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의 지진
클라이스트 지음 / 세종출판사(이길안)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수록작품:
1. 단편소설 : 칠레의 지진, O... 후작 부인, 성 도밍고 섬의 약혼, 로카르노의 거지부인, 주운 아이, 성녀 세실리아 또는 음악의 힘, 결투, 미하엘 콜하스
2. 일화 : 일상의 사건, 프랑스인의 정의, 당황한 시장 외 28편
3. 우화 : 개와 새, 교훈 없는 우화, 정원사의 조건
4. 소품 : 말을 하면서 점차 생각을 완성함에 대하여, 조로아스터의 기도, 세상의 흐름에 대하여, 숙고에 대하여, 인형극에 대하여, 독일인의 교리문답
5. 편지 : 빌헬미네 폰 쩽에에게, 마리 폰 클라이스트에게 [3편], 울리케 누님에게

이 책은 클라이스트의 작품 중 극작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 한 권만으로도 그의 면모를 대략이나마 조감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편 일화, 우화, 소품 중 일부는 옮긴이의 다른 책 <헤르만의 전투>에도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새삼 클라이스트의 문학세계에 대해 재삼재사 언급할 필요는 없다. 이미 그의 소설집과 희곡집의 독서단상을 통해 기본적 문학관과 개인적 소회를 밝혀놓았다.

여기서는 그의 산문 소품과 편지에 대한 인상이 주된 관심이다. 당대 비주류의 작가 클라이스트, 그의 작품 중에서도 비주류에 속하는 영역이 이들이다.

일화로 분류된 31편의 짤막한 단편은 엄밀히 말해 문학으로 분류할 수는 없다. 클라이스트는 작가 외에도 언론인으로서 활동도 하였다. 여기 일화는 아마 신문 또는 잡지에 게재하기 위해 채집 내지 작성한 듯하다. 요즘도 신문에 보면 일종의 토픽이나 해외화제 등의 흥미로운 단편소식을 전하는 코너가 있는 것처럼.

소품 중에는 <말을 하면서 점차 생각을 완성함에 대하여>와 <인형극에 대하여>, <독일인의 교리문답>이 비교적 유명하다. 다만 <독일인의 교리문답>은 당대 애국심에 불타오르는 클라이스트의 일면을 보고, 그의 애국적 작품의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유익하지 현시점에서는 커다란 가치를 갖는다고 보기 어렵다.

<말을 하면서 점차 생각을 완성함에 대하여>는 처음부터 완전한 생각과 구상이 아니라 모호한 상태에서 대화를 진행함에 따라서 아이디어가 구체화되고 틀을 이룬다는 견해이다.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 동안에 그 모호한 생각들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놀랍게도 인식은 복잡한 부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는 복합문을 이루게 된다네.” (P.363)

“마음에 있는 생각을 진짜 소리로 표현하는 것이네. 마음속에 있는 생각과 그 표현은 나란히 진행되어 가고, 정신 활동은 그 양자에 똑같이 호응한다네. 이 때 언어는 정신의 바퀴에 붙은 제동기와 같은 족쇄는 아니고, 정신의 바퀴와 병행하여 달리는 동일한 차축에 붙은 제 2의 바퀴와 같네.” (P.366)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주장의 타당성과 독창성이 아니다. 사실 이런 경우는 누구나 최소 한 번 이상은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추론 보다는 그가 내세우는 예증이 오히려 흥미롭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 미라보의 사례와, 라퐁텐의 한 우화를 언급하고 있다.

<인형극에 대하여>는 작가와 인형극에도 열성적인 오페라 수석 무용수 간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무용수에 따르면 인형극은 간단한 조종만으로도 우아하며 리드미컬한 동작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또한 인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으므로 동작 간에 불필요한 휴지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고 예찬한다.

작가는 그의 주장에 반신반의하면서도 의식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우아함을 방해한다는 점에는 기꺼이 동의한다. 이와 관련하여 작가와 무용수는 각자 자신의 체험담을 교환한다. 그리고 대미를 이렇게 장식한다.

“우아함은 의식이 전혀 없는 상태이거나 또는 무한한 의식을 가진 인체에, 다시 말하면 인형이거나 신에게 가장 순수하게 나타납니다.
나는 한동안 깊이 생각에 잠기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인식의 나무 열매를 다시 한 번 더 먹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물론입니다. 그는 대답했다. 그것이 세계 역사의 마지막 장입니다.” (P.383)

클라이스트가 평생에 걸쳐 사랑과 우정을 쌓았던 여인은 세 명이다. 전 약혼녀, 그리고 이복누나 울리케, 자신을 잘 이해해주던 친척 마리. 여기에는 그들에게 썼던 서신들을 짤막하게 수록하고 있다.

먼저 빌헬미네 폰 쩽에에게 쓴 편지에서 우리는 클라이스트의 작품 이해를 위해 필수적인 그 유명한, 소위 ‘칸트 위기’를 육성으로 들어볼 수 있다.

“우리들은 우리가 진리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로 진리인지 혹은 그저 진리인 것처럼 보이는 것인지를 결정할 수 없소...나의 유일한 최고 목표는 사라졌소. 나는 이제 다른 목표도 없소...” (P.406)

마리 폰 클라이스트에게 보낸 편지는 그가 자살을 감행하기 며칠 전과 당일의 기록이다. 여기서 작가는 세상과 자신에 대한 극도의 절망과 삶의 욕구를 포기한 자신을 처절하게 토로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의 동반자 포겔 부인에 대하여도 언급하고 있다. 이 편지들에서는 인생을 체념한 자에게만 엿볼 수 있는 편안함과 경쾌함마저 배어나 씁쓸하기조차 하다.

금년은 클라이스트 서거 200주년의 해다. 그는 사후 서서히 재평가 받아 오늘날 독일에서 괴테와 실러에 견주는 대작가로 인정 받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 그의 성가는 미미하다. 그의 작품은커녕 이름조차도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그의 생사와 작품 특성 상 단시일 내에 국내에 인지되기는 어려울 것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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