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의 지진
클라이스트 지음 / 세종출판사(이길안)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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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수록작품:
1. 단편소설 : 칠레의 지진, O... 후작 부인, 성 도밍고 섬의 약혼, 로카르노의 거지부인, 주운 아이, 성녀 세실리아 또는 음악의 힘, 결투, 미하엘 콜하스
2. 일화 : 일상의 사건, 프랑스인의 정의, 당황한 시장 외 28편
3. 우화 : 개와 새, 교훈 없는 우화, 정원사의 조건
4. 소품 : 말을 하면서 점차 생각을 완성함에 대하여, 조로아스터의 기도, 세상의 흐름에 대하여, 숙고에 대하여, 인형극에 대하여, 독일인의 교리문답
5. 편지 : 빌헬미네 폰 쩽에에게, 마리 폰 클라이스트에게 [3편], 울리케 누님에게

이 책은 클라이스트의 작품 중 극작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 한 권만으로도 그의 면모를 대략이나마 조감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편 일화, 우화, 소품 중 일부는 옮긴이의 다른 책 <헤르만의 전투>에도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새삼 클라이스트의 문학세계에 대해 재삼재사 언급할 필요는 없다. 이미 그의 소설집과 희곡집의 독서단상을 통해 기본적 문학관과 개인적 소회를 밝혀놓았다.

여기서는 그의 산문 소품과 편지에 대한 인상이 주된 관심이다. 당대 비주류의 작가 클라이스트, 그의 작품 중에서도 비주류에 속하는 영역이 이들이다.

일화로 분류된 31편의 짤막한 단편은 엄밀히 말해 문학으로 분류할 수는 없다. 클라이스트는 작가 외에도 언론인으로서 활동도 하였다. 여기 일화는 아마 신문 또는 잡지에 게재하기 위해 채집 내지 작성한 듯하다. 요즘도 신문에 보면 일종의 토픽이나 해외화제 등의 흥미로운 단편소식을 전하는 코너가 있는 것처럼.

소품 중에는 <말을 하면서 점차 생각을 완성함에 대하여>와 <인형극에 대하여>, <독일인의 교리문답>이 비교적 유명하다. 다만 <독일인의 교리문답>은 당대 애국심에 불타오르는 클라이스트의 일면을 보고, 그의 애국적 작품의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유익하지 현시점에서는 커다란 가치를 갖는다고 보기 어렵다.

<말을 하면서 점차 생각을 완성함에 대하여>는 처음부터 완전한 생각과 구상이 아니라 모호한 상태에서 대화를 진행함에 따라서 아이디어가 구체화되고 틀을 이룬다는 견해이다.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 동안에 그 모호한 생각들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놀랍게도 인식은 복잡한 부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는 복합문을 이루게 된다네.” (P.363)

“마음에 있는 생각을 진짜 소리로 표현하는 것이네. 마음속에 있는 생각과 그 표현은 나란히 진행되어 가고, 정신 활동은 그 양자에 똑같이 호응한다네. 이 때 언어는 정신의 바퀴에 붙은 제동기와 같은 족쇄는 아니고, 정신의 바퀴와 병행하여 달리는 동일한 차축에 붙은 제 2의 바퀴와 같네.” (P.366)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주장의 타당성과 독창성이 아니다. 사실 이런 경우는 누구나 최소 한 번 이상은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추론 보다는 그가 내세우는 예증이 오히려 흥미롭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 미라보의 사례와, 라퐁텐의 한 우화를 언급하고 있다.

<인형극에 대하여>는 작가와 인형극에도 열성적인 오페라 수석 무용수 간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무용수에 따르면 인형극은 간단한 조종만으로도 우아하며 리드미컬한 동작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또한 인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으므로 동작 간에 불필요한 휴지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고 예찬한다.

작가는 그의 주장에 반신반의하면서도 의식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우아함을 방해한다는 점에는 기꺼이 동의한다. 이와 관련하여 작가와 무용수는 각자 자신의 체험담을 교환한다. 그리고 대미를 이렇게 장식한다.

“우아함은 의식이 전혀 없는 상태이거나 또는 무한한 의식을 가진 인체에, 다시 말하면 인형이거나 신에게 가장 순수하게 나타납니다.
나는 한동안 깊이 생각에 잠기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인식의 나무 열매를 다시 한 번 더 먹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물론입니다. 그는 대답했다. 그것이 세계 역사의 마지막 장입니다.” (P.383)

클라이스트가 평생에 걸쳐 사랑과 우정을 쌓았던 여인은 세 명이다. 전 약혼녀, 그리고 이복누나 울리케, 자신을 잘 이해해주던 친척 마리. 여기에는 그들에게 썼던 서신들을 짤막하게 수록하고 있다.

먼저 빌헬미네 폰 쩽에에게 쓴 편지에서 우리는 클라이스트의 작품 이해를 위해 필수적인 그 유명한, 소위 ‘칸트 위기’를 육성으로 들어볼 수 있다.

“우리들은 우리가 진리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로 진리인지 혹은 그저 진리인 것처럼 보이는 것인지를 결정할 수 없소...나의 유일한 최고 목표는 사라졌소. 나는 이제 다른 목표도 없소...” (P.406)

마리 폰 클라이스트에게 보낸 편지는 그가 자살을 감행하기 며칠 전과 당일의 기록이다. 여기서 작가는 세상과 자신에 대한 극도의 절망과 삶의 욕구를 포기한 자신을 처절하게 토로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의 동반자 포겔 부인에 대하여도 언급하고 있다. 이 편지들에서는 인생을 체념한 자에게만 엿볼 수 있는 편안함과 경쾌함마저 배어나 씁쓸하기조차 하다.

금년은 클라이스트 서거 200주년의 해다. 그는 사후 서서히 재평가 받아 오늘날 독일에서 괴테와 실러에 견주는 대작가로 인정 받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 그의 성가는 미미하다. 그의 작품은커녕 이름조차도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그의 생사와 작품 특성 상 단시일 내에 국내에 인지되기는 어려울 것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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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테질레아 지만지 고전선집 660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이원양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2011년 클라이스트 사망 100주년을 맞아 국내 초역이다. 하반기에는 연극 공연도 이루어질 계획이라니 무척 관심 깊다.

작품의 모티브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에 두고 있다. 아킬레스[아킬레우스]가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와의 대결에서 이긴 후 그리스 군이 승세를 올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여인족 군대가 질풍같이 달려들어 그리스군과 트로이군을 모두 공격한다.

극은 여인족 군대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과 그들의 가공할만한 공격력에 대한 놀라움과 두려움을 표현한다. 아마존 여인군은 연합을 모색하는 트로이군을 격파한 후 그리스군에 도전하여 그들의 여왕 펜테질레아는 아킬레우스와 결전을 벌인다. 간신히 추격을 따돌린 아킬레우스와 그를 놓쳐 안타까워하는 펜테질레아. 두 남녀 영웅의 대결을 다시 이어지고 아킬레우스는 펜테질레아를 쓰러뜨리고, 그리스군은 아마존 여인군에 강력한 반격을 펼친다. 정신적으로 혼란한 펜테질레아의 안정을 위해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패배한 것으로 위장하고 그들은 서로 사랑에 빠진다. 이때 펜테질레아는 아킬레우스의 물음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자신들이 누구이며, 그리스군을 공격하는 이유를 밝힌다. 역공을 펼친 여인군으로 그리스군이 다시 패퇴함에 따라 아킬레우스는 싸움의 진실을 밝히고 남녀는 서로에게 자신의 고향으로 가자고 고집 피우다 헤어진다. 아킬레우스는 여왕과 재대결을 요청하고 일부러 싸움에 질 생각이나, 여왕은 오해와 집착으로 그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나중에 제정신을 차린 그녀는 스스로 뒤를 따른다.

단막의 전 25장으로 이루어진 극은 발단의 정체모를 여인군의 등장과 그들과의 전투장면을 관찰자의 시각에서 전언 형태로 독자에게 들려준다. 중간도 이따금씩 그러하다가 결말 부분 역시 발단과 비슷하게 전개된다. 무대에서 대규모의 전투를 재현하기는 용이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아마존 여인국에 대한 설화는 고대 그리스부터 내려온다. 작가는 스키타이, 즉 오늘의 카프카즈를 아마존 국으로 설정한다. 주석에 따르면 아킬레우스의 최후에 관하여는 파리스의 화살에 죽었다는 설 외에, 아마존 여인족과 관련되어 죽었다는 설도 존재하는데, 클라이스트는 후자의 가설을 극화한 것이다. 아마존은, 가슴이 없는 여인들이란 의미라고 한다. 그들은 남성이 없는 여성들만의 국가이다. 자신들을 지키기 위하여 활을 잘 쏠 수 있도록 오른쪽 가슴을 도려내었다. 그들의 본질은 남성의 독재와 횡포를 벗어나 평화와 온화함을 희구함에 있다. 따라서 그들이 벌이는 전쟁은 살육과 약탈이 목적이 아니라, 극중에 계속 반복되는 ‘장미 축제’로 알 수 있듯이 종족을 유지하고자 하는 원초적 목적에 근거한다.

아킬레우스와 펜테질레아의 관계는 처음에 적대적 대결자로 출발한다. 아킬레우스는 상대의 정체를 모른 채 전투에 나서고, 펜테질레아는 그를 알지만 그를 꺾으려고 한다. 따라서 대결 장면은 긴장이 팽배하여 분위기는 살벌하기 그지없다. 아킬레우스는 후에 펜테질레아에게 전사이자 여인으로서 매력을 느끼고 거짓 패배로 둘 사이의 관계는 온기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극단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의 화신이다. 전사이자 전쟁 영웅으로서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 그들. 특히 펜테질레아는 자신이 쓰러뜨린 남성을 파트너로 삼아야 하기에 더욱 필사적이다. 그런 면에서 외양만 달리할 뿐 본질상 그들은 동일하다. 여자를 데리고 그리스로 가고자 하는 아킬레우스, 남자를 데리고 테미스키라로 가고자 하는 펜테질레아. 그들은 타협하지 못한다.

여기서 펜테질레아의 돌변하는 인격 변화가 흥미롭다. 그녀는 이십대 초반의 꽃답고 아리따운 처녀로서 언행에 있어 모범적이었음이 결말의 증언을 통해 드러난다. 하지만 전투에 임하고 격전이 치열해짐에 따라 그녀의 아킬레우스에 대한 사랑은 외골수적인 집착으로 변질된다. 그녀는 여왕으로서 본분을 망각하고 남성을 갈구하는 일개 동물적 여성으로 타락한다. 이는 그녀의 거친 욕설과 막무가내식 행동으로 표출된다. 그런데 이는 아마존 여인족의 본성과 배치되며, 그들의 신의 뜻에도 어긋난다. 그래서 극중의 그녀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지칭이 여왕에서, 미친 여인, 암캐로 점점 추락하며, 그녀의 비극적 운명은 예정된 것이다.

이 작품은 수많은 그리스 신화의 요소를 차용하고 있다. 아킬레우스와 펜테질레아는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디아나]의 관계로 비정하며, 펜테질레아의 광란성과 야수성은 디오니소스 축제에 열광하는 여인들이 이에 반대하는 왕이자 아들이며, 동생을 사지를 찢어 죽이는 일화와 연계한다. 또한 아르테미스의 목욕 장면을 우연히 엿보게된 불행한 악타이온의 최후도 아킬레우스의 죽음과 멀지 않다. 이는 작가의 그리스·로마신화에 대한 해박한 교양을 반영한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그는 정말로 미래를 선취한 극작가이다. 고전주의가 득세한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그의 작품에는 낭만주의의 격동성, 실존주의의 치열한 존재에 대한 의문, 이성의 영역을 벗어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요소가 풍성하다. 후대 작가들이 그에게 열광하고 그를 선구자로 평가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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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부르크 왕자 - 클라이스트 희곡선집
클라이스트 지음 / 세종출판사(이길안)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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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수록작품:
암피트리온
하일브론의 소녀 케트헨
홈부르크 왕자

세 작품 모두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희극이다. 그러나 <깨어진 항아리>와 같은 유의 웃음을 자아내는 코미디는 아니다.

클라이스트는 극을 시종일관 어둡고 진지하게 이끌어간다. 그래서 감초 역할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전체적 극 분위기는 결말을 알 수 없이 이것이 비극인지 희극인지 독자를 어리둥절케 한다. 그래서 독자는 해피엔딩이면서도 환호의 박수를 쉽사리 보내지 못하며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만다. 그것이 클라이스트만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암피트리온>은 그리스 신화에 배경을 두는데, 제우스 신이 남편이 집을 비운 틈을 타서 남편으로 변장하고 부인 알크메네와 동침하여 후일 태어난 아들이 유명한 영웅 헤라클레스가 된다.

작가는 여기서 남편 변장의 주피터 신과 진짜 남편을 마주치게 함으로써 부부 간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또한 암피트리온의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의문을 던진다. 나아가 선의의 인간이 전능한 신 앞에 무력해지는 장면을 통해 인간의 유한성도 드러낸다. 즉 단순한 신화극이 아닌 것이다.

아름답고 정숙한 아내와 사랑과 믿음으로 맺어진 부부 관계는 주피터 신의 개입으로 파탄으로 이어진다. 주피터 신의 한때의 유희로 인간 사회와 가정은 절대적 위기 상태에 이른다. 남편의 의심을 자신에 대한 불신과 남편의 식어버린 애정으로 오인한 아내 알크메네는 남편에 대한 믿음이 약해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알크메네는 진짜 암피트리온으로 변장한 주피터 신을 선택하는데, 과연 남편을 몰라보았는지 의문스럽다. 변장한 주피터 신은 끊임없이 자신이 암피트리온이 아닌, 다른 존재일 수 있음을 암시하였다. 알크메네의 마지막 대사 “아!”와 긴 탄식은 자신의 배반이 무위로 돌아갔음과 주피터 신으로부터 버림받았음에 대한 크나큰 절망의 모습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진짜 암피트리온 구분하기. 남편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다. 자신이 자신임을 증명하는 수단은 너무나 미약하다. 외모, 언행, 습관, 기억 등 모든 면에서 자신과 동일한 다른 존재가 자신임을 주장한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나를 주장할 것인가? 나 자신이 틀림없는 나라고 하는 절대적인 자기 확신, 그것은 외부로 보여주어 증거로 삼을 수 없다. 나아가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 과연 우리는 언제까지 나를 나로 인식하고 주장할 수 있을까. 나라고 하는 존재는 사회에서 볼 때 무수한 관계로 형성된 상대적 평가의 산물이다.

암피트리온은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가. 그는 테베의 왕으로서 타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한 영웅이다. 그는 아내에게도 헌신하였다. 그런 그는 자신이 알지도 못하고 저항할 수도 없는 외적 요인에 의하여 지위와 가정, 자신마저도 빼앗기고 쫓겨날 운명에 처하였다. 주피터 신이 그나마 돌아갔기에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여생은 참담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또한 주피터 신이 올림포스 산으로 돌아갔다 하더라도 그의 삶은 이제 종전과는 동일하지 않다. 그는 자신에 대하여, 아내에 대하여, 그리고 사회와 신에 대하여 더이상 믿지 않는다. 그에게는 절대적 단독자의 순간에서 겪게 된 개체적 고독만이 남아있다.

<하일브론의 소녀 케트헨>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순결한 소녀 케트헨은 어느 순간 슈트랄 백작을 보자마자 자석에 이끌린 듯이 그를 따라다닌다. 그의 발뒤꿈치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아무거나 먹고 한데서 잠을 자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극은 슈트랄 백작이 케트헨에게 마법을 걸어 유혹했다고 케트헨의 아버지가 고발을 하여 비밀재판을 열리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전체적으로 중세풍을 물씬 풍기는 설정이자 배경이다.

슈트랄 백작은 그녀에게 마음이 끌리지만, 그는 황제의 딸과 혼인하게 되리라는 예지몽의 실현을 믿는다. 그래서 자신의 가문과 토지 문제로 갈등을 겪는 투르네크 가문의 쿠니군데를 우연히 위험에서 구해주고, 그녀의 가문이 작센 황제 가문의 방계 후손이라는 점에서 꿈의 실현으로 오인한다.

극은 여기에서 두 방향으로 전개되는데, 하나는 쿠니군데가 사실은 마녀라는 점과 케트헨이 실제로 황제의 딸이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실로 중세 동화적 사건 전개가 아닐 수 없다. 황녀 케트헨은 드디어 자신의 사랑을 달성하게 되고 쿠니군데는 저주의 말을 퍼붓고 퇴장한다. 선인은 복을 많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결말이 확연하다.

그런데 케트헨은 어찌보면 노력의 결실만으로 이루어진게 아니다. 그녀의 변함없는 사랑과 고난은 감탄과 안쓰러움을 갖게 하지만, 그녀가 황제의 딸이 된 것은 우연적 요소의 투영에 지나지 않는다. 즉 순전한 개인적 성취는 아니다. 요즘 드라마에서 흔히 쓰는 용어대로 출생의 비밀이 드러난데 지나지 않는다.

극에서 이런 우연성의 발현에 대하여 클라이스트는 일단 케트헨의 인물을 상찬하여 긍정적인 캐릭터로 그리며 행복한 결말로 이끌어 대중의 기대감을 충족시킨다. 반면 너무나 확연한 우연성을 제시하며 외부에서 행운이 주어지는 고전적, 중세적 가치관을 슬며시 재고하게 만든다.

<홈부르크 왕자>는 그의 최후의 작품으로 한마디로 문제적 작품이라고 평할 만하다. 여기에는 클라이스트가 길지 않은 생애동안 관심을 기울였던 거의 모든 테마가 함축되어 녹아들고 있다. 따라서 이해부득하기조차 한 의미심장한 대사와 장면전개는 독자를 당혹하게 만드는데,  작가는 자신의 최후작을 독자들이 가볍게 넘기는 것을 싫어하였던 듯 하다.

작품의 커다란 골격은 법질서의 준수에 대한 상이한 해석과 대립이다. 홈부르크 왕자는 스웨덴 군과의 전투에서 별도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병력을 움직이는 말라는 선제후의 명령을 거역하고 뛰어들어 뛰어난 전과를 올린다. 한편 우여곡절 끝에 승리를 거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명령 불복종의 사유로 재판을 열어 왕자를 사형에 처하도록 판결한다. 여기서 의견이 상충한다. 국가와 군의 골격을 이끄는 법질서의 우위를 주장하는 선제후와 명령 위반은 인정되지만 이를 뛰어넘는 탁월한 전과를 더 크게 인정하자는 왕자와 신하들의 주장.

“그는 법이 지배하든, 자의가 지배하든 우리 조국엔 상관없다고 생각하니?” (P.271)

“나는 우연히 생겨난 사생아처럼 찾아오는 승리를 원치 않는다. 나에게 승리의 건강한 자손을 낳아주는 내 왕관의 어머니인, 법을 지지한다.” (P.291)

“적이 자기들의 군기를 내동댕이치고 폐하 앞에 무릎을 꿇은 이상, 적을 격파하기 위한 규칙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적군을 격파한 규칙이 바로 최고의 규칙입니다!” (P.291)

이는 오늘날도 곱씹을만한 소재가 아니던가. 결과가 좋으면 과정(절차)에 잘못이 있어도 문제없다는 결과론자와, 과정의 적법성에 무게를 두는 과정론자.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절차를 중시하여 최선을 실현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악의 결과를 피하려는 장치다. 그럼에도 결과만 좋으면 그뿐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이는 사후 결과를 가지고 사전의 행동 및 결정을 정당화하는 수단이다. 성공적 결과는 잘못을 판단할 때 참작 사유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합리적 이성의 결론이다. 그런데 홈부르크 왕자는 이를 부인한다. 그는 꿈과 현실을 오락가락하며 이성과 비이성을 방황한다. 그런 그에게는 ‘마음의 명령’이 더욱 중요하다.

“명령이 있을 때까지! 원 참 코트비츠 대령! 당신은 왜 그렇게 천천히 말을 몹니까? 당신은 공격하라는 마음의 명령에 따르지 않습니까?” (P.240)

“선제후께서는 의무가 명하는 대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폐하는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P.257)

홈부르크 왕자도 죽음이 명백한 절대적 순간에는 삶을 애원한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 솔직해진다고 한다. 목숨이 갈리는 상황에서 체면이고 허위도 부릴 여유가 없다. 여기에는 오직 단 하나의 통렬한 진실, 즉 생명만이 존재한다. 나머지는 부차적이다.

“만약 법률이 그러하다면 저를 파면시켜 군에서 추방시켜도 좋을 것입니다. 하느님, 제 무덤을 본 이래로, 저는 그저 살고 싶다는 생각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명예로운지 어떤지는 결코 묻지 않겠습니다!” (P.265)

이제 눈이 가려진 채 죽음을 맞이하러 가는 왕자. 그는 이미 삶을 단념하고 목숨을 구걸하지 않은 채 - 선제후의 제안, 만일 그가 판결을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것을 파기하겠다! 그를 풀어주겠다!(P.272)는 여전히 매우 해독하기 어렵다. - 마음의 명령에 따른다.

“아, 영원불멸이여, 너는 지금 완전히 내 것이야!...내 양쪽 날개에 날개가 솟아남을 느낀다. 내 정신은 고요한 하늘로 날아오른다...” (P.302)

이제 그에게 삶과 죽음은 더이상 둘이 아니다. 그는 절대적 순간에 자신에 이르는 각성을 통해 진정한 인식에 도달하였다. 그가 도달한 곳은 바로 꿈인 동시에 현실이다. 꿈꾸는 홈부르크 왕자로 시작한 드라마는 새로운 꿈을 꾸는 대단원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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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항아리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김기선 옮김 /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슈로펜슈타인 일가>와 비교할 때 너무나 눈부신 발전을 보여주는 이 작품을 보면 확실히 클라이스트라는 작가의 천재적 소질을 인식하게 된다. 모든 면에서 전작과는 월등한 성취에 도달하여 동일 작가의 작품인지 의심마저 일으킬 정도다. 독일 연극사의 3대 희극으로 꼽힌다고 한다.

이 작품은 완벽한 희극이며, 법정극이자 심리극이기도 하다. 단 1막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장면간 고조되는 박진감과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려는 작가의 절묘한 의도라고 하겠다. 확실히 초반 아담 판사의 인물을 형상화하는 부분에서 리히터 서기관과의 대화를 통해 아담 판사의 면모가 짐작된다.

항아리를 깨뜨린 범인을 놓고 벌이는 공방전은 얼핏 하찮고 우습게 보이지만 사실은 피고 루프레히트의 약혼녀 에바의 정절과 순결에 관련된 사항이므로 만만치 않다.

“네 명예가 이 항아리에 달려 있었던 거야...만인이 주시하는 가운데서 항아리와 함께 네 명예가 깨진 거야.” (P.42)

에바의 어머니 마르테 부인은 따라서 심야에 에바의 방에 있다가 항아리를 깨뜨린 사람이 루프레히트가 되어야만 도덕적 손가락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루프레히트는 약혼녀 에바가 다른 남자를 만난 것으로 생각하고 분개한다. 에바는 명확한 해명을 주저한다.

다른 인물들의 성격이 고정되어 크게 변함이 없는 반면, 아담 판사는 극적으로 눈부신 변신을 거듭한다. 호색하고 욕심 많으면서도 교묘한 척 하지만 사실은 어리숙하기 그지없다. 엄숙한 판사에서, 희극적 언행을 보이다가 어떻게 하면 곤경에서 벗어날까 능청스럽게 굴면서도 재판을 교묘하게 왜곡하려고 노력한다. 루프레히트를 범인으로 몰기 힘들자 또 다른 청년, 이어서 악마가 범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웃음과 동정이 교차하는 아담 판사의 인물을 제대로 소화하려면 실제 무대에서는 대단히 뛰어난 배우가 아니면 안 될 것이다. 그의 연기에 따라 극 전체의 분위기와 흥망이 좌우된다.

검열관 발터와 서기관 리히트는 사건의 실상을 밝히고 이른바 정의를 구현하는 데 있어 구심적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그들의 태도는 매우 상반된다.

발터는 모범적 검열관이다. ‘암행어사 박문수’의 독일판 재현이라고 하겠다. 그는 아담 판사의 두서없는 태도와 모호한 행적에서 사건을 직감하고 교묘히 압박해 들어간다. 그리고 최후에 사법 정의를 선언한다.

서기관은 어떠한가? 그는 아담 판사의 하급자인 동시에 상급자 유고시 판사를 대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실제로 앞마을에서 검열관은 부정을 저지른 판사를 내쫓고 서기관을 판사로 임명하였다. 리히트는 초반부에는 온순한 듯하지만 암암리에 아담 판사를 의심하고 진범을 밝혀내기 위해 후반부에는 오히려 사건 심리를 주도하여 마침내 목표를 달성한다. 하지만 새로운 판사 리히트는 과연 아담 판사보다 나은 인물일까?

“공탁금이라던가 이자 절취라던가, 그런 걸 거론할 수야 있겠지만 누가 그런 데 대해서 근사한 연설을 하겠나?” (P.18)

이 작품은 아담 판사의 흥미진진한 캐릭터 변화를 지켜보는 즐거움이 넘친다. 또한 자기가 스스로를 재판하면서 범인이 아니게끔 유도하는 우스꽝스러운 시도에서 재판의 역설을 만끽한다. 그리고 아담 판사의 추잡한 에바 유혹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에바의 순결이 빛을 발하며 에바와 루프레히트가 행복한 손을 잡는 장면에서는 순수한 기쁨을 느끼게 한다. 이 모든 게 한 치의 삐걱거림도 없이 맞물려서 극적 고양감을 드높이는 수법은 대가의 연륜마저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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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로펜슈타인 일가
배중환 엮음 / 부산외국어대학교출판부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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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스트는 짧은 생애 동안 8편의 단편소설과 8편의 희곡 작품을 남겼다. 작품의 비중과 의의를 감안할 때 그의 주력은 단연 희곡이며, 괴테와 실러의 뒤를 이은 19세기 독일 최대의 극작가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다행히 국내에는 그의 희곡 작품이 모두 번역되어 있다. 이제부터 찬찬히 그의 희곡들을 훑어나갈 계획이다. 희곡의 장르적 특성상 문자만으로 온전한 감상과 이해는 어렵겠지만 수박겉핥기나마 그와 그의 문학을 더 잘 이해하고 싶다.

<슈로펜슈타인 일가>는 그의 첫 극작품이다. 독일 슈바벤 지역을 배경으로 슈로펜슈타인 가문의 두 가계인 로지츠 가와 바르반트 가의 갈등과 대립, 파멸과 극적인 화해를 서술하고 있다. 착상은 분명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이탈리아와 독일이라는 배경 및 작가의 성향 차이로 어둡고 무거우며 긴박감을 자아내는 극적 구성을 가지고 있다.

상속자가 없으면 전 재산이 다른 가계로 넘어가게 되는 오래된 상속계약은 상대방이 자신의 가계를 단절시키려고 음모를 꾸민다는 의심을 낳게 되고, 이것이 우연한 사고를 오해로 빚게 하고 갈등은 증폭된다. 재물이 피보다 진하다는 속설은 여기서도 동서양의 구분을 가리지 않는다.

오해와 증오로 눈과 귀가 막힌 사람들에게 합리적 이성과 설득은 외면되고 처참한 대접을 받는다. 이러한 상황을 반전시키는 길은 오토카르와 아그네스 두 가계의 미래 상속자 간에 싹튼 사랑과 행복한 결합. 하지만 사태는 그들의 사랑을 밝은 빛으로 안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만남 사실은 마지막 치명타를 날릴 좋을 기회로 인식되고 만다.

두 젊은 남녀의 죽음으로 양 가계는 극적인 화해를 하는데, 이 화해가 온전할지는 자못 의심스럽다. 루페르트의 화해의 손에 질베스터는 얼굴을 돌리고 손을 내미는 장면이 이를 암시하는 게 아닐까.

제재의 선택과 긴박한 구성은 이의 없이 매우 뛰어나다. 가문간 대립과 개인간 사랑이라는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를 클라이스트 특유의 갈등 증폭적인 긴박한 글쓰기 수법이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다만 우연성의 개입과 인물 대화와 행동의 과도한 비개연성이 작품에의 몰입과 깊은 이해에 역작용을 하고 있어 아쉽다.

<로베르 귀스카르>는 미완성작이다. 현재는 당초 구성에서 단편만 남아 있을 뿐이다. ‘로베르 귀스카르’ 또는 ‘로베르 기스카르’는 11세기의 실존 인물로서 노르만 왕으로 당시 교황과 연계하여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비잔틴과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노르만 왕국을 세웠다. 나아가 그는 비잔틴 제국을 정복하고자 진격하던 중 그리스에서 병사하고 만다.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 사건과도 관련이 있다.

미완성작이니만큼 전체적 구조와 연관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논하기 어렵다. 다만 페스트에 발목 잡혀 귀국을 청원하는 병사들, 병마에 시달리지만 굴복하지 않으려고 버티는 귀스카르, 후계구도를 둘러싸고 첨예한 신경전을 벌이는 아들 로베르와 조카 아벨라르 등 극의 재미와 긴장을 강화하는 대립적 요소들이 중첩하고 있어 편린에서나마 흥미진진함을 느낄 수 있다. 완성본이 존재했다면 어쩔지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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