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애정생활
팀 라하이 / 보이스사 / 1990년 5월
평점 :
절판


[크리스천 부부를 위한 올바른 성생활 지침서 - 비크리스천에게도 좋다]

사무실 동료가 한번 보라고 빌려 주었다. 원래 기독교적 냄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빌려준 성의를 봐서 대충이나마 한번 훑어봐야지 하던게 정독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확실히 참된 양서는 문화, 종교 등을 뛰어넘는다. 목사이기도 한 저자가 크리스천 예비부부나 기혼부부를 위하여 저술한 크리스천 관점에서 안내하는 성생활 지침서이다. 목사가 이와같은 유형의 책을 썼다는데서 우선적으로 놀라고, 더우기 그 내용이 어떻게 보면 매우 적나라하다는 데서 더욱 놀랍다. 1970년대 출간된 저서라 30년이 경과한 현시점과는 다소 부적합한 내용이 일부 있지만, 그 핵심 영역은 여전히 확고부동하다.

수십년간 각자의 삶을 영위하던 두 남녀가 사랑을 느끼고 함께 일생을 같이하기로 맹세하는 결혼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인류에게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결혼의 장점이야 무수히 많겠지만 점증하는 이혼률은 원만한 결혼생활의 유지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점을 알려주기도 한다. 모든 것이 서로 다른 그들에게 처음부터 찰떡궁합을 기대함은 잘못된 주문이다. 하지만 열에 서너쌍이 이혼하는 데 다수의 사유가 '성격차이'라고 한다. 성격상에 차이가 있음은 당연하므로 그것이 어디 절대적 이혼사유가 되었을까 의심스럽다. 차라리 '성 격차'라고 솔직하게 토로한다면야 모르겠다.

1970년대 당시의 미국 사회도 한창 부부간의 성 문제가 심화되었던 모양이다. 그러기에 저자는 크리스천 부부들을 대상으로 부부간의 진실한 애정을 찾는 방법과 육체적 애정표현에 대하여 상세한 안내를 해주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목사답게 성경에서 주요 문구를 인용하고 하나님이 허용하고 승인하신 성적 표현에 대하여 알려준다. 매우 자세하고 직설적이어서 노골적인 인상을 자아낸다. 출퇴근시에 전철에서 읽는데 옆사람의 눈을 절로 의식하게 된다.

어쨌든 저자에 따르면 하나님은 신실한 부부에게 사랑과 만족을 느낄 수 있도록 정당한 성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따라서 부부간의 애정표현 수위와 방법에 크게 제약을 두지 않는다. 그것이 부부간의 대화와 합의를 통하여 도출된다는 전제아래.

오늘날 많은 연인과 부부들이 성(sex) 문제를 지니고 있다, 비록 저자는 혼전 성관계를 매우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성의 범람 속에서 역설적으로 성의 가치는 점점 저하되고 있다. 성의 순수성과 순결성을 옹호하는 사람은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저자의 주장은 크게 공감을 살 만하다. 정당한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는 성은 결코 떳떳할 수 없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 시사하는 점이 많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크리스천에게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부부간의 사랑 행위는 가장 신성해야 하며 생의 만족을 위해 가장 기교적이어야 하고 또 가장 축복을 가져올 수 있는 생의 절대의 기회이어야 한다."

한편, 번역된 용어는 현재 통상적인 어휘와는 사뭇 다르다. 일부러 비외설적으로 받아들이게끔 한 것인지 의도는 모르겠지만, 조기사정(조루), 지체사정(지루), 구두섹스(구강성교, 오럴섹스) 등 비일상적인 용어의 사용이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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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0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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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철학자 - School Library 04
알퐁스 도데 지음, 강승민 옮김 / 종이나라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단편선을 제외하고는 몇 편 번역본이 나와 있지 않은 국내 출판계에서 뜻밖에도 도데의 1868년 작 <Le petit chose>는 제법 여러 판이 출판되어 있다. 작품의 유별난 우수성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연유가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

원제 'Le petit chose'가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여 구글 번역기를 돌렸더니 ‘A little thing’이라고 나온다. 작은 것, 즉 꼬마 정도라고 해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꼬마 철학자’라는 표제는 절반만 옳다. 그냥 ‘꼬마’라고 하든가 아니면 작품 내용을 감안하여 ‘꼬마 시인’이 보다 적절하다는 개인적 생각이다.

작가의 개인사를 상당 부분 반영하고 있는 자전적 성격의 작품으로서 읽다 보면 이것이 어느 정도까지 허구인지 헷갈린다.

주인공 다니엘은 남프랑스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일가가 리용으로 이주하여 생활고를 겪는다. 가족이 모두 이산되며 자신도 산골지방인 사를랑드 중학교에서 자습교사로 부임하여 사회에 진출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를랑드 시절에서 그는 가세를 일으키겠다는 열정이 스러지고 인간성에 대한 뼈저린 환멸을 경험하며 자살을 시도한다. 여기까지가 1권이다.

2권에서 다니엘은 제르만느 신부의 도움으로 자크 형이 있는 파리로 가서 시를 쓰며 새 출발을 한다. 그리고 피에로트 양과 교제를 하며 결혼을 약속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다가 이르마 보렐이라는 여성을 알게 되면서 다니엘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사를랑드에서 본 ‘검은 눈동자’와 피에로트 양의 ‘검은 눈동자’에서 그가 순수한 열정과 사랑을 발견하였다면, 이르마 보렐과의 관계는 타락과 애증의 끈적거리는 혼합체라고 할 수 있다. 사랑과 증오가 동반된 그들의 관계는 서로를 발전과 향상으로 이끄는 것의 정반대 작용을 하고 있으니 파탄은 시기가 문제일 뿐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다니엘은 수줍음과 우유부단으로 연탄가스에 질식된 사람처럼 스스로의 의지로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하다가 자크 형의 도움으로 탈출하게 된다.

이 작품은 슬프고 비극적이다. 비록 결말에서 희망의 빛을 슬며시 드리우기는 하나 전반적으로 끊임없는 눈물이 주조를 이룬다. 집안의 몰락과 큰형의 죽음, 참혹한 사를랑드 시절, 몽파르나스의 수렁, 그리고 자크 형의 죽음과 어머니의 시력 상실 등. 그럼에도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정서와 더불어 슬픔 속의 미소가 단절되지 않는 것은 알퐁스 도데만의 장기라고 하겠다. 그는 슬픔과 기쁨, 고통과 즐거움을 병존시키면서 작품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희석시키고 있다. 그래서 독자도 한결 가벼운 심경을 품게 된다.

시인 지망생 다니엘, 그에게는 예술가적 기질이 몸에 흐르고 있으니 팜므 파탈 이르마 보렐의 유혹에 저항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희극 배우로서 고통을 겪으며 벗어나려고 하면서도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은 아마도 내면 깊숙이 예술인의 삶을 수용하고자 하는 바램이 잠재되어 있던 게 아닐까. 현실의 알퐁스와 달리 작중의 다니엘은 문학의 포기를 선언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유효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니엘 자신도, 그리고 우리 독자들도.

이르마 보렐은 특이한 매력을 지닌 캐릭터다. 그녀가 다니엘에게 유독 천착하는 이유는 외모나 재산, 지위는 결단코 아닐 텐데, 그렇다면 그의 순수성에 대한 이끌림이라고 할지. 단순히 풋내기 꼬마를 갖고 노는 재미만으로 정결하지 못하지만 풍요로운 생활을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미모와 존재만으로 주변 사람을 망치는 전형적 팜므 파탈이다. 다만 그녀가 악인인지는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다.

팜므 파탈에 대한 알퐁스 도데의 관심은 처음이 아니다. 이미 단편 <아를의 여인>에서 출발하여 희곡 <아를의 여인>으로 발전하였으며, 장편소설 <사포>은 이 제재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풍차방앗간 편지>만을 기억하는 독자는 다소 의외라고 하겠지만, 파리에서 어두운 시절을 경험한 도데로서는 낯선 영역이 아니었으리라.

* 이 리뷰는 원래 <꼬마 철학자 1, 2 (알퐁스 도데/이용남/민중출판사)>에 대하여 썼으나 알라딘에서는 민중출판사 번역본이 등재되어 있지 않음. 한편 옮긴이의 경력으로 미루어 프랑스어 판본의 직접 번역이 아니라 영어판 중역으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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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0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7.29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헤르만 전쟁 지만지 희곡선집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김충남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유럽을 휩쓰는 나폴레옹과 프랑스군의 위력 앞에 당대 독일 연방의 각국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프로이센은 패퇴하였고,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 제국은 힘을 모아 대항하지만 역부족이다. 와중에 군소 제국은 눈치를 살피며 각자 살길을 모색하였다.

전란의 시국에는 거의 항상 애국주의가 득세하기 마련이다. 클라이스트도 여기에 가세하여 극단적 애국주의자로 변모한다.  

<헤르만 전쟁>은 로마 제국 초기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 헤르만 즉, 아르미니우스는 서기를 전후하여 오늘의 독일 땅에 거주하던 종족의 족장이다. 아우구스투수 황제 시절, 로마는 영토 팽창을 위하여 경주하고 있었는데, 갈리아에서 라인 강을 건너 게르만의 땅으로 진출한다. 막강한 로마군단의 힘은 곧 게르만 종족을 휩쓸 듯 보였으나 케루스키 족장 아르미니우스(헤르만)은 교묘한 책략과 흩어진 게르만족의 단합으로 로마군단을 전멸시킨다. 그 후 몇 차례 로마군을 저지하여 마침내 로마제국은 독일 영토를 귀속시키는데 실패한다.

로마 제국의 압도적 군세를 격파한 헤르만처럼, 클라이스트는 나폴레옹 대군을 격파할 영웅이 등장하기를 갈구한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기타 소국들로 분열된 독일을 응집하여 게르만의 위대성을 드높일 영웅을.

따라서 이 작품은 시대에 따라 평가가 극으로 달린다. 20세기 초 나치 독일에서 국수적 극우주의자들에게 클라이스트의 이 작품은 대단한 갈채를 받는다. 그리고 헤르만은 독일의 고대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그 후 이 작품은 역사극을 표방한 이데올로기 극으로 비판을 받고 만다.

확실히 클라이스트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집필하였다. 헤르만의 게르만과 오늘날의 게르만은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 아니다. 포괄적 종족을 일컫는 게르만을 오늘날의 독일 및 독일인과 혼동하거나 의도적으로 연결 짓는 것은 실로 대단한 견강부회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분명 비판의 소지는 충분하다.

다만 이 작품은 덧씌워진 선입관을 벗기고 순전한 문학의 시각으로 볼 때, 새로운 조망과 흥미로움을 독자에게 안겨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헤르만의 초지일관한 종족적 주체의식과 탁월한 전술능력. 시종 강하게 나가서는 안 되며, 강유(剛柔)를 겸비한 인물로 표현해야 할 것이다.

투스넬다의 헛된 기대와 처절한 복수. 투스넬다는 벤티디우스의 접근을 경계하면서도 연정의 함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녀는 정말로 헤르만을 버리고 벤티디우스를 따를 뜻이 있었을까?

마르보트의 우직함, 바루스의 단순함, 에긴하르트의 뛰어난 전략, 그리고 루이트가르의 충실한 직무수행 등은 로마군에 복속하였다가 헤르만의 포고에 표변하는 족장들의 태도와 어울려 다종다양한 인간 군상을 실감나게 표현한다. 사실 이러한 유의 작품은 무대에서 직접 연기와 어우러진 장면을 봐야 제대로 일터이다.

후기작답게 이데올로기 성향을 강하게 띠면서도 결코 여기에 함몰되지 않고 문학으로서의 본질을 놓치지 않는 클라이스트의 능력은 상찬할 만하다.   

*  원래 이 리뷰는 <헤르만의 전쟁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배중환/부산외국어대학교 출판부)>에 대하여 썼으나, 이미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할 수 없다. 여기 이 책에는 희곡 <헤르만의 전쟁 (또는 헤르만의 전투)>와 다음의 산문 소품들이 실려 있다.

독일인의 교리문답
잡지 "게르마니아"의 서문
이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정원사의 조건
오스트리아의 구원에 대하여
조로아스터의 기도
최근의 프로이센 전쟁에서 얻은 일화
최근 전쟁에서 얻은 일화
말을 하면서 점차 생각을 완성함에 대하여
인형극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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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0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1.3.21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물은 답을 알고 있다 2
에모토 마사루 지음, 양억관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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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수년전의 일이다. 사무실로 전화 한 통이 오더니 무슨 세미나인지 학회인지에 대하여 문의하였다. 이런 일이 이따금 있는지라 별로 의아해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제목을 묻는데 '물은 알고 있다'라고 하던가 왜 이리 귀에 낯선지 재차 묻곤 하였다. 제목도 모르는 마당에 장소와 시간 등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그래서 모르겠으니 다른데 알아보라고 한 후 전화를 끊은 적이 있다.

그 후 동일한 제목의 책이 국내에 출판되어 나름대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들었지만 내게는 거리가 먼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그런 많은 유형의 책들에 하나일뿐. 이제 우연한 기회에 그 속편 격이 <물은 알고 있다 2>를 보게 되었다.

200쪽 정도의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에 사진도 심심치 않게 포함되어 있고 문장도 평이하게 서술되어 있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물은 무슨 답을 알고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전작에 상세히 나와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 다음에 대한 내용을 전개하고 있는 듯하다. 전작의 외연적 확장이라고 할까.

솔직히 순수한 내용은 간단하다. 물은 환경과 장소, 상황에 따라 결정구조가 달라진다. 또 좋은 말과 애정어린 말을 들으면 아름다운 결정구조로 바뀐다. 좋은 결정구조는 물을 깨끗하게 정화한다. 고로 깨끗한 물을 유지하기 위하여 아름다운 마음과 말을 사용하면 자연을 아름답게 유지하고 나아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인간세상도 평화롭고 아름답게 될 것이다라는둥...

갑자기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이 마음속에 떠오른다. 전혀 엉뚱하지만은 않다. 적용 분야는 다르더라도 그 근본원리는 동일하니까.

사실 물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누구도 외면하지 못한다. 인간 몸의 70%가 물로 구성되어 있고, 한 달을 굶어도 살 수 있으나 물없이는 단 일주일도 못버틴다는 등의 내용은 이미 상식화되어 있다. 따라서 좋은 물, 깨끗한 물에 대한 갈망은 수돗물을 믿으라는 정부의 효력없는 설득을 외면한 채 무수한 생수업체가 난립하는 근본 동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철학적 의미에서 보더라도 물의 가치는 대단한 것이다. 바슐라르처럼 '촛불'의 미학에 주목한 사람도 있지만, 그 깊이와 폭에서 '물'의 철학의 진정한 전도사는 아마도 노자가 아닐까. 물은 고정된 형체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세상에 더할 수 없는 복을 베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공덕을 자랑하지 않고 항상 낮은 곳에 임하여 있다. 그러기에 노자는 도에 가장 가까운 존재가 물이라고 하였다.

이 책의 내용 자체보다도 중간에 삽입된 물 결정구조의 사진이 보다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상류와 하류의 결정구조 차이가 말해주는 것, 긍정적인 말과 부정적인 말이 물에 미치는 차이 등 물은 결코 죽은 존재가 아니라 살아 있으며, 인간이 자연에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발생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다는 것을.

큰 기대를 갖고 볼 정도는 아니지만 가볍게 훑어본다면 조금이나마 의식에 신선한 자극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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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9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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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평전
김삼웅 지음 / 시대의창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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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중기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한 것을 가리켜 '조선 일천년래의 일대사건'이라고 표현하고, 우리 고대사 연구를 통하여 기존의 식민사관을 통렬하고 공박하였던 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의 평전이다. 종전에 이러한 류의 책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본격적인 평전은 거의 최초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때 역사학도를 꿈꾸었던 내게 단재는 하나의 우상이었다. <조선상고사>를 읽으며 그 혜안과 웅대한 시각, 사료의 한계 속에서도 탁월한 분석과 예리한 비평으로 통념을 갈파하고 올바른 역사를 구축하고자 노력한 그 정신에 깊이 감복하였었다. 하지만 그의 생애와 사상세계에 대해서는 아는바 드물었다. 이러한 연유로 평전을 펼쳐들게 되었다.

단재는 사학자이기에 앞서 뛰어난 유학자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백암 박은식이 유학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단재도 그럴줄은. 보수적인 성균관박사가 어떻게 신학문을 접하고 신사상의 보급에 노력하고 사상의 방향을 아나키즘까지 몰고 갔는지 사상의 편력이 흥미롭고도 놀랍기 그지없다. 또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문'의 주필을 역임하여 항일 언론의 선봉장이었다는 사실도 간과해버렸던 사실이다.

상해 임시정부에 잠시 참여하였다가 위임통치를 주장했던 이승만이 대표가 되고, 외교론의 유약한 모습을 보고 격분하여 뛰쳐나오는 그 순혈한 열정. 왜놈에게 고개숙이기 싫어 뻣뻣하게 세수하여 옷을 적시는 일화는 다시 보아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수 밖에. 단재의 무장투쟁론이 보다 현실적인 방책임은 후에 임시정부가 백범 김구의 주도하여 이봉창, 윤봉길 등 의거에 나서며 체재를 일신하는데서도 엿볼 수 있다. 단재의 말마따나 외세의 처분에 민족의 운명을 언제까지 기다릴 것이며, 일제의 압제하에 어느 세월에 실력을 양성할 수 있을 것인가?

단재의 삶은 치열한 언론인, 사학자, 독립투사의 소임이 수레바퀴의 축을 구성하여 최후까지 끌고 있다. 본문 중에 소개되었던 <천고>라는 잡지의 서문은 감격스럽기 그지없다. 의열단을 위하여 집필한 '조선혁명선언'은 그의 아나키즘을 표출하는 투쟁서일 뿐만 아니라 '3.1독립선언문'을 능가하는 명문이자 가슴절절이 피를 끓게 만드는 혈서이다. 이제 독립투쟁은 '혁명'으로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유일한 일가붙이였던 조카딸이 친일파와 결혼하려고 하자, 어려움을 무릅쓰고 일시 귀국하여 설득하다가 안되자 단호히 절연을 선언한 대쪽같음. 임종을 목전에 두고서도 친일파 친척에게 의지하기 싫다고 출감을 거부하고 차디찬 일제의 감옥에서 순국한 절개. 과연 우리시대에 단재와 같은 이가 다시 있을 것인가 의문스럽다.

저자의 말마따나 이렇듯 위대한 인물의 전집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민족의 수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민족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에 빚을 갚지 못하고 있다. 독립투사의 후손은 대다수가 사회 하층에서 어렵사리 삶을 영위하고, 친일분자의 자손은 사회 지배층이 되어 떵떵거리고 위세를 부리며 사는 작금의 현실을 단재가 알며 얼마나 기가 막힐런지.

평전답게 단재의 삶의 궤적을 하나하나 좇기 보다는 그의 대외 투쟁사를 중심으로 저자는 글을 전개하고 있다. 어쩌면 개인사에 관한 자료가 너무 빈약한데서 연유하지는 않을까 싶다. 때로는 중언부언 반복하는 것도 저자의 안타까움의 토로로 받아들여진다. 본문에 소개된 단재의 작품과 저작 인용문을 뺀다며 부피가 대폭 줄어든다는 것이 이걸 짐작케 해준다.

저자의 뼈아픈 지적대로 '체 게바라'는 동경하여도 '단재'는 고리타분한 존재로 여기는 현세태, 그것은 우리가 아직 단재의 진면목을 모른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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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9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10.12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