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사라진 역사
성삼제 지음 / 동아일보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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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저자는 2001년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이 발생했을때 구성된 일본역사교과서왜곡대책반 실무반장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수년간 활동기간 중 개인 비망록에 기록해 둔 내용이 이 책의 토대가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약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전문 역사학도가 아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서 전문적이고 민감한 역사적 논쟁을 해결하고자 섯부른 시도를 하지 않는다. 단지 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저자 나름대로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드는 사안을 차곡 차곡 정리하여 우리 앞에 이해하기 쉽게 제시하고 있다. 사안의 쟁점은 무엇인지 대립되는 논지의 요점은 어떠하며 감추어진 약점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나도 일찌기 소시적에 역사학도를 꿈꾸고 하였다. 필마단기로 전장에 뛰어들어 난맥으로 뒤엉킨 우리 고대사를 한칼에 정리해버리리라. 그래서일까, 이러한 저자의 노력에 부러움을 금할 수 없는 한편 그 내용에 대해서 새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저자의 말마따나 우리 고대사는 신화와 역사의 울타리에서 아직 빛을 못 보고 있다. 도대체 어디까지를 역사적 사실로 인식해야 할지 때로는 답답한 심경이며 그 한복판에 바로 고조선이 놓여 있다.

전부터 우리 사학계의 맹목적이기조차한 수구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학문에 대해서는 열린 태도를 견지해야 함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데 다들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새로운 견해, 새로운 발견을 굳이 외면하는 연유는 무엇인지 궁금하기 이를데 없다. 고조선의 국가형성 여부에 대한 논쟁도 엄정한 학문적 시시비비를 가리기 보다는 그저 귀를 막고 자신의 주장만을 되풀이하는 형국이다.

고조선의 강역과 한사군 위치 문제는 익히 들어본 내용인데, 명도전이 고조선의 화폐였을지 모른다는 가설은 신선하다. 삼국유사 변조 논란은 광개토대왕비 변조를 연상시키니 우리 고대사는 무엇하나 올바르게 자리잡힌게 없구나 싶다.

무엇보다 '규원사화'나 '환단고기' 같은 재야사서와 재야사가들의 주장을 단순히 재야라고 또는 위서라고 일언지하에 무시하는 소위 정통사학계의 편협성이다. 그것들이 위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글자 몇 개 가지고 꼬투리를 잡을게 아니라 그 담겨있는 내용을 하나하나 짚어보고 그 진위를 파악하는게 진정한 학문적 태도이다. 설사 후세인이 저자라고 하더라도 순수한 창작을 했다기 보다는 무언가 참고도서가 있지 않았을까, 그러면 일부는 진실이 아닐까 이런 적극적 자세가 아쉽기 그지없다.

천문학계의 주목할 만한 성과를 아직 정통사학계는 받아들이고 있지 않는 듯하다. 고대사 연구가 문헌이나 고고학의 차원을 넘어서 자연과학의 협조를 받는다면 그 성과의 폭은 과거를 훌쩍 뛰어넘을 수 있다.

고조선의 역사에 대해서는 누구도 진실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진실을 알기 위한 과정에서 무수한 시행착오와 오류는 불가피하다. 오류를 인식했을때 오류임을 인정하고 열린자세로 새로운 성과를 수용할때 우리 고대사는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은 올바른 민족성 정립에도 긴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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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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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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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와 더불어 조지 오웰의 대표작으로 명성높은 소설이다. 이제사 접하게 되니 만시지탄을 금하지 못한다. 어서 빨리 <1984>도 읽어야하련만.

이 소설은 스탈린 체제하의 구 소련을 풍자한 정치우화로 성가가 높다. 출판 당시인 1940년대에는 두말할 필요없이 모든 독자가 암암리에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미 시절이 경과한 오늘에는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중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체제 전복에 성공한 혁명(쿠데타)세력이 스스로 반동화하는 과정을 그린 일반독재체제를 비판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충분하다. 인간 내면에 깊숙이 숨겨진 어두운 인간성을 설파하는 묘미를 갖추고 있다.

우화답게 어투는 너무 심각하거나 무겁지 않다. 무겁고 심각한 주제를 경쾌하고 해학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 바로 우화다.

조지 오웰은 <동물농장>과 <1984>를 통하여 어두운 미래의 정치체제를 그리고 있다. 그는 순수문학주의자로 간주하기는 어렵고, 그 자신도 문학을 사회고발의 한 형태로 인식하고 있다. 인간의 행동과 사고의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에 대한 맹렬한 분노와 저항, 그것은 1930년대 그가 스페인내전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싹트였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스스로 자율성을 가지고 자신과 사회의 밝은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모습은 비단 오웰 뿐만 아니라 모든이의 눈에 참으로 아름답게 여겨진다. 따라서 어떠한 미명화된 명목일지라도 이에 대한 반대행위는 반인륜으로 지탄을 받아야 함이 마땅하다.

<동물농장>이 단순히 당대의 특정 정치체제를 풍자하는 역할만 수행하였다면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문학으로서 수명은 이미 다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조지 오웰은 이를 뛰어넘어 보편적인 인간성에 대한 호소와 고찰을 주안점으로 삼고 있기에 당대성을 초월한 통시대성을 획득한 것이다. 문학은 문학 자체로 평가하자. 너무 많은 짐은 문학을 휘청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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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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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감역주 천예록 - 조선시대 민간에 떠도는 기이한 이야기
임방 지음, 정환국 옮김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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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고고한 선비들도 사적인 순간에는 허리띠를 풀어놓고 여유로운 마음가짐을 지닌 듯 하다. 그러기에 임방 같은 당대의 대신이 이와 같은 저작을 남겨놓았던 것이 아닐까싶다. 요즘으로 치면 순수문학을 하던 이가 대중문학작품에도 관심을 기울였다는 비교가 어떨런지. 이름도 낯선 <천예록>을 접하게 된 기회는 역시 하늘의 뜻이다. 내 무슨 수로 이와같은 고전을 알기나 하였을 것인가.

21세기의 우리 현대인도 마음 한구석에 귀신과 혼령, 이무기와 구미호의 상념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무더위가 시작되면 납량특집이라 하여 각종 공포영화와 '전설의 고향'류가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 마구 쏟아지는 현실이다. 모두들 꾸며낸 이야기로라고 치부해 버리지만 섬뜩한 기운에 오싹 몸을 떨기도 한다. 한밤중에 폐가와 흉가, 무덤에 가는 것을 극히 꺼림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임방은 17~18세기를 살면서 당시에 전해지던 각종 신기한 이야기를 유형별로 분류하여 두 편씩 기록하고 말미에 자신의 평을 덧붙이고 있다. 주로 임란과 병란 이후의 시기인지라 전란을 겪고난 민초들의 참담과 곤궁한 생활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임방은 정통 사대부 입장에서 신뢰성 여부를 평가하여 허황한 점은 날카롭게 지적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신이한 현상에 대하여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점이 이채롭다.

잘만 다듬으면 소위 판타지 문학이나 컴퓨터게임 등의 좋은 소재로 쓰일만한 내용이 한가득하다. 신선, 혼령, 귀신, 요물 등의 비현실성을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그럴듯한 단편들이 많은데, 유생과 기녀와의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 이야기가 여운이 남는다. '눈을 쓸다가 옥소선을 엿보다'가 바로 그러하다. 마치 춘향전을 연상시키는 애처로움과 질긴 사랑의 연줄이 가슴에 파고든다.

이런한 종류의 설화 민담집은 몇 편을 제외하고는 크게 알려지지 않은 게 많다고 한다. 기껏해야 <어유야담>이나 <고금소총> 외에 귓가에 스친 편명이 무엇인던가. 인간이 이성과 오성의 지배를 받는다고 많은 철학자들이 강변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민초들의 상식과 이성을 뛰어넘은 존재를 마음에 품고 산다. 그것이 낮게는 귀신, 요물이며 높게는 하느님과 부처님 등의 신성한 존재인 것이다. 이성은 머리를 끄덕이게 만들지만 감성은 가슴을 후벼파서 길이 흔적을 새긴다. 그리고 때로는 허황한 듯한 이야기조차 그것이 생성되고 유포되는 과정에서 당대인들의 마음의 편린이나마 반추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서양의 고전에 대한 관심이 높은데 비하여 아직 우리의 고전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높지 않은편이다. 우선적으로는 아직도 잠자고 있는 많은 우리 고전들을 발굴하고 일반인들이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문의 굴레를 벗겨 맛깔스런 우리말로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익숙하면서 우리 건국신화는 왜 이리 낯설게 되었을까?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 전질을 독파하여 로마 인명과 문화에는 바로 최근의 것처럼 통달하면서 왜 조선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수천년 수만리의 고리타분한 옛적 것으로 변모하고 마는가. 홀연 모든이의 기호가 일거에 변화하지는 않을 터이니 답답함을 하소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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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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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찰 - 선비의 마음을 읽다
심경호 지음 / 한얼미디어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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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과 사람의 따스한 연결고리를 복원하는 것]

요즘은 통상 편지 또는 서신이라고 일컬어지는 의사전달수단을 옛적에는 참으로 다양한 명칭을 사용하였음을 알고 저으기 놀랐다. 간찰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용어조차 낯선 척독은 또한 뭔지.

각설하고 이메일로 대치되어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수기 편지는 이메일과는 다른 묘한 뒷맛을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추신이란 것도 수기 편지에서나 필요하지 이메일에서는 언제라도 삽입과 삭제가 가능하니 말이다.

그러고보니 내가 편지를 써본지도 언제였는지 까마득하다. 군입대시 의무적 제출을 빼면 중고등학교 시절이 마지막이 아니었을까 싶다. 강제적 위문편지의 폐해는 그렇게 심대하였다. 마치 초등학생의 방학숙제였던 일기쓰기가 일기에 대한 조기 환멸을 불러왔던 것과 동일한 현상이다.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감있고 깊은 여운이 감도는 그런 글쓰기를 망치는 교육은 언제쯤 사라질 것인가. 며칠전 수시1학기 시험감독을 하였다. 논술고사 하나에 목매는 수험생도 애처롭지만 그들이 논술연마를 통하여 글쓰기의 즐거움을 깨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선인들은 얼핏 꼬장꼬장한 선비적 삶의 자세를 견지하였던 인물이라 할지라도 간찰과 같은 의외로 비공식적 부분에서는 대단히 유연하고 격의없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외형적 엄숙성에 대한 선입견을 지닌 내게는 매우 신선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 책은 고려시대의 이규보로부터 조선말 황현에 이르기까지 24명의 간찰을 선택하여 게재한 후 시대적 사회적 배경을 기술하여 더욱 그 간찰의 맛을 음미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역사속 인물인 정몽주와 이황, 이이 등의 개인적 말투가 간찰 속에서 새록새록 친밀감을 자아내는 묘미는 역시 간찰이라는 특수한 형식이 주는 장점일 것이다.

간찰에는 기본적 형식요건이 준비되어 있다. 받는이, 안부인사, 본문, 맺음말, 작별인사 등. 요즘 편지도 형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하물며 서양의 소위 레터(letter)도 형식면에서는 공통분모를 지닌다.

간찰에는 옛사람의 인간적 풍모가 물씬 배어난다. 당대의 학자들 간에 교제를 주고받기도 하며, 우정어린 조언을 교환하기도 하며, 스승이 제자의 안부를 걱정하며, 친구간에 격의없는 농을 주고받기도 한다. 또한 우국충정의 강렬한 염원을 담아 시국을 토로하는 간찰도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이 간찰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없지만 서로 떨어져 사는 부모자식간에 안부를 주고받는 따뜻한 모습도 볼 수 있다.

이제 간찰의 문화는 사라졌다. 우체국은 이제 금융기관으로 변모중이며, 편지와 엽서를 배달하기에 정신없던 우체부는 택배물품과 쓰레기광고지를 전달하느라고 여전히 바쁘기 그지없다.

간찰이 쇠퇴한 연유를 반추해 본다. 현대사회의 스피드는 간찰이 지닌 느림의 미학을 인내하기에는 부족할 듯 싶다. 보내고 받는데 짧게는 수 일, 길게는 수 개월이 걸리는 편지를 선호하는 자는 없다. 그러기에 내용과 안부를 신속히 전달하는데 편지는 부적합하게 되었다. 그러면 간찰은 영원히 사라질 운명일까.

꼭 그렇지만은 아니다. 디지털시대를 맞이하여 소멸될 운명에 처해졌던 아날로그음반들이 다시금 조용히 세를 확장하고 있다. 보다 빠르고 세련된 사회로 변모할 수록 사람들은 땀냄새나고 따스한 체온을 느끼고 싶어한다. 인간 자체는 결코 디지털이 될 수 없는 존재이다. 편지의 실용적 목적은 포기하자. 그리고 비실용적 목적을 부활시키자. 상호간에 인간미를 되살리고 쿨(Cool)한 마음을 웜(Warm)하게 덥혀주는 그런 간찰은 삭막한 인간관계를 촉촉하게 적셔주고 윤택하는데 큰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아내에게 간찰을 보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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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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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자서전 - 뮈토스의 세계에서 질박한 한국인을 만나다
김열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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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네의 전통적인 삶과 정신을 돌아본다]

일개인은 탄생에서 죽음까지 삶의 역정을 밟는다. 그리고 주마등처럼 스치는 과거의 흔적들을 자서전이라는 기록물 형태로 남긴다. 개개인의 인생 행로는 환경과 선택에 의하여 다양한 굴곡을 겪는다. 그러기에 개인사는 책 한두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토로하지 않던가.

자서전이 어디 개인에 국한하랴. 제각각인 삶도 개인의 집합체인 민족 단위에서 바라볼때 일정한 틀을 가지고 대체적으로 평균적인 형태를 유지하는 정규분포에 수렴된다. 그러기에 타민족과 구별되는 고유성을 지니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한국인은 어떠한 삶의 역정을 따르는지 역시 탄생에서 죽음까지 그 길을 추적하고 있다. 다만 여기에서 저자는 보다 전통적인 한국인의 모습을 많이 조명한다. 그것은 저자가 민속학을 전공한 이력에서 찾을 수 있다.

책은 크게 7부로 대별된다. (탄생에 앞서 선존하는) 어머니, 탄생, 자라고 크고, 사랑, 결혼, 세상살이, 죽음 이렇게 소제목만 일별해도 대강의 흐름이 짐작된다.

흘러간 과거는 아름답다고 흔히들 주절거린다. 옛적의 아픈 상처와 체험도 시간의 작용으로 아련해지고 어느덧 환한 웃음으로 회상하게 된다. 인간이 망각의 동물인 점이 이렇게 편리한 법.

하지만 삶이 결코 즐겁고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러기에 저자는 우리네 삶을 맵고 짭다는 의미에서 맵짠 인생이라고 표현한다. 땀범벅인 짠지 인생이라고도 한다. 그만큼 여기에는 장미빛으로 채색된 그런 환상을 없는 것이다.

저자가 파고드는 소재는 우리민족의 신화와 전설, 민담 등이다. 물어머니와 산어머니의 존재, 그리고 웅녀의 슬픔에서 시작하여 혼불과 오구굿판에 이르는 다종다기한 설화는 우리의 문화유산이 그리 풍부했던가 새삼 놀라움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고단한 인생살이를 연상하면 자꾸만 우리네 어머니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그만큼 과거 여성의 생은 '한'으로 점철되었던 탓일까. 저자가 페미니스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이런 측면에서 극히 자연스레 나타난다.

'신방에 앉은채 돌이 된 신부' 이야기는 그런 면에서 한맺혀서 죽어도 죽지 못하는 그런 아픔을 짠하게 보여준다. 그 가슴속 슬픔이 얼마나 크고 아팠던 것인지. 일제시대와 빨치산을 배경으로 한 '아비와 자식의 핏줄을 잘라 낸 이야기'는 또 천륜마저 무너질 수 밖에 없던 우리의 굴곡깊은 역사가 새삼 상처가 된다.

그럼에도 "생명은 그만큼 무서운 것, 늠렬한 것! 옷깃 여미고 또 여미고, 간수하고 다듬어야 하는 것!"을 '상복 입은 산모'는 침묵 속에 절규한다. 그리고 "죽음은 단지 소멸이 아니다. 미완의 삶을 억척같이 완성하는 자가 다름 아닌 죽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죽음의 꿈'에서는 알려준다. 이렇게 인생은 삶 곁에 죽음을 동반하고, 죽음과 삶이 한바탕 흐드러지게 어우러지는 연극이기도 하다. 이 무대 한복판에서 각자가 맵짠 삶을 꾸려 나가며 개인의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며 동시에 한국인의 자서전도 그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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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6.8.1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