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서의 베토벤 - 퓰리처상 수상 작가가 바라본 베토벤의 삶과 음악
에드먼드 모리스 지음, 이석호 옮김 / 프시케의숲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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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은 바흐와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 작곡가다. 오래전부터 그의 주요 작품들을 다양한 연주로 반복하여 감상하지만, 그때마다 새록새록 듣는 재미를 안겨준다. 확실히 음악가로서의 그의 역량은 대단하여 괜히 최고의 음악가로 평가받는 게 아니다.

 

로맹 롤랑의 전기로 그의 삶을 대강 훑어보았지만 미진한 느낌이 드는 건 20세기 초에 쓴 글이다 보니 현대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어서다. 메이너드 솔로몬 또는 얀 카이에르스의 두툼한 본격적 평전은 쉽사리 도전하기 부담스러워 적당한 책을 찾은 게 모리스의 전기다. 저자는 전문적인 전기 작가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바 있다고 하니 작가로서의 기본 역량은 인정받은 셈이다. 책 뒤표지의 보통의 독자를 위한 이상적인 베토벤 평전이라는 광고 문구는 이 책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저자는 베토벤이 위대한 예술가인 건 맞지만 위대한 인간은 아님을 여러 자료를 인용하여 보여준다. 번역자도 이 점을 강조하고 싶었는지 원제에 없는 인간으로서의라는 문구를 표제에 추가하였다. 베토벤의 인간으로서의 면모와 음악 해석은 기존에 그의 비서였던 쉰들러가 남긴 글과 자료에 많이 의지하였다. 쉰들러가 사실은 베토벤의 삶을 조작했음이 연구 결과로 밝혀진 게 1970년대였다고 하니, 우리가 아는 베토벤의 모습은 실상과는 거리가 멀었던 셈이다. 음악의 성인으로서 또는 영웅으로서 베토벤을 신성시하는 견해는 오히려 베토벤의 참모습을 이해하는 데 적합하지 않으므로 저자는 베토벤을 성인화하는데 반대하며 쉰들러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성인전 작가라는 단어까지 사용한 마당에 이쯤 해서 안톤 펠릭스 쉰들러를 소개해야 하지 싶다. 쉰들러는 다른 물고기에 붙어 그 피를 빨아먹는 칠성장어처럼 어떻게든 위대한 사람들 가까이에 붙으려 하는 특색 없는 젊은이 가운데 하나였다. (P.304)

 

이 책은 베토벤의 치부까지도 가감 없이 독자에게 드러낸다. 인간 베토벤은 약점이 많은 인물이다. 육체적으로 잘 알려진 난청 외에 근시였고, 각종 질병에 일생토록 시달렸다. 그의 연인들과는 플라토닉한 사랑만 거듭한 채 결실을 이루지 못하고 정욕을 달래기 위해 사창가를 들락거렸다. 후반부에서 상세한 경과를 밝히고 있는 조카의 양육권을 둘러싼 제수씨와의 법정 소송은 치졸함과 추잡함의 극단을 보여준다. 그의 행동과 글을 보면 과연 그가 정신적으로 온전할까 의구심이 들 정도다. <장엄미사> 악보출판을 두고 벌이는 출판업자 간 다중 계약의 음모 또한 제아무리 생활고에 항상 시달린 베토벤이라고 하더라도 금전적으로 타락하였음을 변호하기 힘들 정도다.

 

1813년부터 1820년 사이에 베토벤이 겪었던 개인사에서처럼 병치레와 돈 거래, 가족 간의 알력 다툼, 개인적 기벽 등이 온갖 하나로 범벅이 되는 걸 보고 나면, 당시 그가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과연 정신을 꽉 붙들고 있었을지도 우리로서는 확신할 수 없다. (P.243)

 

그럼에도 우리는 베토벤을 비난하기보다는 그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음악가에 치명적인 난치병을 앓는 것도, 사랑하는 여인과의 행복한 삶 대신 외로움과 쓸쓸함 속에서 삶을 살아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므로. 오죽했으면 유서를 남겼고, 연인에게 보내고 싶은 편지는 부치지 못한 채 서랍 속에 묻었어야 했겠는가. 저자는 불멸의 연인의 정체에 관해 앞선 연구의 내용을 반영하여 소개하고 있으며, 못다 보낸 편지의 내용도 인용한다. 애절한 그의 심경이 참으로 안타깝고 저절로 동정심을 품게 한다.

 

누구도 베토벤의 육체적·정신적 괴로움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이는 없었다. 남들 몰래 써서 감추어두었다가 그가 죽고 나서야 발견된 두 점의 유명한 문서가 이를 뚜렷이 보여준다. 1802년의 하일리겐슈타트 유서1812년의 불멸의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그것이다. (P.15-16)

 

이 책은 한 유명한 예술가의 사생활을 파헤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 저자는 인간적 약점을 지닌 한 천재 예술가가 시련을 극복하고 시대 정신을 선도하며 예술사에 불멸의 명성을 남기게 되기까지의 여정을 차근차근 짚어나간다. 베토벤의 예술을 향한 저자의 찬미와 탄복은 한결같고 진정이다. 그는 개인적 위기와 사회적 혼란에도 굴하지 않고 그것을 음악으로 통합하고 승화하여 더욱 높은 예술의 지향점을 아로새겼다.

 

대조와 갈등은 베토벤 예술의 본질적 특성이다. 베토벤은 평생에 걸쳐 막대한 역경에 맞서 싸웠고 엄청난 용기를 발휘하여 끝내 이를 이겨냈다. (P.15)

 

베토벤 음악의 거대성이 가지는 역설은 그것을 시간이나 데시벨로 측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에 있다. [......] 한 마디로 베토벤은 현미경과 망원경을 넘나드는 공간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며, 소리의 세포를 빚어내는 솜씨와 소리의 대성당을 지어 올리는 솜씨가 나란히 확고했던 것이다. (P.20)

 

저자는 몇몇 작품에 대해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두고 소개 및 분석한다. <요제프 2세 장송 칸타타>는 처음 알게 된 작품인데 무려 6면에 걸쳐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어 이채롭다. 오페라 <피델리오>는 잇단 참패와 더불어 이를 극복한 마지막 성공까지를 기술하면서 음악의 순수성을 높이 평가한다. <장엄미사><교향곡 제9>의 성공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작곡과 관련한 보다 세부적인 사실을 알 수 있어 작품 이해에 도움을 준다.

 

우리는 왜 베토벤의 음악을 좋아하는가?

 

베토벤의 음악은 모차르트풍의 음악과는 달랐고 언제나 다정하고 즐겁지만도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거기에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는 사실이다. (P.102)

 

그의 음악 역시 듣는 이를 뜻대로 주무르려는 측면이 강하다. 언제나 서로 대조되는 주제나 화음 덩어리를 강제로 하나로 묶고, 억지로 떼어놓고, 다시 쪼개어 더욱 혼란하게 만들고, 그러고는 다시는 서로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으로 하나로 혼융시키는 음악인 것이다. (P.309)

 

베토벤의 음악이 하이든과 모차르트와 다른 점은 개개의 악곡마다 독자적인 개성이 분명하며 작품에 자신의 의지가 강력히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듣는 이는 누구라도 그의 음악을 들으면 잘 모르는 곡이더라도 아! 이건 베토벤 음악 같은데 하는 느낌을 갖는 게 이런 연유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넘치는 영감에서 샘솟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멜로디가 시종일관 음악 전체에 흘러넘친다.

 

베토벤의 음악은 모차르트만큼 항상 영감이 넘치고 풍요롭지는 않지만, 음악적 영감에 이성적 논리구조를 자연스럽게 결합하고 확장 및 발전시켜 청자로 하여금 음악을 듣는 와중에 사고와 의지를 끊임없이 인식하게끔 하는데 이게 강한 설득력을 발휘한다. 더욱이 중기의 음악이 구상화라면 후기의 그것은 추상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그의 음악은 한자리에 계속 머무르는 게 아니라 계속 변화 발전한다.

 

난청에다 지독한 근시였던 베토벤은 자신의 닫힌 감각 기관들에 대해 불평하곤 했지만, 그의 음악의 음향은 그가 침묵의 저편에서의 삶에 적응한 이후로 오히려 더욱 풍성해진 것이 사실이다. (P.295)

 

베토벤 개인의 삶에 있어 청력 상실은 불행이지만, 그의 음악 세계와 후세 인류에게 그것은 아마 축복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그가 보통의 음악가였다면 거친 역경에 맞서기보다 좌절하고 쓰러졌겠지만, 그는 맞서 싸우고 극복해낼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베토벤은 외면의 소리를 잃는 대신 내면의 소리를 얻었다. 구체성이 약해지는 가운데 추상성과 초월성이 뚜렷이 나타나게 되었다. 음에만 집중하였던 것이 음은 물론, 음과 음 사이에 대한 중요성이 인식되었다. 이런 위업을 성취한 음악가는 베토벤 이전에는 없었고, 이후에도 아직 없다. 그가 악성(樂聖)’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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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소동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종환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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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Much ado about nothing’이다. 대부분 이 책과 같이 헛소동이라는 표제로 번역하는데, 이상섭 번역본과 같이 괜히 소란 떨었네로 풀어서 번역하는 사례도 있다. 장소도 스페인 아라곤 왕국의 지배를 받는 시칠리아로 설정하고 있어서 셰익스피어 초기 작품의 일반적인 배경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등장인물 중 영주와 동생인 돈 페드로와 돈 존의 존재가 이를 보여 준다. 다만 주요 인물인 클라우디오와 베데딕은 이탈리아 본토 출신 귀족이며, 히어로와 베아트리체는 시칠리아 총독의 딸과 조카딸이므로 대체로 이탈리아는 조건에는 부합한다.

 

헛소동의 주인공은 클라우디오와 히어로다. 히어로를 향한 클라우디오의 일관되지 못한 사랑이 헛소동을 불러온다. 그런데 가만히 극의 내용을 살펴보면 실제 주인공은 베네딕과 베아트리체임을 알 수 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우선 두 사람의 대사가 월등히 분량 면에서 많다는 점, 클라우디오와 히어로의 극 중 행동이 매우 단편적이며 소극적인 반면 베네딕과 베아트리체는 극을 온통 휩쓸고 다닐 정도로 재기발랄하며 행동과 대사의 진폭이 크다는 점이다.

 

클라우디오는 히어로를 사랑함에도 구혼을 고백할 용기가 없어서 돈 페드로의 도움을 빌린다. 여기서 일차적인 오해의 빌미가 생긴다. 돈 존의 속임수에 빠진 클라우디오는 히어로의 정절을 섣불리 의심하며 성급하게 히어로에게 모욕을 가한다. 결정적인 오해의 순간이다.

 

(클라우디오) 어르신, 따님을 돌려드리겠습니다. / 이런 썩은 오렌지를 친구에게 주시다니요? / 그녀의 정절은 겉치레일 뿐입니다. (P.124-125, 4막 제1)

 

야경꾼들이 돈 존의 하수인을 체포하지 않았다면 그는 영원히 히어로를 원망한 채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클라우디오는 단순하고 순진한 성격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본인의 잘못으로 연인이 죽게 되었음을 자책하며 그녀를 향한 길고도 애절한 추도를 바치는 그의 모습에서 성실성이 잘 드러난다. 한편 히어로는 여주인공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극 중 비중이 약하다. 순결하고 지조 높은 점은 인정하겠지만. 두 사람의 재결합을 위한 수사의 역할이 <로미오와 줄리엣>과 비슷한 점이 흥미롭다. 물론 이 작품은 희극이므로 수사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지만.

 

(베아트리체) 누구냐고? 전하의 어릿광대랍니다. / 멍청한 바보 녀석이죠. 황당한 중상 비방이나 / 늘어놓는 놈이랍니다. 건달이면 모를까, / 아무도 그 광대 말에 즐거워하지 않아요. (P.44-45, 2막 제1)

 

(베네딕) 절대로 그런 여자와 결혼하지 않을 겁니다. / 그녀는 욕설을 퍼부어 헤라클레스조차도 / 고기 굽는 꼬챙이나 돌리게 만들 여자랍니다. / 헤라클레스의 곤봉을 쪼개서 / 불쏘시개로 쓸 그런 고약한 여자랍니다. (P.52, 2막 제1)

 

이 작품의 희극적 재미는 단연 베네딕과 베아트리체다. 상대방에게 한 치의 양보도 무릅쓰지 않기 위해 재치가 철철 넘치는 언어 공격을 주고받는 그들의 대사는 독자 입장에서도 지나치게 과격한 게 아닐까 우려가 될 정도다. 각자가 비혼 선언을 한 그들이지만 너무나 잘 어울려 보이기에 돈 페드로를 주도로 두 사람의 결혼 프로젝트가 가동된다. 제아무리 똑똑한 그들이라도 사랑의 사안에는 경험 부족이 드러난다. 특히 베아트리체의 돌연한 변심은 너무나 급작스러워 독자로서는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인상을 받는다.

 

(베아트리체) 내가 그렇게까지 거만하고 / 조롱을 일삼는 여자라고 비난받고 있나? / 그럼 이제 멸시하는 마음과는 이별이다! / 처녀의 자존심도 이별이다! 뒤에서 / 그런 비난을 듣는 한, 멋지게 살 수 없으니까. / 베네딕, 절 사랑해 주세요. 그럼 / 저도 당신을 사랑하겠어요. 사랑하는 / 당신 손으로 제 거친 마음을 길들여 주세요. / 당신이 사랑하면 저도 순순히 따르겠어요. (P.89-90, 3막 제1)

 

두 사람의 티격태격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부부의 연을 맺기로 결정하고 난 이후에도 여전하다. 상대방이 먼저 사랑의 마음을 품게 되었음을 인정하라고 말이다. 끝까지 독자에게 재미를 안겨주는 커플이다.

 

(베네딕) , 당신을 내 아내로 삼겠소. / 하지만 이 빛에 두고 맹세하지만, / 당신이 불쌍해서 아내로 삼는 거요.

(베아트리체) 거절하진 않겠어요. 하지만 / 오늘처럼 좋은 날에 걸고 맹세하지만 / 설득에 마지못해 당신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 버린 목숨 하나 구하는 셈치고... / 상사병으로 거의 죽을 지경이라고 들었으니까. (P.188, 5막 제4)

 

베네딕과 베아트리체가 고상한 귀족으로서 희극에 이바지한다면, 도그베리와 베르게스 및 야경꾼들은 평민 계층으로서 대놓고 희극적 대사를 뿜어낸다. 그들이 등장하는 장면(3막 제3, 3막 제5, 4막 제2, 5막 제1)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단어 오용(정반대의 단어 사용)과 자기 비하는 서민적이며 털털한 해학적 재미를 전해준다. 참으로 이 희극에서 관객이 체면 차리지 않고 마음껏 낄낄거릴 수 있는 유일한 대목이다.

 

(도그베리) 넌 경관이란 내 직분을 의심하느냐? / 너보다 나이 많은 나를 의심하지 않느냐? / 서기 양반이 여기 있으면 / 날 바보라고 기록하게 했을 텐데... / 여보게, 기록되진 않았지만 / 내가 바보라는 걸 기억해. / 내가 바보라는 걸 잊지 마, 악당 놈아, / 넌 아주 경건한 놈이다. / 그 증거가 차고 넘쳐. 난 아주 현명한 사람이다. (P.147, 4막 제2)

 

마지막으로 돈 존과 수하인 보라키오를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희극에만 존재하는 어리숙한 악당이다. 말로는 어떤 짓도 저지를 전형적 악한을 흉내 내지만 돈 존은 상황이 전개되자 잽싸게 도망치려다 의심을 유발하고 붙잡히며, 보라키오는 쓸데없이 자신의 악행을 늘어놓다가 역시 야경꾼에게 체포된다. 후기의 비극에 등장하는 용의주도하고 철저한 악인과 비교해본다면 이들의 미숙함과 한계를 쉽사리 파악할 수 있다.

 

종합하자면 이 작품은 클라우디오와 히어로의 오해와 착각이 빚어내는 소란보다는 베네딕과 베아트리체의 귀족적 재치, 도그베리와 야경꾼들의 서민적 해학이 빚어내는 희극적 묘미가 두드러지는 희극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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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아이들 - 히로세 다카시 평화소설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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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순전히 문학적 관점으로 헤아린다면 매우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할 수 있다. 작가의 목적은 반핵평화라는 자신의 주장을 많은 이들에게 전파하기 위한 것이며, 소설이라는 형식을 사용한 것은 많은 이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동일한 주장을 딱딱한 논설문이나 선전문 형태로 작성한다면 대중의 관심을 끌기는 어려울 테니.

 

나는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통해 핵발전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떤 비극 속으로 빠뜨려 가는가를 절실히 알리고 싶었다. (P.175)

 

원자력발전의 필요성과 관련해서는 찬반양론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고, 이는 정치적 이해득실과도 연계되어 있기에 문외한은 깊숙한 내막을 자세히 알기 어렵다. 이 책은 원자력발전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쓰인 글이므로 작가는 당연히 부정적 내용으로 기술한다. 저자 후기에서 작가는 이렇게 주장한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란 것도 알고 보면 원자·수소폭탄 산업을 경제적으로 성립시키려는 상당히 무리한 방법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P.173)

 

1986년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사고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의 발전소 간부인 안드레이 가족을 중심으로 방사선 피폭의 무섭고도 잔인한 효과를 그리고 있다. 지금이야 여러 통로로 피폭의 위험성이 대중에게 많이 알려졌지만 체르노빌 당시 또는 이 책이 간행된 1990년에만 해도 일반사람은 원자력의 안전성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던 시절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작품이 독자에게 주는 충격은 매우 강렬한 반응을 일으켰으리라. 타냐 또한 사고가 발생한 이후에야 비로소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발전소라는 말의 허구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것은 얼마나 무서운 직업이었단 말인가. 자신은 왜 좀 더 일찍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을까. 이렇게 끝날 줄 미리 알았어야 했다는 자괴감만이 지금 그녀의 마음속에 가득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반과 이네사를 지금과 같은 불행한 상황으로 이끈 것이 자신들이라는 생각까지 이르자, 그녀는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P.167)

 

소설은 두 개의 갈래로 뒤엉켜 전개된다. 하나는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뒤따른 피폭 효과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확산되고 심화되는 과정을 그린다. 위험성을 인지하기도 전에 방사능은 피폭자의 전신을 휘감는다. 신체는 방사능 수준에 따라 급격히 또는 서서히 돌이킬 수 없이 잠식당한다. 이네사는 무릎 관절의 약화로, 이반은 시력 상실로. 조그맣게 드러나는 붉은 반점은 내출혈의 악화라는 형태로 수많은 피폭자의 목숨을 앗아간다. 환경 변화에 예민한 체르노빌의 아이들이 속수무책으로 스러지고 마는 것이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은 소련 당국의 폐쇄적 통제 체제다. 사고의 축소와 은폐에 급급한 당국은 피난민들의 이동을 통제하고 강제 격리한다. 재빨리 피폭 지역을 벗어나야 함에도 비효율적 통제 체제에 순응하기를 요구하고 불응자는 처형도 꺼리지 않는다. 그들은 수만 명의 인명 피해가 나더라도 자신들의 실수와 약점이 노출되는 것을 막는 게 더욱 중요하다. 안드레이를 포함한 결사대, 그리고 수많은 소방대원이 무의미하게 발전소 진화를 위해 희생된 것은 무능력하고 낙후된 체제의 신경질적 발작이다.

 

그들의 체제는 사람들의 통제에 최적화된 체제이지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데는 소질이 없음을 이 소설은 다시금 보여준다. 통제의 용이를 위해 피폭자들은 부모와 가족이 생이별을 당하며, 타냐는 아이들의 소재와 현황도 파악하지 못한 채 병원들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아무런 보람없이. 아이들은 이미 지상에 없으므로. 타냐가 눈물을 흘리며 과거의 즐거웠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은 그것이 되찾을 수 없는 평화와 행복임을 깨달아서다.

 

눈물 속에 떠오르는 것은 단지 늠름했던 남편의 웃는 모습뿐이었다. 멀리 남편의 생생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갑자기 이미 십 년이나 지난 먼 옛날의 행복했던 시절이 타냐의 눈앞에 펼쳐졌다. 미래의 운명에 대한 아무런 걱정도 없이 개울가에서 온 가족이 행복하게 보내던 화창했던 날의 추억... (P.101)

 

물론 체르노빌의 비극은 소련 체제의 특수성에 기인하여 악화되었다. 개방화된 시민사회라면 피폭자의 관리와 치료는 더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졌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근본적 사안인 원자력발전의 안전성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인간의 기술에는 완벽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가능성을 최소로 낮출 것을 기대할 뿐.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소에서 체르노빌에서와 같은 치명적인 사고가 발생하였을 경우 더는 대한민국의 존속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방사능 낙진의 위험성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인간의 상상력이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된 생물이라면, 마땅히 신이 창조한 세계의 현상에 대해서 자연적으로 인식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고는 신이 창조한 세계의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가장 신비한 신의 창조물인 원자를 파괴하는, 즉 신이 창조한 세계를 파괴하는 현상이기 때문이었다. (P.149)

 

방사선 피폭의 위험성을 웅변하는 저자의 설명은 거의 종교적 울림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 대안은 무엇인가? 다카시는 원자력발전 없이도 전력 수요의 충족이 가능하다고 하며, 무진장한 천연가스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다만 문외한인 내 생각에도 천연가스 매장이 지역적으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지 않으므로 소위 석유 무기화처럼, 천연가스 무기화도 불가능하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지역적으로 균등하게 확보할 수 있는 환경적으로도 깨끗한 대체 발전 수단이 개발되지 않는 한 원자력발전에 대한 논란은 쉽사리 해소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은 불확실한 장래의 위험성보다는 당장 눈앞의 확실한 가능성에 무게를 두기 마련이다. 그때까지는 원자력 발전소가 안전하기를, 또한 친환경 대체 발전이 조속히 연구 개발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것이 나 같은 범인(凡人)들의 소박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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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헛수고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미예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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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비교적 초기 작품으로 분류되는 작품으로 언어유희, 재담, 익살이 풍부한 희극이다. 이것이 과하여 한바탕 웃고 끝나는 유형의 가벼운 소극(笑劇)으로 볼 여지도 있다. 무대는 프랑스와 스페인 접경지대의 나바라 왕국이다.

 

나바라의 왕 페르디난드는 극 중에서 덕망을 지닌 인물로 회자되는데, 학문적으로 도덕적으로 지향점이 매우 드높음을 알 수 있다. 개인뿐만 아니라 왕국 자체가 타의 모범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학문의 완성을 위해 스스로 삼 년간 철저한 금욕, 절제, 근면을 맹세하는데, 문제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벗인 세 명의 신하와 함께 맹세를 지켜나가려고 한다.

 

(베로네) , 이런 것들은 소득도 없는데 지키기는 무척 힘든 일들입니다. / 여자도 만나지 마라, 학문만 해라, 금욕하고 잠도 자지 마라. (P.9, 1막 제1)

 

인간의 자연스러운 신체적, 정신적 욕망은 막을 수 없다. 기본적으로 막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억지로 막는다면 다른 배출구를 찾아 분출하려고 하게 마련이다. 추구하는 목표를 위해 욕망을 일부 억제할 수 있으나 과도하지 않은 수준에서 그것도 자발적 의사에 따라 가능할 뿐 타인에게 강요하여 실행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베로네가 반발하는 건 당연하며 그의 주장은 현실적이며 이치에도 부합한다.

 

(베로네) 학문이란 하늘에 빛나는 태양과 같아서/ 무모하게 찾는다고 다 찾아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P.11, 1막 제1)

 

(베로네) 저야 기꺼이 제 머리를 내놓을 겁니다만, / 이 맹세와 법령은 무의미한 조롱거리가 될 겁니다. (P.25-26, 1막 제1)

 

아름다운 프랑스 공주의 방문으로 네 사람의 맹세는 순식간에 금이 가버리며, 각자 정체를 노출하지 않기 위해 가면을 쓴 채 프랑스 공주와 시녀들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작가는 여기서 인간의 본성을 거역하는 말과 행동의 허망함을 적나라하게 관객에게 보여주는 셈이다. 그들 모두가 맹세를 어겼음이 드러나는 순간 베로네는 다시금 맹세의 부적절성을 지적하며 맹세를 포기할 것을 주장한다. 작가가 이처럼 베로네의 입을 빌려 맹세에 대한 비판을 되풀이하는 까닭은 그것이 갖는 비합리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이리라.

 

(베로네)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이런 이치를 우리는 거스를 수 없는 법. / 그러니 하나같이 맹세를 깰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P.117, 4막 제3)

 

(베로네) 우리 자신을 찾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맹세를 버립시다. / 맹세를 지키려 들다 우리 자신을 버리게 될 것이오. (P.126, 4막 제3)

 

왕과 신하들의 금욕 맹세는 다른 등장인물이 벌이는 언어유희, 재담, 해학적 대화와 행동 등으로 비현실성과 터무니없음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런 경묘한 소극(笑劇)에서 그들의 진지함이란 처음부터 당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익살꾼 아르마도는 대사 자체가 과장되고 현학적이며, 시동 모트 또한 어린 나이에 주인을 능가할 정도로 꾀쟁이다. 코스타르드는 광대답게 천방지축이다. 나타니엘 목사와 올로페르네스 교장은 올바른 영어 발음법에 관한 대화에서 그들의 현학성과 무지 및 허세를 한눈에 나타낸다. 이러한 재담은 세 신하는 물론 공주를 포함한 시종과 시녀들도 마찬가지다. 즉 이 희극은 등장인물들이 전체적으로 진지한 대사보다는 재치와 풍자, 익살과 유희 등이 넘실넘실하는 작품이다. 어처구니없는 말꼬리 잡기에 기반한 언어유희의 한 사례다. 극중극으로 벌이는 아홉 영웅 놀이는 이 모든 익살과 유희로 점철된 난장판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하다.

 

(올로페르네스) 무안해할 얼굴이 아닙니다.

(베로네) 얼굴 통이 없단 말씀.

(올로페르네스) 이건 무슨 뜻?

(부아예) 탄금 대갈통인 게지.

(두마인) 머리핀 통인가.

(베로네) 반지에 붙은 해골 통이야. (P.189, 5막 제2)

 

왕과 세 신하는 자신들의 맹세를 저버리면서까지 프랑스 공주 일행의 사랑을 얻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저버린 맹세의 가벼움에 공주 일행이 오히려 미더움과 성실성을 의심하게 되어서다. 한바탕 떠들썩한 희극으로 막을 내리는 것에 대한 부담감인지 작가는 돌연 공주 일행의 입을 빌어 구혼자들의 성실성을 시험하는 조건을 내세운다. 일 년간 세속적 욕망의 도전을 이겨낼 수 있다면 구혼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베로네는 한 가지 조건을 더 부여받는데, 워낙 재기발랄하기로 유명한 그였기에 그 습성을 버리라는 것이다. 매우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결말이다.

 

통상적인 희극은 주인공이 얽힌 사건과 묵은 갈등을 해결하고 모두가 즐겁고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걸로 끝나기 마련이다. 연인이라면 응당 혼사를 치르거나 결혼을 약속하는 등. 하지만 이 작품은 결말이 다소 다르다. 물론 조건부로 구혼을 받아주므로 외양상 해피 엔딩이지만 일 년이라는 시간적, 시험의 통과라는 물리적 장애물이 엄연히 남아 있는 상황에서 섣불리 확신을 갖고 미래의 행복을 단언하지는 못한다. 베로네가 지적하는 대목이 바로 이것이다.

 

(베로네) 우리 구혼의 결말은 옛날 극과는 다르군요. / ‘갑돌이와 갑순이는 결혼하지 않았대요.’ 이렇게 돼 버렸습니다. / 아가씨들의 호의만이 우리 장난을 희극으로 만들 수 있었는데.

(페르디난드) 이것 봐, 열두 달하고 하루가 지나면, / 희극으로 끝날 거요.

(베로네) 극이 되기에는 너무 긴데요. (P.208, 5막 제2)

 

이 결말 부분을 근거로 셰익스피어가 모종의 진지함을 부여하였는지 아니면 진지함을 가장한 일관된 희극성을 의도하였는지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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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생애 - 위대한 투쟁 거장이 만난 거장 7
로맹 롤랑 지음, 임희근 옮김 / 포노(PHONO)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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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음악을 알고 좋아한 지 오랜 시일이 경과하였고 명곡의 작품 배경과 해설을 통해 그의 삶도 대강 헤아렸다. 이제 새삼 베토벤의 생애를 알고 싶어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그의 삶과 음악의 연관성을 보다 체계적으로 조감하고 싶다는 바램과, 겉으로 드러난 그의 삶의 참모습을 다시금 살펴보고 싶다는 것

 

베토벤을 일컬어 흔히 악성(樂聖)’으로 일컫는다. 9개의 교향곡, 7곡의 협주곡, 32개의 피아노 소나타, 16개의 현악사중주곡, 7개의 피아노 삼중주곡, 10개의 바이올린 소나타, 5개의 첼로 소나타 등 그가 남긴 거의 모든 곡은 자체로 서양음악사에서 우뚝 섰으며 후대에 미친 영향력 또한 거대하다. 그가 남긴 족적이 너무나 명확하므로 일반인들은 그의 천재성에 감탄하고 존경하지 그가 난청(難聽)이라는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인 장애를 극복한 인물이라는 점을 자칫 간과하는 때가 많다.

 

말이 나온 김에 베토벤 작품 목록에서 Op.1(삼중주 세곡)만이 1796년 이전에 발표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자. Op.2, 즉 첫 피아노 소나타 세 곡은 17963월에 나왔다. 그러니까 베토벤의 작품 전체가 귀먹은 베토벤이 작곡한 것이라는 얘기다. (P.30, 각주)

 

위의 글에서처럼 베토벤의 주요한 거의 모든 작품은 난청 이후에 작곡한 곡들이다. 자신에게 난청이 생겼다고 가정해 보자. 많은 사람은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한 삶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정상적인 직업을 갖기 어려우며, 사교적인 생활도 포기해야 하며, 스스로 자신 속으로 위축된 채 인생의 비참함을 한탄하며 지내기에 십상이다. 요즘도 그러할진대 1800년 전후 베토벤이 살던 시대를 떠올려보자. 게다가 그는 음악가다. 귀가 들리지 않는 음악가는 매우 이율배반적 인상을 풍긴다. 그러면 그가 남긴 음악 유산이 결코 범상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을 위해 고통받았던 위대한 영혼들을 말이다. 이 총서 유명인들의 삶은 야심만만한 자들의 오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불행한 이들을 위해 펴낸 것이다. (P.11)

 

저자는 초판 서문에서 이 책의 저작 의도를 분명히 한다. 그는 이 책이 학문을 위해 쓴 책이 아니”(P.8)라고 개정판 서문에서 다시 한번 강조한다. 저자는 오히려 전기 작가들이 쓴 일반적인 베토벤의 전기에 비판적 견해를 나타낸다. 그에 따르면 그것은 세밀한 자료들의 죽은 문장에 지나지 않는다. 전기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본질적 요소인 인물을 독자에게 생생하게 살아있는 존재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놓쳤다고.

 

로맹 롤랑의 이 책에 대해 여러 비판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베토벤을 역경을 극복한 영웅이라는 이미지로 지나치게 미화하였기에 인간 베토벤의 실체를 오히려 가리고 말았다며. 여기에 대해서 저자는 일찌감치 항변하였다.

 

나는 결코 베토벤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그를 비난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그의 면모 전체를 그리려 할 뿐이다. 베토벤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가 지닌 강력한 균형의 자연적 저울을 형성하는 이 과도한 대조를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P.208-209, 부록: ‘1800, 서른 살 베토벤의 초상’)

 

저자는 베토벤을 찬양한다. 때로는 그의 굴곡진 운명에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며 그가 삶에서 금전 면에서나 애정 면에서 행복을 성취하지 못하였음에 더없이 감상적 표현도 아끼지 않는다. 이것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으나 베토벤의 생애를 들여다볼 때 동정적이고 감상적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음악가 베토벤이 아닌 인간 베토벤은 딱한 삶을 살다 갔으니.

 

난 혼자였지. 완전히 혼자였어.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세상에 나서볼 수도 없었다. 나는 추방된 자처럼 살 수밖에 없었단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가까이 가면 남들이 내 상태를 눈치챌까 봐 말할 수 없는 불안에 휩싸였지. (P.92,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상황이 조금 나아지리라는 희망만 있을 뿐. 이 병만 아니라면 벌써 그리로 갔겠지! ! 이 병에서 놓여나기만 하면 온 세상을 내 품에 안을 텐데! (P.111, ‘베겔러에게 보낸 편지’)

 

고작 서른 살 무렵에 자살을 각오하고 유서를 남긴 심정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야심만만하고 음악으로 세상을 정복하리라는 자신감을 지닌 그의 앞날이 이렇게 비참함에 빠졌을 줄 어찌 알았을까. 난청 장애가 남긴 영향과 후유증은 이렇게나 심대하였다. 사랑의 동반자라도 있었다면 상황이 나아졌을 텐데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그는 독신의 처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였다. 경제적으로도 음악적으로도 그는 현실은 밝지 않았다. 우리는 베토벤이 슈베르트와는 달리 죽을 때까지 음악계의 거장으로 비교적 여유로운 삶을 살았다고 착각하는데 저자는 그렇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그는 매우 가난하였고, 당대인들은 그의 작풍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그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고, 조카를 둘러싼 가족사도 어수선하였다.

 

그런 베토벤이 인류문명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엄청난 성취를 이루고 후대에 영원한 유산을 남겼으니 그를 영웅이라고 칭하지 않으면 누가 영웅의 자격이 있겠는가. 저자는 오히려 반문할 것이다. 그로서는 찬미의 문장으로 끝맺음을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어떤 정복이 이만하겠으며, 보나파르트의 어떤 전투가, 아우스터리츠의 어떤 태양이 이 초인적 노력의 영광, ‘정신이 일찍이 이뤄낸 가장 혁혁한 이 승리의 영광만 하겠는가. 가난하고 장애가 있으며 외롭고 고통으로 점철된 듯한 불행한 남자, 세상이 그에게 기쁨을 주길 거부하니 스스로 환희를 만들어내 세상에 가져다준 한 인간의 정신이 말이다. (P.87)

 

이 책은 베토벤의 생애를 다룬 본문 외에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와 친우들과 주고받은 편지들, 음악과 비평에 대한 베토벤의 단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본격적인 전기 문학은 아니며, 그의 삶을 세세하게 포괄하기에는 분량적으로 짧은 편이다. 이러한 한계를 참작하면 거인 베토벤의 삶을 조망하기엔 충분하며, 독자는 저절로 저자의 감상에 젖어들게 된다.

 

한편 부록으로 로맹 롤랑의 다른 저서 중 일부 대목인 <1800, 서른 살 베토벤의 초상>을 수록하여 다른 번역본과 차별화를 꾀하고 보다 심층적인 이해를 도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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