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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내전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 / 2005년 9월
평점 :
카이사르는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정복하고 이후 원로원과 대립하다가 마침내 원로원파를 뒤에 업은 폼페이우스와 일대 결전을 벌인다. 카이사르로서는 평화를 원한다면 본인의 죽음을 감수해야 하는 절박한 처지에서 모험에 몸을 맡기는 외에 선택의 대안이 없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그토록 무정하고 모진 것이다.
수년간의 내전 끝에 마침내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일파를 진압하고 로마 제일의 권력가로 부상하여 이후 제정의 토대를 마련하다가 암살을 당하게 되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사실 내전에 관한 이야기는 카이사르가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 외에 자세한 이야기는 일반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카이사르 본인이 직접 기술한 이 기록에 따르면 그의 승리는 결코 간단한게 아니었음을 알게된다. 폼페이우스 역시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일찌기 젊은시절부터 장군으로서 재능을 인정받아 오리엔트 일대를 정복하여 개선장군이 되었던 것처럼 명망에 있어 결코 카이사르에 뒤지지 않았고 더구나 막강한 원로원이 뒤를 받치고 있으니 카이사르보다는 여러가지 면에 있어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너자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를 탈출하는데 그것은 로마에는 카이사르를 대적할 군단이 없었고 그의 근거지는 소아시아 일대였기 때문이다. 최근 정복한 갈리아를 제외하고는 로마의 모든 영역이 카이사르보다는 폼페이우스 세력권에 가깝다고 하는게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초기에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호민관 쿠리오에게 아프리카 진격을 본인으 히스파니아 제압에 주력하였던 것이다. 그로써 일단 서방과 남방을 완전히 제압한 후 동방의 라이벌을 압도할 방책이었던 것이다. 전략에서 가장 하책중의 하나가 양편의 적과 싸우는 것임은 익히 알려진 것이다.
양진영의 수장이 모두 당대의 용장이었던만큼 그들의 세력대결은 팽팽하기 그지없었다. 히스파니아는 굴복시켰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실패하였으므로 일대일인 셈이다. 이제 보스간의 대결이 남았는데 무대는 오늘날의 그리스지역이다. 해군력에서 열세였던탓에 많은 부대를 이끌지 못한 카이사르는 더구나 요충지 디라키움 점령에도 실패함으로써 많은 난관에 봉착하였다. 보급도 부족한데다 병력에 있어서도 절반에 미치지 못한 누가 봐도 패배가 예견되는 상황에서 카이사르는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일거에 균형추를 옮겨 놓았다. 그리고 폼페이우스는 그리스를 포기하고 시리아로 향했지만 세상은 패자에게 냉담하게 돌변하여 결국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일단 내전기는 여기에서 펜을 거둔다. 아직 내전이 종료된 것은 아니지만 운명이 더이상의 글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점에서 유리하였던 폼페이우스가 몰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만심이 아니었을까.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상황에서 지나친 자신감으로 군기가 해이해 졌으며, 지도층끼리는 내전 이후의 세력다툼에 여념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로지 독한 승리에의 일념으로 충만한 카이사르군에게 숫적인 차이는 무의미한 것이다. 용병 한명은 겁병 백명은 당하고도 남는다.
카이사르 이전과 이후 로마의 대외정책은 많은 차이를 보인다.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정복과 뒤이은 이집트 합병으로 실질적인 로마의 국경선은 확정되었다. 그후의 공방전은 충동적인 정복욕을 제외하고는 단지 국경을 지키고자 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언제나 대외를 향하던 로마군단의 창끝이 자국민에게도 향할 수 있음을 그리고 치열하고 잔인하기는 과거 못지 않음을 내외에 천명하였으니 위대한 공화정으로서의 로마는 사실상 문을 닫는 것이다.
카이사르가 씨앗을 뿌린 제정 덕택에 로마가 수백년을 지탱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때문에 불과 수백년밖에 버티지 못했는지는 쉽사리 판단하기 어렵다. 한가지 확실한 점은 카이사르는 그 전환기의 로마에게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거대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이천여년전의 인물들이 행동과 사고가 마치 현재 지금의 것과 하등의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역시 인간성이란 영속적인 존재인가. 당시 우리나라는 전설상의 단군시대였고 이제 삼국이 태동되는 즈음인데 로마인들은 이렇게 가치높고 충실한 기록물을 역사적 유산으로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