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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 슬라브 문학 1
까렐 차뻭 지음, 김희숙 옮김 / 길(도서출판)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추억의 만화 영화 ‘마징가Z’, ‘로보트 태권브이’, ‘그랜다이저’에서 근년의 ‘A.I.’와 ‘아이 로봇’과 같은 SF 영화에 이르기까지 변치 않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로봇(robot)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 희곡은 로봇이라는 단어를 처음 등장시키고 일반 명사화 시키는데 지대한 공로를 세운 작품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로봇에 대한 초기의 유토피아적 환상은 어느덧 최근에는 로봇에 의한 인간 존재의 위협이라는 디스토피아적 미래관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는 차페크가 이 작품에서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로봇은 인간의 힘든 노동을 대신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기계적 존재 형태로 출발하였다. 20세기 전반 자본주의 전성기에 도달한 당대적 관점에서 가장 훌륭한 노동자는 가장 값싼 노동자였다(P.25). 그런데 인간은 단순하지 않고 감정이 까다로우며 영혼을 가지고 있다. 오로지 능률만을 고려한다면 이들은 모두 불필요한 장식물에 불과하다. 이렇게 로봇은 구상되었다.
한편 인간에게서 힘든 노동이 면제되면 여유분의 에너지를 지적, 예술적 활동에 투입함으로써 보다 나은 인류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발상은 지나치게 순진하다. 전형적인 기계론자들의 주장이다. 자아실현은 노동과 불가분의 관련성을 맺고 있음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 인간에게 노동은 회피하고픈 떨칠 수 없는 천형(天刑)이 결코 아니다. 일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존재 가치와 의의를 인식하고 각성하게 된다. 인간에게서 노동을 박탈하면 스스로 퇴화할 것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들”(P.77)로 전락한다.
노동 기계로 시작된 로봇의 역할은 점차 다양화되고 변질된다. 인간은 로봇을 생산적인 과업에만 이용하지 않으며, 전장에서 인간 상호간을 살상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이는 로봇의 탄생 목적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인간을 돕기 위한 로봇이 인간을 죽이기 위한 도구로 말이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단순한 기계덩어리로 나타난 로봇은 점차 세련되고 사실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아울러 최대한 인간을 닮게 된다. 사람들은 로봇에게 감각과 감정을 부여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자신들을 닮을수록 인간들을 증오하게 될 것을 예상치 못하고. 로봇이 인간화 될수록 그들은 생존 본능을 갖게 되고 자존감을 자각하게 되며 자신들의 부당하고 열악한 지위에 분개하게 된다. 결국 스스로의 생존을 위하여 인간을 멸종시키려는 의도를 갖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오히려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도민) “세상에 그 무엇도 인간만큼 인간을 증오할 수 있는 존재는 없어!” (P.118)
(로봇 다몬) “너희가 사람처럼 되고 싶다면, 너희는 죽이고 정복해야만 한다.”(P.150)
작품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암울하다. 신이 되고 싶어 한 인간의 무모한 도전은 과학기술의 힘을 얻어 로봇을 창조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로봇으로 인하여 인류 세계는 종말을 맞이한다. 그럼 지구는 로봇 세상이 된 것인가? 차페크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로봇은 공장에서 생산되어야 한다. 생명체처럼 생식을 통하여 번식하지 못하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결국 로봇의 운명도 어둡기 그지없다.
작가는 시종 여일하게 주장한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방법은 인간으로서의 능력과 한계를 자각하고 제한된 삶의 무대에서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데 있다고. 얼핏 왜소하고 화려하지 않지만 그것이 기실 인류 세계를 영속시키는 최상의 장면이라고. 그런 면에서 아래 알뀌스뜨의 강변은 불편하지만 진실이다.
(알뀌스뜨) “인간에게 지상낙원을 주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습니다!” (P.75~76)
작품의 결말은 매우 시사적이다. 로봇이 인간처럼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서로 사랑을 할 수 있다면 로봇은 이제 생명을 지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쁘리무스와 헬레나처럼. 그래서 최후의 인간 알뀌스뜨는 둘에게 아낌없는 축복을 내리며 생명의 불멸성을 찬양한다. 비록 인간은 사라지지만.
차페크의 뛰어난 상상력과 대담한 착상은 창작된 지 일백년 가까이 지냈음에도 전혀 구식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20세기 초의 기계적 산업화 시대를 배경으로 인간과 노동에 대한 당대의 진부한 인식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차페크가 제기한 명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휴머노이드니 안드로이드니 하는 진화한 형태의 로봇의 궁극적 지향점은 결국 인간 자체이다. 그것이 인간과 인류 세계에 순전히 도움이 될지 아니면 독이 될지는 알지 못한다.
※ 도서출판 길에서 2002년에 나온 번역본은 이제 절판이 되어 시중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다행하게도 2010년에 리젬에서 청소년용 시리즈로 새 번역본(<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이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