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아 전쟁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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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시저,케사르)는 무려 2,000여년도 더 옛적 인물이다. 기원전 거인의 육필기록을 이렇게 접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경이로운데 하물며 그 내용의 충실성은 되새김질하고 싶게 만든다.

기존까지 내게 알려진 카이사르의 윤곽은 그저 로마공화국에서 제정을 시도하려다 공화파에 의해 암살당한 정치가 이게 전부이다. 물론 "주사위는 던져졌다"와 같은 경구는 익숙하지만.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카이사르가 얼마나 대단한 위인인지 그가 단지 운이 좋아 로마최고의 자리에 올라섰던게 아니었음을 새삼 깨닫게 만든다.

그의 나이 사십대를 몽땅 쏟아부은 갈리아 정복전, 그것은 정치적 라이벌들에 비하여 군사적 업적이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카이사르가 인생을 걸었던 모험이었다. 상대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갈리아인들. 당시의 갈리아는 오늘날 프랑스 전체와 플랑드르 및 독일 일부와 스위스를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였다. 이탈리아 본토와 스페인, 발칸지역 그리고 소아시아와 아프리카 일부를 차지한 로마인들에게 지중해를 둘러싼 일부 틈새를 메꾸어 명실공히 '로마의 호수'로 삼고 싶은 욕구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리라.

어쨌든 카이사르는 과감히 갈리아로 진출하였다. 그리고 갈리아 부족들간의 갈등과 역학관계를 조정하여 강약 전법을 교묘히 구사하여 숫적으로 지리적으로 불리한 정복전을 성공적으로 끝내었다. 그리고 곧바로 브리타니아로 진격하였다. 한때 세계를 지배하였고 여전히 유럽문명의 핵심을 자랑하는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은 로마의 갈리아정복에 대하여 감사의 심정을 품고 있을지 궁금하다.

누구나 자유와 재산을 침탈당하면 그대로 가만히 있지는 않는게 인간사의 법리다. 갈리아인에게 로마인의 고향을 침입한 적국의 군대이다. 그들이 강력한 저항투쟁을 벌이는것 또한 응당 그럴법하다.

카이사르의 탁월함은 단순히 전쟁사령관이 아니라는데서 오히려 빛을 발한다. 그는 군대를 지휘할 뿐 아니라 고도의 심리 외교전을 수행하며 동시에 갈리아인들에게 교역을 확대하여 로마의 지배를 받는게 실익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며 대개의 경우 너그럽게 항복한 이들을 처리하여 인망을 높이 쌓는다. 힘과 덕망이 갖추어진 지도자에게 고개를 수그리는 것은 부끄럽지 않은 법. 그래서 갈리아인들은 로마가 아니라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였다. 그래서 훗날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치열한 내전을 전개할 때도 카이사르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였다.

참으로 놀랐던 점 한가지는 로마군의 무시무시함이다. 체격이 상대적으로 거대한 갈리아인과 게르만인을 상대해서 막강한 보병 공격격를 발휘한 로마인들이 당시 서구세계를 지배하고 수세기 동안 지배했던게 결국 다 연유가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공성작전을 벌일때의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방벽을 쌓거나 진지를 구축하는 무모하다시피한 전략이 수시로 채택되는 것을 보면 당시의 갈리안인들의 기막혔을 표정이 상상이 간다.

결국 카이사르는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복속시키고 폼페이우스와 일전을 벌인후 로마 최고의 지위에 오르며 각종 개혁정치를 펼치다가 비운의 칼날을 맞는다. "브루투스, 너 마저도..."로 유명한 그의 최후는 이제껏 공화파와 제정파의 갈등으로만 이해하였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브루투스는 공화정을 수호한 뛰어난 인물로 회자되었다.

그런데 당시는 공화정의 감내할 수 없는 누적된 위기를 겪고 있었기에 공화정체제는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해설을 통해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브루투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원로원파의 수단에 불과한게 아니었을까. 만약 카이사르가 그대로 성공적인 개혁정치로 로마를 이끌어갔다면 그후의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또다른 내전의 불꽃은 불붙지 않았을 것이며 로마의 미래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짙은 의구심이 상상의 똬리를 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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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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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내전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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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는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정복하고 이후 원로원과 대립하다가 마침내 원로원파를 뒤에 업은 폼페이우스와 일대 결전을 벌인다. 카이사르로서는 평화를 원한다면 본인의 죽음을 감수해야 하는 절박한 처지에서 모험에 몸을 맡기는 외에 선택의 대안이 없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그토록 무정하고 모진 것이다.

수년간의 내전 끝에 마침내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일파를 진압하고 로마 제일의 권력가로 부상하여 이후 제정의 토대를 마련하다가 암살을 당하게 되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사실 내전에 관한 이야기는 카이사르가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 외에 자세한 이야기는 일반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카이사르 본인이 직접 기술한 이 기록에 따르면 그의 승리는 결코 간단한게 아니었음을 알게된다. 폼페이우스 역시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일찌기 젊은시절부터 장군으로서 재능을 인정받아 오리엔트 일대를 정복하여 개선장군이 되었던 것처럼 명망에 있어 결코 카이사르에 뒤지지 않았고 더구나 막강한 원로원이 뒤를 받치고 있으니 카이사르보다는 여러가지 면에 있어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너자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를 탈출하는데 그것은 로마에는 카이사르를 대적할 군단이 없었고 그의 근거지는 소아시아 일대였기 때문이다. 최근 정복한 갈리아를 제외하고는 로마의 모든 영역이 카이사르보다는 폼페이우스 세력권에 가깝다고 하는게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초기에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호민관 쿠리오에게 아프리카 진격을 본인으 히스파니아 제압에 주력하였던 것이다. 그로써 일단 서방과 남방을 완전히 제압한 후 동방의 라이벌을 압도할 방책이었던 것이다. 전략에서 가장 하책중의 하나가 양편의 적과 싸우는 것임은 익히 알려진 것이다.

양진영의 수장이 모두 당대의 용장이었던만큼 그들의 세력대결은 팽팽하기 그지없었다. 히스파니아는 굴복시켰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실패하였으므로 일대일인 셈이다. 이제 보스간의 대결이 남았는데 무대는 오늘날의 그리스지역이다. 해군력에서 열세였던탓에 많은 부대를 이끌지 못한 카이사르는 더구나 요충지 디라키움 점령에도 실패함으로써 많은 난관에 봉착하였다. 보급도 부족한데다 병력에 있어서도 절반에 미치지 못한 누가 봐도 패배가 예견되는 상황에서 카이사르는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일거에 균형추를 옮겨 놓았다. 그리고 폼페이우스는 그리스를 포기하고 시리아로 향했지만 세상은 패자에게 냉담하게 돌변하여 결국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일단 내전기는 여기에서 펜을 거둔다. 아직 내전이 종료된 것은 아니지만 운명이 더이상의 글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점에서 유리하였던 폼페이우스가 몰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만심이 아니었을까.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상황에서 지나친 자신감으로 군기가 해이해 졌으며, 지도층끼리는 내전 이후의 세력다툼에 여념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로지 독한 승리에의 일념으로 충만한 카이사르군에게 숫적인 차이는 무의미한 것이다. 용병 한명은 겁병 백명은 당하고도 남는다.

카이사르 이전과 이후 로마의 대외정책은 많은 차이를 보인다.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정복과 뒤이은 이집트 합병으로 실질적인 로마의 국경선은 확정되었다. 그후의 공방전은 충동적인 정복욕을 제외하고는 단지 국경을 지키고자 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언제나 대외를 향하던 로마군단의 창끝이 자국민에게도 향할 수 있음을 그리고 치열하고 잔인하기는 과거 못지 않음을 내외에 천명하였으니 위대한 공화정으로서의 로마는 사실상 문을 닫는 것이다.

카이사르가 씨앗을 뿌린 제정 덕택에 로마가 수백년을 지탱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때문에 불과 수백년밖에 버티지 못했는지는 쉽사리 판단하기 어렵다. 한가지 확실한 점은 카이사르는 그 전환기의 로마에게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거대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이천여년전의 인물들이 행동과 사고가 마치 현재 지금의 것과 하등의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역시 인간성이란 영속적인 존재인가. 당시 우리나라는 전설상의 단군시대였고 이제 삼국이 태동되는 즈음인데 로마인들은 이렇게 가치높고 충실한 기록물을 역사적 유산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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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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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의 영혼
오히예사 지음, 류시화 옮김 / 오래된미래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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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헐리우드 서부영화로 각인된 아메리칸 인디언의 이미지는 견고한 틀을 이루어 좀체로 깨어지지 않았다. 그만큼 자본과 권력의 힘으로 조작된 진실의 파급력은 막강한 것이다. 그러나 소수의 꾸준한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조금씩 그동안 뭔가 잘못알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온 유럽 이주민들은 결코 무주공산의 무인도에 정착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수만년동안 아메리카대륙의 땅과 기후에 적응하여 지속적인 삶의 시스템을 구축해온 원주민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굴러온 돌은 더불어 살아야 할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다. 무참히 폭력을 행사하고 살해하더라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인간보다는 동물과 가까운 생명체로 무시하고 말았다.

그래서 원주민이 정착민 정부와 맺은 협정은 언제나 기만당하기 일쑤였고 얼굴 흰 자들은 계속하여 원주민의 땅을 요구하였다. 눈엣가시같은 원주민은 소위 인디언보호구역이라 하여 척박하고 불결하기 이를데없는 조그만 공간은 제약하여 한발짝도 외부로 나가지 못하게 한후 위반시 가차없이 죽음으로 응징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미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뿌리이며, 앵글로색슨 문명의 우월성의 감추고 싶은 실체이다.

가끔씩 전해지는 오늘날의 인디언의 삶도 그다지 나아진 것 같지 않다. 여전히 인디언보호구역은 존재하며 의식있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인디언들의 현실을 볼 때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멸종이 결코 머나먼 일은 아닌듯싶다. 오히려 미국정부로서는 불감청고소원이라고 그러길 소망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할일은 없는데 생계비를 주니 술과 마약으로 찌들기 마련이며, 그 구역내에서는 그토록 철저한 마약류 단속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예사는 19세기 후반에 태어나 20세기 전반을 살아간 소위 인디언이다. 하지만 여타 인디언과는 다른 점이 그는 청소년기까지 전통 원주민으로 살아갔다가 후에 얼굴 흰 자들의 문명세계에서 그들의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는 점이다. 그당시 그가 겪어야 했던 모진 고초와 인내는 어찌 필설로 다하겠는가. 그리고 수십년간 원주민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고자 노력하였다. 원주민의 삶과 문화를 올바로 얼굴 흰 자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그에 따르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머릿가죽을 벗기는 일은 과거에는 없었다고 한다. 얼굴 흰 자들이 먼저 그런 관습을 유포시켰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서부영화는 얼마나 현실을 왜곡하였는가? 평화와 고요를 사랑하고 자연과 대지를 항상 품고 살았던 아메리카 원주민의 영혼은 정착민들의 선교와 술에 의하여 무너지고 말았다. 기독교의 유일신 주장은 자신들의 '위대한 신비'가 우상이지 않았을까 하는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술은 엄격한 가족간 전사간의 기초적 윤리와 존중을 바닥에서부터 깨뜨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코 겪어보지 못한 천연두와 콜레라 등 치명적 전염병의 광범위한 살포는 수많은 원주민 공동체를 일거에 무력화시켰다.

원래 씨족단위의 분산화된 삶을 선호하는 전통에다가 위와 같은 요인으로 인해 동부로부터 밀려오는 얼굴 흰 자들의 공격에 제대로 된 반격조차도 해보지 못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았다. 더우기 생명의 근원인 들소 개체의 인위적인 급격한 감소 또한 치명타를 날렸다.

이 시점에서 볼 때 아메리카 원주민이 과연 열등하여 오늘날의 위치에 있는게 당연하게 여겨질 것인가? 그들의 음악을 귀기울여 들어본 경험이 있는지 그들 자신의 나직한 목소리를 가슴깊이 새겨들은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그들은 결코 거짓을 말한 적이 없다. 폭력을 앞세우는 행동을 먼저 저지르지도 않았다. 오히예사는 울분을 삭이며 말한다. 소위 '얼굴 흰 자'들이 내세우는 기독교의 정신에 보다 가까운 것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이라고.

아직도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편견이 있는 이라면 제일 먼저 이 책을 통하여 그들의 닫힌 생각을 깨뜨릴 것을 권하고 싶다. 아직도 대중매체를 통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얼굴 흰 자들의 사고와 생활을 우러르면 사는데 익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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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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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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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읽지 않은 것은 일종의 '편견' 탓이다. 그녀의 글은 여성 자신의 일상사를 정밀한 소묘라는 인상이 강하게 자리매김하였다. 근자들어 동명의 영화가 개봉하면서 다시금 '오만과 편견'의 마케팅 붐이 일기 시작하였다. 그래 어차피 나름대로 문학전집에 수록될 만한 고전작품이라면...

베네트 집안에서 긍정적인 인간상은 첫째딸 제인과 둘째딸이자 주인공인 엘리자베스 외에는 나오지 않는다. 어처구니없는 어머니는 물론이고 아버지조차 냉소적이다. 나머지 동생들은 하나의 대칭적인 인간상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면 충분하다.

이 작품의 소재와 내용은 기존의 내 '편견'에 상당히 부합하고 있다. 관심사는 오로지 시종 '훌륭한 결혼'에 집중하고 있다. 작중 어머니는 어떻게하면 딸들을 좋은 환경의 남자에게 시집보낼까를 궁리한다. 요즘 자립적인 여성들이 보기엔 구태의연한 봉건적인 문화관의 표출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왜 이 소설이 그렇게 당당히 고전의 하나로 생존하게 되었을까 반추해 본다. 18세기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어디까지나 남성에게 종속되고 있었으며 독자적 생존수단을 가질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성의 인생에서 최고의 성공은 넉넉하고 훌륭한 집안 남성을 만나서 결혼하여 삶의 안정을 누리는 것이다. 만약 여의치 못한다면 남은 생 내내 형제에게 얹혀살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엘리자베스의 친구로서 나름대로 분별력과 사리를 갖춘 샬럿이 한심한 인물로 평가된 콜린스의 청혼을 적극적으로 유치한 것은 어쩔수없는 현실을 인정한데서 연유한다.

따라서 엘리자베스가 새로운 여성상을 대변하는 인물로 독자들(특히 여성들)의 환호를 이끌어낸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남성에게 의존하는 수동적 여성을 극복하고, 대단한 집안의 다아시와 당당하게 인간 대 인간의 자격으로 사랑을 줄다리기하는 모습에서 당시의 여성은 환희를 느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오늘날의 많은 여성들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만큼 아직 사회에서 여성들의 지위는 당시에 비해 진일보하기는 하였지만 월등한 그것은 아닌 여지가 많다.

이러한 소재와 배경을 염두에 둔다면 작품 자체는 그럭저럭 재밌게 볼 수 있다. 전체를 하나의 희극으로 본다면 말이다. 아버지 베네트의 냉소적 비평. 어머니와 동생들이 벌이는 때론 짜증날 정도의 소동, 특히 막내 리디아의 자유연애와 사랑의 도주. 빙리집안과 캐서린 영부인이 보여주는 잘난체하는 상류계급의 위선과 가식. 이 모든 것은 가벼움과 날카로움이라는 양면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오만과 편견'을 세계적인 문호들의 작품과 같은 수준으로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당대성은 갖췄지만 통시성이라는 요소에서 역시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내가 남성인데서 오는 '오만과 편견'의 영향이 없다고 또한 단언하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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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6.7.27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북회귀선
헨리 밀러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세계사 / 199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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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가에서 먼지를 떨어내고 책장을 펼쳐든다. 발행년도가 1991년, 벌써 15년이나 경과하였다, 그런데 난 한번도 구입한 후 한번도 이 책에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된 것일까.

앞뒤 표지를 뒤집어본다. 겉표지에는 '무삭제 완역판'이라고 큼지막하게 강조한 문구가, 뒷표지에는 '헨리 밀러 탄생 100주년 기념 출간'이 마찬가지로 뚜렷하게 보는이에게 들이대고 있다. 본고장인 서구에서도 오랜동안 외설을 이유로 출판금지 되었다고 하니 상업성을 위해서는 역시 마땅한 공략법이다.

꽤나 머리아프고 난해할 것으로 짐작되는 선입견을 깨고 초반부를 넘기자 이내 읽어나가기에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일관된 스토리를 기대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어렵다. 이는 나중에 해설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작품의 특징이자 작가의 작법이다. 그저 한 미국인인 '나'가 파리에서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단편적인 에피소드를 어찌 보면 나열한데 지나지 않는 인상마저 풍긴다. 하지만 작품 전체가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그래도 뭔가 내적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는걸 보면 분명히 그 이상임을 어려풋이나마 느끼게 된다.

이 작품이 '외설적'이라는 평가에는 나는 쌍수를 들고 반대하련다. 현대사회가 너무나 성표현의 과다한 개방으로 범람한 탓일까, 눈을 부릅뜨고 보더라도 외설스럽다는 표현이 눈에 띄지 않는다. 아마도 1930년대 당시의 보수적인 서양사회에서라면 그럴수도 있겠지만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시각도 변화되었다.

작가는 극한의 바닥까지 스스로를 추락시키면서 역설적으로 순수한 인간 본연을 되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새로운 현실의 깊이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수도의 뚜껑을 열고, ..." (180면)

'나'가 파리에서 무일푼으로 눈앞의 끼니를 걱정하고 여자들 엉덩이에 혀를 내밀면서도 그래도 미국 대신 파리를 택하는 것은 거기에 자유가 있어서다. 당시 미국은 경제대공황을 겪고 있었다. 실직과 기아에 허덕이며 '나'는 비인간적인 자본주의세계를 떠나 파리에 왔다.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닥치는 대로 약탈을 하고, 전대미문의 고통과 비참을 야기시키면서도 항구 평화의 수립을 꿈꾸고 있는 사자(死者)의 심부름꾼으로 온 것이다. 제기랄!"(284면)

그가 보는 파리는, 아니 세상은 "희망이 없는 세상, 그러나 절망이 아니다."(167면). 마치 색으로 치면 백색도 흑색도 아닌 회색이라는 것처럼. 그는 인생과 세상의 극한을 그리기 위해 극단적인 표현을 골라 사용한다. 황당하기조차한 비유와 표현들이 아무렇지 않은 듯 나열되는데서 일말의 역설적 자연스러움이 배어나온다고 할까.

"전기를 띤 창백한 여명의 창백한 빛 너머로 빈대 껍질이 파랗게 짓눌려 보인다. 몽파르나스 기슭에 수련이 꺾여서 시들어 있다. 썰물이 되어, 몇몇 매독에 걸린 인어가 쓰레기에 섞여 육지 위에 올라와 있다...모든 것이 서서히 하수도를 향해 되돌아간다. 한 시간쯤 구토물을 정리하고 있는 동안은 죽음과 같은 정적이 감돈다. 별안간 나무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한길의 끝에서 끝에까지 온통 미친 노랫소리가 울려퍼진다. 그것은 거리의 마지막을 알리는 신호다. 모든 희망이 일소되어 버린 것이다. 마지막 오줌을 배설할 순간이 온 것이다. 여명이 문둥병 환자처럼 스며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에피소드들 중간에 이따금 나오는 작가 자신의 개인적 사고와 견해를 피력하는 현학적이고 수사적인 말의 홍수를 피해갈 수 있다면 나름대로 흥미롭게 독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나친 선정주의적 기대는 접어두도록 하자.

갑자기 원제인 'Tropic of Cancer'의 어원이 궁금해져 사전을 뒤적거린다. 'Tropic'은 열대라는 의미 외에서 '회귀하는' 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Cancer'는 낯익은 '암' 외에 천문상에서 '게자리'라고 한다. 즉 게자리가 회귀하는 점을 이은 선이 북회귀선을 가리키는 듯. 참고로 남회귀선은 'Tropic of Capricorn'인데, 'Capricorn'은 '염소자리'를 가리킨다.

헨리 밀러의 다른 작품들의 출판 현황은 어떤가 하고 보니 몇 편 나와 있지 않다. 역시 대중적으로 어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 책은 절판되고 다른 번역본이 나와 있는데, 해설을 보니 이 책은 일어 중역판이라고 한다. 어쩐지 군데군데 오역과 모호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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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6.7.28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