루쥐(<사막의 요정>)를 잡아 가두려는 시도가 부질없음을 깨달아서다. 자연을 자연 그대로 놓아둘 때 치커리(<붉은 다람쥐의 모험>)의 야생의 모험담이 의미 있으며, 작가가 환상적으로 그려 내는 숲의 밤(<숲 속의 밤>)의 두려움과 정취가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겠는가? 린컨과 마찬가지로 가축이 된 황소(<칠링햄의 야생 들소>)조차도 내재한 야성의 본능을 결코 상실하지 않음을 보자.

 

표제작 <표범을 사랑한 군인>에서 군인뿐만 아니라 독자는 표범과 군인의 옛 연인을 동일시하게 된다. 아름다움과 표독함, 사랑과 독점욕이 한데 어우러진 치명적인 사랑. 실현되지도 완성할 수도 없는 비극적 운명이 예고된 표범과의 사랑은 팜므 파탈을 연상시킨다. 사랑과 고통이 공존하는 사랑은 오래갈 수 없다. 군인과 옛 연인의 이별이 비극으로 끝났듯이 그가 표범에게서 헤어날 길은 유일할 길만이 남아 있을 따름.

 

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여전히 그녀에게서 벗어날 기회를 간절히 엿보고 있었지만 고통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에게나 나에게나 그것은 끔찍한 고통이리라는 것을, 죽도록 슬픈 고통이 따를 것이라는 생각이 언제나 나를 사로잡았다. (P.355)

 

인간과의 우정과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동물과 얄팍한 이익을 위해 자식을 무자비하게 희생시키는 부모. 인간과 다름없는 사랑을 바친 암표범. 자식에 대한 무한한 기쁨과 헌신을 아낌없이 바치는 엄마 곰(<엄마 곰의 기쁨>)의 모성은 인간 여성이 갖는 감정과 무엇이 다른가?

 

시튼은 말미에 이렇게 묻는다, 어느 쪽이 짐승이냐고. 우리가 시튼의 동물 이야기에 매료되는 것은 표피적 흥미 이상의 것이 담겨 있어서다. 미처 알지 못했던 종이 아닌 개체로서의 동물의 모습을 비로소 알게 되고 그것이 인간과 마찬가지임을 깨닫게 해 주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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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를 위한 정의란 무엇인가 -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 수업
조혜진 그림, 신현주 글, 김선욱 감수, 마이클 샌델 원작 / 미래엔아이세움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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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원저를 청소년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면적으로 편집한 책이다. 많은 그림과 커다랗게 강조하는 글꼴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듯하지만, 각 장의 끝에 마이클 샌델이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형식으로 원저의 내용이 압축, 요약된 대목은 분명 중학생 이상의 수준에 가깝다. 아직 원저를 읽지 않은 나로서는 이 책이 원저에 얼마만큼 충실하였을지 판단할 수 없다. 감수자가 꼼꼼히 봤을 테니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으리라 믿고, 저자의 말처럼 원저를 읽기 위한 디딤돌로 생각하고 싶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매우 민감한 질문이다. 답변자의 가치관과 정치적 견해가 포함될 수밖에 없기에 토론은 갈등으로 이어지고, 우리나라처럼 이념, 지역, 세대 간 첨예하게 이해관계가 구분되는 사회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공개하는데 더더욱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원저자는 이러한 공개적 논쟁이 바람직하다고 옹호한다.

 

의견 충돌의 두려움 때문에 이러한 질문들을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것을 미루거나 피해서는 안 됩니다. 정의에 관해 경쟁하는 여러 원칙들을 두고 이렇게 공개적으로 논쟁하는 것은 성숙하고 자신감 넘치는 민주주의의 징표라고 생각합니다. (‘원저자의 말에서)

 

마이클 샌델은 정의에 대한 주요한 견해를 크게 세 가지 소개하고 있는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유명한 제레미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 행복의 질적인 부분에 주목한 존 스튜어트 밀의 질적 공리주의가 그것이다. 공리주의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데 사회적 의사결정에 완벽한 동의는 거의 불가능하기에 다수결의 원칙 또한 공리주의와 멀지 않다.

 

행복의 질은 개인마다 똑같을 수 없기에 사람들 사이의 자유로운 선택과 의사결정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자유롭게 거래되고 교환되는 곳을 시장으로 보면, 자유시장주의자가 등장한다. 여기서도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완전한 자유가 보장되고 완벽한 정보가 제공된다면 모르겠지만, 시장의 무결성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음을 우리는 역사적 경험으로 알고 있다. 원저자도 이렇게 언급한다.

 

흔히 우리가 시장에서의 정의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 사이의 자유로운 선택과 합의를 강조해요. 바로 여기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있어요. 사람들 사이의 선택과 합의가 정말 공정한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있느냐는 거예요. (P.87)

 

이어서 원저자는 칸트와 아리스토텔레스를 소개하면서 존 롤스에 이른다. 그는 마이클 샌델에 앞서 정의론으로 시대를 풍미했던 철학자인데, 서가에 꽂혀 있는 두 사람의 책을 보면 뿌듯함과 동시에 갑갑한 심정이다. 샌델은 존 롤스의 정의의 원칙 중 차등의 원칙에 근거하여 미국의 소수 집단 우대 정책의 정당성을 의제에 올린다.

 

우리 사회도 양성평등 또는 사회적 약자 배려의 차원에서 차등적 보상을 실행하는 정책을 실행할 때면 특히 근래 들어 굉장한 논쟁거리가 되는 경우가 많다. 역사적, 구조적 차별을 바로잡으려는 조치가 역차별에 해당하는지는 이해당사자마다 민감하게 받아들이게 마련이다. 지금 여기에서 피해를 보는 나는 앞서 말한 차별과는 관련 없는데 오히려 불이익을 감수하라고 할 때 쉽게 용납하기 어렵다. 마이클 샌델은 고립된 개인이 아닌 공동체 내에 소속된 개인의 의무로서 공동체주의를 제시하여 타당성의 근거를 제시하려고 한다.

 

나를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보는 연대의 의무는 아주 특별해요. 그 의무에는 우리가 떠안아야 할 도덕적 책임이 있거든요. 이 책임은 역사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찾는 도덕적인 인식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어요. 또한 우리를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서 보고 연대의 의무를 찾는 것이 정의로워 보입니다. (P.183)

 

공동체주의의 논거로 불만을 잠재울 수 있지만 완전한 해법이 되지 못한다. 공동체주의는 자칫 개인을 억압하는 집단주의화 우려가 잠재되어 있다. 원저자 또한 개인의 선택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고 부언함은 이를 의식한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개인의 선택에 있어 도덕성의 가치를 강조한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정의가 도덕과 종교적 가치와 결부되어 있다면, 정의를 실현하는 방안 또한 도덕과 종교와 분리할 수 없게 된다. 정의는 어떻게 보면 정답이 없는 질문이다. 서로가 자신들의 대답이 정답이라고 주장하면 분쟁의 화약고가 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갈등 확대를 우려하여 정의에 대한 논쟁을 외면하고 회피할 것인지, 아니면 어려움을 감수하고라도 정면으로 정의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지속할 것인지.

 

정치와 법이 도덕적, 종교적으로 중립을 지키는 건 불가능하기에 서로 다른 입장을 존중하는 정치를 해야 해요. 공동체의 삶에서 다르게 나타나는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피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도 서로를 존중하며 나아가야 해요. 도덕과 가치를 고민하는 정치는 도덕을 회피하는 정치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니까요. (P.211)

 

마이클 샌델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원리적으로 자연스러운 귀결에 이른다. 다만 그것이 실행이라는 현실적 과제와 맞닥뜨렸을 때 여전히 앞길에 커다란 어려움이 드리워져 있음 또한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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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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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대표작 가운데 가장 잔인하고 처절한 작품이다. 처절함은 리어 왕에게서, 잔인함은 글로스터 백작을 통해 표출된다. 두 사람이야말로 단연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표제로 볼 때 리어 왕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글로스터 백작이 주인공인 까닭은 리어 왕과 함께 비극을 유발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인물이어서다. 글로스터 일가와 관련된 얘기가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까닭이다.

 

두 사람의 운명은 병행하여 진행된다. 그들은 닮은꼴이다. 반목-그들의 반목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하는 형제를 둔 글로스터 백작과 역시 그러한 자매를 둔 리어 왕. 간언(間言)에 연약한 전자와 감언(甘言)에 취약한 후자. 양자는 성격도 유사한데, 성급함과 함께 직진성이 그것이다.

 

이는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진실에 충실한지를 증명하는 단적인 예이다. 그 정도는 때로 섬뜩할 지경이다. 우리가 코딜리아의 순수함이나 사랑과 진실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거리감을 느낀다면 바로 이런 점 때문이라 할 수 있다. (P.189)

 

리어 왕의 성격적 결함은 노인이니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코딜리아의 집요한 강경함은 극 초반에 두드러진다. 작중 인물들이 모두 찬미하는 인물임에도 독자는 그녀에게 그다지 공감대와 동정을 형성하지 못한다. 이는 아버지를 닮은 듯 일체의 타협에 굴하지 않는 그녀의 성격에서 비롯한다. 자식에게서 사랑의 말을 듣고 싶은 리어 왕의 바람이 그렇게 터무니없지는 않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한다. 물론 그녀의 생각은 진실에 가깝다. 하지만 인간적인지는 않다. 작품 해설에서도 이를 언급한다.

 

코딜리아의 작중 비중이 낮은 것은 비극을 이끌어내는 리어 왕의 대척점에서만 의의를 지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원한을 복수하려는 그녀의 전쟁 시도가 실패로 끝나는 것은 불가피한데 어쨌든 그녀는 외세인 프랑스의 왕비로서 프랑스군을 이끌고 왔기 때문이다.

 

(코딜리아) 없습니다, 전하.

(리어) 없습니다?

(코딜리아) 없습니다.

(리어) 없음은 없음만 낳느니라. 다시 해봐. (11, P.17-18)

 

리어 왕과 코딜리아의 대화는 선()문답을 떠올리게 한다. 자석의 같은 극끼리 서로 끌어당기지 못하듯 닮은꼴인 그들은 내내 밀쳐내기만 한다. 여기서 사랑하지 않지만 사랑을 말하여 사랑을 인정받고, 사랑함에도 사랑을 말하지 않아 사랑을 부인 받는 모순적 상황이 발생하며, 이것이 리어 왕의 비극의 출발점이다. 리어 왕의 처사가 가져올 비극을 예언하는 인물은 켄트와 바보가 둘뿐이나, 켄트는 추방당하고 바보는 바보일 뿐.

 

(바보) 당신 땅을 내주라고 조언한 신하 불러 / 내 곁에 세우고 당신이 그 사람 역을 하면 / 친절한 바보와 신랄한 바보는 바로 보여. / 얼룩옷 바보는 여기에, 또 하나는 거기에.

(리어) , 나를 바보라고 부르는 거냐?

(바보) 다른 칭호는 다 줘버렸잖아. 그건 당신이 가지고 / 태어났고. (11, P.45)

 

(바보) 넝마 걸친 아비는 / 자식들이 눈 돌리나 / 주머니 찬 아비는 / 자식들이 친절하지. / 최고 창녀 운명여신 / 거지에겐 문 안 열어. (24, P.76)

 

<리어 왕>에서 바보는 독특한 인물이다. 리어 왕을 따라다니면서 시종일관 풍자와 해학을 자아내는 그는 극의 지나친 엄숙성과 비극성을 완화해주는 역할을 맡는다. 여기에 더해 미쳐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명료한 인식을 지니고 대놓고 직언하지만 아무도 수용하지 않는데 그의 비극성이 드리운다. 리어 왕이 광기에 완전히 휩싸인 후 그가 더는 극에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등장할 이유가 없어서이리라.

 

이 작품은 주요 등장인물이 거의 모두-올바니와 에드거만 빼고-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에서도 드물게 참담하다. 고너릴과 리간은 극이 전개될수록 패륜과 음욕에 물든 본성을 드러내는데, 에드먼드를 쟁탈하고자 하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에드먼드는 형을 내쫓고 아버지를 처참한 상황에 빠뜨리는 장본인이다. 서자로서의 그의 좌절과 분노를 십분 이해하고 출세욕을 참작하더라도 그의 죄악은 용서받을 수 없다. 그리고 콘월 공작.

 

올바니와 콘월은 리어 왕의 사위이자 왕국의 후계자임에도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다. 고너릴에게 바보라고 불릴 만큼 충성스럽고 성실한 올바니는 고너릴의 행동과 성격에 영합하길 거부한다. 그는 리어 왕에 대한 글로스터 백작의 충정에 감복한다. 그가 훗날 유일하게 생존한 후계자로서 그가 사태를 정리하고 왕국을 계승한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다.

 

(올바니) , 몹쓸 인간 고너릴, / 당신은 그 얼굴을 때리는 무례한 바람 속의 / 먼지만도 못하오. 그 성질이 두렵소. (42, P.125)

 

(올바니) 글로스터, / 국왕에게 보여준 충정에 감사하고 / 눈에 대한 복수는 꼭 하리다. (42, P.128-129)

 

콘월은 리간과 함께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데 일조하는 인물이다. 리어 왕의 사자인 켄트를 죄 주면서 그는 이미 리어 왕의 권위를 거부한다. 무엇보다 그의 오만하고 잔인한 면모는 자신을 배반한 글로스터 백작의 두 눈알을 뽑는 잔인한 처벌 장면에서 드러난다. 그의 이러한 잔인함은 결국 자신을 향한 부메랑이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된다.

 

(콘월) 그건 절대 못 볼 거다. 이봐, 의자를 꽉 잡아. / 네 눈알을 내 발로 짓밟아 주겠다.

(글로스터) 늙어 죽을 때까지 살고 싶은 사람은 / 날 살려주시오!-, 잔인하다! , 신들이여!

(리간) 한쪽이 다른 쪽을 비웃을 테니까!-저쪽도. (37, P.117)

 

(콘월) 못 보게 할 테다. 빠져라 눈깔아. / 이제 네 밝은 빛은 어딨느냐? (37, P.118)

 

이제 주인공인 리어 왕에 집중하자. 리어 왕의 잘못은 오로지 두 딸을 믿었고 일순간의 화에 사로잡혀 막내딸을 추방한 데 있다. 그의 화는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수 있고 잘못을 깨닫고 뉘우칠 가능성도 있다. 그의 잘못이 최악의 보답을 받을 정도로 크고 도저히 회복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간언에 속아 넘어간 글로스터 백작도 마찬가지다. 자칫 찻잔 속의 태풍마냥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는 조그만 잘못이지만 셰익스피어는 간단하게 다루지 않는다. 카오스 이론의 나비 효과와도 같이 미처 추론하거나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로 상황을 확장한다.

 

셰익스피어가 여기서 가장 공들이고 독자들이 가장 인상 깊게 받아들이는 대목은 미친 리어 왕의 모습에서다. 분노와 절망에 사로잡혀 광기에 휩싸인 채 광야를 방황하며 울부짖는 리어에게서 우리는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어리석음과 나약함과 고독함과 맹목적일 정도로 집요한 의지를 단숨에 엿볼 수 있다. 우리가 떠올리는 리어 왕은 바로 이 장면이다.

 

(리어) 하늘은 저에게 인내를 주소서, 인내가 필요하오! / 신들이여, 이 불쌍한 노인이 보이지요. / 나이만큼 근심에 찬, 둘 다 많아 비참한. / 아비에게 반항토록 이 딸들을 선동한 게 / 당신들이라면 저 또한 바보처럼 순하게 / 참지 않게 하소서. 고귀한 분노 내려 / 이 남자의 두 뺨을 여자들 무기인 눈물로 / 더럽히지 마소서. 그래, 이 무정한 마녀들아, / 내 너희 둘에게 철저히 복수하여 온 세상이- / 난 할 테다.- 뭘 한진 모르지만 그것은 / 지상의 공포가 되리라! 너흰 내가 울 것 같지? / 아냐, 난 안 울어. (폭풍우 소리) / 울 이유는 충분하나 울기 전에 이 심장이 /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질 것이다. / , 바보야, 난 이제 미치련다. (24, P.87)

 

(리어) 바람아 불어라, 뺨 터지게! 사납게 불어라! / 하늘과 바다의 폭풍우야, 첨탑들이 잠기고 / 풍향계가 다 빠질 때까지 내뿜어라! / 참나무 쪼개는 벼락의 선구자, / 생각보다 더 빠른 유황색 번갯불아, / 내 흰머리 태워라! 만물을 뒤흔드는 천둥아, / 둥글게 꽉 찬 세상 납작하게 깨부숴라! / 조물주의 틀을 깨고 배은의 인간 빚는 / 모든 씨앗 한꺼번에 엎질러라! (32, P.91-92)

 

비틀거릴지언정 결코 무너지지 않던 그가 끝내 무너지는 대목은 마지막으로 믿었고 사랑과 후회로 뒤섞인 채 다시 보기를 염원해 마지않았던 코딜리아의 죽음에 이르러서다. 그로서는 더 이상 버틸 기력도 의미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리어 왕과 글로스터 백작의 얘기는 죄악의 유혹에 흔들리기 쉬운 인간 본성의 취약함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라고 할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그의 주요 비극작품들에서 한결같이 다루는 제재와 마찬가지로. 그는 <오셀로><맥베스> 등에서보다 한층 큰 스케일로 감정의 진폭을 극단으로 확장한다. 너무나 미미하여 간과될 수 있는 존재도 현미경으로 확대하여 보여주었을 때 실체를 생생하게 알아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별것 아닌 것 같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조차도 걷잡을 수 없는 파국적 결과를 낳을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연약한 이성의 토대 위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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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반할 지도 - 박물관 큐레이터가 들려주는 신비로운 고지도 이야기, 2021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알고 보면 반할 시리즈
정대영 지음 / 태학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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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박물관 큐레이터가 들려주는 신비로운 고지도 이야기

 

어릴 적부터 지도를 좋아했다. 메르카토르 도법의 세계지도가 집에 있었는데, 전지에 그대로 베낀 기억도 있다. 요즘도 책이나 미디어에서 특정 도시나 지역이 소개되면 네이버 지도나 구글맵으로 찾아보곤 한다.

 

우리나라의 옛 지도하면 상식적으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떠올린다. 나 역시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기껏해야 국사 시간에 배운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 정도 추가될 뿐이다. 이 책을 보면서 뜻밖에 옛 지도가 많이 남아있음에 우선 놀라고, 옛 지도가 매우 다채로움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세계지도, 전국지도, 그리고 지역지도 등. 휴대용 지도인 <수진일용방>와 특수목적 지도인 <삼남해방도><강화도이북해역도> 등도 있다.

 

오늘날 지도는 정확성과 사실성이 제일의 미덕으로 간주된다. 그런 점에서 옛 지도는 일부를 제외하면 아쉬움을 남긴다. 물론 오늘날과 옛날은 지도의 필요성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다. 조선 시대만 해도 대다수 서민은 태어난 고장을 벗어날 일이 별로 없었다. 즉 지도의 수요가 미약하였고 일부에만 국한되었다는 점이다. 지도가 크게 발달할 동기가 부족하였다. 그럼에도 이미 서양의 과학적 지도가 유입되었으나 이를 수용하지 못하고 천하도, 천하고금대총편람도, 대청일통천하전도 등을 고집하였음은 주목할 만하다. 현실보다 관념에 치우친 편협한 사고와 인식으로 왜곡되고 퇴행한 지도를 낳게 한 낙후된 시대정신은 조선과 중국이 똑같이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옛 지도는 저자의 설명과 같이 현실적인 지도와 회화적 지도로 나눌 수 있다. <대동여지도> 등과 같이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고 사실성에 주력한 지도를 오늘날의 시각에서 들여다보고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으나 아무래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회화식 지도가 자체로서 더욱 흥미롭다. 이는 지도인 동시에 한 편의 그림이니 기능성과 아울러 예술성을 찾아볼 수 있어서다. 오늘날 지자체에서 발간하는 관광지도 중에는 주요 포인트를 입체적으로 구현하면서 시각적 요소를 강조하는 사례가 있는데 회화식 지도는 이와 유사하다. 소개된 <완산부지도>와 여러 지방지도가 여기에 속한다.

 

과거의 아름다운 옛 지도를 무조건 찬미할 수는 없다고 본다. 미적 요소에 대한 높은 평가는 후세의 관점일 따름이다. 정확하고 사실적인 지도의 기본 요소를 충족시킨 가운데 심미성을 부가하였다면 예술성이 한층 돋보였겠지만 이를 결여한 아름다움은 당대의 기술과 지식의 역부족을 드러내는 모래성에 불과하다. 여기에 옛 지도의 허실이 있다. 그럼에도 회화적 지도는 현대의 기능적이며 과학적인 지도의 한계를 극복하고 대중의 관심을 유인할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 안에는 상상과 사람이 동시에 반영되어 있으므로.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에 관련한 역사적 왜곡은 단지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려운 것이 어쨌든 그것이 통설로 받아들여진 바탕에는 지도를 바라보는 옛사람들의 긍정과 부정의 인식이 병존한다는 의미이리라. 그런 열악한 시대적 배경에서도 지도 제작에 헌신한 선인들의 존재를 알게 되는 무척 뜻깊고 흥미롭다.

 

[정상기]의 지도는 조선 후기에 폭넓게 유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신경준, 정철조, 황윤석 등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지도를 고쳐 나갔으며, 정상기의 아들과 손자, 증손자 역시 끊임없이 수정을 했다. 그야말로 지도 제작의 르네상스가 펼쳐진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김정호가 있었다. (P.86)

 

저자는 이중 정철조와 황윤석의 교류를 특별히 소개한다. 그리고 하백원이란 인물도. 남쪽 시골에서 나 홀로 세계지도와 조선 전도를 그려 낸 그의 노력은 단지 호사가의 것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사서삼경과 시문을 달달 외우고 써 내려가는 것이 최고의 미덕으로 인정받던 시절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하게 초심을 유지하고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던 그들에 대한 저자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은 한없다.

 

누구에게 감사받을 생각 없이 나의 길을 가겠다는 말. 수많은 고지도 제작자들도 그러했으리라......그들이 당대에 부귀영화와 인정을 원했다면 이런 일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들의 헤아릴 길 없는 마음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P.182)

 

옛 지도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져야 마땅하다. 우리 역사, 특히 고대사를 보면 지도와 지리에 대한 인식 부족의 경우를 가끔 접하게 된다. 과거의 지리와 지금의 그것이 동일하다는 무언의 가정이 발견된다. 과거의 평양이 지금의 평양인지, 지금의 강릉이 옛날에도 여전히 동해안의 지역인지는 엄정한 지리 고증을 통해 분명하게 해야 한다. 저자의 말대로 깊이 있는 역사 연구와 이해를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연구부터 느리지만 꼼꼼히 선행되어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그 첫 발걸음은 행정구역을 모두 표시한 정밀한 역사 지도의 완성이라 생각한다(P.160).”는 의견에 동의한다.

 

이 책은 옛 지도에 대한 대중의 무지를 일깨우고 다양한 옛 지도를 알리는 데 목적을 두었다. 소개된 지도가 좀만 더 크고 지도의 내용 자체에 대한 설명이 좀만 더 상세하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후속 저작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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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대왕 사계절 1318 문고 7
크리스티네 뇌스트링거 지음, 유혜자 옮김 / 사계절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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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에 원작이 발표되고, 1997년에 번역본이 출간된 이 작품이 청소년 문학 시장에서 상당한 인기를 모은 까닭은 무엇보다 시대적 상황으로 파악할 수 있다. 민주화 투쟁 이후 독재체제가 서서히 무너지고 자유언론이 가능해진 때 이 소설이 지향하는 독재주의 청산 및 소통의 강조는 당시 시대적 요구에 정확히 부합하였다.

 

이 책에서 독재자는 누구인가? 볼프강네 가족에서는 아빠이며, 쿠미-오리 사회에서는 오이대왕이다. 독재자의 공통적 속성은 자신이 절대적으로 올바르며 나머지 구성원은 무지하다는 인식이다. 따라서 자신의 말에 거역하는 걸 견뎌내지 못하며 타인에 대한 인격적 존중을 하지 않는다.

 

우리들 가운데 아빠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리들 스스로도 몹시 놀랐고 아빠는 우리보다 더 경악했다. 아빠가 다시 한 번 위협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소용 없었다. (P.37)

 

볼프강네 가족을 먼저 보자.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으로 여겨졌으나 오이대왕이 등장하면서 내재한 모순과 균열이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볼프강네 가족은 매사에 아빠의 승인과 허락이 있어야 수영장, 극장, 친구 집에 놀러 가는 게 가능하다. 아빠가 원하는 것만 먹거나 입고 TV를 볼 수 있고 하물며 허락해야만 웃는다. 아무리 어머니가 정상적인 가족이라고 주장해 봤자 할아버지의 의견대로 비정상적인 가정임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다. 작품 내에서 아빠가 마르티나의 과외 건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명령하는 사례가 전형적인 경우로 예시된다.

 

쿠미-오리들이 대왕이 없으면 왜 아무것도 할 수 없지?”

할아버지가 말했다.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말해 줄 이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지.” (P.25)

 

오이대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이대왕은 자기의 존재가 없다면 쿠미-오리 사회의 만사가 엉망이 될 거라는 확신을 품고 있다. 볼프강이 쿠미-오리들을 만나면서 그의 독재자로서의 그의 실체가 드러나며, 볼프강 아빠의 도움을 받아 쿠미-오리사회를 물바다로 만들려는 복수 계획에서 오이대왕의 잔인성을 발견할 수 있다.

 

오이대왕과 볼프강의 아빠는 모두 독재자로서 공통분모를 지니므로 양자가 소위 죽이 잘 맞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볼프강의 아빠가 오이대왕에게 동정심을 품는 건 그에게서 자신의 일부를 보았기 때문이었으리라. 볼프강네 가족들이 오이대왕과 아빠를 유사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에게는 오이대왕과 아버지의 차이가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았다. 어머니도 우리와 거의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P.81)

 

볼프강네 가족에게서 벌어진 해괴한 사건과 함께 이 작품의 다른 한 축을 형성하는 것이 볼프강과 하슬링거 선생님과의 갈등이다. 볼프강은 하슬링거 선생님이 유독 자신에게 매정하고 각박하게 구는 게 그를 놀려댔던 과거사의 잔상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자칫 악화일로를 향해 가지만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의외의 결과로 귀결된다. 하슬링거 선생님의 교육적 지도에 대한 오해가 양자 간의 우연한 소통으로 비로소 풀렸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내가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고 있잖아! 내가 누구인지도 알아보지 못했어. 하슬링거 선생님은 내게 교사로서의 당연한 노여움만 느끼고 계셨던 거야.’ (P.158)

 

볼프강네 가족에 닥친 오이대왕 사건의 경우도 갈등이 봉합되고 해결되는 외양을 띤다. 아빠는 자신이 오이대왕에게 속았음을 알게 되고, 오이대왕은 유모차에 실려 집에서 내쫓김을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하지만 이것이 만족스러운 해법이 아님을 독자는 본능적으로 느낀다.

 

오이대왕이 등장하여 가족의 화합이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 아니다. 가족의 위기는 그 이전에 내재하고 있었으며 오이대왕이 표출의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오이대왕은 퇴출당하였지만 아빠의 전제적 성향이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다. 오이대왕 사건으로 아빠의 권위는 많이 실추되었고 가족들의 자유를 요구하는 성향이 강화되었음은 사실이다. 볼프강네 가족의 위기는 아빠와 나머지 구성원 간 사고와 소통의 단절에서 비롯되었다.

 

누나는 그 모든 것이 어린아이도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고 독립적인 하나의 인격체라는 것을 아버지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했다. 아버지가 그런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P.101)

 

아빠가 자신의 독선적 성향을 극복하고 구성원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민주적 방식으로 가정을 꾸려나가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가족의 위기는 상존할 것이며 제2, 3의 오이대왕이 볼프강네 집안에 들어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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