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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아이들 - 히로세 다카시 평화소설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9년 6월
평점 :
이 작품을 순전히 문학적 관점으로 헤아린다면 매우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할 수 있다. 작가의 목적은 ‘반핵평화’라는 자신의 주장을 많은 이들에게 전파하기 위한 것이며, 소설이라는 형식을 사용한 것은 많은 이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동일한 주장을 딱딱한 논설문이나 선전문 형태로 작성한다면 대중의 관심을 끌기는 어려울 테니.
나는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통해 핵발전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떤 비극 속으로 빠뜨려 가는가를 절실히 알리고 싶었다. (P.175)
원자력발전의 필요성과 관련해서는 찬반양론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고, 이는 정치적 이해득실과도 연계되어 있기에 문외한은 깊숙한 내막을 자세히 알기 어렵다. 이 책은 원자력발전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쓰인 글이므로 작가는 당연히 부정적 내용으로 기술한다. 저자 후기에서 작가는 이렇게 주장한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란 것도 알고 보면 원자·수소폭탄 산업을 경제적으로 성립시키려는 상당히 무리한 방법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P.173)
1986년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사고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의 발전소 간부인 안드레이 가족을 중심으로 방사선 피폭의 무섭고도 잔인한 효과를 그리고 있다. 지금이야 여러 통로로 피폭의 위험성이 대중에게 많이 알려졌지만 체르노빌 당시 또는 이 책이 간행된 1990년에만 해도 일반사람은 원자력의 안전성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던 시절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작품이 독자에게 주는 충격은 매우 강렬한 반응을 일으켰으리라. 타냐 또한 사고가 발생한 이후에야 비로소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발전소”라는 말의 허구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것은 얼마나 무서운 직업이었단 말인가. 자신은 왜 좀 더 일찍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을까. 이렇게 끝날 줄 미리 알았어야 했다는 자괴감만이 지금 그녀의 마음속에 가득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반과 이네사를 지금과 같은 불행한 상황으로 이끈 것이 자신들이라는 생각까지 이르자, 그녀는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P.167)
소설은 두 개의 갈래로 뒤엉켜 전개된다. 하나는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뒤따른 피폭 효과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확산되고 심화되는 과정을 그린다. 위험성을 인지하기도 전에 방사능은 피폭자의 전신을 휘감는다. 신체는 방사능 수준에 따라 급격히 또는 서서히 돌이킬 수 없이 잠식당한다. 이네사는 무릎 관절의 약화로, 이반은 시력 상실로. 조그맣게 드러나는 붉은 반점은 내출혈의 악화라는 형태로 수많은 피폭자의 목숨을 앗아간다. 환경 변화에 예민한 체르노빌의 아이들이 속수무책으로 스러지고 마는 것이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은 소련 당국의 폐쇄적 통제 체제다. 사고의 축소와 은폐에 급급한 당국은 피난민들의 이동을 통제하고 강제 격리한다. 재빨리 피폭 지역을 벗어나야 함에도 비효율적 통제 체제에 순응하기를 요구하고 불응자는 처형도 꺼리지 않는다. 그들은 수만 명의 인명 피해가 나더라도 자신들의 실수와 약점이 노출되는 것을 막는 게 더욱 중요하다. 안드레이를 포함한 결사대, 그리고 수많은 소방대원이 무의미하게 발전소 진화를 위해 희생된 것은 무능력하고 낙후된 체제의 신경질적 발작이다.
그들의 체제는 사람들의 통제에 최적화된 체제이지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데는 소질이 없음을 이 소설은 다시금 보여준다. 통제의 용이를 위해 피폭자들은 부모와 가족이 생이별을 당하며, 타냐는 아이들의 소재와 현황도 파악하지 못한 채 병원들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아무런 보람없이. 아이들은 이미 지상에 없으므로. 타냐가 눈물을 흘리며 과거의 즐거웠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은 그것이 되찾을 수 없는 평화와 행복임을 깨달아서다.
눈물 속에 떠오르는 것은 단지 늠름했던 남편의 웃는 모습뿐이었다. 멀리 남편의 생생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갑자기 이미 십 년이나 지난 먼 옛날의 행복했던 시절이 타냐의 눈앞에 펼쳐졌다. 미래의 운명에 대한 아무런 걱정도 없이 개울가에서 온 가족이 행복하게 보내던 화창했던 날의 추억... (P.101)
물론 체르노빌의 비극은 소련 체제의 특수성에 기인하여 악화되었다. 개방화된 시민사회라면 피폭자의 관리와 치료는 더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졌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근본적 사안인 원자력발전의 안전성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인간의 기술에는 완벽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가능성을 최소로 낮출 것을 기대할 뿐.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소에서 체르노빌에서와 같은 치명적인 사고가 발생하였을 경우 더는 대한민국의 존속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방사능 낙진의 위험성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인간의 상상력이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된 생물이라면, 마땅히 신이 창조한 세계의 현상에 대해서 자연적으로 인식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고는 신이 창조한 세계의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가장 신비한 신의 창조물인 원자를 파괴하는, 즉 신이 창조한 세계를 파괴하는 현상이기 때문이었다. (P.149)
방사선 피폭의 위험성을 웅변하는 저자의 설명은 거의 종교적 울림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 대안은 무엇인가? 다카시는 원자력발전 없이도 전력 수요의 충족이 가능하다고 하며, 무진장한 천연가스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다만 문외한인 내 생각에도 천연가스 매장이 지역적으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지 않으므로 소위 석유 무기화처럼, 천연가스 무기화도 불가능하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지역적으로 균등하게 확보할 수 있는 환경적으로도 깨끗한 대체 발전 수단이 개발되지 않는 한 원자력발전에 대한 논란은 쉽사리 해소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은 불확실한 장래의 위험성보다는 당장 눈앞의 확실한 가능성에 무게를 두기 마련이다. 그때까지는 원자력 발전소가 안전하기를, 또한 친환경 대체 발전이 조속히 연구 개발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것이 나 같은 범인(凡人)들의 소박한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