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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테질레아 ㅣ 지만지 고전선집 660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이원양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2011년 클라이스트 사망 100주년을 맞아 국내 초역이다. 하반기에는 연극 공연도 이루어질 계획이라니 무척 관심 깊다.
작품의 모티브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에 두고 있다. 아킬레스[아킬레우스]가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와의 대결에서 이긴 후 그리스 군이 승세를 올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여인족 군대가 질풍같이 달려들어 그리스군과 트로이군을 모두 공격한다.
극은 여인족 군대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과 그들의 가공할만한 공격력에 대한 놀라움과 두려움을 표현한다. 아마존 여인군은 연합을 모색하는 트로이군을 격파한 후 그리스군에 도전하여 그들의 여왕 펜테질레아는 아킬레우스와 결전을 벌인다. 간신히 추격을 따돌린 아킬레우스와 그를 놓쳐 안타까워하는 펜테질레아. 두 남녀 영웅의 대결을 다시 이어지고 아킬레우스는 펜테질레아를 쓰러뜨리고, 그리스군은 아마존 여인군에 강력한 반격을 펼친다. 정신적으로 혼란한 펜테질레아의 안정을 위해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패배한 것으로 위장하고 그들은 서로 사랑에 빠진다. 이때 펜테질레아는 아킬레우스의 물음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자신들이 누구이며, 그리스군을 공격하는 이유를 밝힌다. 역공을 펼친 여인군으로 그리스군이 다시 패퇴함에 따라 아킬레우스는 싸움의 진실을 밝히고 남녀는 서로에게 자신의 고향으로 가자고 고집 피우다 헤어진다. 아킬레우스는 여왕과 재대결을 요청하고 일부러 싸움에 질 생각이나, 여왕은 오해와 집착으로 그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나중에 제정신을 차린 그녀는 스스로 뒤를 따른다.
단막의 전 25장으로 이루어진 극은 발단의 정체모를 여인군의 등장과 그들과의 전투장면을 관찰자의 시각에서 전언 형태로 독자에게 들려준다. 중간도 이따금씩 그러하다가 결말 부분 역시 발단과 비슷하게 전개된다. 무대에서 대규모의 전투를 재현하기는 용이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아마존 여인국에 대한 설화는 고대 그리스부터 내려온다. 작가는 스키타이, 즉 오늘의 카프카즈를 아마존 국으로 설정한다. 주석에 따르면 아킬레우스의 최후에 관하여는 파리스의 화살에 죽었다는 설 외에, 아마존 여인족과 관련되어 죽었다는 설도 존재하는데, 클라이스트는 후자의 가설을 극화한 것이다. 아마존은, 가슴이 없는 여인들이란 의미라고 한다. 그들은 남성이 없는 여성들만의 국가이다. 자신들을 지키기 위하여 활을 잘 쏠 수 있도록 오른쪽 가슴을 도려내었다. 그들의 본질은 남성의 독재와 횡포를 벗어나 평화와 온화함을 희구함에 있다. 따라서 그들이 벌이는 전쟁은 살육과 약탈이 목적이 아니라, 극중에 계속 반복되는 ‘장미 축제’로 알 수 있듯이 종족을 유지하고자 하는 원초적 목적에 근거한다.
아킬레우스와 펜테질레아의 관계는 처음에 적대적 대결자로 출발한다. 아킬레우스는 상대의 정체를 모른 채 전투에 나서고, 펜테질레아는 그를 알지만 그를 꺾으려고 한다. 따라서 대결 장면은 긴장이 팽배하여 분위기는 살벌하기 그지없다. 아킬레우스는 후에 펜테질레아에게 전사이자 여인으로서 매력을 느끼고 거짓 패배로 둘 사이의 관계는 온기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극단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의 화신이다. 전사이자 전쟁 영웅으로서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 그들. 특히 펜테질레아는 자신이 쓰러뜨린 남성을 파트너로 삼아야 하기에 더욱 필사적이다. 그런 면에서 외양만 달리할 뿐 본질상 그들은 동일하다. 여자를 데리고 그리스로 가고자 하는 아킬레우스, 남자를 데리고 테미스키라로 가고자 하는 펜테질레아. 그들은 타협하지 못한다.
여기서 펜테질레아의 돌변하는 인격 변화가 흥미롭다. 그녀는 이십대 초반의 꽃답고 아리따운 처녀로서 언행에 있어 모범적이었음이 결말의 증언을 통해 드러난다. 하지만 전투에 임하고 격전이 치열해짐에 따라 그녀의 아킬레우스에 대한 사랑은 외골수적인 집착으로 변질된다. 그녀는 여왕으로서 본분을 망각하고 남성을 갈구하는 일개 동물적 여성으로 타락한다. 이는 그녀의 거친 욕설과 막무가내식 행동으로 표출된다. 그런데 이는 아마존 여인족의 본성과 배치되며, 그들의 신의 뜻에도 어긋난다. 그래서 극중의 그녀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지칭이 여왕에서, 미친 여인, 암캐로 점점 추락하며, 그녀의 비극적 운명은 예정된 것이다.
이 작품은 수많은 그리스 신화의 요소를 차용하고 있다. 아킬레우스와 펜테질레아는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디아나]의 관계로 비정하며, 펜테질레아의 광란성과 야수성은 디오니소스 축제에 열광하는 여인들이 이에 반대하는 왕이자 아들이며, 동생을 사지를 찢어 죽이는 일화와 연계한다. 또한 아르테미스의 목욕 장면을 우연히 엿보게된 불행한 악타이온의 최후도 아킬레우스의 죽음과 멀지 않다. 이는 작가의 그리스·로마신화에 대한 해박한 교양을 반영한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그는 정말로 미래를 선취한 극작가이다. 고전주의가 득세한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그의 작품에는 낭만주의의 격동성, 실존주의의 치열한 존재에 대한 의문, 이성의 영역을 벗어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요소가 풍성하다. 후대 작가들이 그에게 열광하고 그를 선구자로 평가함은 지극히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