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클린 자서전 - 세기를 넘는 젊은이들의 인생 교과서
벤자민 프랭클린 지음, 강미경 옮김 / 느낌이있는책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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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프랭클린이 어떤 인물인지 웬만한 사람들은 대개 알고 있다. 아이들의 위인전 전집에도 등장하며, 그의 이름을 딴 유명한 다이어리도 팔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에 관한 기록물을 남겼다. 그것도 매우 뛰어난 수준으로.

 

아마 내가 그의 자서전을 처음 읽은 것도 중학생 때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범우 사루비아문고라는 청소년 문학시리즈의 한 권인데 제법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난다. 물론 대단한 사람이라는 흐릿한 인상에 남았을 뿐이지만. 제대로 된 프랭클린 자서전을 읽어보고 싶다. 그래서 프랭클린이란 인물이 진정 얼마나 위인인지 진면목을 이제 성숙한 시각에서 알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펼쳐든다.

 

무엇보다 그의 솔직성이 두드러진다. 그는 자신의 공과를 가감 없이 적는다. 공적은 자랑하지 않고 과오는 숨기지 않고 자기비판한다. 젊은 시절 한때의 방탕과 친구의 아내에 대한 성적 집적거림 등을 보면 그 역시 평범한 젊은이였을 따름이다.

 

이것이야말로 내 인생의 가장 큰 실수였다. 다시 한 번 삶이 주어진다면 절대로 그런 방탕한 생활은 하지 않을 것이다. (P.106)

 

하지만 이건 정말이지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인생에 있어서 또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P.111)

 

프랭클린의 훌륭한 인품과 태도는 대부분 후천적이다. 스스로 지켜야 할 덕목들을 선정해서 계획표에 따라 주간, 월간, 연간으로 실행 여부를 관리하는 방식은 훗날 자기계발 유형의 원조 격에 해당할 정도로 효과적이며 선구적이다. 그가 제시한 13가지 덕목들을 언급하는 것은 오늘날도 유효하다. 절제, 침묵, 질서, 결단, 절약, 근면, 진실, 정의, 중용, 청결, 침착, 순결, 겸손. 이 덕목들을 지키고 체화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으니 그가 후년에 고매한 인품과 덕의 상징으로 추앙받았음은 놀랄 일이 아니다.

 

번개가 전기임을 증명한 과학자로서 유명하지만, 인쇄업자로 출발한 그는 신문발행인이자 당대의 저명한 정치가요 독립운동가인 동시에 사회개혁가이기도 하였다. 현재의 필라델피아 도서관을 설립하고, 소방대와 병원, 대학 설립 등 새롭게 인식한 주요 업적 등은 그의 전인적 풍모를 알게끔 한다.

 

여기서 프랭클린의 생을 뒤쫓으며 시시콜콜 그의 업적을 찬양할 필요는 없으리라. 프랭클린 자신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자랑의 목적으로 자서전을 썼다면 이 책은 당대에 조용히 사멸할 운명에 처해졌을 것이므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변변찮은 교육도 받지 못하고 어릴 때부터 생업 현장에 뛰어든 인물이 훗날 수많은 미국인과 세계인들이 흠모하는 인물이 되었다는 점은 범상하지 않다. 그 과정 속의 근면과 절제, 치열한 분투 등은 당연할 것이며, 보다 완벽한 인격 수양을 위한 노력도 간과할 수 없다.

 

난 건전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언제까지나 간직하겠다고 결심했었다. (P.142)

 

정통적, 보수적인 기독교 교리에 반감을 지니고 있던 그가 타락의 길에 빠져들지 않았던 사유 중 하나는 바로 사고의 건전성에 있었다. 특정 종교에 무관하게 훌륭한 인간으로서의 공통적 자질을 쌓고 지키려고 노력한 건전함 말이다.

 

그는 행운과 요행을 고대하지 않고 자신의 발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성취를 중시하였다. 관념의 허상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고 일상과 현실의 사회를 개선시키기 위해 고민했다. 건전한 실용주의라 할만하다.

 

인간의 행복이란 어쩌다 생기는 횡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발견하는 소소한 일에 있는 것이다. (P.297)

 

뛰어난 가문 출신 또는 하늘이 내린 천재와 같은 인물들은 비록 외경하고 감탄할망정 존경의 념이 들지 않는다. 좌우를 둘러볼 때 우리와 비슷한 처지인 사람이 각고의 노력(물론 정직하다는 전제로)을 기울여 세상에 큰 족적을 남겼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들을 숭배하고 존경한다. 그것이 얼마나 지난한 여정이었음을 본능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바로 그런 유형의 위인이다. 많은 후대인들이 여전히 실패하면서도 본받으려고 계속 애쓰는 연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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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아이 여자아이 - 유치원생에서 고등학생까지
레너드 삭스 지음, 이소영 옮김 / 아침이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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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아이를 둘씩이나 키우는 처지이고 보니 육아가 힘겹게 여겨지는 사례가 자주 있다. 게다가 요즘은 초등학교 4학년인 큰아이와 애엄마가 날카롭게 대립하는 빈도가 증가하여 어찌 처신해야 할지 곤혹스럽기 그지없다. 아내의 의견과 입장을 십분 인정하지만 한창 혈기왕성하고 자유분방한 녀석을 책상머리에 잡아놓고 애엄마가 원하는 학습 수준을 강요하는 장면도 썩 보기 좋지는 않다. 가끔씩 오버랩 되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상기하면 때로는 입맛이 씁쓸하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하다 이 책을 펼쳐든다.

 

저자가 주장하는 요지는 간결 명료하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생물학적인 성차가 존재하므로 육아 및 교육 과정에서 이 점을 고려하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일견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새삼 주장하는 게 아닌가 생각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우리네 교육방식과 프로그램이 성적으로 무차별적이고 획일적임을 깨닫게 된다.

 

유치원과 초등학교는 남녀합반이 당연하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대세는 남녀공학으로 바뀌는 추세가 교육적으로 올바른 것인가. 상대방 성에 대한 자연스런 인식과 존중을 가져오며 선의의 경쟁을 유발할 것이라는 막연한 판단은 과학적 근거를 지니고 있지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오히려 일정 시기까지는 동성들로만 이루어진 교육체계가 교육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하면서. 시대의 추이에 역행하는 발언이라고 하겠다.

 

임상의학자인 저자는 현재의 남녀공학 교육방식은 남녀평등론자들의 정치적 주장이 반영된 결과일 뿐 교육학적인 진지한 고민이 결여되어 있음을 밝힌다. 수많은 상담사례와 연구결과를 통해 이것이 남녀의 자연스런 성장 상의 차이를 반영하지 못하고 성별 차이에 대한 왜곡된 견해를 부각하고 강화한다는 것이다.

 

어린 남자아이는 손의 미세근육이 아직 발달되지 못하여서 여자아이에 비해서 예쁜 글쓰기에 불리하다. 이를 다그치면 오히려 글쓰기에 저항감을 갖게 된다. 또한 상대적으로 청력이 약하다. 대부분의 여자선생님들이 하듯이 조근 조근한 어투는 주로 뒷자리에 앉은 남자아이들에게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으니 주의가 산만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언어능력도 늦게 형성되니 영락없이 부진아 또는 부적응아로 비치기 딱 좋다. 놀랍지 않은가!

 

남녀의 성 차이는 호르몬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유전적으로 결정된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여자의 뇌 조직과 남자의 뇌 조직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P.29)

 

단순히 발달과정 상의 늦고 빠름이 아니라 뇌 구조가 자체가 다르다고 한다. 아이나 어른을 불문하고 남자들은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는데 서투르다. 여자아이가 수학이나 물리에 서투르고 공간 지각 면에서 취약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는 뇌 기능의 차이에 연원하니 무조건 상대방 성을 놀리고 비웃을 것은 아니다. 자연은 남녀의 성역할에 따른 구조와 기능의 차이를 태생적으로 부여한 것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많은 남자아이들이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현실이다. 학교의 규율은 활동적이고 모험적이며 공격 성향을 지닌 남자아이들의 욕구를 억제할 뿐 자연스럽게 발산하지 못하게 한다. 학습능력의 상대적 차이는 성적과 평가의 우등생과 열등생의 구조를 고착화시키며 상대방 성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커녕 질시와 갈등을 확산시킨다. 더구나 나이를 먹음에 따라 이성을 의식하면서 남녀의 전형적인 성역할이 오히려 강화된다고 한다. 여기서 여자아이는 외모에 대한 관심과 집착이 바람직스럽지 못할 정도로 중시된다.

 

모든 아이들은 각자의 개성이 있다. 그러나 각 아이가 독특하고 복잡하다는 사실 때문에 성별이 아동발달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원칙 중 하나(다른 한 가지 원칙은 나이이다.)라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P.52)

 

이 책에서 소개하는 많은 놀라운 사실들과 인상적인 사례들을 계속 나열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흥미롭지만 효과적이지는 못하다. 중요한 점은 평등이라는 관념에 무의식적으로 사로잡혀 실질상의 차이를 간과하는 것이야말로 그릇된 평등이라는 사실이다. 저자의 주장이 비록 부분적으로 과장되고 침소봉대하는 것일지라도 일정 부분 진실에 가깝다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우리 아이들을 올바르게 키우는데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의 첫 번째 목표는 교육이다. 사회공학은 두 번째이다. (P.156)

 

후반부의 성 문제, 약물중독, 동성애에 관한 사안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네 사회와는 거리가 있을 것으로 치부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광범위한 학교 흡연, 청소년 산모의 증가 등은 더 이상 남의 문제가 아니다.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게이와 호모라는 단어는 이미 친숙한 용어다.

 

이쯤에서 우리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저자의 견해는 사실 새로운 게 없다. 연령별, 남녀별로 각각의 조언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일반론적일 뿐 절대적 해결방안이 되지 못함을 스스로 인정한다. 다만 남녀의 성차를 제대로 인식하고 인정하며 이를 긍정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가지라고 한다. 때로는 부모의 권위도 올바로 행사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인다. 현대사회로 오면서 가정과 사회가 아이 중심적이 되면서 부모의 권위가 상실되었다고 하며 아이들을 양육하는데 있어 가정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한다. 제아무리 학교에서 제대로 교육하려고 노력하더라도 가정에서 어긋나면 바로잡기 어려운 법이다.

 

부모가 자기 자녀를 훈련시키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그 일을 대신 해주지 않을 것이다. (P.263)

 

육아 관련 많은 책들은 주로 육아의 테크닉을 다룬다. 기존에 읽었던 여러 책들도 마찬가지다. 일단 목표는 동일하다. 우리 아이를 남보다 공부 잘하고 똑똑하게 키우기 위해 어떻게 노력해야 할까.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기본원칙을 재발견하게 하고 있어 참신하다. 우리가 간과하고 있던 육아와 학교교육의 숨은 병폐를 제대로 짚어낸다. 잘난 아이로 키우기는커녕 시름시름 병들어가게 방치하고 있지나 않는지.

 

이 책을 읽고 난 후 육아 방식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 속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명약관화한 일부 사실은 뼈저리게 다가오며 그동안 내가 그것을 무시하거나 간과하였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다. 저자의 일부 견해는 다소 과격하고 급진적으로 보이지만 전체적 맥락에서 볼 때 저자의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정녕 육아는 어려운 과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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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자본론 - 모든 사람이 디자이너가 되는 미래
마스다 무네아키 지음, 이정환 옮김 / 민음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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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자부하는 츠타야 서점은 기실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서점 내에 음반점, 문구점, 때로는 커피점도 입점해 있는 구조는 일본과 우리네가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나머지는 모두 다르다. 도서의 분류 및 배치 방식, 전문적 능력을 갖춘 접객원(concierge)의 존재, 그리고 고객을 배려하는 디자인 등. 더욱이 도서관은 비교할 여지가 전혀 없음을 인정한다.

 

이 책에서 전개되는 저자의 논리 구조는 두 가지 방향이다. 먼저 비즈니스 환경변화에 대한 인식이다. 단순히 플랫폼만 제공하는 단계를 넘어서 소위 서드 스테이지라고 해서 고객의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하는 단계라고 본다. 따라서 디자인이 매우 중시된다. 또 하나는 비즈니스의 지향점이다. 저자는 고객가치의 제고를 최우선시 한다. 판매자, 관리자의 시각이 아니라 고객의 가치와 행복을 늘리는 고객의 관점. 다이칸야마 츠타야 서점과 다케오 시립도서관이 획기적이면서도 생경하지 않은 점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게다가 편안함을 자아내는 휴먼 스케일도.

 

기획은 이 두 가지를 결합시키는 행위다. 즉 고객 가치를 제고하는 제안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기획이며 기획의 가치가 여기에 있다. 기획가는 곧 디자이너다. 따라서 기획은 고객이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에서 수립되어야 하며, 현장과 유리된 기획은 어불성설이다.

 

디자인은 가시화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디자인은 결국 제안과 같은 말이다. (P.50)

 

모든 사람이 디자이너가 되는 미래가 이 책의 부제다. 모든 사람이 디자이너가 된다고? 왠지 거부감이 드는 문구다. 모든 사람이 기획과 디자인 능력을 갖춘다면 좋은 일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디자이너가 아니라면, 기획 능력이 부족하다면 시대의 추세에 낙오되는 열등한 부류의 인간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책표지를 찬찬히 살펴보니, 원래의 부제는 조금 다르다. ‘모든 기업이 디자이너집단이 되는 미래’. 비슷하지만 뉘앙스가 다르다. 무엇보다도 주체가 다르다. 개인이 아닌 기업. 비즈니스를 영위하는 기업이라면 당연히 디자이너기업이 될 필요가 있다. 저자의 말마따나 지적 자본의 축적 여부가 기업의 사활을 좌우할 것이므로.

 

따라서 기업은 모두 디자이너 집단이 되어야 한다. 그러지 못한 기업은 앞으로의 비즈니스에서 성공을 거둘 순 없다. (P.41)

 

각설하고 CCC의 주력사업인 도서, 음반, 영상물 및 전자제품 등 유통은 오프라인이 쇠퇴하는 산업분야다. 제아무리 디자인과 고객가치를 외쳐본들 한물간 꽁무니를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차라리 대세인 온라인에 매진하는 게 보다 현명하며 수익성에서도 유리하지 않겠는가. 저자는 이렇게 밝힌다. 현실세계와 가상공간은 각기 장단점이 있으며, 현실세계는 즉시성과 직접성이라는 측면에서 우위에 있다는 점, 사람을 배려하는 편안함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온라인도 병행하지만 결코 오프라인의 미덕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이런 유형의 책은 저자의 성공담과 철학을 소개하는 외에 대개 독자를 향한 메시지도 던지는데, 저자의 당부는 자유 개념에서 두드러진다. 저자는 자유를 독특하게 개념 짓는다. 자유란 마음대로로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으로 이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본다. 본능과 충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성과 목표에 충실한 삶의 태도.

 

어쩌면 다케오 시립도서관의 방문객 수, 츠타야 서점의 매장 수, T-포인트 회원 수 같은 계량화된 지표는 별 의미가 없다. 우리들이 마스다 무네아키의 경영철학과 CCC의 성공신화에 반드시 주목할 필요도 없다. 책장을 덮고 훌쩍 다이칸야마로, 하코다테로 아니면 다케오시로 떠나서 우리 자신의 눈과 몸과 마음으로 둘러보면 충분할 것이다. 고객가치라는 거창한 표현도 불필요하다. 이용객들로 활기찬 구내, 깨닫지 못한 라이프 스타일의 신선한 제안, 심신을 편안하게 만드는 디자인 등을 목도하면 모든 것을 알아차리지 않겠는가. 불현 듯 그곳에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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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석 목양신 - 또는 몬테 베니 이야기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73
너다니엘 호손 지음, 김용수 옮김 / 나남출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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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는 <몬테 베니 이야기>인데, 몬테 베니는 작중 주요 인물 네 명-미리엄, 힐다, 케년, 그리고 도나텔로-가운데 도나텔로를 지칭한다. 도나텔로의 집안이 토스카나 지방의 유서 깊은 몬테 베니 백작 가문이다. 이 작품 역시 작가에 따르면 로맨스. 호손은 자신의 주요 소설들을 로맨스로 굳이 구분한다. 신생 미국에서 로맨스를 쓰는 어려움을 토로한 호손이기에 유럽, 그것도 로마라면 풍부한 로맨스의 소재가 넘쳐났을 것이다. 로맨스는 중세에 연원한 형식이므로.

 

호손의 작품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방대-<주홍글자>에 비하면 거의 두 배 분량이다-한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독자는 전형적인 호손의 특성과 함께 생경하고 당혹스러운 의문감이 끊이지 않고 내심에서 분출하게 된다. 방대함의 적절성에 대한 의구심이다.

 

주요 인물들 간의 대화와 사건의 얽히고설킨 전개는 그렇다 하자. 또 도나텔로를 제외한 그들의 직업이 예술가, 즉 두 명은 화가, 한 명은 조각가이므로 회화, 조각, 건축 등에 대한 비평과 작품 소개 및 감상이 일정 부분 등장하는 것도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로마의 유적과 유물에 대한 과도할 정도로 상세한 소개와 묘사는 불필요하게 작품의 방대화에 기여한다는 인상이다. 이 부분을 대폭 축소하였다면 최소한 <일곱 박공의 집> 정도에 가깝게 독자에게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었을 텐데.

 

문득 소설이 아닌 기행문의 시각으로 바라보자 모든 의문이 해소되었다. 약 이백년 전 미국인들 가운데 유럽 여행을 해본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네들의 문화적, 정신적 뿌리가 유럽이므로 많은 호기심이 있었음에도 시간적, 경제적 형편상 극소수만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로마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작가는 로마의 유서 깊은 문명의 자취에 대한 당대인의 지적 호기심과 갈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을 반영한 게 아니었을까. 나중에 작품해설에서 옮긴이는 많은 당대인들이 이 작품을 로마 여행서로 받아들였다고 언급하여 이 추측을 입증한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동력은 미리엄과 그녀를 둘러싼 전혀 대조적인 두 인물 간의 과거와 갈등, 그리고 대립이다. 도나텔로와 대리석 목양신 조각상의 놀랄만한 유사성은 작품 첫머리에서 인물들 간에 화제거리가 되지만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반복적인 농담을 통해 복선을 구축한다. 외면에서 내면으로. 게다가 빼어난 미모의 미리엄의 주위를 배회하는 정체모를 인물 모델의 음험하고 사악하기 조차한 이미지. 이 둘은 빛과 그늘, 지상과 지하, 낮과 밤, 순진과 죄 등 완전히 상반되는 유형의 인물이다.

 

여기에 미리엄의 모호함과 비밀이 곁들여져서 작품을 다소 어둡고 모호하며 신비스럽게 이끌어간다. 그녀는 뭔가를 숨기고 있다. 어둠과 죄악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속박을 암시하는 미리엄의 대사는 절실함과 동시에 숙명적 체념을 담고 있기도 하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 날, 떠나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운명이 지워진, 다른 세상에서 온 여자인 나와 함께 이 숲에서 헤매는 것은 당신이 상상하는 것만큼 그리 행복한 일이 아니야. (P.103)

 

당신은 날 떠나야 해!......당신의 시간은 지났고, 그의 시간이 왔어! (P.112)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원죄를 지니고 태어난다. 순수하고 무구한 사람은 없다. 이 점에서 미리엄은 지극히 인간적이며 사실적이다. 반면 도나텔로와 힐다는 비현실적이다. 그들은 순진과 순수를 상징한다. 느리고 단조롭게 흘러가던 시간은 운명적인 사건 이후 급변한다. 그들 넷은 뿔뿔이 흩어지고 단편적으로 재회하지만 결코 과거를 회복할 수 없다.

 

신화 속 목양신처럼 자연과 환력, 순진의 화신이었던 도나텔로는 미리엄을 사랑하게 되면서 서서히 변모하며, 운명적 사건 이후 전혀 다름 사람이 되었다. 풍부하고 즐거우며 건강한 삶, 단순하고 흠 없는 기쁨으로 가득했던 도나텔로는 에덴동산을 떠나게 된 아담이 되었다. 그 사건이 미리엄에게 미친 파장보다 도나텔로에 심대한 영향을 준 것은 이런 연유다.

 

조각가는......얼마나 철저하게 그 멋지고 신선한 야수적 기운의 광채가 그의 얼굴에서 떠나버렸는지를 목격하고는 깜짝 놀라고 경각심이 일었다......모든 그의 젊은이다운 쾌활함과, 그와 함께 단순한 매너가,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어도 그림자로 가려졌다. (P.216)

 

이따금, 불쌍한 도나텔로는 마치 비명을 들은 듯 깜짝 놀랐고, 가끔은, 마치 보기에도 두려운 어떤 얼굴이 자신의 얼굴에 가까이 들이밀어진 듯, 뒤로 움츠렸다. 이 음침한 분위기 속에서, 죄와 슬픔에 대한 신기함으로 당황하여, 유사함 때문에 그리고 장난삼아서 그의 세 친구들이 환상적으로 그를 바로 그 <프락시텔레스의 목양신>으로 인식했던 그 기이한 유사함이 그에겐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P.238)

 

죄를 저지른 미리엄과 도나텔로와 달리 힐다는 순수 그 자체이다. 옛 대가들의 영혼과 일체화된 공감을 지니고, 성모의 성소를 지키며 비둘기들이 힐다를 따르는 설정에서 독자는 작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우연히 목도하게 된 죄의 현장, 그리고 범죄와 윤리, 우정 사이에서 그녀는 미리엄을 이해하고 용서하길 거부한다. 그녀는 자신의 순수함을 유지하고자 애쓰나 고뇌는 날로 깊어진다.

 

힐다의 상황은 모든 자신의 고민을 자신의 의식 안에 가둘 필요성으로 인해 무한히 더 비참해졌다. 미리엄의 범죄에 대한 인식을 자신의 연하고 섬세한 영혼 안에 간직한 이 순수한 소녀에게는, 그 효과는 마치 자신이 그 범죄에 참여했던 것과 거의 같았다. (P.376)

 

죄로 얼룩진 비참한 자들보다 어느 누가 순수한 자의 부드러운 구원을 더 필요로 하겠는가! 그리고, 우리 자신의 옷이 얼룩이지지 않도록 이기적으로 조심하는 것으로 인해 우리가 그 죄지은 자들을 우리의 심장에 가까이 껴안지 못해야 한다면, 우리가 순수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어디에 그들의 가장 안전한 더 이상의 악으로부터의 도피처가 있는가! (P.439)

 

조각가 케년은 이해자이자 중계자이다. 그는 도나텔로의 변화를 통해 죄의 윤곽을 알아차리면서도 도나텔로를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미리엄에 대한 힐다의 완고함을 책망하면서 세상이 선과 악의 단순한 이분법적 구조가 아님을 지적하는 그는 건전한 이성과 감성의 소유자라고 하겠다. 그는 도나텔로와 미리엄의 재회와 화해를 유도하면서 그들에게 참회와 속죄의 삶을 살아가도록 권고할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정신적, 예술적 감성은 아폴론적이라는 근원적 한계를 지녔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 힐다, 당신은......악한 것들에 어떠한 선의 혼합물이 있을지, 그리고 아무리 엄청난 범죄인이라도 그의 행위를 그 자신의 견지에서, 아니면 어떤 측면 지점에서라도 바라보면 결국은 그렇게 논의의 여지없이 유죄로 보이지는 않을지 모른다는 것을 모르오. (P.437)

 

세속적 희열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질고 고통스러운 삶을 향한 상호간의 높임과 격려를 위해서, 당신들은 서로의 손을 잡으시오. 그리고 만일, 옳은 일들을 향한 수고, 희생, 기도, 회개, 그리고 진지한 노력에서 결국은 음울하고 사려 깊은 행복이 나오거든, 그걸 맛보고 하늘에 감사하시오! (P.369)

 

호손의 전작들을 관통하는 공통 주제어는 죄와 죄의식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다. 이 작품에서도 그것이 명확히 드러난다. 천방지축이던 도나텔로는 죄를 통해 변모하였다. 어떤 점에서 보다 성숙해졌다고 하는 게 마땅하다. 죄를 통해 도나텔로는 양심을 자각하게 되었으며, 내면에의 성찰과 도덕적 기준에 대한 인식,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재고하게 되었다. 섣부르게 단언하면 죄와 죄의식은 인간의 성숙에 있어 필요악적인 역할을 담당한다고도 하겠다. 그렇다고 볼 때 에덴동산에서의 원죄는 결국 인간이 자연 세계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간 세계로 진입하게 되었음을 상징하는 셈이다.

 

그것은 그를 불붙여 어른으로 만들었었고, 그의 내부에 우리가 여태껏 알아왔던 도나텔로의 어떠한 원래의 성격도 아닌 어떤 지성을 생성시켰었다. 그러나 저 단순하고 기쁨이 넘치는 인물은 영원히 떠나갔다. (P.206)

 

그 어조는 또한 변화되고 깊어진 성품을 말해 주었다. 그것은 슬픔과 양심의 가책을 통해 왔었던 생생해진 지성과 정신적인 가르침에 대해 말해줬다. 그래서 제멋대로인 소년, 장난기 어리고 동물적인 성격의 존재, 숲의 목양신대신에, 여기 이제 감성과 지성을 지닌 남자가 있었다. (P.366)

 

케년의 추론은 오래된 교회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와 같이 예술과 종교로의 확장을 넘어 인간과 종교의 근원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아담과 에덴동산까지 이르는 근본적 문제제기에서 케년과 작가는 한 발짝 물러난다. 케년은 힐다의 사랑을 얻고 놓치지 않기 위해서 불가피하였다. 반면 작가는 이 작품이 가져올 종교적 논란의 불씨를 확대하고 싶지 않았서였을 것이다. 작가는 예술가이지 사회변혁가는 아니며, 호손 자신도 노예해방 사안에서는 미온적 내지 온건한 입장이었다고 한다.

 

이 작품을 로마 유적과 유물과 연관하여 읽어나가면 무척 흥미로울 듯하다. 대리석 조각상과 케년의 클레오파트라 조각상, 힐다가 모작한 르네상스기의 거장들 회화, 보르게세 장원의 즐거움과 카타콤브의 음울함, 트레비 분수와 콜로세움 등등. 하나 작가가 이를 사건과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소재와 배경으로 삼았음은 명백하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실패한 낭만주의 작품이라고 지적한다. 느슨하고 흐트러진 구성, 모호하고 난해한 신화적 상징성으로의 편향 등을 제기하면서. 근대적 소설이 아닌 로맨스의 관점에서 볼 때 모호함과 신화적 상징성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조성하였으니 전혀 단점이 될 수 없다. 구성 역시 <보카치오><캔터베리 이야기>, 아니면 <돈키호테>만 떠올려 봐도 전혀 느슨하지 않으며 오히려 현대성을 지니고 있어 작품 성격에 부합하는 의도된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작가는 이 작품에서 상징적 알레고리를 과거와 현재가 공존과 대립을 병행하는 로마라는 역사적 도시의 풍요로운 유산에 힘입고 있다.

 

케년과 힐다는 현실에 복귀하고 안주하는 길을 따른다. 도나텔로와 미리엄은 현실에서 추방됨에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한 단계 초월하는 길을 택한다. 두 사람이 지향하는 길은 작중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하지만 인습과 전통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보다 진실 된 인간 자신을 발견하는 길임은 확실하다.

 

모든 인간들이 존재의 표면과 환각적 즐거움들 밑의 어느 것이든 알려면 그 동굴 속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나올 때, 비록 첫 번째 대낮의 눈부신 빛에 눈이 부시고 앞이 캄캄해지지만, 그들은 그 이후 영원히 더 진실 되고 더 슬픈 삶에 대한 견해를 취한다.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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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학교 3 창비아동문고 156
E.데 아미치스 글, 김환영 그림, 이현경 옮김 / 창비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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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찾아 삼만 리>의 원작은 제3권에 드디어 등장한다. ‘이 달의 이야기5월에 해당하는데, 여기서의 표제는 압뻰니니 산맥에서 안데스 산맥까지. 압뻰니니 산맥, 우리에겐 아펜니노 산맥으로 익숙한데 이탈리아를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어 이탈리아를 상징하고 있다.

 

열세 살 마르꼬가 소식이 끊긴 엄마를 찾으러 홀로 아르헨티나로 떠나는 이야기는 모두에게 친숙하다. 요즘에는 이탈리아가 아르헨티나보다 생활수준이 높지만, 19세기에는 아르헨티나가 보다 잘 사는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마르꼬가 아르헨티나로 가서 단번에 엄마를 찾은 게 아니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로자리오를 거쳐 꼬르도바, 다시 뚜꾸만으로 글자 그대로 삼만 리와 수개월의 시간이 소요되는 대장정을 인내하였음도 새삼 알게 되었다.

 

이 이야기만큼 가족 간의 단절될 수 없는 사랑을 극적으로 드러낸 작품도 드물 것이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머나먼 아르헨티나로 식모살이를 떠난 엄마, 어린 나이에도 온갖 고난과 두려움을 무릅쓰고 일편단심으로 엄마를 찾기 위해 전력하는 아들. 그네들의 극적인 상봉은 비단 동화가 아닌 소년소설에서도 결코 감동을 줄이지 못한다.

 

이 이야기는 또 한 가지, 이탈리아인과 이탈리아 소년이 갖추어야 할 투철한 의지와 도전정신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다. 범선에서 슬픔에 잠긴 소년을 위로하며 진정한 제노바인의 정신을 소리 높여 외치는 뱃사람, 무일푼이 된 마르꼬를 데리고 선술집에서 동포들에게 애국심 발휘를 호소하는 롬바르디아의 할아버지와 이에 호응하는 이탈리아인들. 그리고 다음 문장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마르꼬는 고개를 꼿꼿이 들었습니다. 강인하고 훌륭한 제노바인의 피가 그의 가슴에서 자존심과 대담함이 담긴 뜨거운 물결로 다시 흘렀던 것입니다. (P.84)

 

마르꼬의 이야기는 이 작품에 소개된 여러 이 달의 이야기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어 제3권의 거의 1/3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다른 에피소드가 적은데, 통상적인 애국적 소재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인 가리발디 장군의 서거와 국경일 행진 등이 그러하다. 특히 이딸리아라는 장에서 아버지가 엔리꼬에게 국경일을 맞이하여 조국에 인사하고 맹세하라고 알려주는 내용과 표현은 거의 기도문의 수준일 정도로 비장함에 오글거린다.

 

난 당신을 존경하며 온 마음을 바쳐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에게서 태어난 것, 그리고 당신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성스러운 조국이여! 당신의 모든 자식들도 형제와 같이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나는 정직하고 부지런하며 끊임없이 내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는 시민이 되겠습니다......당신이 허락해 준다면 나의 소질과 몸과 마음을 바쳐 겸손하게 그리고 용감하게 당신에게 봉사할 것을 맹세합니다. (P.123~124)

 

이 권에서는 마르꼬 외에도 휴머니즘을 담은 이야기가 여러 편 들어있다. ‘곱추 어린이들농아 소녀가 그렇고, 마지막 이 달의 이야기난파선도 소녀를 살리고 자신은 죽음을 택한 이탈리아 소년의 이야기를 담담하면서도 감명 깊게 서술하고 있다.

 

신생 통일 이탈리아의 화합과 단결과 발전을 기원하는 작가의 심경은 작품 곳곳에 직간접적으로 투영되어 있다. 그것에 대한 집착과 전념이 강렬하여 때로는 부담스러움을 자아내지만 그럼에도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것은 결국 작가가 꿈꾸는 조국의 미래는 모두가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따뜻한 세상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서는 계급과 신분, 신체장애에 의해 누구도 차별받지 않으며, 서로가 상호 배려를 아끼지 않는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이다. 그래서 작가가 유달리 마지막 권에 집중적으로 휴머니즘을 드러내는 이야기들을 수록한 게 아니었을까. 결국 순수한 사랑이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점을.

 

그리고 학교는 바로 아이들, 미래를 이끌어갈 존재들인 그들을 올바르게 교육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기에 중요하다. 어머니는 학교를 어머니에 비유하며, 엔리꼬에게 학교를 잊지 말 것을 당부한다.

 

덧창이 닫힌 이 소박한 흰 건물, 네 지성이 처음 꽃봉오리를 피운 이 작은 정원은 네 삶이 끝나는 날까지 머릿속에 그리게 될 거야. 내가 너의 목소리를 처음 듣던 집을 아직도 그려 보듯이 말이다. (P.168)

 

한 학년을 마치는 시기는 어수선하며 기쁨과 슬픔이 어우러져 착잡하다. 한 반으로 지냈던 친구들 중에서 다른 반으로 갈리는 친구는 헤어져야 한다. 물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 기대와 설렘도 있지만. 친구들과 작별을 고하는 엔리꼬. 하지만 엔리꼬가 다시 그들을 볼 수 있을지는 기약할 수 없다. 아버지의 일 때문에 이사를 하고 전학을 가게 되었으므로. 그리고 <사랑의 학교>는 끝난다. 우리에게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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