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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두발 ㅣ 지만지 고전선집 573
카렐 차페크 지음, 권재일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작품에서 호르두발의 철저한 고독에 대하여 깊은 공감을 갖지 못하는 사람은 그 감수성을 의심하고 싶다. 차페크의 소위 철학소설 3부작의 처음인 이 작품은 굳이 철학적 해설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문학 그 자체로서 충분히 심금을 울릴 수 있다.
총 3부 구성 중에서 핵심은 호르두발의 목소리로 구술되는 1부일 것이다. 분량 면에서도 또한 호르두발 자신의 내면이 표출된다는 점에서. 2부와 3부는 호르두발의 사망 이후 사건 수사와 재판 과정을 다루고 있어 1부에서 간과하였던 호르두발의 태도와 외부 환경과의 관계를 기술한다.
호르두발은 미국에 가서 8년간을 고생하며 돈벌이를 한다. 모은 돈은 꼬박꼬박 아내에게로 송금하였다. 적어도 연락이 두절되기 전까지는. 그러다 실직을 하고 문득 귀국을 하게 된다. 미국에서 언어도 통하지 않고 가족과 지인도 없는 가운데 그는 철저히 혼자로 생활한다. 그가 귀국 후 꿈꾸는 것은 따뜻한 일상의 가정사로 복귀하는 것이다.
1부를 관통하는 정서의 기조는 외로움과 처량함이다. 그의 기대는 철저히 저버려진다. 아내도 아이도 그를 환영하지 않는다. 집에는 낯선 남자하인이 들어와 있다. 마을사람이 그를 쳐다보는 눈길은 외지인에 대한 그것과 별반 차이 없다. 무엇인 잘못된 것일까?
그는 외양간으로 간다. 그곳에서 잠자리를 찾는다.
“거기가 그가 있을 장소니까요. 그리고 거기에서라면 적어도 그토록 외롭지는 않을 거예요. 누군가가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거든요.” (P.81)
이윽고 우리는 알게 된다. 호르두발이 집을 떠난 동안 그의 아내는 정숙하지 않았으며, 현재 하인 슈테판과도 관계를 가져왔다는 사실. 그에게 연락이 끊기자 하인이 사실상 바깥주인의 역할을 맡아왔다는 사실. 호르두발은 아내를 의심할 수 없다. 그에게 남은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는 슈테판을 내쫓았지만 결국 다시 들일 수밖에 없다. 오로지 아내를 위해서.
호르두발과 슈테판은 여러모로 대비된다. 체코인 대 헝가리인, 농경민 대 목축인, 소의 선호 대 말의 선호. 한쪽은 “밭은 농사의 근본”으로 여기는 반면 다른 이는 “말 사육에 돈을 투자하는 게 훨씬 낫다”(P.61~62)고 주장한다. 출신과 가치관의 차이는 둘 간에 화목이 불가능함을 가시적으로 가리킨다.
세 주요 인물을 비교하면, 유라이 호르두발은 거세마이고 슈테판 마야는 종마이다. “거세마는 여전히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있고, 종마는 머리를 하늘로 꼿꼿하게 세우고 있다. 슈테판 또한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다니지.” (P.162) 폴라나는 어떤가? 유라이가 묘사하는 폴라나는 언제나 “기품 있는 말처럼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다니는 부인”(P.180)이다. 즉 폴라나는 기질 상 유라이 보다는 슈테판과 더 어울린다. 그러기에 그녀는 약삭빠른 여자처럼 남편이 돌아왔지만 여전히 슈테판을 포기하지 못한다.
작가가 대독하는 호르두발의 내면세계에 대한 독특한 구술 형식은 19장 이후부터는 이색적 색채를 띠게 된다.
“사랑이 이러한데, 사람들아, 모든 것이 잘되어 가고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P.157)
이제는 청자를 의식하여 직접 청자에게 호소하는 형식이 추가된다. 판소리로 치면 아니리에 가깝다고 할까. 낭독조의 어투에 해학조가 어려 있다.
해설에 따르면 이 작품은 “차페크의 문학 중 파토스와 이미저리가 가장 풍부한 소설”(P.10)이다. 확실히 나직이 울리는 호르두발의 내적인 독백의 효과는 뛰어나다. 그는 왜소하고 나약한 인물이 아니다. 키도 크고 슈테판을 울타리 너머로 던져버릴 만큼 여전히 힘도 세다. 그럼에도 그는 수동적이다. 차라리 아내를 다그치는 대신 자기희생을 감내한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자기를 포기하려는 그의 태도는 탄식을 넘어 숭고하기조차 하다.
호르두발의 죽음은 병사(病死)인가 타살인가? 자기희생을 무릅쓴 그의 본심은 무엇일까? 그는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인지하고 있었는가? 작가는 주인공의 목소리를 통해(1부), 사건을 수사하는 두 형사의 탐문을 통해(2부), 법정에서의 재판과정을 통해(3부) 호르두발의 참모습에 접근한다. 잡힐 듯 말 듯 하지만 결코 붙잡히지 않는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