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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이츠 시 전집
한국예이츠학회 지음 / 동인(이성모)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국내 유일의 예이츠 시 전집이다. 단 조건부다. 우선은 현재 출간되어 유통되는 경우에 한하는 것으로 이미 1980년대에 최초로 시 전집(권의무/한신문화사)이 나온 적이 있다. 완전한 전집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어쨌든 대다수 작품을 수록하였으며, 이는 여전히 중고서점에서 구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은 표제와는 달리 예이츠의 시 ‘전집’이 아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의 데뷔작 <어쉰의 방랑>을 포함한 장편 설화시가 누락되어 있다. 즉 이 전집은 서정시에 국한한 시 전집인 셈이다. 참고로 권의무 역본에서는 설화시도 수록되어 있다. 내친 김에 이 책의 아쉬운 점을 더 언급하련다. 여기에 수록된 시 작품들은 모두 우리말 번역본만 수록되어 있다. 영한대역이 아니다. 이는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책의 부피가 너무 방대한 점과 영문 원시의 경우 인터넷 등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였다고 한다. 일견 이해되지만, 독자의 편의성 및 독서의 효과성 측면에서는 매우 아쉽다. 권의무 역본은 영한대역본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이 시 전집이 별볼일 없는 것처럼 생각될지 모르나 기실 그렇지 않다. 예이츠 만큼 시 선집과 시 전집의 세계가 차이나는 시인도 없을 것이다. 시중의 선집들은 고작 30편 내외의 작품을 수록한데다 선집의 한계상 시의 길이와 성격도 무난한 선택을 하고 있다. 예컨대 ‘미친 제인’의 경우 선집에는 주교와 이야기하는 한 편 정도만 수록되지만, 전집을 통해 미친 제인과 미치광이 톰이 세트임을 알 수 있고 총 25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시라는 진면모를 알 수 있다. 또한 ‘젊었을 때와 늙었을 때의 여자’는 11편, ‘초자연의 노래’는 12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얄팍한 선집은 40여년에 걸친 시인의 시작 경력과 전집에 수록된 12권의 시집을 감안하면 터무니없이 빈약하다. 그의 시 선집만을 읽고 시인에 대한 섣부른 평가를 내리는 것은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에 불과할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한 오류에 빠졌다.
예이츠의 시 세계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생애와 작품을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개인과 사회, 존재의 통일로 발전되는 모습으로 구분하는 게 통상적이지만, 찬찬히 읽어나가 보면 이를 꼭 최적의 분류라고 하기도 어렵다. 초기작에도 후기 못지않은 사색적이며 철학적인 진지한 질문이 담겨 있으며, 후기작에도 초기 못지않은 순수한 서정을 읽어 나갈 수 있다.
대체로 보아 아일랜드의 민간 설화, 즉 켈트 문화에 연원을 둔 작품들은 전 기간을 통해 꾸준히 산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쉰, 쿠훌린, 엥거스, 메이브 여왕 등. 이는 시인의 정신적 고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 시인은 켈트를 넘어서 기독교 이전 또는 기독교에 물들지 않은 고대 문화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인도, 그리스 신화, 트로이와 헬렌 등.
시인은 현실에도 눈감지 않는다. 당대의 정치, 사회적 현실을 빗대거나 직접적 소재를 취한 작품들도 다수 존재한다. 아일랜드 독립투쟁, 자치정부 수립 후 혼란스러운 사회, 문화 예술에 대한 사회적 무지에 대한 반발 등.
그의 창작력에 불을 붙인 여인들(모드 곤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일각에서는 예이츠의 거의 모든 시를 모드 곤과의 관계를 통해 해석하려는 경향도 있다. 초기와 중기는 다소 그렇다하더라도 후기작까지 그렇게 연결짓는 것은 견강부회가 아닐까. 어쨌든 시인은 노년에 이르러서도 자신의 시적 관심은 정치보다는 사랑이라고 선언(<정치>에서)한다.
한편 후기작을 어떤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까는 예이츠 연구자에게 커다란 과제일 듯하다. 단순한 시어로 단순하지 않은 사상을 함축하는 대가의 경지를 발휘하고 있다. 여기서 신비주의 시인이라는 평가가 등장하게 된 연유이다. 아내와의 자동기술 체험을 통해 장기간에 걸쳐 그는 색다른 영적 경험을 겪게 된다. 이는 단순한 무의식의 반영에 그치지 않고 세계 문명에 대한 독자적인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후기작을 이해하는 데 <환상록>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2천년을 주기로 세계가 커다란 순환을 한다는 그의 인식은 이제 기독교가 역사적 한계에 도달하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당대적 관점에서 현대 문명의 문제점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지향점에 대한 선험적 체득을 보여준다. 그에게 있어 ‘존재의 통합’은 단순히 개인과 사회의 합일이 아니다. 바람직한 존재는 역사적 순환주기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그 안에서 자신과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바를 동일시한다. 그러한 개인과 사회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 찾고자 하는 끊임없는 갈구와 노력이 마이클 로바티즈와 비잔티움 등에 드러나 있다. 이런 면에서 예이츠를 예언시인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생겼으리라.
위에서 언급한 이 요인들 전부가 시인 예이츠의 면모이다. 다수의 요절하고 조로한 시인들과 달리 그는 노년기에도 창작력을 놓치지 않았으며 꾸준한 개인적, 시적 발전을 이루어냈다. 그에게 주어진 노벨문학상은 너무 일렀다는 개인적 생각이다. 그의 성취는 오히려 노벨상 수상 이후에 더욱 두드러진다.
석달에 걸쳐 띄엄띄엄 이 전집을 읽어나가는 시간은 내가 예이츠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고 얄팍한 선입견에 빠져 있었는가에 대한 자성의 시간인 동시에 재발견의 기간이기도 하였다. 진정으로 예이츠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어렵더라도 시 전집의 일부라도 통독해 보기를 권한다. 그것이 시 전집을 읽는 의의이자 가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