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
카렐 차페크 지음, 김규진 옮김 / 리브로 / 1998년 9월
평점 :
품절


<호르두발>의 제1부는 주인공의 내적 독백 방식으로 독자가 호르두발의 삶과 내면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어서 제2부와 제3부는 형사의 수사와 법정의 재판 과정을 통해 호르두발의 죽음에 대한 진실 파헤치기를 시도하고 있다. 여기서는 탐정 기법을 사용하며 주인공의 외면과 인간 관계를 객관적 관점에서 기술한다. 이렇게 주인공의 내부와 외부의 복합적 바라보기를 통해 호르두발의 진실을 알고자 하지만 작가는 언저리만 보여주고 나머지는 독자에게 맡긴다.

 

<유성>의 구성도 전작과 비슷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유성>에서는 환자 X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대신 보다 주관적이고 신비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

 

환자 X는 비행기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 병상에 누워있다. 악천후 속에 그를 유성같은 속도로 비행하도록 만든 것은 무슨 연유인지 그의 삶은 어떠했는지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그리고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한다.

 

간호사 수녀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그녀는 환자 X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의 꿈은 일종의 예지몽(叡智夢)이라고 할 것이다.

 

묘한 환자인 천리안은 뛰어난 감각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인식의 동화를 통해 자신을 환자 X와 일치시켜 그의 실체에 다가선다.

 

시인은 이야기를 창조한다. 그는 직관으로 진실을 발견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상상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허구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것은 순수한 자연이고 꾸민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선생님, 저는 그것을 직관으로 씁니다. 제 자신도 왜 그런지는 모릅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상상이고 직관입니다.” (P.160)

 

의사들(내과의와 외과의) 역시 각자의 학문적 지식에 의거하여 그의 삶의 이력을 추론한다.

 

이처럼 모든 이들이 재구성한 그의 삶은 놀랍게도 큰 공통점을 지닌다. 환자 X는 서인도 제도 지역에서 생활하였고, 비교적 유복한 집안 출신이지만 집안을 박차고 고생을 많이 겪었을 것이라는 점. 여인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맹렬한 비행을 감행하였을 것이라는 점 등.

 

<호르두발>은 이야기의 흐름이 구체성을 띠고 있어 쫓아가기가 어렵지 않다. 반면 이 작품은 구체성 보다는 추상성, 명료성 보다는 모호성에 치중하고 있다. 하긴 이야기의 재구성이 각자 꿈, 감각, 상상 등에 근거하므로 이는 예정된 것이기도 하다. 특히 천리안이 자신의 인식의 동화 방식의 배경 내지 정당성을 설명하는 내용은 나로서는 도저히 요령 부득이다.

 

전체 이야기 가운데 시인의 이야기가 가장 큰 분량을 차지한다. 역시 작가는 시인의 상상과 직관에 더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는 환자 X가 기억을 상실하고 케텔링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사랑을 성취하려고 고생하다가 문득 기억을 되찾고 부모의 용서를 구하고자 귀향하다가 사고를 당한다.

 

높은 산을 등반할 때 우리는 다양한 등산로를 택할 수 있다. 방위의 동서남북에 따라 오르는 코스가 다르며, 정상으로 바로 올라 내려다보는 호연지기를 누리거나 또는 둘레길을 택하여 산의 속살을 감상할 수도 있다. 누구도 산의 전체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모두가 산에 대하여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환자 X의 참모습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각자가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고 지어낸다. 이것은 일말의 진실을 내포하지만 완전한 참은 아니다. 어느 정도가 진실인지 참인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다른 접근을 통해 유사한 삶을 추론했다면 그의 삶의 많은 부분이 해명된 것이 아닐까 판단할 수 있다.

 

이 작품과 <호르두발>의 접근 방향은 이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것이 후속작 <평범한 인생>에서는 어떤 프리즘으로 이어질지 자못 궁금하다.

 

같은 옮긴이에 의하여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새 번역본이 나와 있다. 당초에는 신간을 읽을 의향이었는데, 애석하게도 신간은 완역이 아니라 절반 정도의 발췌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구간을 대신 읽는다. 그런데 재차 확인해 보니 역시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완역본도 후에 출간된 것 같다. 책 면수가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 것을 보아하니. 어차피 구간은 절판이므로 관심있다면 신간 완역본을 읽는 편이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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