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들의 사생활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평점 :
품절


이승우는 독특한 작가다. 특이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가장 정통적인 소설작법을 구사하고 있다. 요즘 톡톡 튀는 신세대 작가들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지친 독자라면 기쁘기 그지없을 것이다. 재기발람함을 압도하는 성실함과 우직함이 그의 소설 미덕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생의 이면>에 이어 두번째 펼쳐든 작품에서도 그의 특성은 큰 변함이 없다. 칠년이 경과하였지만 그는 섯부른 꼼수를 부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는 '사랑'을 다룬다. 그의 사랑이란 표피적이고 찰나적이지 않다. 어쩌다 술김에 하룻밤 같이 자고 가벼운 말다툼 끝에 절교를 선언하는 그런 유치함과는 비교하지 말자. 그의 사랑은 인간의 존재론적 질문과 맞닿아 있다.

박부길과 기현은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러나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들은 자신의 과도한 열정과 집착이 사랑의 뜨거운 표출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기현은 순미의 집에 찾아가는 무모함을 보인다. 마치 그녀가 그를 뜨겁게 맞아줄 것을 믿어마지 않으면서.

우리는 새로운 가전제품을 구입하면 사용설명서를 한번 훑어본다. 기본 작동이야 할줄 알지만 세부기능을 알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휴대폰 제품상자에는 두툼한 설명서가 따라온다. 반면 제대로 사랑하기 위하여 또는 잘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학을 공부하는 사람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사랑은 그저 본능에 충실하면 된다는 것일까? 그런 면에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퍽이나 선구적이다. 우리 모두는 사랑에대하여 진지하게 공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사랑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덕목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모든 나무들은 좌절된 사랑의 화신이다"(P.220)

이 한 문장이 이 소설의 모든 것을 대변한다. 우현은 때죽나무와 소나무를 보면서 이루어지지 못한 순미와의 영원한 사랑을 갈구한다. 남천의 야자나무는 기현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가 사랑했던 사람의 사랑의 아이콘이다. 또한 우현과 순미를 잇는 연결점이기도 하다.

해설에서도 지적했듯이 기현-순미-우현의 단선적 삼각관계는 아버지-어머니-비서관으로 이어지는 선행 관계의 복사판이다. 사랑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고 기현은 나직이 되뇌인다. 상호간의 뜨겁고 격렬한 사랑에서 나무처럼 한발 떨어져서 고요하고 은은한 사랑까지. 일방적 사랑과 쌍방적 사랑은 어떠하며 다자간의 사랑은 무엇인가. 작중 아버지와 어머니의 전혀 표출되지 않는 사랑도 있다.

이승우는 이지적이며 냉혹한 작가이다. 박부길이나 기현은 따뜻하고 바람직한 가족생활을 누리지 못하였다. 박부길은 어머니를 빼앗기고 아버지를 죽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묘를 불태우고 고향을 떠난다. 기현은 어떤가. 건조한 가정에서 우수한 형에게 가리워져 소외당하다가 형의 사진기를 들고 역시 가출한다. 그리고 이것의 파장으로 형은 두 다리를 잃고 정신적 장애마저 겪는다. 어설픈 해피엔딩의 미덕을 보여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우현의 욕정을 달래주기 위하여 어머니가 그를 업고 연꽃시장을 드나드는 모습은 쓰디쓴 모정의 착잡함을 안겨준다.

그나마 사랑에 실패하는 전작에 비해 조금이나마 상황 호전의 여지가 엿보이는 점에서 일말의 변화가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시선이 조금은 누그러진 듯 한데 과연 그럴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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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10.26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생의 이면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 전에 공지영이 중앙일보에 연재하던 소설이 있었다. 본인의 개인사를 소재로 한 것인데,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전남편이 소송을 걸기도 하였다. 아무리 작가가 사실을 토대로 한 허구라고 하여도 어리석은 우리네 범인(凡人)들은 여전히 사실과 허구를 혼동한다. 아니 동일시하고 싶어 한다.

“작가는 자신의 삶의 의식, 무의식의 다양한 파편들을 교묘하게 조작하여 소설들을 만든다...독자들의 의식 속에서 소설가가 쓴 글들은 너무 쉽게 글쓴이를 지향한다. 우리는 한 작가의 소설로부터 구성해 낸 인물의 초상과 그의 삶을 너무 편리하게 현실 속의 작가와 동일시해 버리곤 한다.” (P.170~171)

지금 내가 읽는 <생의 이면>은 작가의 작품을 통하여 작가의 삶 자체를 재구성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는 범인(凡人)이 우대받는다. 소설과 사실을 명백히 구분할 줄 아는 독자에게는 그다지 신선하지 못한 접근방식이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 어찌 그리 나의 삶과 똑같을까 무르팍을 쳐본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내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작중 박부길과 나는 삶의 환경과 궤적이 천양지차이다. 그러나 그의 태도와 내적 심리는 때로 나를 당혹하게 할 정도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렇게 많은 책장을 접은(난 인상 깊은 대목은 책장 끝은 살짝 접어놓는다. 그래야 나중에 재음미하거나 감사기를 적을 때 유용하다) 적은 처음이다.

“그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라고 하지만, 성실함의 징표 같은 매일매일의 글쓰기는 아니었다...거기 적은 내용도 그날 있었던 일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것은 아니고...대부분 내면의 수상한 움직임들을...포착한 것들이었다.” (P.91)

지금은 거의 일기를 쓰지 않지만 한때나마 간헐적으로 몇 자 끄적이던 때가 있었다. 그때 나의 일기 쓰는 방식도 이와 유사하였다. 며칠에 한 번 뭔가 삶에 강한 영향을 주는 사건이나 인식이 있을 때만.

박부길의 필화사건(P.92~93)을 읽다보니 지나간 나의 필화사건들이 떠오른다. 돌아보면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하다. 초등학교때 난 나름 문학소년 이었다. 그땐 상상력이 풍부했는지 시흥에 겨워 곧잘 시 몇 구절을 쓱 적어나가곤 하였다. 그때 노트가 아직 남아있으면 재밌으련만. 어머니께서 군인이신 첫째 작은아버지께 위문편지를 쓰라고 시켰는데, 난 쓰지 않았다. 몇 번이나 재촉하다가 내가 편지는 쓰지 않고 시 나부랭이만 끄적거리니 화가 나신 당신은 내 시작(詩作) 노트를 빼앗아 확 찢어버리셨다. 그때 이후로 난 시를 쓰지 않는다.

고3 들어서 학기 초에 담임이 모두에게 편지를 쓰라고 지시한다. 수신자는 부모님. 내용은 이제 고3이 되었으니 정신 차려서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에 들어가겠다 등등. 다음날 난 편지를 써 가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몇 명이 불려나왔다. 일장 훈계 후 내일까지 써올 사람은 들어가라고 하였다. 나는 들어가지 않았다. 담임은 어이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더니 안 써올 거냐고 묻는다. 난 쓸 생각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런 이야기는 평소 해오던 것이라 별도로 편지를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손찌검이 뒤따랐고, 난 교무실로 끌려갔다. 난 결국 편지를 쓰지 않았다.

“생각이 많은 사람은 세상을 쉽게 믿지 않고, 세상은 그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따돌림의 대상이 된, 생각이 많은 사람은, 복수하듯 세상을 따돌릴 채비를 한다. 거기서는 다른 사람에 비해 자기가 너무 크다는 생각이 돌출한다...모든 오만의 기본 정서는 슬픔과 울분, 또는 스픈 울분이고 그 뿌리는 좌절감임을 나는 안다.” (P.106)

나 역시 세상과의 불화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여전히 세상은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세상과 어울리고 싶지 않다. 홀로 독야청청하리라. 옛적의 은자(隱者)처럼. 고독하지만 쓸쓸하지는 않다. 한동안은 이러한 심경이 나를 약간의 우울증 증세로 몰고 가기도 하였다. 결혼을 생각하던 여자가 감당하기에 힘들다고 우려하던. 이제 나이가 제법 든 탓인가 예전같은 흔들림은 거의 사라졌다. 그렇다고 내가 세상과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쓰라림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을 뿐.

“내가 살던 자취방은 이상스레 어두웠다...나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불을 켜지 않고 살았다...나는 어둠 속에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어둠의 넓고 깊은 품에 푹 잠기기를 좋아했다. 어둠은 얼마나 아늑한지, 얼마나 아늑하고 편안한지...”(P.110)

중학교 때 나도 내 방을 굴속같이 어둡게 한 채 종일을 보내곤 하던 시절이 있었다. 조명을 겨지 않고 커튼을 치면, 북향인 내 방은 그야말로 은둔지로서 제격이다. 대낮의 어둠속에서 난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마음껏 백일몽을 꿈꿀 수 있었다. 거기서는 하루 종일이라도 시간가는 줄 몰랐다. 그래서일까 난 아직도 빛 보다는 어둠을 선호한다. 환한 빛은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눈을 아프게 만든다.

“그 시절, 나는 아주 간절하게 동지를 찾고 있었다...나는 아무와도 마음을 주고받으며 사귀지 못했다. 누구에게서도 동질성을 발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P.112)

내가 찾은 인생의 반려자는 동질성을 지닌 동지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과도한 경건성과 정신성의 갈구로 나를 지치게 하지 않는. 어느 정도 나의 취미를 공유하고 그리고 적어도 나라고 하는 괴팍하기 그지없는 유형의 인간에 대해 조그마한 이해를 품은. 하지만 결혼에서 그런 거창한 포부를 찾는 이여, 일치감치 망상에서 벗어나라. 결혼은 말 그대로 생활을 그대에게 몰고 올 뿐.

"나의 사랑은 그런 식이었다. 사랑은 평화라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그러나 나의 사랑은 도무지 평화를 이해하지 못했다...그렇다. 나는 사랑을 전쟁처럼 하고 있었다. “ (P.216)

박부길과는 다르지만 내게도 사랑이 있었나보다.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건 차라리 탈 고독 욕구가 아니었을까 회의도 든다. 아니면 약간의 동정심과 정욕의 복합체. 뭐라고 지칭하건 내게 결혼이라는 걸 해보게 한건 그녀, 그리고 그 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부담스러워 하였다. 그땐 난 사랑하는 방법을 아직 몰랐다. 사랑해야겠다는 마음의 준비와 각오도 미처 없었다.

만물이 그러하듯 생(生)도 양면을 지닌다. 보통의 우리는 생의 긍정적인 면, 생의 밝은 면만을 주목하고 바라본다. 고통과 슬픔 없이는 참다운 인간은 완성되지 않는다. 생의 드러나지 않은 면, 즉 어둠속에 숨어있는 부분이야말로 인생의 진정한 본질이 아닐까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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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10.8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그곳이 어디든 - 현대문학 창작선
이승우 지음 / 현대문학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생의 이면><식물들의 사생활>로 급속도로 나의 호감을 사로잡은 작가의 신작이다. 그간 도서관에서 대출해 보다가 이번에 모처럼 마음먹고 구입하였다. 그것이 최소한도의 인사치레가 아닐까 자위하며.

이승우의 스타일은 여전하다. 그의 스타일이라니? 그의 소설은 관념적 또는 사변적이다. 사건이나 행동 묘사보다는 심리분석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더욱 심리기술을 인간 존재의 근원까지 밀어붙인다. 설마 설마 하다보면 이미 한계상황에 다다른다. 그 점이 내가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승우의 글쓰기 특징은 사변적이라고 하였지만 또한 현학적이기도 하다. 그는 작중인물의 심리기술을 동어반복적인 언어유희로 표현하길 좋아한다. 여기에서는 좀 더 성향이 강화되었다. 이 작품에서 그런 부분을 빼면 분량이 한 사분의 일은 줄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곳이 어디든>은 뭐랄까 너무 어깨에 힘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자신의 스타일을 힘껏 밀고 나간 점은 좋지만 다소 무리한 설정과 구성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소설적 허구는 이른바 ‘그럴듯함’을 전제로 한다. 처음부터 만화적 허구도 존재하지만 내 생각에 작가는 그런 방향으로 내용을 전개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물론 그러함에도 읽는이의 손끝을 붙잡아매는 전매특허의 박진감은 여전하다.

이 소설은 출발부터 다분히 짙은 허구성을 내포하고 있다. 유는 지방 발령 아니면 사표에서 선택의 여지없이 서리로 내려온다. 서리는 서남쪽 바닷가 근처의 어느 곳이다. 그곳이 어디든, 그는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유와 아내의 관계는 특이하다. 이미 예사로운 부부관계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아내는 서리로 가는 유를 떠나서 몸이 망가진 옛 애인에게 가버린다.

그리고 서리에서 마주치는 적대적인 자연과 사람들. 이 과정에서 유는 늪에 빠져 허우적대듯이 아니면 개미지옥에 빠진 한 마리 개미마냥 버둥대며 서서히 서리에 가라앉는다. 여기서 서리는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폐쇄적인 악의 소굴이다. 일단 서리에 오면 죽든가 밑바닥에서 순응하며 연명하든가 대안이 없다.

그러기에 미친 노아는 동굴에서 세상의 종말을 대비하여 영원한 집, 곧 관을 만들고 있다. 서리라는 지옥같은 현실은 찰나에 불과하다. 영원한 내세에 평화와 행복을 누리리라. 그러나 그의 딸과 유는 여기에 순응할 수 없다. 그건 너무 자포적이며 수동적이다.

위태롭게나마 사실성을 유지해 나가던 소설은 마지막 장면에서 일대 압권을 보여준다. 서산봉의 화산 폭발. 여태까지의 작가가 보여준 치열성을 생각해보면 너무나 안이한 결말이다. 노아의 홍수처럼, 화산 폭발은 서리를 정화한다. 서리를 탈출하려는 유와 노아의 딸의 시도 자체를 봉쇄한다. 거기에 유의 아내와 남자마저도.

이제 작가 이승우는 한 고비에 다다른 듯하다. 보다 진일보하려면 자신의 스타일에 변화를 도모하던가 아니면 보다 내면적 심화를 꾀하든가. 그의 선택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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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8.1.13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캐리커처로 본 여성 풍속사
에두아르트 푹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젊은 남성들에게 거리는 즐거움과 유혹의 장소이다. 좌우를 둘러보자. 혹독한 겨울바람에 여성들은 그들의 늘씬한 다리를 레깅스를 이용하여 한껏 드러내고 있다. 감추지만 감추지 않는 미덕. 한여름은 어떤가? 점점 짧아지기 시작한 치마길이는 그저 미니스커트라고 부르기가 멋적다. 초미니스커트로 싱싱한 매력을 뿜어내는 맨 다리를 드러낸다. 불과 십수년 전과 비교해도 혁명적인 변화이다. 더구나 봉긋한 가슴을 타인에게 노출하는 의상도 인기를 끌고 있다. 노출의 강도는 해마다 더해간다. 이제 살짝 노출은 자연스럽게 여길 정도다.

이러한 패션이 여성들의 단순한 자기표현 내지 자기만족이라고 여기는 시각은 너무 안이하고 순진하다. 비록 여성들은 부인하겠지만 이는 암묵적으로 남성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과 노력의 산물이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의 사회 질서가 여성을 향락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여성은 죽는 날까지 영원히  관능을 자극하는 도구의 역할을 하도록 강요받는다. 여성들 대부분이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이렇게 행동할 뿐이고, 이른바 교양있는 여성들도 자신이 어떤 법칙을 따르고 있는지, 자신의 행동이 추구하는 효능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전혀 없다."(P.281)

저자에 따르면 "지극히 잘 계산된 여성적 교태의 형태로는 우선 '위에서 아래로'든 '아래에서 위로'든 방향을 불문하고 나타나는 노출을 들 수 있다...여성들 대부분은 아름다운 자신의 다리를 아주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므로 다리의 장점을 잘 드러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다..."(P.281~283)

무엇보다도 20세기초에 이러한 선구적인 저작이 나올 수 있었다는게 놀랍다. 패션의 사회사든가 하는 영역은 과문이지만 아직 국내에서 심도있게 논의가 이루어졌다는 말조차 듣지 못하던터이다. 과연 <풍속의 역사> 저자다운 안목과 관록이다.

'캐리커처'는 지금도 비주류의 표현 방식이다. 신문 한구석에 한 컷짜리 만평으로 아니면 길거리 화가들의 용돈벌이 수단일 뿐, 이것이 서양 근대사에서 대대적으로 제작되어 왔고 저자 푹스는 혜안을 가지고 이의 가치를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캐리커처는 단순한 희화화가 아니다. "진실은 평범함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극단에 놓여 있다. 극단적으로 과장해야만 사물의 본질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다."(P.736) 여기에 캐리커처의 본질과 가치가 위치한다.

캐리커처의 본격적인 등장은 봉건시대가 끝나고 시민계급의 사회의 주류로 부상하는 것과 맞물려 있다. "탁월한 캐리커처 작가들은 근대 시민계급이 넘치는 힘을 이에 상응하는 형태로 마음껏 밯뤼하는 시기가 도래해서야 등장한다."(P.325) 종교의 영향력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절 캐리커처의 표현방식은 불손하게 보였을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비꼬고자 하는 대상이 애매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리라. 교회 아니면 신의 국가? 그래서 인간 삶의 방식이 다양해지고 사상이 호흡을 비교적 자유로이 내뿜을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해서야 캐리커처도 햇볕을 쬐기 시작한 것이다.

푹스는 특히 이곳에서는 캐리커처를 통해 여성 풍속의 변천을 살피고 있다. 미리 말해두지만 여성 풍속의 변화는 단순한 취향과 변덕의 산물이 아니다. 즉 여성 사회사(P.737)라고 지칭해도 무방하다.

위에서 언급한 노출과 교태로 돌아가자.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비난하지 않는다. 이는 여성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교태가 결코 부도덕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하게 강조해야 한다. 교태는 성생활에서 여성이 지닌 수동적인 역할 때문에 필요불가결"(P.305)하다고 오히려 도덕적 타당성을 옹호한다. "여성의 교태는 타고날 때부터 지닌 수동성 때문이므로, 대부분의 여성이 교태도 타고난다는 사실을 확실히 해두자."(P.271)

저자의 인식이 지나치게 편향적이라는 비판도 제기될 수 있다. 보부아르라면 펄펄 뛰고도 남음이 있겠다. 그런데 푹스는 오히려 역공을 편다. 초기 여성해방운동의 목표가 잘못되었다고 말이다. "여성의 완벽한 정신적인 해방을 추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정신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데 있다. 남성들에게는 능동적인 성의 특성에 맞는 창조적이고 지적인 능력이, 여성들에게는 수동적인 성의 특성에 맞는 깊은 감정이 날 때부터 주어졌다는 사실을...자연적인 이분법을 인정함으로써 이상적인 인류 발전의 기초를 놓을 수 있다."(P.715~716) 차별이 아닌 차이를 인정하자, 근래 많이 회자되는 슬로건의 본의를 푹스는 일찍이 외쳤다. 그의 선구적 시각은 아리스토텔레스, 스펜서, 쇼펜하우어 등을 비판하는 장면(P.536~537)에서 명확히 알 수 있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위에 내재하는 것은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한, 그리고 가장 오래 지속되는 계급 통치일 뿐이라는 사실"(P.537)을 그는 반복하여 주장한다. 

피지배계급인 여성에게 인생을 업그레이드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럴듯한 '바지'를 잡는 것이다. 그래서 '바지전쟁'이라는 캐리커처가 나왔다. 야한 수영복을 입은 자신을 비난하는 친구에게, 자신은 지참금이 이것 밖에 없다고 해명하는 캐리커처 역시 이를 반영한다. 여류작가의 유명한 소설 <오만과 편견><이성과 감성>은 어떤가? 당시 사회에서 젊은 여성들의 모든 관심이 잘난 신랑감을 잡는데 집중되어 있음을 있음을 알 수 있다. 결혼에 목매다는 여성을 한심해 해서는 안된다. 그들에게는 생계가 달려있는 문제다. 독자적인 생활수단이 전무한 그들에게 사회,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가장 합리적인 행동을 하는 셈이다.

그리고 여성의 사회 진출과 자본주의의 관계도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여권의 신장이 언제나 사유재산과 생산양식의 변화와 보조를 맞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여성 계급들이 차례로 자영업과 가사 노동에서 벗어나 다른 일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현상은 자본주의와 대기업이 발달하면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엘렌 케이)"(P.713)

이상을 감안하면 여성 풍속의 변화, 모드(패션)는 의미를 갖게 된다. 코르셋, 데콜테, 허리받이 치마, 굴렁쇠 치마, 크리놀린, 퐁탕쥬 등 용어도 생소한 모드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여성으로 하여금 남성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에서 모드를 가장 중요한 도구로 사용하도록 강요한다...의복은 교태의주요 형태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대이다"(P.421) 따라서 모드(패션)은 속성상 항상 새로움을 지향한다. "눈에 띄는 것은 아름다움이나 조화로움이 아니라,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것이다...두드러져 보이는 방법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의복, 그중에서도 새로운 의복이다. 그러므로 '늘 새롭게!'가 표어가 된다. 모드는 매일 자신의 형태를 바꾸고, 여성들은 언제나 새로운 모드를 통해 자신의 매력, 육체와 정신과 물질의 소유 상태를 온 세상에 보임으로써 이 표어를 충실히 따른다."(P.421~422)

그렇다면, 캐리커처로 보는 여성 풍속사(사회사)의 의의는 무엇일까, 하필이면 캐리커처를 통해 여성사를 파악할 이유가 존재하는가? 저자의 답변은 서론에 나와있다.

"여성의 캐리커처는 인류 양심의 한 부분이라는 것, 이것이 비밀스러운 반어법이다. 풍자적인 점층법을 통해 여성의 모습을 지독하게 추하고 부자연스럽게 그리는 모든 미학적, 도덕적인 탈선은, 기본적으로는 신이 만든 아름다운 피조물의 모습이 그냥 사라지게 둘 수 없으며, 반대로 이것이 원래 가지고 있던 권리를 찾게 해주자는 욕구, 즉 이것이 언젠가는 자신의 원래 성향대로 완전한 것이 되도록 하게 하자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캐리커처가 보여주는 의식적인 추함만큼이나 진정한 아름다움을 조용하게 장려하는 것도 없다."(P.48~49)

언뜻 말초적 흥미만을 자아내기 쉬운 소재로 저자는 묵직한 저작을 만들어냈다. 1세기전이라는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선구자적 혜안은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물론 저자를 비판할 여지는 충분하다, 그의 여성관, 여성해방운동에 대한 비판 등. 하지만 옮긴이 말마따나 요즘도 여성에 대한 인식이 획기적으로 변모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자. 남성이든 여성이든. 레깅스와 미니스커트, 클리비지 룩, 시스루 룩, <미녀는 아름다워>가 보여준 성형 광풍 등은 우리 사회가 아직도 저자의 분석이 유효함을 입증하는 바로미터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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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8.1.25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탈레반의 납치사건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관심이 조금은 늘어난 듯 싶지만, 논의의 초점은 인질들의 현지 활동과 종교단체의 편협한 신학관에 집중되어 있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 문화(종교를 포함한) 상대주의를 존중하는 한계가 어디인가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런 면에서 이것은 문학작품이 아니라 논픽션을 픽션의 형식을 빌어 구현한 것 뿐이다. 이를데 없는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준엄한 문제제기가 담겨 있다.

더불어 작금의 아프간 사태의 시대적 배경을 더 잘 이해하고 싶다면 강추하련다. 소련의 침공과 저항전, 소련의 철수와 저항군의 카불 입성. 저항군의 분열과 내전. 난민들 사이에서 세력을 키운 골수 이슬람원리주의자 탈레반의 등장과 현상까지 일목요연하게 사태를 꿰뚫어보게끔 도와준다. 이 점이 미국인들에게 커다란 호응을 받게 된 연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소설이니만큼 문학적 매력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마리암. 불가항력적인 라시드와의 결혼. 몇 번의 유산으로 완전히 라시드의 종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고 로켓포 폭격으로 일가족을 잃은 라일라. 살기 위하여 라시드를 받아들인다. 그녀는 마리암과는 달리 신식 교육을 받았으므로 내심은 굴복하지 않는다. 심해지는 라시드의 학대와 마리암의 살인. 이렇게 소설은 70년대부터 지금 이순간까지의 두 여인의 삶을 시대 상황과 결합하여 비교적 담담하게 그린다. 너무 비참해서 눈물을 뚝뚝 흘려야 할 순간임에도 오히려 작가는 독자를 다독이는 듯 때로는 무심하기조차하다.

아프간에서도 일상적인 삶이 영위되었다는 것이 놀랍게 다가왔다. 희노애락이 존재하고 가족끼리 개인과 개인의 자유로운 행동이 보장되는 사회. 내가 본 아프간은 언제나 전투의 참상에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아프간 여성들은 물론 가장 큰 피해자이다. 그들이 탈레반 치하에서 겪는 어려움은 이 책에서도 잘 나와있다. 여성을 이등 인간으로 간주하는 편향적 시각. 이는 반대로 남성에게는 거의 무한한 자유를 제공한다.

"남자가 자기 집에서 무슨 일을 하든 그건 그 사람의 문제입니다...우리는 규칙상 개인적인 가정사에는 개입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러시겠죠. 남자한테 유리할 때만 그렇겠죠." (P.360)
 
이것은 라시드에게서 탈출하려고 하다가 버스 터미널에서 잡힌(단지 동승하는 남자없이 여행한다는 이유만으로) 라일라와 경찰의 대화다.

문득 라시드가 인간적으로 불쌍하게 여겨진다. 그에게 다른 아프간 남성들보다 심하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의 문화적 전통에 충실하였다. 단지 성격이 조금더 괴팍하였을 뿐. 중간중간의 정세 분석을 보면 그는 결코 막무가내의 몰상식한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국외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가치관과 태도는 어이가 없을 정도다. 그도 체제의 희생자이다.

나는 문화상대주의자(문화다원론자)다. 우리 민족의 문화와 종교가 타인의 것보다 우월하다고 여기고 싶지 않다. 가급적이면 일방적인 시각을 벗어나 당사자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으레 오해와 편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나의 일방적인 주관과 의사를 타방에 강요하는 것은 커다란 폭력이다. 

그럼에도 일정한 한계는 설정되어야 한다. 개인의 자유로운 판단과 의사결정을 통해 선택권이 부여되어야 한다. 개인의 자유 선택을 억압한다면 제 아무리 고상하고 훌륭한 가치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 자체가 이미 비인간적이고 불합리하다.

탈레반이 국제 사회에서 비난받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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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12.21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