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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 ㅣ 세계문학의 숲 7
마크 트웨인 지음, 김영선 옮김 / 시공사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대단한 풍자문학이다. 19세기 미국인이 6세기 아서 왕 시기의 영국(보다 정확히는 브리튼)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역사를 뒤바꿀 계획을 실행한다. 발상 자체가 독특하며 대담하다.
마크 트웨인의 작품은 유머와 해학으로 가득 차 있다고 일컬어진다.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도 전자에 못지않다. 두툼한 분량의 소설이며, 발상의 엉뚱함을 제외하면 아서 왕 시기의 정치, 사회, 경제에 대한 혹독한 비판을 아끼지 않음에도 작가의 필치는 결코 심각해지지 않는다. 팽팽한 활시위를 슬쩍슬쩍 느슨하게 하는 작가 특유의 낙천적이며, 결코 젠체하지 않는 서민적 태도가 읽는 이에게 심적 여유를 불어넣는다.
유머와 해학은 본질적으로 비판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깊은 함의 없는 순전히 말장난에 불과한 유머는 찰나적이며 독자의 깊은 감흥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정통에 대한 삐딱한 태도, 주류에 대한 엇나간 사고 등 권위와 권력에 대한 소수자의 저항의식이 유머와 해학을 통해 발현된다. 이것이 문학으로 승화되면 뛰어난 풍자문학이 되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처럼.
19세기 양키의 눈에 비친 아서 왕 시기의 브리튼은 한마디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는 공간이다. 엄격한 계급제도는 체내에 뿌리박혀 있어 평등사상은 찾아보기 어려우며, 계급장벽이 심대하여 하층민들과 노예는 비인간으로 취급받아 심지어 죽여도 처벌은커녕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면서 작가는 당대에 노예제와 계급제도를 유지하는 남부와 영국 등을 비판하는 걸 놓치지 않는다.
주인공 행크 모건이 경악한 사실은 고대인들의 철저히 비합리적이고 반이성적인 사고관이다. 그들은 종교와 미신의 낡은 관습에 얽매여 능동적으로 삶을 구현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여기서 특히 날카로운 종교 비판이 두드러진다. 지배적인 종교는 사회에 군림하는 절대악과도 같다.
작품 내내 독자를 의아스럽게 만드는 요인이 있다. 작가가 비판하는 것이 아서 왕 시기의 브리튼사람들인지 아니면 거기서 좌충우돌하며 19세기를 재현하려는 코네티컷 양키인가? 표면상으로는 분명히 19세기의 발달한 문명과 진보된 의식의 우월성이 압도적이다. 이에 비하면 고대 브리튼은 야만사회임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읽는 내내 그다지 맘이 편치 않은 것은 미래의 한 개인이 당대적 가치관을 절대 진리로 간주하고 시대와 지역을 달리하는 문화권에 일방적으로 이식하고 개조하려고 하는 행위가 정당하지 않다는 인식이다. 행크 모건의 행동은 19세기와 20세기 전반에 타 문명권을 미개한 것으로 간주하고 서양문명을 강제하는 제국주의 정책과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실상 아서 왕을 포함한 귀족층과 주인공의 행동 양태는 유사한 면모를 보이니 주인공도 자신이 내키지 않는 이는 무조건 처형해 버리며, 인간의 가치를 부르짖던 그가 현대문명의 대량살상무기를 통해 수만 명의 기사들을 몰살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일말의 가책도 받지 않은 점 등이 참으로 그러하다.
마크 트웨인이 아서 왕 시대를 선택한 연유를 생각해 본다. 작가는 특히 영국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들이 여전히 왕정을 유지하는 것도 마뜩치 않다. 또 다른 작품 <왕자와 거지>의 배경도 역시 영국이다. 미국의 정신문화는 유럽, 특히 영국에 근원하고 있으며 영국인들에게 아서 왕의 전설은 일종의 모태 신앙과도 같이 선천적인 것이다. 작가는 남부의 노예제 등 구체제 비판을 영국에, 이어서 고대 브리튼과 연결 지어 고대의 영광이 얼마나 허위적이며, 눈부신 기사제도가 사실은 한 치도 쓸모없는 무용지물임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4년에 걸쳐 집필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작품 곳곳에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아서 왕 전설을 연구하고 창조적으로 재해석하기에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는 장면이 나타난다. 양키의 파격적인 장면깨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서 왕 이야기의 현대적 계승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다.
이 작품은 낙관적이라던 마크 트웨인답지 않다. 내용 전반은 분명히 낙관적 분위기가 농후하지만 결말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어둡고 절망적이다. 아서 왕의 죽음과 함께 행크 모건의 사회 개조와 변혁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잔존 세력과의 처참한 전투는 인간성을 되새겨보게 한다.
언제나 사회비판에 부지런했던 마크 트웨인은 표면상 고대 비판과 내면상 당대 비판을 동시에 이루어냈다. 겉핥기에 치중한 이는 근대 문명의 우월성에 열광하겠지만, 작가가 당대 미국과 세계 현실의 전개에 우려를 품고 있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즉 이 작품의 무게추는 후자, 즉 제국주의적 가치관에 더 치중하고 있다. 그것이 이 작품에 묘한 부조화와 긴장감을 유발하여 내내 석연치 않은 느낌을 들게끔 만들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