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사:19C-현대 -하 - 세계총서 32
정판룡 외 / 세계 / 1989년 3월
평점 :
품절


세계문학사를 통독하다 보면 꽤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다. 무엇보다도 개개의 문학작품을 고립화된 원자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을 지양하고 시대와 개인의 텍스트에서 긴밀하게 엮인 화학적 관점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전에는 관심도 없던 작가와 작품들에 새삼 호기심이 생기게 된다. 이는 문학사적으로 해당 작품의 의의를 이해하게 된 데 연유한다.

또한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작가와 작품 외에 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뛰어났지만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세인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숨은 보석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나로서는 코르네유, 라신, 몰리에르로 이어지는 프랑스 고전파 희곡작가들과 크리스토퍼 말로, 벤 존슨 등의 셰익스피어 선배와 동시대 작가들에 새삼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와 라틴의 고전 작품들도 그러하다. 이 책에만 국한한다면 인도의 고전들, 즉 라마야나, 마하바라타, 샤쿤탈라, 판차탄트라 등이 주목된다.

이 책을 보면서 국내 문학계의 얕은 수준에 절망하게 된다. 변변한 세계문학사 입문서도 부재하여 1980년대 연변에서 간행된 이 책을 봐야 할 정도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앞서 존 메이시의 세계문학사에 비하며 이 편이 더 공평하다. 어느 정도 오리엔트와 아시아권의 작품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다만 특수한 연유로 중국은 제외하고 있다. 우리는 서양문학사의 시시콜콜한 작가와 작품들도 훤히 꿰뚫고 있는 반면 이웃과 옆나라의 걸작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무지하다. 연변 조선족 학자들은 비록 마르크스적 관점이 두드러지는 한계가 있지만 나름대로 객관적인 소개와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모든 저작에는 가치관 내지 세계관과 이념의 개입을 회피할 수 없다. 회피하려는 노력 자체가 또다른 편향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글쓴이의 선호와 사상이 편집 과정에 반영됨은 당연하다. 이들 저자는 세계문학사의 시발에서 중간을 거쳐 내내 일관된 이데올로기를 비치고 있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다. 일관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모든 문학을 그 자체의 예술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가혹한 착취와 피지배계급의 열악한 처지를 폭로하는 정도, 그리고 민중의 의식깨침과 봉기에 대한 의식 정도로 문학작품의 중요성과 가치에 등급을 매기는 것은 지나침의 함정에 빠져 있다.

존 메이시와는 달리 이들 저자는 상대적 중요성에 따라 때로는 꽤 상당한 분량을 특정 작가와 작품에 할애하고 있다. 이것이 편파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기계적 균등이 아닌 실질적 공평을 보여주고 있음이다. 괴테의 <파우스트>에만 8면을 할애하고 있으며, 셰익스피어에 20면 가까운 분량을, <겐지모노가타리>에도 9면을 소개하고 있다. 그만큼 저자들은 중요한 것은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음이다. 그래서 개설서이지만 나름대로 깊이있는 해설과 분석을 하여 간과하기 쉬운 참면모를 밝혀내고 있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커다란 미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다소간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제 하권의 길에 들어서고 있다. 

하권은 19세기부터 현대까지를 다루고 있다. 흠, 그런데 솔직히 기대에 많이 못 미친다. 존 메이시의 저작에서 아쉬운 점의 하나가 20세기 초까지 만을 다룬 점이라서 20세기 중후반부에 대한 기대가 자못 있었다. 그런데 이 책 역시 20세기 전반까지 만을 다루고 있으며, 그나마도 러시아를 위주로 한 공산주의권 작가와 작품만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이데올로기적 편향이 사실의 왜곡에 미치는 영향을 눈앞에서 보는 기회를 가졌다. 근대 이전의 시기에는 차라리 공산주의가 나타나기 이전이므로 나름대로 커다란 이념적 지향이 전체적 이해에 지장을 주지 않았는데, 이 하권에서는 이념이 문학을 압도해 버렸다. 이념의 기준으로 측정하여 맞지 않는 작가와 작품들은 과감하게 마치 침대에 다리를 맞추듯이 배제시키고 있다. 문학사적 거장이 왜소한 난장이가 되고, 조그만 씨앗을 거대한 고목으로 둔갑시키는 재주는 손오공도 울고 갈 지경이다.

일례로 거장 도스토예프스키를 보면 단 5줄로 간결하게 언급하는데 그치고 있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키(1821~1881년)는 장편소설 <죄와 벌>(1866년)에서 평민출신의 빈궁한 대학생 라스꼬르니꼬프의 살인과 참회의 과정을 통하여 폭력적인 수단을 비난하고 기독교적 순종의 정신을 설교하였다. 특히 그의 마지막 장편소설 <까라마조프형제>(1880년)에서 도스또예프스키는 반동적인 신권정치를 공개적으로 비호하여 나섰다."(P.212)

이는 동시대의 병칭되는 거장인 톨스토이에게 18면을 할애한 것과는 극과 극의 대조를 보인다. 열린책들의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보유한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리 그의 작품 제재 및 주제가 종교적 색채로 차있고 관념주의적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것은 과연 공산주의답다는 생각만 떠오른다. 그의 초기작 중에서도 얼마나 아름다운 작품들이 많은데 이조차 외면하다니.

이런 저자들의 시각은 근본적으로 20세기 전반기의 문학 사조를 퇴폐 및 반동, 파쇼로 이해하는 이념적 덫에 갇혀 있는데 연유한다. 사회주의 러시아를 예찬하기 위하여 무산계급 문학을 내세우다 보니 대칭되는 유산계급(자본주의) 국가들의 문학 전반을 축소하거나 은폐하는 결과를 빚고 만다. 잠시 책의 내용을 인용하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체계내에서의 전반적 공황의 도래와 함께 현대 자산계급 문학에서 퇴폐적 경향이 더한층 격화되어 갔다. 독일 군국주의의 재생과 함께 파쇼문학이 대두하여..."(P.318)

반면 문학사적 가치보다는 혁명사적 의의가 큰 파리꼼뮨 시기의 문학을 별도로 다룬 점 및 소련, 일본, 한국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주목한 점 등은 기존 자본주의 문학관에서 놓친 부분을 양지로 이끌어냈다는 부분적 긍정을 부여하더라도 과도한 비중으로 이런 유형의 개설서에서 가장 중요한 균형과 절제를 상실하였다는 점에서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기존 인식에서 벗어난 참신한 시각으로 제기하는 스탕달의 <적과 흑> 재해석과, 상권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주인공의 고뇌를 나약성의 관점을 탈피한 점 등은 지나치지 않다면 문학작품을 읽는 우리들의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새로운 맛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환영한다.

더욱이 바이런, 하이네 등 단순히 낭만파 시인으로 인식되던 그들에 드러나지 않던 고뇌와 번민, 사회 부정의를 바로잡기 위한 유랑 등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측면도 있다.

마광수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를 개인적으로 높이 평가한다. 반면 그가 보여준 일탈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여긴다. 전혀 엉뚱한 사례지만 이것과 유사하다. 다양성을 인정하되 함몰되지 않는 것, 이것이 참다운 중용의 미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11-18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8.17과 9.3에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스승을 찾아서 - 화엄경 입법계품
법정(法頂) 옮겨 엮음 / 동쪽나라(=한민사)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갈등의 시대에 읽는 구도의 이야기]

화엄경은 수많은 불경 중에서도 가장 방대한 규모와 심오한 사상을 자랑하는 경전이다. 그래서 그런지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게 나온 경우가 드물다. 그러던 차에 법정 스님의 번역으로 화엄경이 부분적으로나마 번역 출간되었다는 정보를 얻자마자 주저하지 않고 입수하였다. <스승을 찾아서>는 선재동자가 보살의 도를 수행하여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무수한 스승을 찾아가는 구도의 이야기 형식이다. 선재동자는 문수사리보살의 깨우침을 통해 위없는 보리심을 지니게 되고 참된 선지식을 찾아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며, 어떻게 보살행을 닦는지’를 덕운비구부터 보현보살까지 쉼없이 묻고 있다. 각각의 선지식이 선재동자에게 가르치는 깊은 의미를 문외한인 내가 해득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한줄 한줄을 음미하면서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하는 것이 종교의 경전을 대하는 자세라고 한다면, 지금의 나는 단순히 호기심에서 마치 소설책을 읽는 듯이 이해가 되건 안되건 그냥 책장을 넘기는데 급급한 형편이다.

그럼에도 삶의 고통에서 허우적대는 가련한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 지극한 염원과 선근(善根)을 심고 보살도를 깨우치고자 하는 간절한 바램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인간사회에서 종교가 간직한 가장 커다란 미덕이 바로 여기에 있는게 아닐까 싶다. 나를 수양하고 다른 사람을 도와서 개인을 안정시키고 사회를 건강하고 발전적으로 유지하는 역할. 우연의 일치였는지 이 책을 집어든 즈음 미국-이라크전쟁이 발발하였다(전쟁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이상하지만). 인류에게서 전쟁이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혹자는 말한다. 하지만 최소한도의 외적 정당성을 갖추려는 모습마저도 거부하는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더욱 참된 종교의 가치가 요구된다. 마치 암흑 속에서 한점의 빛이 유난히 밝고 멀리 비추듯이. 책에 대하여 잠시 덧붙이자면, 편집은 전반적으로 깔끔하여 읽기에 부담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쉽게 풀이하려고 노력하였음에도 여전히 화엄경은 일반독자에게 용이한 접근 대상은 아니다. 더구나 심심치않게 등장하는 불교용어에 대한 해설이 너무 부족하여 막연한 추측만으로 넘어갈 때가 있다. 대표적으로 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위없는 보리심’에서 ‘위없는’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몰랐다가 후편격인 <화엄경>에서 비로소 ‘위없는(無上)’을 보고야 어이없어 하기도 하였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11-15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3.4.4에 쓴 글을 마이페이퍼에서 이동
 
화엄경
법정(法頂) 지음 / 동쪽나라(=한민사)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보살의 눈으로 바라보는 부처님의 세계, 그러나 역시 어렵다]

동쪽나라에서 작년말에 두권의 화엄경을 출간하였다. 하나는 입법계품을 별도로 분리하여 <스승을 찾아서>라고 하였으며, 나머지가 이 <화엄경>이다. 종교적 목적이 아닌 일반대중을 위한 화엄경은 참으로 찾기 어려웠는데,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렇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화엄경을 접하려는 독자가 있다면 개인적으로는 말리고 싶다. 이것은 소설이나 단순한 인문학 서적이 아니라 종교 경전임을 새삼 자각하기 바란다. 일체의 군더더기가 없는 것은 좋지만 어려운 불교용어에 대한 풀이가 각주로 약간 있을 뿐, 이해가 어려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따라서 이해가 안되더라도 그냥 지나쳐갈뿐 곰곰이 되새겨 보아도 뾰족한 방법이 없다. 확실히 불교경전은 강원(講院)에서 접해야하나 하는 아쉬움이 든다. 화엄경은 불교경전 중 가장 방대하고 심오한 사상체계를 자랑한다. 이전에 잠시 읽어보았던 <숫타니파타>는 불교 초기의 소박한 교리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암송이 용이하도록 짧은 문장을 반복하여 운율을 느낄 수 있었다. 반명에 화엄경은 불교사상이 난숙한 후대에 나왔던 탓인지 사용된 용어나 때로는 현학적이기조차 한 표현양식에서 매우 상이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내용에 대해서는 새삼 언급을 피하겠다. 보살문명품, 정행품, 십행품, 십회향품, 십지품, 여래출현품 및 이세간품으로 구성하여 전체를 완역하지 않고 발췌 번역하였다.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는 말처럼 이따금 편린적 이해는 가능했지만 전체적으로 무슨 의미로 어떤 내용을 말하는지는 전혀 느낌이 오지 않는다. 다만 책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다른 경전과는 달리 부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 아니라 여러 보살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풀이하는 형식을 취했다는 점이 인상에 남았다. 구약성서나 신약성서를 반드시 기독교신자만 읽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는 서양역사와 사상을 관통하는 거대한 뿌리가 담겨 있다. 마찬가지로 불교경전도 동양, 폭을 좁혀서 우리역사와 사상의 중요한 영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수많은 내용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지만 일반인들이 교양삼아 도전하기에는 그 벽이 너무나 높다. <화엄경>도 새삼 이 사실을 절감하게 해준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11-15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3.4.21에 쓴 글을 마이페이퍼에서 이동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 - 촘스키의 신자유주의 비판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모색 / 1999년 7월
평점 :
품절


[신자유주의는 누구를 위한 논리인가]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권의 IMF 사태와 관련하여 대다수의 시각은 경제구조의 취약성 내지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소수의 비주류 학자들은 소위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즉 아시아경제의 눈부신 성장 특히 화교권의 경제력을 저지시키기 위하여 서구에서 조직적으로 금융위기를 조장하였다는 견해이다. 어떤 주장이 진실일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는 없다. 하지만 바로 단기자본의 급격한 유출이 IMF 사태의 촉발점이었음을 떠올린다면 촘스키의 저작은 비주류의 견해가 터무니없지는 않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촘스키가 내내 강조하는 점 중의 하나가 바로 닉슨대통령 시절 브레튼우즈 체제를 무너뜨리고 국제간 자본이동을 자유로이 놓아준 데서 문제가 파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이동의 자유는 노동자의 생활수준을 저하시키고 빈부의 격차를 심화시키는 동시에 개발도상국의 경제를 서구선진국에 예속시키는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더구나 소수의 부유층에 부가 편중되고 이들이 권력과 언론을 장악하면서 국민 대다수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신자유주의 이념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도록 강요와 세뇌를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기업은 인간 개개인보다 우월한 법적 지위와 특권을 향유하고 나아가 국가조차도 뛰어넘으려고 한다. 기업은 철저한 일인 독재체제이다. 그의 절대적 목적은 이익창출이며 효율성을 강조하는 지극히 비민주적인 운영시스템을 보유한다. WTO와 MAI는 기업과 소수 특권층에게만 유리한 시스템을 전 세계적으로 보급시키는 첨병 역할을 수행한다. 언론을 통해 대다수 국민에게 불리한 측면은 은폐하고 교묘한 논리로 국민을 속이고 있다. 그리하여 마치 신자유주의야말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이상적인 결합이며, 인류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이상향인양 오도하는 것이다.

촘스키는 지적한다.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따라 시장을 완전 개방한 중남미의 많은 국가들은 번영의 길에서 피폐의 나락으로 떨어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적절하게 자본유출을 통제하고 시장을 조절한 칠레 같은 곳은 슬기롭게 위기를 헤쳐 나가고 있다. 이것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촘스키는 묻고 있다. 누가 기업에게 인간과 같은 자격을 부여하였는가. 신자유주의는 누구에게 혜택을 가져다주고 있는가. 특정 소수는 넘쳐나는 돈을 주체할 수 없는 반면, 대부분의 평범한 국민들은 날로 힘겨운 일상에 치여 살아가는 것이 진정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모습일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11-15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3.3.18에 쓴 글을 마이페이퍼에서 이동
 
카트린 M의 성생활
카트린 밀레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노골적이기에 당혹스럽지만 메마른 성생활의 모습]

이런 유형의 책들을 읽는 독자의 부류는 대개 둘로 나뉘어진다. 직업적 관심을 갖는 독자와 아니면 은근한 성적 흥미를 느끼고 싶어하는 나와 같은 독자로.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난 다음의 소감을 요약하자면 오히려 섹스에 대한 불감증만을 불러일으켰다고나 할까. 저자 특유의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건조한 성적 묘사와 기술의 일관성은 마치 ‘동물의 왕국’에서 동물들의 교미를 해설하는 나레이터를 연상시킨다. 카트린의 몸을 거쳐간 뭇남성들의 수를 헤아린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파르투즈에서 얼굴도 모르는채 다리를 벌린 경우가 허다하다. 그녀는 남성을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키가 크거나 작던지, 날씬하거나 뚱뚱하던지 아니면 깔끔하거나 약간 변태적인 취향을 가지던지에 관계없이 자신을 원하는 남성에게는 자연스럽게 일체의 망설임없이 옷을 벗는다. 여기에 수반하여 등장하는 노골적인 섹스 묘사는 순간순간 전율을 일으킬 정도이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독자를 무감각하게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햇빛 아래 드러난 섹스는 더 이상 내밀하고 미묘한 감정을 허용하지 않는다고나 하겠다. 파르투즈, 항문성교, 펠라티오 등을 하면서 카트린은 모든 섹스에 정성을 다하며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다.

카트린의 성생활은 일반적이지 않다. 그녀 스스로도 밝히고 있다. “내가 가진 관계는 특히 여자들에게는 그리 통상적인 것이 아니다. 다른 환경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떠할지 몰라도 내가 속한 사회 환경에서는 결코 흔하다고 볼 수 없다.” 문득 궁금해진다. 카트린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섹스에 굶주린 사람처럼 섹스에 탐닉할까. 섹스 자체가 그녀의 인생 목표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녀는 성공한 미술 평론가이며 때때로 드러나는 상세한 묘사도 직업적 관찰을 연상케 한다. 섹스에 대한 그녀의 헌신적이며 초월적인 태도가 때로는 종교적 느낌마저 준다며 웃기다고 할지 모르나, 자신의 몸을 바침으로써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처연한 비장감이 풍겨짐을 어쩔 수 없다. 그녀는 섹스를 통해 자신의 ‘공간’이 확대된다는 표현도 사용한다. 하지만 내게 카트린의 모습은 68세대의 자유분망한 삶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기존 가치관의 붕괴를 섹스로 채우려는 삶의 모습. 열심히 갈구하지만 대리만족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그녀는 건드리려고 한다. 결코 다수의 동의와 공감을 얻지 못하는 일탈의 모습. 그것이 프랑스에서 화제를 불러 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11-15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3.4.28에 쓴 글을 마이페이퍼에서 이동

헬로우세븐 2014-07-09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재밌게 읽었습니다. 프랑스란 나라, 재밌고 관심 가는 나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