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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범을 사랑한 군인 - 역사에 남을 위대한 야생 동물들 ㅣ 시튼의 동물 이야기 9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이한중 옮김 / 궁리 / 2016년 2월
평점 :
부제 : 역사에 남을 위대한 야생 동물들
궁리에서 발간한 시튼 동물기 시리즈의 가장 마지막 편인 동시에 작가로서도 최 말년의 작품에 해당한다. 수년 후에 그의 자서전이 출간되었으니. 부제에 걸맞은 이야기는 <식인 늑대 라베트>와 <프랑스 늑대 왕 쿠르토> 정도로 봐야 하리라. 이걸 포함해서 절반 정도의 이야기가 늑대를 다루고 있는데, 작가는 서문에 “늑대에 대한 나의 연민과 관심이 그만큼 컸기 때문”(P.9)이라고 밝힌다.
<식인 늑대 라베트>와 <프랑스 늑대 왕 쿠르토>는 인간 세계를 압도하는 최고 포식자로서의 늑대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둘 다 거대한 크기, 사냥꾼을 따돌리는 명석한 두뇌, 그리고 사람고기에 대한 집착으로 역사적 명성을 남겼다. 인간은 거대한 포식자에 열광하는 습성이 있다. 공룡에 대한 애정은 비단 아이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라베트와 쿠르토의 삶과 영광, 그리고 죽음을 서술하는 작가의 필치에는 흡사 영웅의 생애를 다루는 것과 동일한 찬사와 탄식이 함께 배어 있다.
거대한 늑대는 그렇게 쓰러졌다. 끝까지 싸우다 숨을 거둔 것이다. 무쇠 창을 물어뜯으며 저항하면서 당당하게 죽어 갔다.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시체더미 위에 쓰러진 것이다. 그렇다! 이제는 죽었다. 그렇지만 승자는 그였다. 라베트는 그렇게 죽었다. (P.302)
라베트가 식인 늑대로 악명을 떨쳤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 개체로서 그러할 뿐이었다. 쿠르토는 스케일이 남다르다. 늑대 무리를 이끌고 파리시를 장기간 포위할 지경이었다고 하니 글을 보면서도 이게 과연 실제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쿠르토가 활약하던 때는 잔 다르크와 동시대라고 하니 시대적 배경을 보면 그러할 수도 있겠다 싶다. 세상과 자연이 모두 어지러우면 자고로 역사상에 언제나 비상식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법.
온 땅에 무정부 상태와 기근과 질병이 난무했다. 소작농들은 힘없이 죽어 나갔고 비옥한 농지들 황폐해지기 시작했다.
시절 탓인지 늑대들은 무리 지어 탐욕스러운 약탈을 일삼았다. (P.306)
그해 프랑스는 학살의 해였다. 외국의 적들과 도적 떼들이 쓸 만한 땅은 모조리 황폐화시키자고 작정이라도 한 듯했다. (P.318)
이 이야기의 흥미로운 대목은 ‘루브르’의 어원을 알게 되었으며, 수비대장의 고귀한 희생을 잔 다르크의 그것과 동일시한 점이다.
그밖에 <아일랜드 늑대의 최후>, <하얀 늑대와 용감한 아들>과 <늑대의 법>은 늑대와 인간의 대결 과정에서 드러나는 늑대의 고귀성과 불굴성, 그리고 인간과 늑대의 교감 등을 두루 다루고 있다. <소녀와 늑대>는 인간을 두려워하는 법을 학습한 현대의 늑대를, <러닝보드의 늑대>는 길들여진 늑대를, <린컨과 밤의 부름>은 야성을 상실하고 가축화된 개에게 남겨진 태곳적의 끈질긴 야성의 편린을 알게 해 준다.
시튼이 많은 늑대 이야기를 전한 까닭은 늑대에 대한 애정과 아울러 늑대가 유럽과 미국에 그토록 맹위를 떨쳤던 사실을 반영하였기 때문이다. 두뇌와 야수성을 갖추었고 무엇보다 집단 사냥을 즐겨한 그들에게 대항할 맹수가 없었기에 아마도 인간의 개입이 없었다면 늑대는 여전히 최고의 지위를 누렸을 것이다.
인간에게 최고의 친구 동물은 누가 뭐래도 개다. 이 책에서도 <전달병 캐럿>과 <행크와 제프>를 통해 인간과 진실한 유대와 공감을 주고받는 개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개의 도움을 얻어 목숨을 구한 인간의 숫자가 얼마나 많으며, 단지 가축이 아닌 영혼의 동반자에 가까울 정도로 교감을 나누는 사람과 개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서로 떨어져 살아갈 수 없는 행크와 제크의 슬픔에 동감하게 된다.
“행크는...내...개였어요. 그러지...말았어야 했는데. 나를 용서한 것처럼...나도 용서를 했어야 하는데. 행크는 내 개였어요. 내...내 개였어요.” (P.264)
그럼에도 시튼은 야생 동물의 가축화에 부정적 입장을 취한다. 야생 동물의 순수성과 도덕성을 잃는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가 방울뱀과 혈투를 벌이는 쥐(<쥐와 방울뱀의 혈투>)를 옹호하는 건 쥐를 좋아해서가 아니다. 그의 불굴의 용기에 감탄해서다. 경탄 어린 어조로 묘사하는 사막의 요정 캥거루쥐(<사막의 요정>)를 잡아 가두려는 시도가 부질없음을 깨달아서다. 자연을 자연 그대로 놓아둘 때 치커리(<붉은 다람쥐의 모험>)의 야생의 모험담이 의미 있으며, 작가가 환상적으로 그려 내는 숲의 밤(<숲 속의 밤>)의 두려움과 정취가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겠는가? 린컨과 마찬가지로 가축이 된 황소(<칠링햄의 야생 들소>)조차도 내재한 야성의 본능을 결코 상실하지 않음을 보자.
표제작 <표범을 사랑한 군인>에서 군인뿐만 아니라 독자는 표범과 군인의 옛 연인을 동일시하게 된다. 아름다움과 표독함, 사랑과 독점욕이 한데 어우러진 치명적인 사랑. 실현되지도 완성할 수도 없는 비극적 운명이 예고된 표범과의 사랑은 팜므 파탈을 연상시킨다. 사랑과 고통이 공존하는 사랑은 오래갈 수 없다. 군인과 옛 연인의 이별이 비극으로 끝났듯이 그가 표범에게서 헤어날 길은 유일할 길만이 남아 있을 따름.
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여전히 그녀에게서 벗어날 기회를 간절히 엿보고 있었지만 고통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에게나 나에게나 그것은 끔찍한 고통이리라는 것을, 죽도록 슬픈 고통이 따를 것이라는 생각이 언제나 나를 사로잡았다. (P.355)
인간과의 우정과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동물과 얄팍한 이익을 위해 자식을 무자비하게 희생시키는 부모. 인간과 다름없는 사랑을 바친 암표범. 자식에 대한 무한한 기쁨과 헌신을 아낌없이 바치는 엄마 곰(<엄마 곰의 기쁨>)의 모성은 인간 여성이 갖는 감정과 무엇이 다른가?
시튼은 말미에 이렇게 묻는다, 어느 쪽이 짐승이냐고. 우리가 시튼의 동물 이야기에 매료되는 것은 표피적 흥미 이상의 것이 담겨 있어서다. 미처 알지 못했던 종이 아닌 개체로서의 동물의 모습을 비로소 알게 되고 그것이 인간과 마찬가지임을 깨닫게 해 주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