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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 왕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5년 12월
평점 :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가운데 가장 잔인하고 처절한 작품이다. 처절함은 리어 왕에게서, 잔인함은 글로스터 백작을 통해 표출된다. 두 사람이야말로 단연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표제로 볼 때 리어 왕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글로스터 백작이 주인공인 까닭은 리어 왕과 함께 비극을 유발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인물이어서다. 글로스터 일가와 관련된 얘기가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까닭이다.
두 사람의 운명은 병행하여 진행된다. 그들은 닮은꼴이다. 반목-그들의 반목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하는 형제를 둔 글로스터 백작과 역시 그러한 자매를 둔 리어 왕. 간언(間言)에 연약한 전자와 감언(甘言)에 취약한 후자. 양자는 성격도 유사한데, 성급함과 함께 직진성이 그것이다.
이는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진실에 충실한지를 증명하는 단적인 예이다. 그 정도는 때로 섬뜩할 지경이다. 우리가 코딜리아의 순수함이나 사랑과 진실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거리감을 느낀다면 바로 이런 점 때문이라 할 수 있다. (P.189)
리어 왕의 성격적 결함은 노인이니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코딜리아의 집요한 강경함은 극 초반에 두드러진다. 작중 인물들이 모두 찬미하는 인물임에도 독자는 그녀에게 그다지 공감대와 동정을 형성하지 못한다. 이는 아버지를 닮은 듯 일체의 타협에 굴하지 않는 그녀의 성격에서 비롯한다. 자식에게서 사랑의 말을 듣고 싶은 리어 왕의 바람이 그렇게 터무니없지는 않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한다. 물론 그녀의 생각은 진실에 가깝다. 하지만 인간적인지는 않다. 작품 해설에서도 이를 언급한다.
코딜리아의 작중 비중이 낮은 것은 비극을 이끌어내는 리어 왕의 대척점에서만 의의를 지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원한을 복수하려는 그녀의 전쟁 시도가 실패로 끝나는 것은 불가피한데 어쨌든 그녀는 외세인 프랑스의 왕비로서 프랑스군을 이끌고 왔기 때문이다.
(코딜리아) 없습니다, 전하.
(리어) 없습니다?
(코딜리아) 없습니다.
(리어) 없음은 없음만 낳느니라. 다시 해봐. (1막 1장, P.17-18)
리어 왕과 코딜리아의 대화는 선(禪)문답을 떠올리게 한다. 자석의 같은 극끼리 서로 끌어당기지 못하듯 닮은꼴인 그들은 내내 밀쳐내기만 한다. 여기서 사랑하지 않지만 사랑을 말하여 사랑을 인정받고, 사랑함에도 사랑을 말하지 않아 사랑을 부인 받는 모순적 상황이 발생하며, 이것이 리어 왕의 비극의 출발점이다. 리어 왕의 처사가 가져올 비극을 예언하는 인물은 켄트와 바보가 둘뿐이나, 켄트는 추방당하고 바보는 바보일 뿐.
(바보) 당신 땅을 내주라고 조언한 신하 불러 / 내 곁에 세우고 당신이 그 사람 역을 하면 / 친절한 바보와 신랄한 바보는 바로 보여. / 얼룩옷 바보는 여기에, 또 하나는 거기에.
(리어) 너, 나를 바보라고 부르는 거냐?
(바보) 다른 칭호는 다 줘버렸잖아. 그건 당신이 가지고 / 태어났고. (1막 1장, P.45)
(바보) 넝마 걸친 아비는 / 자식들이 눈 돌리나 / 주머니 찬 아비는 / 자식들이 친절하지. / 최고 창녀 운명여신 / 거지에겐 문 안 열어. (2막 4장, P.76)
<리어 왕>에서 바보는 독특한 인물이다. 리어 왕을 따라다니면서 시종일관 풍자와 해학을 자아내는 그는 극의 지나친 엄숙성과 비극성을 완화해주는 역할을 맡는다. 여기에 더해 미쳐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명료한 인식을 지니고 대놓고 직언하지만 아무도 수용하지 않는데 그의 비극성이 드리운다. 리어 왕이 광기에 완전히 휩싸인 후 그가 더는 극에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등장할 이유가 없어서이리라.
이 작품은 주요 등장인물이 거의 모두-올바니와 에드거만 빼고-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에서도 드물게 참담하다. 고너릴과 리간은 극이 전개될수록 패륜과 음욕에 물든 본성을 드러내는데, 에드먼드를 쟁탈하고자 하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에드먼드는 형을 내쫓고 아버지를 처참한 상황에 빠뜨리는 장본인이다. 서자로서의 그의 좌절과 분노를 십분 이해하고 출세욕을 참작하더라도 그의 죄악은 용서받을 수 없다. 그리고 콘월 공작.
올바니와 콘월은 리어 왕의 사위이자 왕국의 후계자임에도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다. 고너릴에게 바보라고 불릴 만큼 충성스럽고 성실한 올바니는 고너릴의 행동과 성격에 영합하길 거부한다. 그는 리어 왕에 대한 글로스터 백작의 충정에 감복한다. 그가 훗날 유일하게 생존한 후계자로서 그가 사태를 정리하고 왕국을 계승한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다.
(올바니) 오, 몹쓸 인간 고너릴, / 당신은 그 얼굴을 때리는 무례한 바람 속의 / 먼지만도 못하오. 그 성질이 두렵소. (4막 2장, P.125)
(올바니) 글로스터, / 국왕에게 보여준 충정에 감사하고 / 눈에 대한 복수는 꼭 하리다. (4막 2장, P.128-129)
콘월은 리간과 함께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데 일조하는 인물이다. 리어 왕의 사자인 켄트를 죄 주면서 그는 이미 리어 왕의 권위를 거부한다. 무엇보다 그의 오만하고 잔인한 면모는 자신을 배반한 글로스터 백작의 두 눈알을 뽑는 잔인한 처벌 장면에서 드러난다. 그의 이러한 잔인함은 결국 자신을 향한 부메랑이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된다.
(콘월) 그건 절대 못 볼 거다. 이봐, 의자를 꽉 잡아. / 네 눈알을 내 발로 짓밟아 주겠다.
(글로스터) 늙어 죽을 때까지 살고 싶은 사람은 / 날 살려주시오!-오, 잔인하다! 오, 신들이여!
(리간) 한쪽이 다른 쪽을 비웃을 테니까!-저쪽도. (3막 7장, P.117)
(콘월) 못 보게 할 테다. 빠져라 눈깔아. / 이제 네 밝은 빛은 어딨느냐? (3막 7장, P.118)
이제 주인공인 리어 왕에 집중하자. 리어 왕의 잘못은 오로지 두 딸을 믿었고 일순간의 화에 사로잡혀 막내딸을 추방한 데 있다. 그의 화는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수 있고 잘못을 깨닫고 뉘우칠 가능성도 있다. 그의 잘못이 최악의 보답을 받을 정도로 크고 도저히 회복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간언에 속아 넘어간 글로스터 백작도 마찬가지다. 자칫 찻잔 속의 태풍마냥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는 조그만 잘못이지만 셰익스피어는 간단하게 다루지 않는다. 카오스 이론의 나비 효과와도 같이 미처 추론하거나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로 상황을 확장한다.
셰익스피어가 여기서 가장 공들이고 독자들이 가장 인상 깊게 받아들이는 대목은 미친 리어 왕의 모습에서다. 분노와 절망에 사로잡혀 광기에 휩싸인 채 광야를 방황하며 울부짖는 리어에게서 우리는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어리석음과 나약함과 고독함과 맹목적일 정도로 집요한 의지를 단숨에 엿볼 수 있다. 우리가 떠올리는 리어 왕은 바로 이 장면이다.
(리어) 하늘은 저에게 인내를 주소서, 인내가 필요하오! / 신들이여, 이 불쌍한 노인이 보이지요. / 나이만큼 근심에 찬, 둘 다 많아 비참한. / 아비에게 반항토록 이 딸들을 선동한 게 / 당신들이라면 저 또한 바보처럼 순하게 / 참지 않게 하소서. 고귀한 분노 내려 / 이 남자의 두 뺨을 여자들 무기인 눈물로 / 더럽히지 마소서. 그래, 이 무정한 마녀들아, / 내 너희 둘에게 철저히 복수하여 온 세상이- / 난 할 테다.- 뭘 한진 모르지만 그것은 / 지상의 공포가 되리라! 너흰 내가 울 것 같지? / 아냐, 난 안 울어. (폭풍우 소리) / 울 이유는 충분하나 울기 전에 이 심장이 /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질 것이다. / 오, 바보야, 난 이제 미치련다. (2막 4장, P.87)
(리어) 바람아 불어라, 뺨 터지게! 사납게 불어라! / 하늘과 바다의 폭풍우야, 첨탑들이 잠기고 / 풍향계가 다 빠질 때까지 내뿜어라! / 참나무 쪼개는 벼락의 선구자, / 생각보다 더 빠른 유황색 번갯불아, / 내 흰머리 태워라! 만물을 뒤흔드는 천둥아, / 둥글게 꽉 찬 세상 납작하게 깨부숴라! / 조물주의 틀을 깨고 배은의 인간 빚는 / 모든 씨앗 한꺼번에 엎질러라! (3막 2장, P.91-92)
비틀거릴지언정 결코 무너지지 않던 그가 끝내 무너지는 대목은 마지막으로 믿었고 사랑과 후회로 뒤섞인 채 다시 보기를 염원해 마지않았던 코딜리아의 죽음에 이르러서다. 그로서는 더 이상 버틸 기력도 의미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리어 왕과 글로스터 백작의 얘기는 죄악의 유혹에 흔들리기 쉬운 인간 본성의 취약함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라고 할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그의 주요 비극작품들에서 한결같이 다루는 제재와 마찬가지로. 그는 <오셀로>와 <맥베스> 등에서보다 한층 큰 스케일로 감정의 진폭을 극단으로 확장한다. 너무나 미미하여 간과될 수 있는 존재도 현미경으로 확대하여 보여주었을 때 실체를 생생하게 알아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별것 아닌 것 같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조차도 걷잡을 수 없는 파국적 결과를 낳을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연약한 이성의 토대 위에서 살아가고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