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숲 정원에서 온 편지
카렐 차페크 지음, 윤미연 옮김, 요제프 차페크 그림 / 다른세상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차페크는 극작가, 소설가로서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다양한 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비평집, 대담집, 여행기, 서한집, 우화 및 동화 등등. 이 책은 이색적인 차페크의 면모를 알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부여한다.

 

이 책은 1929년에 발표된 <원예가의 열두 달>이다. 여기서 원예가라 함은 주택에서 조촐하게 취미삼아 화초를 심고 가꾸는 이들을 지칭한다. 그는 순전히 아마추어 애호가의 관점에서 열두 달을 기술하고 있다. 형식이나 내용 등을 감안하면, 잡지 게재물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솔직히 소설과 희곡의 스타일과 내용을 통해 이해한 차페크에게 원예가의 자질이 있다는 것은 의외이다. 이래서 작품과 작가를 섣부르게 동일시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는 화초에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다. 낯선 품종들을 구분하고 줄줄이 쏟아내는 것은 여간 공력이 아니다. 화초에 관한 한 전혀 무지한 나로서는 경이롭기조차 할 지경이다.

 

여기서 차페크는 어깨에 힘을 빼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헤친 채 원예에 심취한 이들의 전형적인 대변자이다. 본인이 직접 손대지 않으면 결코 이해하지 못할 원예의 즐거움과 어려움 등을 다소 해학적으로 묘사하여 읽는 이의 마음을 흐뭇하게 만든다. 게다가 형인 요제프 차페크의 우스꽝스런 삽화가 간간이 들어가 있어 글과 그림의 어울림도 제법 그럴듯하다.

 

1월부터 시작하여 12월까지 월별로 원예가가 바라보는 일 년은 통상의 열두 달과는 상이하다. 한겨울인 원예가는 1월에도 한가하지 않으며 새봄을 기다리며 철저한 준비에 매진한다. 이윽고 날이 풀려 꽃이 피어나는 계절이 오면 그의 몸은 한가할 틈이 없으며 하루가 부족할 지경이다. 비가 안 와도 또 많이 와도 고민하며, 여름휴가를 마지못해 떠나서도 머릿속에는 온통 정원에 대한 생각뿐이다. 이 대목에서 문득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떠오른다. 즐거움이 집착하는 변하는 것은 찰나의 순간.

 

마른 잎이 떨구어지는 시절, 이제 사람들은 한 해가 마무리된다고 하지만 원예가에게 가을과 겨울은 또 다른 봄이다. 땅속에서 봄철을 기약하는 무수한 생명의 약동을 감지할 수 있으므로. 이렇게 정신없이 열두 달을 보면서 원예가가 정원을 가꾸는 목적은 물론 아름다운 화초를 감상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정원일에 치이느라 막상 원예가는 감상할 여유도 시간도 갖지 못한다. 눈 덮인 한겨울이 되어야 비로소 여유가 생기지만...

 

원예가는 정원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자연은 시련을 줄지언정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자연을 벗하는 이들은 그래서 순박하다. 이는 간교함과 악으로 물들어 가는 사회에 대한 나직하지만 강력한 경고이다.

 

베이컨만큼 기름진 흙...이 흙들은 저마다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반면에 미끈거리는 흙...이런 흙들은 모두 추하고 한심하다. 인간이 지닌 냉혹함, 완고함, 사악함만큼이나 추하다.” (P.184)

 

정원은 결코 완성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정원은 인간 세상과 인간이 하는 모든 일과 유사하다.” (P.197)

 

정말로 정원에는 죽음과 같은 것이 전혀 없다. 잠과 같은 것도 없다. 우리는 단지 한 계절에서 또 다른 계절로 나아갈 뿐이다. 우리는 삶에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삶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P.212)

 

미래는 이미 우리 내부에 있다. 지금 우리 내부에 없는 것은 미래에도 역시 없을 것이다. 우리는 새싹이 땅 밑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미래가 우리 내부에 있기 때문에 미래를 알지 못한다...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미래의 은밀한 분주함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지난날에 대한 향수나 미래에 대한 불안 같은 것은 되잖은 헛소리라고,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즉 성장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것이다.” (P.219~220)

 

차페크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어렵고 험난한 시기를 정면으로 살아간 작가이다. 미증유의 인재(人災)는 인간에 대한 신뢰와 인식의 밑바닥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정원일을 통하여 인간에 대한, 나아가 생명에 대한 본질은 흔들림이 없음을, 따라서 여전히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됨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닐는지.

 

차페크의 이 작품이 후에 헤르만 헤세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데, 연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일견 당연해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성
카렐 차페크 지음, 김규진 옮김 / 리브로 / 1998년 9월
평점 :
품절


<호르두발>의 제1부는 주인공의 내적 독백 방식으로 독자가 호르두발의 삶과 내면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어서 제2부와 제3부는 형사의 수사와 법정의 재판 과정을 통해 호르두발의 죽음에 대한 진실 파헤치기를 시도하고 있다. 여기서는 탐정 기법을 사용하며 주인공의 외면과 인간 관계를 객관적 관점에서 기술한다. 이렇게 주인공의 내부와 외부의 복합적 바라보기를 통해 호르두발의 진실을 알고자 하지만 작가는 언저리만 보여주고 나머지는 독자에게 맡긴다.

 

<유성>의 구성도 전작과 비슷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유성>에서는 환자 X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대신 보다 주관적이고 신비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

 

환자 X는 비행기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 병상에 누워있다. 악천후 속에 그를 유성같은 속도로 비행하도록 만든 것은 무슨 연유인지 그의 삶은 어떠했는지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그리고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한다.

 

간호사 수녀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그녀는 환자 X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의 꿈은 일종의 예지몽(叡智夢)이라고 할 것이다.

 

묘한 환자인 천리안은 뛰어난 감각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인식의 동화를 통해 자신을 환자 X와 일치시켜 그의 실체에 다가선다.

 

시인은 이야기를 창조한다. 그는 직관으로 진실을 발견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상상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허구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것은 순수한 자연이고 꾸민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선생님, 저는 그것을 직관으로 씁니다. 제 자신도 왜 그런지는 모릅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상상이고 직관입니다.” (P.160)

 

의사들(내과의와 외과의) 역시 각자의 학문적 지식에 의거하여 그의 삶의 이력을 추론한다.

 

이처럼 모든 이들이 재구성한 그의 삶은 놀랍게도 큰 공통점을 지닌다. 환자 X는 서인도 제도 지역에서 생활하였고, 비교적 유복한 집안 출신이지만 집안을 박차고 고생을 많이 겪었을 것이라는 점. 여인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맹렬한 비행을 감행하였을 것이라는 점 등.

 

<호르두발>은 이야기의 흐름이 구체성을 띠고 있어 쫓아가기가 어렵지 않다. 반면 이 작품은 구체성 보다는 추상성, 명료성 보다는 모호성에 치중하고 있다. 하긴 이야기의 재구성이 각자 꿈, 감각, 상상 등에 근거하므로 이는 예정된 것이기도 하다. 특히 천리안이 자신의 인식의 동화 방식의 배경 내지 정당성을 설명하는 내용은 나로서는 도저히 요령 부득이다.

 

전체 이야기 가운데 시인의 이야기가 가장 큰 분량을 차지한다. 역시 작가는 시인의 상상과 직관에 더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는 환자 X가 기억을 상실하고 케텔링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사랑을 성취하려고 고생하다가 문득 기억을 되찾고 부모의 용서를 구하고자 귀향하다가 사고를 당한다.

 

높은 산을 등반할 때 우리는 다양한 등산로를 택할 수 있다. 방위의 동서남북에 따라 오르는 코스가 다르며, 정상으로 바로 올라 내려다보는 호연지기를 누리거나 또는 둘레길을 택하여 산의 속살을 감상할 수도 있다. 누구도 산의 전체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모두가 산에 대하여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환자 X의 참모습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각자가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고 지어낸다. 이것은 일말의 진실을 내포하지만 완전한 참은 아니다. 어느 정도가 진실인지 참인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다른 접근을 통해 유사한 삶을 추론했다면 그의 삶의 많은 부분이 해명된 것이 아닐까 판단할 수 있다.

 

이 작품과 <호르두발>의 접근 방향은 이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것이 후속작 <평범한 인생>에서는 어떤 프리즘으로 이어질지 자못 궁금하다.

 

같은 옮긴이에 의하여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새 번역본이 나와 있다. 당초에는 신간을 읽을 의향이었는데, 애석하게도 신간은 완역이 아니라 절반 정도의 발췌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구간을 대신 읽는다. 그런데 재차 확인해 보니 역시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완역본도 후에 출간된 것 같다. 책 면수가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 것을 보아하니. 어차피 구간은 절판이므로 관심있다면 신간 완역본을 읽는 편이 나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르두발 지만지 고전선집 573
카렐 차페크 지음, 권재일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작품에서 호르두발의 철저한 고독에 대하여 깊은 공감을 갖지 못하는 사람은 그 감수성을 의심하고 싶다. 차페크의 소위 철학소설 3부작의 처음인 이 작품은 굳이 철학적 해설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문학 그 자체로서 충분히 심금을 울릴 수 있다.

 

3부 구성 중에서 핵심은 호르두발의 목소리로 구술되는 1부일 것이다. 분량 면에서도 또한 호르두발 자신의 내면이 표출된다는 점에서. 2부와 3부는 호르두발의 사망 이후 사건 수사와 재판 과정을 다루고 있어 1부에서 간과하였던 호르두발의 태도와 외부 환경과의 관계를 기술한다.

 

호르두발은 미국에 가서 8년간을 고생하며 돈벌이를 한다. 모은 돈은 꼬박꼬박 아내에게로 송금하였다. 적어도 연락이 두절되기 전까지는. 그러다 실직을 하고 문득 귀국을 하게 된다. 미국에서 언어도 통하지 않고 가족과 지인도 없는 가운데 그는 철저히 혼자로 생활한다. 그가 귀국 후 꿈꾸는 것은 따뜻한 일상의 가정사로 복귀하는 것이다.

 

1부를 관통하는 정서의 기조는 외로움과 처량함이다. 그의 기대는 철저히 저버려진다. 아내도 아이도 그를 환영하지 않는다. 집에는 낯선 남자하인이 들어와 있다. 마을사람이 그를 쳐다보는 눈길은 외지인에 대한 그것과 별반 차이 없다. 무엇인 잘못된 것일까?

 

그는 외양간으로 간다. 그곳에서 잠자리를 찾는다.

거기가 그가 있을 장소니까요. 그리고 거기에서라면 적어도 그토록 외롭지는 않을 거예요. 누군가가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거든요.” (P.81)

 

이윽고 우리는 알게 된다. 호르두발이 집을 떠난 동안 그의 아내는 정숙하지 않았으며, 현재 하인 슈테판과도 관계를 가져왔다는 사실. 그에게 연락이 끊기자 하인이 사실상 바깥주인의 역할을 맡아왔다는 사실. 호르두발은 아내를 의심할 수 없다. 그에게 남은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는 슈테판을 내쫓았지만 결국 다시 들일 수밖에 없다. 오로지 아내를 위해서.

 

호르두발과 슈테판은 여러모로 대비된다. 체코인 대 헝가리인, 농경민 대 목축인, 소의 선호 대 말의 선호. 한쪽은 밭은 농사의 근본으로 여기는 반면 다른 이는 말 사육에 돈을 투자하는 게 훨씬 낫다”(P.61~62)고 주장한다. 출신과 가치관의 차이는 둘 간에 화목이 불가능함을 가시적으로 가리킨다.

 

세 주요 인물을 비교하면, 유라이 호르두발은 거세마이고 슈테판 마야는 종마이다. “거세마는 여전히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있고, 종마는 머리를 하늘로 꼿꼿하게 세우고 있다. 슈테판 또한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다니지.” (P.162) 폴라나는 어떤가? 유라이가 묘사하는 폴라나는 언제나 기품 있는 말처럼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다니는 부인”(P.180)이다. 즉 폴라나는 기질 상 유라이 보다는 슈테판과 더 어울린다. 그러기에 그녀는 약삭빠른 여자처럼 남편이 돌아왔지만 여전히 슈테판을 포기하지 못한다.

 

작가가 대독하는 호르두발의 내면세계에 대한 독특한 구술 형식은 19장 이후부터는 이색적 색채를 띠게 된다.

사랑이 이러한데, 사람들아, 모든 것이 잘되어 가고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P.157)

이제는 청자를 의식하여 직접 청자에게 호소하는 형식이 추가된다. 판소리로 치면 아니리에 가깝다고 할까. 낭독조의 어투에 해학조가 어려 있다.

 

해설에 따르면 이 작품은 차페크의 문학 중 파토스와 이미저리가 가장 풍부한 소설”(P.10)이다. 확실히 나직이 울리는 호르두발의 내적인 독백의 효과는 뛰어나다. 그는 왜소하고 나약한 인물이 아니다. 키도 크고 슈테판을 울타리 너머로 던져버릴 만큼 여전히 힘도 세다. 그럼에도 그는 수동적이다. 차라리 아내를 다그치는 대신 자기희생을 감내한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자기를 포기하려는 그의 태도는 탄식을 넘어 숭고하기조차 하다.

 

호르두발의 죽음은 병사(病死)인가 타살인가? 자기희생을 무릅쓴 그의 본심은 무엇일까? 그는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인지하고 있었는가? 작가는 주인공의 목소리를 통해(1), 사건을 수사하는 두 형사의 탐문을 통해(2), 법정에서의 재판과정을 통해(3) 호르두발의 참모습에 접근한다. 잡힐 듯 말 듯 하지만 결코 붙잡히지 않는 진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곤충 극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04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카렐 차페크의 희곡 선집이다. <로봇(R.U.R.)>을 제외한 주요 희곡을 모두 수록하여 한 권으로 차페크의 희곡 세계를 조감할 수 있는 좋은 기획이다.

 

애초 희곡으로 문학세계를 시작했던 만큼 차페크에게 희곡 장르는 후의 소설과 함께 그의 양대 작품 축을 이루는 중요성을 지닌다. 희곡은 통상적이라면 곧 연극 상연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소설과 달리 관객 앞에서 공연 형식을 통해 내용을 외부로 표출해야 한다. 속성상 외향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소설과 차이를 보인다.

 

그는 이미 <로봇>을 통해 인간이 기계 문명의 편의에 굴복하고 인간다움을 상실해 갈 때 인류의 미래는 매우 어둡게 됨을 경고하였다. 이 책에 수록된 희곡들에서도 그의 메시지는 뚜렷하다. 즉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한 집착이다.

 

차페크의 활동 시기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불안한 휴지기다. 전대미문의 대전으로 서구의 구체제는 무너져버린 반면 새로운 질서는 아직 태동하지 않고 있어 사회는 혼란스럽고 불안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일각에서는 어두운 악의 세력이 서서히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이때 인간과 세상에 예민한 촉수를 드리운 작가는 무슨 글을 쓸 수 있을 것인가.

 

<곤충 극장>(<곤충의 생활> 또는 <곤충의 세계> 등으로 번역되기도 함)은 기실 외피만 곤충일 뿐 사고와 행동 양태는 인간 그 자체다. 3막의 각 막별로 화려하고 부박한 삶을 쫓는 나비들, 생존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끊임없이 살육을 저지르는 맵시벌, 그리고 국익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대대적인 전쟁을 일으키는 개미들이 등장한다. 이들 곤충은 얼핏 기대와는 달리 전혀 희화화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직접적으로 인간을 다룰 때보다도 더 비열한 인간 세상의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기에 이건 벌레들이지 인간이 아니라는 여행자의 절규는 역설적으로 처절하다. “다시 인간들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P.65)

 

그런 면에서 내내 탄생의 고통을 겪는 번데기의 결말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래고 힘든 산고 끝에 무언가 거대함을 내포한 그는 탄생과 거의 동시에 곧 죽음을 맞이한다. 덧없는 찰나의 삶을 살아야 하기에 오히려 하루살이의 생명에 대한 예찬과 갈구는 절실하고 아름답다. 하루살이처럼 민달팽이처럼 스러지고 계속 땅을 기더라도 만물은 모두 살기를 바란다. 겉으로는 하찮고 가치 없이 여겨지더라도 주어진 생명을 경시하지 않고 소박하게 꾸려나가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함을 작가는 주창한다.

 

<마크로풀로스의 비밀>은 야나체크의 동명의 오페라로 유명하다. 사람은 누구나 무병장수를 기원한다. 불로장생은 진시황제만의 꿈은 아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 환갑은 우스워진지 오래고 백 살도 멀지 않다는 전망도 나오는 요즘.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장수를 넘어 영생을 할 수 있다면 인간의 행복을 지고에 이를 것인가. 앞서의 하루살이와는 반대되는 관점에서 생명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생의 처방을 받아 수백 년을 살아오고 있는 에밀리아 마르티. 그녀는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여러 개의 이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 성악가로 청자의 혼을 앗아갈 정도이면서도 그녀의 노래에서는 영혼이 느껴지지 않으며, 그녀와 동침한 프루스는 얼음처럼 차가워 시체를 안고 있는 기분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면서 그녀가 다시 영생을 갈구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것은 유한한 생명을 지닌 존재의 공통적 두려움일 것이다.

 

모든 게 차갑고 무감각해져. 선에도 무감하고, 악에도 무감하고. 천국에도, 이승에도 무감해져...그런데 당신들한테는 만사에, 만물에 의미가 있잖아. , 하느님, 한때는 나도 당신들 같았는데! 소녀였고, 여자였고, 행복했는데, 나도나도 인간이었는데! 맙소사, 하느님!” (P.224~225)

 

후반부는 전적으로 획득한 영생 처방의 처리에 관한 등장인물 간의 쟁론이다. 일견 어처구니없는 황당한 논쟁이지만, 진정으로 절실하기 그지없는 견해들이기도 하다. 특정인의 소유로 할 것인가, 특정 계급에 국한할 것인가 또는 인류 전체에 공개할 것인가. 이들의 논란은 가장 어린 크리스티나가 제조법을 불태우면서 잠잠해진다. 크리스티나는 말없이 웅변한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삶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감수하는 데 있음을. 유한함 속에서 가치를 더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생명의 아름다움이 있음을. 삶의 영원성은 개체 내가 아니라 개체 간을 통해서 실현된다는 것을.

 

<하얀 역병>10여 년 후에 씌어진 작품이므로 시대적 배경을 달리하지만 작품의 분위기와 주제의식은 여일하다. 나치 세력이 이미 역병처럼 유럽을 휩쓸고 있는 시기다. 이 작품에는 임박한 전쟁의 음울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한편 인류의 불행을 막고 평화를 회복하려는 작가의 심경이 갈렌의 행동을 통해 두드러진다.

 

50대 이상만 걸리며 발병하면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역병. 와중에 독재자인 총사령관은 영국과의 전쟁에 광분한다. 역병과 전쟁, 양자는 모두 인류의 운명에 위협을 주는 요인이다. 지휘권을 가진 이들은 역병의 심각성을 외면한다, 적어도 자신들이 감염되기 전에는. 갈렌은 역병 치료법의 공개 조건으로 전쟁 중지를 요구한다.

 

이 작품에는 다양한 성격과 유형의 개성적 인물이 등장한다. 의사로서의 윤리와 역병 치료법 발견자로서의 명예 사이에서 이중적 언행을 구사하는 시겔리우스, 대조적으로 세속적 영광에 관심 없이 오로지 빈민과 평화 실현에 헌신하는 이상적 인물 갈렌, 국가의 리더로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지만 막상 감염되자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히는 크루그 남작과 총사령관. 여기에 경제 침체기의 세대 간 갈등과, 전쟁을 열렬히 구호하는 군중 심리에 휩싸인 국민들의 모습 등. 이것은 조만간 닥쳐올 참혹한 비극의 적나라한 예시라고 할 것이다.

 

작품의 끝은 허무하기조차 하다. 군중에 짓밟힌 갈렌의 최후는 평화 달성의 불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더러 동시에 하얀 역병의 치료법이 소실되어 총사령관의 목숨은 물론 인류 전체의 생명이 위태로운 처지에 놓이게 됨을 여실히 제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봇 - 슬라브 문학 1
까렐 차뻭 지음, 김희숙 옮김 / 길(도서출판)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추억의 만화 영화 마징가Z’, ‘로보트 태권브이’, ‘그랜다이저에서 근년의 ‘A.I.’아이 로봇과 같은 SF 영화에 이르기까지 변치 않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로봇(robot)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 희곡은 로봇이라는 단어를 처음 등장시키고 일반 명사화 시키는데 지대한 공로를 세운 작품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로봇에 대한 초기의 유토피아적 환상은 어느덧 최근에는 로봇에 의한 인간 존재의 위협이라는 디스토피아적 미래관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는 차페크가 이 작품에서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로봇은 인간의 힘든 노동을 대신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기계적 존재 형태로 출발하였다. 20세기 전반 자본주의 전성기에 도달한 당대적 관점에서 가장 훌륭한 노동자는 가장 값싼 노동자였다(P.25). 그런데 인간은 단순하지 않고 감정이 까다로우며 영혼을 가지고 있다. 오로지 능률만을 고려한다면 이들은 모두 불필요한 장식물에 불과하다. 이렇게 로봇은 구상되었다.

 

한편 인간에게서 힘든 노동이 면제되면 여유분의 에너지를 지적, 예술적 활동에 투입함으로써 보다 나은 인류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발상은 지나치게 순진하다. 전형적인 기계론자들의 주장이다. 자아실현은 노동과 불가분의 관련성을 맺고 있음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 인간에게 노동은 회피하고픈 떨칠 수 없는 천형(天刑)이 결코 아니다. 일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존재 가치와 의의를 인식하고 각성하게 된다. 인간에게서 노동을 박탈하면 스스로 퇴화할 것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들”(P.77)로 전락한다.

 

노동 기계로 시작된 로봇의 역할은 점차 다양화되고 변질된다. 인간은 로봇을 생산적인 과업에만 이용하지 않으며, 전장에서 인간 상호간을 살상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이는 로봇의 탄생 목적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인간을 돕기 위한 로봇이 인간을 죽이기 위한 도구로 말이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단순한 기계덩어리로 나타난 로봇은 점차 세련되고 사실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아울러 최대한 인간을 닮게 된다. 사람들은 로봇에게 감각과 감정을 부여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자신들을 닮을수록 인간들을 증오하게 될 것을 예상치 못하고. 로봇이 인간화 될수록 그들은 생존 본능을 갖게 되고 자존감을 자각하게 되며 자신들의 부당하고 열악한 지위에 분개하게 된다. 결국 스스로의 생존을 위하여 인간을 멸종시키려는 의도를 갖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오히려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도민) “세상에 그 무엇도 인간만큼 인간을 증오할 수 있는 존재는 없어!” (P.118)

 

(로봇 다몬) “너희가 사람처럼 되고 싶다면, 너희는 죽이고 정복해야만 한다.”(P.150)

 

작품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암울하다. 신이 되고 싶어 한 인간의 무모한 도전은 과학기술의 힘을 얻어 로봇을 창조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로봇으로 인하여 인류 세계는 종말을 맞이한다. 그럼 지구는 로봇 세상이 된 것인가? 차페크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로봇은 공장에서 생산되어야 한다. 생명체처럼 생식을 통하여 번식하지 못하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결국 로봇의 운명도 어둡기 그지없다.

 

작가는 시종 여일하게 주장한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방법은 인간으로서의 능력과 한계를 자각하고 제한된 삶의 무대에서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데 있다고. 얼핏 왜소하고 화려하지 않지만 그것이 기실 인류 세계를 영속시키는 최상의 장면이라고. 그런 면에서 아래 알뀌스뜨의 강변은 불편하지만 진실이다.

 

(알뀌스뜨) “인간에게 지상낙원을 주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습니다!” (P.75~76)

 

작품의 결말은 매우 시사적이다. 로봇이 인간처럼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서로 사랑을 할 수 있다면 로봇은 이제 생명을 지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쁘리무스와 헬레나처럼. 그래서 최후의 인간 알뀌스뜨는 둘에게 아낌없는 축복을 내리며 생명의 불멸성을 찬양한다. 비록 인간은 사라지지만.

 

차페크의 뛰어난 상상력과 대담한 착상은 창작된 지 일백년 가까이 지냈음에도 전혀 구식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20세기 초의 기계적 산업화 시대를 배경으로 인간과 노동에 대한 당대의 진부한 인식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차페크가 제기한 명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휴머노이드니 안드로이드니 하는 진화한 형태의 로봇의 궁극적 지향점은 결국 인간 자체이다. 그것이 인간과 인류 세계에 순전히 도움이 될지 아니면 독이 될지는 알지 못한다.

 

도서출판 길에서 2002년에 나온 번역본은 이제 절판이 되어 시중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다행하게도 2010년에 리젬에서 청소년용 시리즈로 새 번역본(<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이 출간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