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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소동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종환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평점 :
원제는 ‘Much ado about nothing’이다. 대부분 이 책과 같이 ‘헛소동’이라는 표제로 번역하는데, 이상섭 번역본과 같이 ‘괜히 소란 떨었네’로 풀어서 번역하는 사례도 있다. 장소도 스페인 아라곤 왕국의 지배를 받는 시칠리아로 설정하고 있어서 셰익스피어 초기 작품의 일반적인 배경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등장인물 중 영주와 동생인 돈 페드로와 돈 존의 존재가 이를 보여 준다. 다만 주요 인물인 클라우디오와 베데딕은 이탈리아 본토 출신 귀족이며, 히어로와 베아트리체는 시칠리아 총독의 딸과 조카딸이므로 대체로 이탈리아는 조건에는 부합한다.
헛소동의 주인공은 클라우디오와 히어로다. 히어로를 향한 클라우디오의 일관되지 못한 사랑이 헛소동을 불러온다. 그런데 가만히 극의 내용을 살펴보면 실제 주인공은 베네딕과 베아트리체임을 알 수 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우선 두 사람의 대사가 월등히 분량 면에서 많다는 점, 클라우디오와 히어로의 극 중 행동이 매우 단편적이며 소극적인 반면 베네딕과 베아트리체는 극을 온통 휩쓸고 다닐 정도로 재기발랄하며 행동과 대사의 진폭이 크다는 점이다.
클라우디오는 히어로를 사랑함에도 구혼을 고백할 용기가 없어서 돈 페드로의 도움을 빌린다. 여기서 일차적인 오해의 빌미가 생긴다. 돈 존의 속임수에 빠진 클라우디오는 히어로의 정절을 섣불리 의심하며 성급하게 히어로에게 모욕을 가한다. 결정적인 오해의 순간이다.
(클라우디오) 어르신, 따님을 돌려드리겠습니다. / 이런 썩은 오렌지를 친구에게 주시다니요? / 그녀의 정절은 겉치레일 뿐입니다. (P.124-125, 제4막 제1장)
야경꾼들이 돈 존의 하수인을 체포하지 않았다면 그는 영원히 히어로를 원망한 채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클라우디오는 단순하고 순진한 성격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본인의 잘못으로 연인이 죽게 되었음을 자책하며 그녀를 향한 길고도 애절한 추도를 바치는 그의 모습에서 성실성이 잘 드러난다. 한편 히어로는 여주인공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극 중 비중이 약하다. 순결하고 지조 높은 점은 인정하겠지만. 두 사람의 재결합을 위한 수사의 역할이 <로미오와 줄리엣>과 비슷한 점이 흥미롭다. 물론 이 작품은 희극이므로 수사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지만.
(베아트리체) 누구냐고? 전하의 어릿광대랍니다. / 멍청한 바보 녀석이죠. 황당한 중상 비방이나 / 늘어놓는 놈이랍니다. 건달이면 모를까, / 아무도 그 광대 말에 즐거워하지 않아요. (P.44-45, 제2막 제1장)
(베네딕) 절대로 그런 여자와 결혼하지 않을 겁니다. / 그녀는 욕설을 퍼부어 헤라클레스조차도 / 고기 굽는 꼬챙이나 돌리게 만들 여자랍니다. / 헤라클레스의 곤봉을 쪼개서 / 불쏘시개로 쓸 그런 고약한 여자랍니다. (P.52, 제2막 제1장)
이 작품의 희극적 재미는 단연 베네딕과 베아트리체다. 상대방에게 한 치의 양보도 무릅쓰지 않기 위해 재치가 철철 넘치는 언어 공격을 주고받는 그들의 대사는 독자 입장에서도 지나치게 과격한 게 아닐까 우려가 될 정도다. 각자가 비혼 선언을 한 그들이지만 너무나 잘 어울려 보이기에 돈 페드로를 주도로 두 사람의 결혼 프로젝트가 가동된다. 제아무리 똑똑한 그들이라도 사랑의 사안에는 경험 부족이 드러난다. 특히 베아트리체의 돌연한 변심은 너무나 급작스러워 독자로서는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인상을 받는다.
(베아트리체) 내가 그렇게까지 거만하고 / 조롱을 일삼는 여자라고 비난받고 있나? / 그럼 이제 멸시하는 마음과는 이별이다! / 처녀의 자존심도 이별이다! 뒤에서 / 그런 비난을 듣는 한, 멋지게 살 수 없으니까. / 베네딕, 절 사랑해 주세요. 그럼 / 저도 당신을 사랑하겠어요. 사랑하는 / 당신 손으로 제 거친 마음을 길들여 주세요. / 당신이 사랑하면 저도 순순히 따르겠어요. (P.89-90, 제3막 제1장)
두 사람의 티격태격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부부의 연을 맺기로 결정하고 난 이후에도 여전하다. 상대방이 먼저 사랑의 마음을 품게 되었음을 인정하라고 말이다. 끝까지 독자에게 재미를 안겨주는 커플이다.
(베네딕) 자, 당신을 내 아내로 삼겠소. / 하지만 이 빛에 두고 맹세하지만, / 당신이 불쌍해서 아내로 삼는 거요.
(베아트리체) 거절하진 않겠어요. 하지만 / 오늘처럼 좋은 날에 걸고 맹세하지만 / 설득에 마지못해 당신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 버린 목숨 하나 구하는 셈치고... / 상사병으로 거의 죽을 지경이라고 들었으니까. (P.188, 제5막 제4장)
베네딕과 베아트리체가 고상한 귀족으로서 희극에 이바지한다면, 도그베리와 베르게스 및 야경꾼들은 평민 계층으로서 대놓고 희극적 대사를 뿜어낸다. 그들이 등장하는 장면(제3막 제3장, 제3막 제5장, 제4막 제2장, 제5막 제1장)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단어 오용(정반대의 단어 사용)과 자기 비하는 서민적이며 털털한 해학적 재미를 전해준다. 참으로 이 희극에서 관객이 체면 차리지 않고 마음껏 낄낄거릴 수 있는 유일한 대목이다.
(도그베리) 넌 경관이란 내 직분을 의심하느냐? / 너보다 나이 많은 나를 의심하지 않느냐? / 서기 양반이 여기 있으면 / 날 바보라고 기록하게 했을 텐데... / 여보게, 기록되진 않았지만 / 내가 바보라는 걸 기억해. / 내가 바보라는 걸 잊지 마, 악당 놈아, / 넌 아주 경건한 놈이다. / 그 증거가 차고 넘쳐. 난 아주 현명한 사람이다. (P.147, 제4막 제2장)
마지막으로 돈 존과 수하인 보라키오를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희극에만 존재하는 어리숙한 악당이다. 말로는 어떤 짓도 저지를 전형적 악한을 흉내 내지만 돈 존은 상황이 전개되자 잽싸게 도망치려다 의심을 유발하고 붙잡히며, 보라키오는 쓸데없이 자신의 악행을 늘어놓다가 역시 야경꾼에게 체포된다. 후기의 비극에 등장하는 용의주도하고 철저한 악인과 비교해본다면 이들의 미숙함과 한계를 쉽사리 파악할 수 있다.
종합하자면 이 작품은 클라우디오와 히어로의 오해와 착각이 빚어내는 소란보다는 베네딕과 베아트리체의 귀족적 재치, 도그베리와 야경꾼들의 서민적 해학이 빚어내는 희극적 묘미가 두드러지는 희극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