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짜 심리학 - 생각의 오류를 파헤치는 심리학의 유쾌한 반란
리처드 와이즈먼 지음, 한창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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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프로이트 전집 몇 권을 읽으면서 매우 흥미진진하게 그의 견해를 접할 수 있었다. 그의 독자적 이론은 당대는 물론 현대에도 찬반이 숱하게 격돌하는 전장이며, 그의 이론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프로이트로 인해 인간 심리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그의 가치는 유효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물론이고 많은 심리학자들의 연구와 분석은 대체로 정신 또는 신경에 병리학적으로 이상이 있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정상적인 인간 심리를 알기 위해 비정상적인 심리 상태에 의존해야 함은 아무리 타당성과 불가피성이 있더라도 마음 한켠 개운치 않았다.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는 어려운 것인가. 프로이트의 저서 중에서도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나 <일상 생활의 정신병리학> 등이 있지만 썩 부합되지는 않았다.

 

저자는 이 책에 괴짜심리학(Quirkology)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있다. quirk는 별나고 기이함을 가리킨다. 무엇이 그렇게 별나고 기이한지는 실제적 내용과는 관계가 없다. 주류 심리학에서 볼 때 여기서 다루는 연구 분야들이 기이해 보이는 모양이다.

 

시간과 날짜의 심리학, 거짓말과 속임수의 심리학, 미신과 초자연의 심리학, 암시와 선택의 심리학, 유머와 웃음의 심리학, 이타성과 인간관계의 심리학의 각 장의 표제만을 보더라도 이 책의 내용이 호기심을 자극하며, 그다지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일상 생활의 심리학’ 정도가 적당한 부제가 되지 않을까?

 

저자가 다루는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신호등 앞에서 앞 차가 꼼짝도 안 할 경우 뒤차들이 몇 초나 기다린 후 경적을 눌러대는지 측정한 실험,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과 관련된 직업(저자의 이름도 연관성이 있다)을 갖게 되는 이유를 연구한 실험, 대형 마트의 소량 계산대에서 물건을 잔뜩 계산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분석한 실험, TV 화면의 숨겨진 광고 메시지가 실제 구매율에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한 실험, 세상에서 가장 웃긴 농담을 찾아내기 위한 전세계적 실험 등.

 

소위 정통 심리학의 학문적 엄숙주의와 현학성에 혼이 난 일반 독자들이라면 여기서 언급한 실험과 그 결과에 커다란 흥미를 느낄 수 있다. 기실 심리학이란 인간 심리에 대한 이해를 제고하는 데 목적을 두는 게 아니겠는가. 현실 적용이란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참말과 거짓말을 파악하는 방법과 가장된 웃음을 알아내는 방법은 유효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다. 뛰어난 주식투자 전문가를 가리기 위한 실험에서 점성술사와 투자전문가를 제치고 다트를 통한 무작위 투자가 더 좋은 수익을 낳았다는 점은 섣부른 주식투자에 경종을 울릴 것이다. 더욱이 현대에도 점쟁이가 득세하는 연유는 인간의 취약성을 깨닫게 한다.

 

클래식음악을 좋아하는 개인으로서 저주파 음악회 실험은 특히 인상깊다. 저주파가 신체와 감각에 영향을 미쳐 초자연적 경험을 갖게 된다는 사실. 교회와 성당의 오르간과 건물 구조상의 음향적 특징 등이 이에 근거한다는 점은 낯설지만 어색하지는 않다. 귀로 듣는 음악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초저음이 음악 감상의 폭과 감동에 기여함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므로.

 

여하튼 괴짜심리학은 대중에게서 멀어져 간 심리학을 다시금 대중과 재결합시키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고 관심을 가지고 수용할 수 있는 영역에는 열성적인 반응과 호응을 보여주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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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리스트 카잘스, 나의 기쁨과 슬픔
앨버트 칸 지음, 김병화 옮김, 파블로 카잘스 구술 / 한길아트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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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한 클래식음악 애호가라면 그 존재를 외면할 수 있는 아티스트, 그가 바로 파블로 카잘스다. 첼리스트에게 있어 성서라고 할 수 있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재발견-개별 곡이 아니라 전체 음악으로 연주해야 건축적인 구조와 예술성이 완성됨을 최초로 인식-하고 전곡을 최초로 녹음하였으며, 물리적 시대를 초월하는 불멸의 가치를 여전히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음악가가 아닌 인간 카잘스에 대해서는 그다지 잘 소개되어 있지 않다. 바흐 악보와 관련된 에피소드, 프랑코 독재정권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 정도만이 단편적으로 흘러나올 뿐이다.

 

이 책은 카잘스의 자서전이 아니다. 엮은이는 애초 특정한 질문 주제를 정해놓고 이에 대한 카잘스의 이야기를 듣는 형식으로 구성하려고 하였으나 최종 단계에서 오로지 카잘스 자신의 목소리만 부각시키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 하에 구술 형식으로 변경하였다. 따라서 이 책은 ‘카잘스의 초상화’이되, 카잘스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와 판단에 따른 주제가 아닌 엮은이의 의도가 반영된 초상화로 이해해야 한다. 이 점에서 부분적 한계는 있지만 그의 육성으로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이므로 자서전으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카잘스는 확실히 특출한 재능을 지녔다. 어린 나이에 귀족과 왕족의 전폭적 성원과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그만의 천재적 재능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파리에서 잠시 고생을 한 시기를 제외하면 그에게는 오직 탄탄한 성공 가도만이 앞날에 드리워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천재의 오만함과 경박함 대신 소박함과 겸허함만이 묻어나온다. 삶과 자신을 진실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 만이 품을 수 있는 성품이다.

 

카잘스의 인생에 짙은 암운을 드리운 것이 스페인 내전이다. 역설적으로 스페인 내전을 통해 카잘스는 단순한 예술가에서 세계사적인 인물로 거듭났다. 스페인 내전은 프랑코가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쇼 정권의 지원을 받아 민주적 공화정을 세우고 발전시켜 나가던 민간 정부를 무너뜨리고 수십 년간 독재정권을 수립한 계기가 되었다. 이때 합법적 스페인 정부는 서방 국가의 지원을 호소했지만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수년 간 처절한 투쟁을 벌이다 마침내 전복되고 만다. 이 전쟁은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침공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을 촉발하는 단초가 되었다.

 

사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어보았지만 그 참혹함과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인식되지 않았다. 서가 한 구석에 꽂혀있는 <스페인 내전>은 언제 읽게 될지 기약없는 상황에서 카잘스의 생생한 증언은 우리에게 무엇이 정의이며, 인간의 기본 가치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 것인가? 권력 앞에 인간성이란 존재하는가 등의 원초적 질문을 반복하게 만든다. 인간 카잘스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스페인 내전에 대해 카잘스의 토로는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만큼 깊은 울림을 지닌다.

 

카잘스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을 녹음한 연도는 1936년부터 1939년까지에 해당한다. 더 일찍 음반을 만들 수도 있었던 그가 하필 60대에 접어들어서야 녹음을 했던 연유가 궁금했다. 좀 더 음악적 해석의 깊이와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라고 막연하게 추론들 하였다. 이 책이 그에 대한 명시적 답변을 주지는 않지만 그럴듯한 해석은 가능하다. 그의 녹음 시기는 스페인 내전과 정확히 겹친다. 내전의 치열함과 참혹성을 목도한 카잘스는 혹시 자신의 앞날이 잘못될 경우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수십 년간 갈고 닦은 음악을 후세에 남기지 못하는 것, 그것은 크나큰 죄악이다. 또 하나 현실적인 이유로 내전 세력과 맞서기 위한 공화국 정부의 빈약한 재정으로 사회의 많은 부문이 지원이 끊어진 채 방치되고 있을 때 카잘스에게는 이를 돕기 위한 금전적 고려가 매우 필요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카잘스의 바흐 음반을 들을 때 파이프 담배연기 뒤에 드리워진 짙은 전쟁의 깊은 영혼의 슬픔을 동시에 헤아려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의 음악이 유달리 치열한 것은 여기에 기인하기 때문일 것이다.

 

카잘스는 만년에 첼로 연주보다는 지휘를 더 즐겼다. 노년이 될수록 악기 연주가 무리가 되니 자연스레 지휘에 관심을 기울이는 연주자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런데 이 책에서 카잘스는 자신이 처음부터 지휘를 더 선호하였음을 증언한다.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독주를 펼치는 것에 심적 부담을 느끼고 있었음을. 그리고 동료 음악가들과 함께 교감을 주고받으며 함께 음악을 만들어 나가는 묘미를. 개인적으로 카잘스의 지휘 음반에 편견을 품고 있어 가까이 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카잘스의 개인사에서 흥미로운 점은 노년에 수십 년 연하의 여제자와 결혼하였다는 점이다. 팔순 노인에게 결혼과 아내는 젊은이와는 다른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에게는 일상사를 같이할 동반자가 필요하였던 것이며, 더구나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의 고향 출신이며 유사한 외모를 지녔음도 상승 작용을 더했다.

 

예술가 카잘스에 앞서 진실한 인간 카잘스가 존재한다. 카잘스는 이 점을 한 치도 잊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프랑코와 나치의 생명의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고 투쟁하였으며 후에 프랑코 독재정권을 수립한 국가들을 용서하지 않았던 바탕이었다. 그는 음악가에게 있어 음악과 삶의 태도는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음악의 의의는 자체보다 더 큰 어떤 목표에 봉사하고 인간성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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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 세계문학의 숲 7
마크 트웨인 지음, 김영선 옮김 / 시공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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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풍자문학이다. 19세기 미국인이 6세기 아서 왕 시기의 영국(보다 정확히는 브리튼)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역사를 뒤바꿀 계획을 실행한다. 발상 자체가 독특하며 대담하다.

 

마크 트웨인의 작품은 유머와 해학으로 가득 차 있다고 일컬어진다.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도 전자에 못지않다. 두툼한 분량의 소설이며, 발상의 엉뚱함을 제외하면 아서 왕 시기의 정치, 사회, 경제에 대한 혹독한 비판을 아끼지 않음에도 작가의 필치는 결코 심각해지지 않는다. 팽팽한 활시위를 슬쩍슬쩍 느슨하게 하는 작가 특유의 낙천적이며, 결코 젠체하지 않는 서민적 태도가 읽는 이에게 심적 여유를 불어넣는다.

 

유머와 해학은 본질적으로 비판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깊은 함의 없는 순전히 말장난에 불과한 유머는 찰나적이며 독자의 깊은 감흥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정통에 대한 삐딱한 태도, 주류에 대한 엇나간 사고 등 권위와 권력에 대한 소수자의 저항의식이 유머와 해학을 통해 발현된다. 이것이 문학으로 승화되면 뛰어난 풍자문학이 되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처럼.

 

19세기 양키의 눈에 비친 아서 왕 시기의 브리튼은 한마디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는 공간이다. 엄격한 계급제도는 체내에 뿌리박혀 있어 평등사상은 찾아보기 어려우며, 계급장벽이 심대하여 하층민들과 노예는 비인간으로 취급받아 심지어 죽여도 처벌은커녕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면서 작가는 당대에 노예제와 계급제도를 유지하는 남부와 영국 등을 비판하는 걸 놓치지 않는다.

 

주인공 행크 모건이 경악한 사실은 고대인들의 철저히 비합리적이고 반이성적인 사고관이다. 그들은 종교와 미신의 낡은 관습에 얽매여 능동적으로 삶을 구현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여기서 특히 날카로운 종교 비판이 두드러진다. 지배적인 종교는 사회에 군림하는 절대악과도 같다.

 

작품 내내 독자를 의아스럽게 만드는 요인이 있다. 작가가 비판하는 것이 아서 왕 시기의 브리튼사람들인지 아니면 거기서 좌충우돌하며 19세기를 재현하려는 코네티컷 양키인가? 표면상으로는 분명히 19세기의 발달한 문명과 진보된 의식의 우월성이 압도적이다. 이에 비하면 고대 브리튼은 야만사회임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읽는 내내 그다지 맘이 편치 않은 것은 미래의 한 개인이 당대적 가치관을 절대 진리로 간주하고 시대와 지역을 달리하는 문화권에 일방적으로 이식하고 개조하려고 하는 행위가 정당하지 않다는 인식이다. 행크 모건의 행동은 19세기와 20세기 전반에 타 문명권을 미개한 것으로 간주하고 서양문명을 강제하는 제국주의 정책과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실상 아서 왕을 포함한 귀족층과 주인공의 행동 양태는 유사한 면모를 보이니 주인공도 자신이 내키지 않는 이는 무조건 처형해 버리며, 인간의 가치를 부르짖던 그가 현대문명의 대량살상무기를 통해 수만 명의 기사들을 몰살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일말의 가책도 받지 않은 점 등이 참으로 그러하다.

 

마크 트웨인이 아서 왕 시대를 선택한 연유를 생각해 본다. 작가는 특히 영국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들이 여전히 왕정을 유지하는 것도 마뜩치 않다. 또 다른 작품 <왕자와 거지>의 배경도 역시 영국이다. 미국의 정신문화는 유럽, 특히 영국에 근원하고 있으며 영국인들에게 아서 왕의 전설은 일종의 모태 신앙과도 같이 선천적인 것이다. 작가는 남부의 노예제 등 구체제 비판을 영국에, 이어서 고대 브리튼과 연결 지어 고대의 영광이 얼마나 허위적이며, 눈부신 기사제도가 사실은 한 치도 쓸모없는 무용지물임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4년에 걸쳐 집필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작품 곳곳에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아서 왕 전설을 연구하고 창조적으로 재해석하기에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는 장면이 나타난다. 양키의 파격적인 장면깨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서 왕 이야기의 현대적 계승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다.

 

이 작품은 낙관적이라던 마크 트웨인답지 않다. 내용 전반은 분명히 낙관적 분위기가 농후하지만 결말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어둡고 절망적이다. 아서 왕의 죽음과 함께 행크 모건의 사회 개조와 변혁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잔존 세력과의 처참한 전투는 인간성을 되새겨보게 한다.

 

언제나 사회비판에 부지런했던 마크 트웨인은 표면상 고대 비판과 내면상 당대 비판을 동시에 이루어냈다. 겉핥기에 치중한 이는 근대 문명의 우월성에 열광하겠지만, 작가가 당대 미국과 세계 현실의 전개에 우려를 품고 있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즉 이 작품의 무게추는 후자, 즉 제국주의적 가치관에 더 치중하고 있다. 그것이 이 작품에 묘한 부조화와 긴장감을 유발하여 내내 석연치 않은 느낌을 들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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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 2012-06-12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 1 때 이 작품을 읽었는데, 지금까지도 모든 장면이 세세하게 기억날 정도로 여러번 읽었습니다. 그래서 리뷰 한줄 한줄 참 공감하며 읽었고, 지금 어른의 시각으로 감상을 말씀해주시니 여러가지 의미들이 새삼 그렇구나, 이해가 되는군요 ^^
 
예이츠 시 전집
한국예이츠학회 지음 / 동인(이성모)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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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유일의 예이츠 시 전집이다. 단 조건부다. 우선은 현재 출간되어 유통되는 경우에 한하는 것으로 이미 1980년대에 최초로 시 전집(권의무/한신문화사)이 나온 적이 있다. 완전한 전집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어쨌든 대다수 작품을 수록하였으며, 이는 여전히 중고서점에서 구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은 표제와는 달리 예이츠의 시 ‘전집’이 아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의 데뷔작 <어쉰의 방랑>을 포함한 장편 설화시가 누락되어 있다. 즉 이 전집은 서정시에 국한한 시 전집인 셈이다. 참고로 권의무 역본에서는 설화시도 수록되어 있다. 내친 김에 이 책의 아쉬운 점을 더 언급하련다. 여기에 수록된 시 작품들은 모두 우리말 번역본만 수록되어 있다. 영한대역이 아니다. 이는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책의 부피가 너무 방대한 점과 영문 원시의 경우 인터넷 등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였다고 한다. 일견 이해되지만, 독자의 편의성 및 독서의 효과성 측면에서는 매우 아쉽다. 권의무 역본은 영한대역본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이 시 전집이 별볼일 없는 것처럼 생각될지 모르나 기실 그렇지 않다. 예이츠 만큼 시 선집과 시 전집의 세계가 차이나는 시인도 없을 것이다. 시중의 선집들은 고작 30편 내외의 작품을 수록한데다 선집의 한계상 시의 길이와 성격도 무난한 선택을 하고 있다. 예컨대 ‘미친 제인’의 경우 선집에는 주교와 이야기하는 한 편 정도만 수록되지만, 전집을 통해 미친 제인과 미치광이 톰이 세트임을 알 수 있고 총 25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시라는 진면모를 알 수 있다. 또한 ‘젊었을 때와 늙었을 때의 여자’는 11편, ‘초자연의 노래’는 12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얄팍한 선집은 40여년에 걸친 시인의 시작 경력과 전집에 수록된 12권의 시집을 감안하면 터무니없이 빈약하다. 그의 시 선집만을 읽고 시인에 대한 섣부른 평가를 내리는 것은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에 불과할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한 오류에 빠졌다.

 

예이츠의 시 세계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생애와 작품을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개인과 사회, 존재의 통일로 발전되는 모습으로 구분하는 게 통상적이지만, 찬찬히 읽어나가 보면 이를 꼭 최적의 분류라고 하기도 어렵다. 초기작에도 후기 못지않은 사색적이며 철학적인 진지한 질문이 담겨 있으며, 후기작에도 초기 못지않은 순수한 서정을 읽어 나갈 수 있다.

 

대체로 보아 아일랜드의 민간 설화, 즉 켈트 문화에 연원을 둔 작품들은 전 기간을 통해 꾸준히 산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쉰, 쿠훌린, 엥거스, 메이브 여왕 등. 이는 시인의 정신적 고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 시인은 켈트를 넘어서 기독교 이전 또는 기독교에 물들지 않은 고대 문화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인도, 그리스 신화, 트로이와 헬렌 등.

 

시인은 현실에도 눈감지 않는다. 당대의 정치, 사회적 현실을 빗대거나 직접적 소재를 취한 작품들도 다수 존재한다. 아일랜드 독립투쟁, 자치정부 수립 후 혼란스러운 사회, 문화 예술에 대한 사회적 무지에 대한 반발 등.

 

그의 창작력에 불을 붙인 여인들(모드 곤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일각에서는 예이츠의 거의 모든 시를 모드 곤과의 관계를 통해 해석하려는 경향도 있다. 초기와 중기는 다소 그렇다하더라도 후기작까지 그렇게 연결짓는 것은 견강부회가 아닐까. 어쨌든 시인은 노년에 이르러서도 자신의 시적 관심은 정치보다는 사랑이라고 선언(<정치>에서)한다.

 

한편 후기작을 어떤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까는 예이츠 연구자에게 커다란 과제일 듯하다. 단순한 시어로 단순하지 않은 사상을 함축하는 대가의 경지를 발휘하고 있다. 여기서 신비주의 시인이라는 평가가 등장하게 된 연유이다. 아내와의 자동기술 체험을 통해 장기간에 걸쳐 그는 색다른 영적 경험을 겪게 된다. 이는 단순한 무의식의 반영에 그치지 않고 세계 문명에 대한 독자적인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후기작을 이해하는 데 <환상록>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2천년을 주기로 세계가 커다란 순환을 한다는 그의 인식은 이제 기독교가 역사적 한계에 도달하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당대적 관점에서 현대 문명의 문제점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지향점에 대한 선험적 체득을 보여준다. 그에게 있어 ‘존재의 통합’은 단순히 개인과 사회의 합일이 아니다. 바람직한 존재는 역사적 순환주기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그 안에서 자신과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바를 동일시한다. 그러한 개인과 사회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 찾고자 하는 끊임없는 갈구와 노력이 마이클 로바티즈와 비잔티움 등에 드러나 있다. 이런 면에서 예이츠를 예언시인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생겼으리라.

 

위에서 언급한 이 요인들 전부가 시인 예이츠의 면모이다. 다수의 요절하고 조로한 시인들과 달리 그는 노년기에도 창작력을 놓치지 않았으며 꾸준한 개인적, 시적 발전을 이루어냈다. 그에게 주어진 노벨문학상은 너무 일렀다는 개인적 생각이다. 그의 성취는 오히려 노벨상 수상 이후에 더욱 두드러진다.

 

석달에 걸쳐 띄엄띄엄 이 전집을 읽어나가는 시간은 내가 예이츠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고 얄팍한 선입견에 빠져 있었는가에 대한 자성의 시간인 동시에 재발견의 기간이기도 하였다. 진정으로 예이츠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어렵더라도 시 전집의 일부라도 통독해 보기를 권한다. 그것이 시 전집을 읽는 의의이자 가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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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음악으로의 초대
김현철 지음 / 음악세계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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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클래식 음악을 듣다 보면 어느 순간 싫증을 느끼는 때가 간혹 생긴다. 뻔한 작곡가에 한정된 레퍼토리를 반복하다 보면 연주 자체가 귀에 인이 박힐 정도가 된다. 이 진부성, 상투성을 벗어나고자 목마른 이가 물은 찾듯 새로운 연주를 갈구하는 함정에 빠진다.

 

그럴 때 고전시대 이전의 바로크 음악, 더 나아가 중세와 르네상스 음악을 접하면 생경함에 우선 놀라며, 나름 클래식 음악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하던 지적 오만이 산산이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문제는 바로크 시기까지는 어떻게든 소화가 되는데 르네상스부터 그 이전은 도저히 친숙해지기 어렵다는 점이다. 각종 음악 가이드 및 음반 소개서도 바흐, 헨델, 비발디가 상한선이며, 제법 진지한 경우 몬테베르디를 살짝 소개하는 정도에 그친다. 학구열에 불타는 애청자가 아닌 이상 영어로 된 음반 내지를 독해할 욕구는 생기지 않는다. 이렇게 음악도 낯설고 형식과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음악은 곧 귀에서 멀어진다. 이것이 현재까지의 통상적인 국내 클래식 음악계의 감상수준(적어도 나에 국한하면 참이다!)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가치는 획기적이다. 르네상스 음악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어렵지 않은 용어로 친절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주요 악파와 작곡가들, 그리고 추천할 만한 음반들을 소개하고 있어 이 책 한 권이라면 르네상스 음악에 대해서는 어느 자리에 가서도 기죽지 않고 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다. 사실 몇몇 작곡가들을 제외하면 어지간한 클래식 음악 애호가조차도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작곡가가 많이 등장하여 당대의 음악이 이렇게 풍성하였음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레고리오 성가로 대표되던 중세 음악은 14세기 기욤 드 마쇼에 의하여 커다란 변화의 조짐이 잉태되었다. 그리고 15세기 초 영국의 던스터블이 선구자가 되어 부르고뉴 악파에서 싹이 튼 후 플랑드르 악파에서 활짝 개화한 후 유럽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르네상스 음악은 “고대 그리스 음악의 재현이라기보다는 그리스인들의 인간 정신의 부활이며, 억압받지 않는 인간 본래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려는 예술 운동”(P.26)이다. 가톨릭의 굳건한 위상이 약화되기 시작하여 르네상스 음악 시대 후기에는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과, 영국 국교회의 성립으로 종교적 혼란이 이어지지만 예수를 근간으로 기본 교리는 변함없이 당대인들의 머리와 가슴을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르네상스 음악의 지배적 형식도 종교곡에 치우쳐 있음은 당연할 것이다. 다만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종교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음악성, 즉 예술성을 최대한 구현하려는 욕구를 반영하고자 하였으며, 세속음악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이 점차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음악사적으로 르네상스 음악은 몬테베르디를 전후로 하여 바로크 음악으로 이어진다. 바흐와 헨델, 비발디가 땅 위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모차르트가 모테트와 레퀴엠을 쓰고, 베토벤이 장엄미사를 작곡하며 현대음악 시기로 넘어와서도 꾸준히 종교음악이 생산되는 것은 결국 음악사적 시기를 면면히 관통하는 그네들의 문화적 유산과 정신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기욤 뒤파이, 요하네스 오케겜, 조스캥 데 프레, 하인리히 이자크, 피에르 드 라 뤼, 오를란도 디 라수스 등 부르고뉴와 플랑드르의 저명한 작곡가들의 위상이 어떤지 쉽사리 이해하려면, 음악사에서 그야말로 모차르트, 베토벤 급의 대작곡가로 비유하면 쉽게 납득이 갈 것이다.

 

뒤파이는 “중세 말기의 여러 작곡 기법을 종합하여 여기에 자신의 개성을 불어 넣어 새로운 르네상스 음악의 방향을 결정한 작곡가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로크 음악을 완성하고 근세 음악의 길을 연 바흐에 비견되는 인물”(P.59)이다.

 

조스캥 데 프레는 “르네상스 시대 전 기간을 통해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평가되고 있다. 조스캥은 모든 시대를 통털어 가장 위대한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회화에서 미켈란젤로가 한 일을 음악에서 했다고 평가되는 위대한 작곡가”(P.87)이다.

 

이탈리아의 팔레스트리나와 제수알도, 그리고 르네상스 음악 시기 또 다른 위대한 작곡가로 인정받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는 어떠한가. 게다가 영국만 예로 들더라도 던스터블, 존 태버너, 토마스 탈리스, 윌리엄 버드, 존 다울랜드 같은 기라성 같은 작곡가들이 줄지어 있다.

 

몬테베르디는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작곡가로 르네상스 시대의 최후를 장식하는 작곡가였을 뿐만 아니라 바로크라는 새로운 음악을 창시한 위대한 음악가”(P.168)이다.

 

소개된 음악가들 면면이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이렇게 책장을 넘기면서 그들과 작품들, 유행하던 종교적, 세속적 음악 장르 및 악기 등에 관한 글들을 읽다보면 두 귀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욕구가 솟구쳐 오른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작곡가와 작품을 소개하더라도 음반을 통해 듣지 못한다면(실연 감상까지는 기대하지 않는다.) 뜬구름 잡기에 불과하며, 화중지병(畵中之餠)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저자는 틈나는 대로 구할 수 있는 음반을 짤막하게나마 성심껏 소개하고 있다. 만약 여기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저자의 또 다른 책 <르네상스 음악의 명곡·명반>을 참조하면 충분할 것이다.

 

마무리하자면, 이 책은 국내에서 르네상스 음악을 음악 애호가들에게 소개한 거의 유일한 책이다. 단순한 소개 차원에 그치지 않고 실제 감상으로 이어지도록 각 작곡가와 작품의 아름다움을 논평하고 추천음반도 제시하면 말 그대로 종합 가이드라고 할 수 있는 귀중한 저서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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