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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의 영혼
오히예사 지음, 류시화 옮김 / 오래된미래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무수한 헐리우드 서부영화로 각인된 아메리칸 인디언의 이미지는 견고한 틀을 이루어 좀체로 깨어지지 않았다. 그만큼 자본과 권력의 힘으로 조작된 진실의 파급력은 막강한 것이다. 그러나 소수의 꾸준한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조금씩 그동안 뭔가 잘못알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온 유럽 이주민들은 결코 무주공산의 무인도에 정착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수만년동안 아메리카대륙의 땅과 기후에 적응하여 지속적인 삶의 시스템을 구축해온 원주민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굴러온 돌은 더불어 살아야 할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다. 무참히 폭력을 행사하고 살해하더라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인간보다는 동물과 가까운 생명체로 무시하고 말았다.
그래서 원주민이 정착민 정부와 맺은 협정은 언제나 기만당하기 일쑤였고 얼굴 흰 자들은 계속하여 원주민의 땅을 요구하였다. 눈엣가시같은 원주민은 소위 인디언보호구역이라 하여 척박하고 불결하기 이를데없는 조그만 공간은 제약하여 한발짝도 외부로 나가지 못하게 한후 위반시 가차없이 죽음으로 응징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미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뿌리이며, 앵글로색슨 문명의 우월성의 감추고 싶은 실체이다.
가끔씩 전해지는 오늘날의 인디언의 삶도 그다지 나아진 것 같지 않다. 여전히 인디언보호구역은 존재하며 의식있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인디언들의 현실을 볼 때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멸종이 결코 머나먼 일은 아닌듯싶다. 오히려 미국정부로서는 불감청고소원이라고 그러길 소망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할일은 없는데 생계비를 주니 술과 마약으로 찌들기 마련이며, 그 구역내에서는 그토록 철저한 마약류 단속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예사는 19세기 후반에 태어나 20세기 전반을 살아간 소위 인디언이다. 하지만 여타 인디언과는 다른 점이 그는 청소년기까지 전통 원주민으로 살아갔다가 후에 얼굴 흰 자들의 문명세계에서 그들의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는 점이다. 그당시 그가 겪어야 했던 모진 고초와 인내는 어찌 필설로 다하겠는가. 그리고 수십년간 원주민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고자 노력하였다. 원주민의 삶과 문화를 올바로 얼굴 흰 자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그에 따르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머릿가죽을 벗기는 일은 과거에는 없었다고 한다. 얼굴 흰 자들이 먼저 그런 관습을 유포시켰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서부영화는 얼마나 현실을 왜곡하였는가? 평화와 고요를 사랑하고 자연과 대지를 항상 품고 살았던 아메리카 원주민의 영혼은 정착민들의 선교와 술에 의하여 무너지고 말았다. 기독교의 유일신 주장은 자신들의 '위대한 신비'가 우상이지 않았을까 하는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술은 엄격한 가족간 전사간의 기초적 윤리와 존중을 바닥에서부터 깨뜨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코 겪어보지 못한 천연두와 콜레라 등 치명적 전염병의 광범위한 살포는 수많은 원주민 공동체를 일거에 무력화시켰다.
원래 씨족단위의 분산화된 삶을 선호하는 전통에다가 위와 같은 요인으로 인해 동부로부터 밀려오는 얼굴 흰 자들의 공격에 제대로 된 반격조차도 해보지 못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았다. 더우기 생명의 근원인 들소 개체의 인위적인 급격한 감소 또한 치명타를 날렸다.
이 시점에서 볼 때 아메리카 원주민이 과연 열등하여 오늘날의 위치에 있는게 당연하게 여겨질 것인가? 그들의 음악을 귀기울여 들어본 경험이 있는지 그들 자신의 나직한 목소리를 가슴깊이 새겨들은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그들은 결코 거짓을 말한 적이 없다. 폭력을 앞세우는 행동을 먼저 저지르지도 않았다. 오히예사는 울분을 삭이며 말한다. 소위 '얼굴 흰 자'들이 내세우는 기독교의 정신에 보다 가까운 것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이라고.
아직도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편견이 있는 이라면 제일 먼저 이 책을 통하여 그들의 닫힌 생각을 깨뜨릴 것을 권하고 싶다. 아직도 대중매체를 통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얼굴 흰 자들의 사고와 생활을 우러르면 사는데 익숙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