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의 아이들 - 히로세 다카시 평화소설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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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순전히 문학적 관점으로 헤아린다면 매우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할 수 있다. 작가의 목적은 반핵평화라는 자신의 주장을 많은 이들에게 전파하기 위한 것이며, 소설이라는 형식을 사용한 것은 많은 이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동일한 주장을 딱딱한 논설문이나 선전문 형태로 작성한다면 대중의 관심을 끌기는 어려울 테니.

 

나는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통해 핵발전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떤 비극 속으로 빠뜨려 가는가를 절실히 알리고 싶었다. (P.175)

 

원자력발전의 필요성과 관련해서는 찬반양론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고, 이는 정치적 이해득실과도 연계되어 있기에 문외한은 깊숙한 내막을 자세히 알기 어렵다. 이 책은 원자력발전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쓰인 글이므로 작가는 당연히 부정적 내용으로 기술한다. 저자 후기에서 작가는 이렇게 주장한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란 것도 알고 보면 원자·수소폭탄 산업을 경제적으로 성립시키려는 상당히 무리한 방법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P.173)

 

1986년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사고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의 발전소 간부인 안드레이 가족을 중심으로 방사선 피폭의 무섭고도 잔인한 효과를 그리고 있다. 지금이야 여러 통로로 피폭의 위험성이 대중에게 많이 알려졌지만 체르노빌 당시 또는 이 책이 간행된 1990년에만 해도 일반사람은 원자력의 안전성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던 시절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작품이 독자에게 주는 충격은 매우 강렬한 반응을 일으켰으리라. 타냐 또한 사고가 발생한 이후에야 비로소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발전소라는 말의 허구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것은 얼마나 무서운 직업이었단 말인가. 자신은 왜 좀 더 일찍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을까. 이렇게 끝날 줄 미리 알았어야 했다는 자괴감만이 지금 그녀의 마음속에 가득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반과 이네사를 지금과 같은 불행한 상황으로 이끈 것이 자신들이라는 생각까지 이르자, 그녀는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P.167)

 

소설은 두 개의 갈래로 뒤엉켜 전개된다. 하나는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뒤따른 피폭 효과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확산되고 심화되는 과정을 그린다. 위험성을 인지하기도 전에 방사능은 피폭자의 전신을 휘감는다. 신체는 방사능 수준에 따라 급격히 또는 서서히 돌이킬 수 없이 잠식당한다. 이네사는 무릎 관절의 약화로, 이반은 시력 상실로. 조그맣게 드러나는 붉은 반점은 내출혈의 악화라는 형태로 수많은 피폭자의 목숨을 앗아간다. 환경 변화에 예민한 체르노빌의 아이들이 속수무책으로 스러지고 마는 것이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은 소련 당국의 폐쇄적 통제 체제다. 사고의 축소와 은폐에 급급한 당국은 피난민들의 이동을 통제하고 강제 격리한다. 재빨리 피폭 지역을 벗어나야 함에도 비효율적 통제 체제에 순응하기를 요구하고 불응자는 처형도 꺼리지 않는다. 그들은 수만 명의 인명 피해가 나더라도 자신들의 실수와 약점이 노출되는 것을 막는 게 더욱 중요하다. 안드레이를 포함한 결사대, 그리고 수많은 소방대원이 무의미하게 발전소 진화를 위해 희생된 것은 무능력하고 낙후된 체제의 신경질적 발작이다.

 

그들의 체제는 사람들의 통제에 최적화된 체제이지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데는 소질이 없음을 이 소설은 다시금 보여준다. 통제의 용이를 위해 피폭자들은 부모와 가족이 생이별을 당하며, 타냐는 아이들의 소재와 현황도 파악하지 못한 채 병원들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아무런 보람없이. 아이들은 이미 지상에 없으므로. 타냐가 눈물을 흘리며 과거의 즐거웠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은 그것이 되찾을 수 없는 평화와 행복임을 깨달아서다.

 

눈물 속에 떠오르는 것은 단지 늠름했던 남편의 웃는 모습뿐이었다. 멀리 남편의 생생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갑자기 이미 십 년이나 지난 먼 옛날의 행복했던 시절이 타냐의 눈앞에 펼쳐졌다. 미래의 운명에 대한 아무런 걱정도 없이 개울가에서 온 가족이 행복하게 보내던 화창했던 날의 추억... (P.101)

 

물론 체르노빌의 비극은 소련 체제의 특수성에 기인하여 악화되었다. 개방화된 시민사회라면 피폭자의 관리와 치료는 더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졌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근본적 사안인 원자력발전의 안전성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인간의 기술에는 완벽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가능성을 최소로 낮출 것을 기대할 뿐.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소에서 체르노빌에서와 같은 치명적인 사고가 발생하였을 경우 더는 대한민국의 존속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방사능 낙진의 위험성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인간의 상상력이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된 생물이라면, 마땅히 신이 창조한 세계의 현상에 대해서 자연적으로 인식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고는 신이 창조한 세계의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가장 신비한 신의 창조물인 원자를 파괴하는, 즉 신이 창조한 세계를 파괴하는 현상이기 때문이었다. (P.149)

 

방사선 피폭의 위험성을 웅변하는 저자의 설명은 거의 종교적 울림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 대안은 무엇인가? 다카시는 원자력발전 없이도 전력 수요의 충족이 가능하다고 하며, 무진장한 천연가스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다만 문외한인 내 생각에도 천연가스 매장이 지역적으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지 않으므로 소위 석유 무기화처럼, 천연가스 무기화도 불가능하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지역적으로 균등하게 확보할 수 있는 환경적으로도 깨끗한 대체 발전 수단이 개발되지 않는 한 원자력발전에 대한 논란은 쉽사리 해소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은 불확실한 장래의 위험성보다는 당장 눈앞의 확실한 가능성에 무게를 두기 마련이다. 그때까지는 원자력 발전소가 안전하기를, 또한 친환경 대체 발전이 조속히 연구 개발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것이 나 같은 범인(凡人)들의 소박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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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헛수고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미예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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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비교적 초기 작품으로 분류되는 작품으로 언어유희, 재담, 익살이 풍부한 희극이다. 이것이 과하여 한바탕 웃고 끝나는 유형의 가벼운 소극(笑劇)으로 볼 여지도 있다. 무대는 프랑스와 스페인 접경지대의 나바라 왕국이다.

 

나바라의 왕 페르디난드는 극 중에서 덕망을 지닌 인물로 회자되는데, 학문적으로 도덕적으로 지향점이 매우 드높음을 알 수 있다. 개인뿐만 아니라 왕국 자체가 타의 모범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학문의 완성을 위해 스스로 삼 년간 철저한 금욕, 절제, 근면을 맹세하는데, 문제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벗인 세 명의 신하와 함께 맹세를 지켜나가려고 한다.

 

(베로네) , 이런 것들은 소득도 없는데 지키기는 무척 힘든 일들입니다. / 여자도 만나지 마라, 학문만 해라, 금욕하고 잠도 자지 마라. (P.9, 1막 제1)

 

인간의 자연스러운 신체적, 정신적 욕망은 막을 수 없다. 기본적으로 막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억지로 막는다면 다른 배출구를 찾아 분출하려고 하게 마련이다. 추구하는 목표를 위해 욕망을 일부 억제할 수 있으나 과도하지 않은 수준에서 그것도 자발적 의사에 따라 가능할 뿐 타인에게 강요하여 실행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베로네가 반발하는 건 당연하며 그의 주장은 현실적이며 이치에도 부합한다.

 

(베로네) 학문이란 하늘에 빛나는 태양과 같아서/ 무모하게 찾는다고 다 찾아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P.11, 1막 제1)

 

(베로네) 저야 기꺼이 제 머리를 내놓을 겁니다만, / 이 맹세와 법령은 무의미한 조롱거리가 될 겁니다. (P.25-26, 1막 제1)

 

아름다운 프랑스 공주의 방문으로 네 사람의 맹세는 순식간에 금이 가버리며, 각자 정체를 노출하지 않기 위해 가면을 쓴 채 프랑스 공주와 시녀들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작가는 여기서 인간의 본성을 거역하는 말과 행동의 허망함을 적나라하게 관객에게 보여주는 셈이다. 그들 모두가 맹세를 어겼음이 드러나는 순간 베로네는 다시금 맹세의 부적절성을 지적하며 맹세를 포기할 것을 주장한다. 작가가 이처럼 베로네의 입을 빌려 맹세에 대한 비판을 되풀이하는 까닭은 그것이 갖는 비합리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이리라.

 

(베로네)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이런 이치를 우리는 거스를 수 없는 법. / 그러니 하나같이 맹세를 깰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P.117, 4막 제3)

 

(베로네) 우리 자신을 찾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맹세를 버립시다. / 맹세를 지키려 들다 우리 자신을 버리게 될 것이오. (P.126, 4막 제3)

 

왕과 신하들의 금욕 맹세는 다른 등장인물이 벌이는 언어유희, 재담, 해학적 대화와 행동 등으로 비현실성과 터무니없음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런 경묘한 소극(笑劇)에서 그들의 진지함이란 처음부터 당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익살꾼 아르마도는 대사 자체가 과장되고 현학적이며, 시동 모트 또한 어린 나이에 주인을 능가할 정도로 꾀쟁이다. 코스타르드는 광대답게 천방지축이다. 나타니엘 목사와 올로페르네스 교장은 올바른 영어 발음법에 관한 대화에서 그들의 현학성과 무지 및 허세를 한눈에 나타낸다. 이러한 재담은 세 신하는 물론 공주를 포함한 시종과 시녀들도 마찬가지다. 즉 이 희극은 등장인물들이 전체적으로 진지한 대사보다는 재치와 풍자, 익살과 유희 등이 넘실넘실하는 작품이다. 어처구니없는 말꼬리 잡기에 기반한 언어유희의 한 사례다. 극중극으로 벌이는 아홉 영웅 놀이는 이 모든 익살과 유희로 점철된 난장판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하다.

 

(올로페르네스) 무안해할 얼굴이 아닙니다.

(베로네) 얼굴 통이 없단 말씀.

(올로페르네스) 이건 무슨 뜻?

(부아예) 탄금 대갈통인 게지.

(두마인) 머리핀 통인가.

(베로네) 반지에 붙은 해골 통이야. (P.189, 5막 제2)

 

왕과 세 신하는 자신들의 맹세를 저버리면서까지 프랑스 공주 일행의 사랑을 얻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저버린 맹세의 가벼움에 공주 일행이 오히려 미더움과 성실성을 의심하게 되어서다. 한바탕 떠들썩한 희극으로 막을 내리는 것에 대한 부담감인지 작가는 돌연 공주 일행의 입을 빌어 구혼자들의 성실성을 시험하는 조건을 내세운다. 일 년간 세속적 욕망의 도전을 이겨낼 수 있다면 구혼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베로네는 한 가지 조건을 더 부여받는데, 워낙 재기발랄하기로 유명한 그였기에 그 습성을 버리라는 것이다. 매우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결말이다.

 

통상적인 희극은 주인공이 얽힌 사건과 묵은 갈등을 해결하고 모두가 즐겁고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걸로 끝나기 마련이다. 연인이라면 응당 혼사를 치르거나 결혼을 약속하는 등. 하지만 이 작품은 결말이 다소 다르다. 물론 조건부로 구혼을 받아주므로 외양상 해피 엔딩이지만 일 년이라는 시간적, 시험의 통과라는 물리적 장애물이 엄연히 남아 있는 상황에서 섣불리 확신을 갖고 미래의 행복을 단언하지는 못한다. 베로네가 지적하는 대목이 바로 이것이다.

 

(베로네) 우리 구혼의 결말은 옛날 극과는 다르군요. / ‘갑돌이와 갑순이는 결혼하지 않았대요.’ 이렇게 돼 버렸습니다. / 아가씨들의 호의만이 우리 장난을 희극으로 만들 수 있었는데.

(페르디난드) 이것 봐, 열두 달하고 하루가 지나면, / 희극으로 끝날 거요.

(베로네) 극이 되기에는 너무 긴데요. (P.208, 5막 제2)

 

이 결말 부분을 근거로 셰익스피어가 모종의 진지함을 부여하였는지 아니면 진지함을 가장한 일관된 희극성을 의도하였는지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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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생애 - 위대한 투쟁 거장이 만난 거장 7
로맹 롤랑 지음, 임희근 옮김 / 포노(PHONO)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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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음악을 알고 좋아한 지 오랜 시일이 경과하였고 명곡의 작품 배경과 해설을 통해 그의 삶도 대강 헤아렸다. 이제 새삼 베토벤의 생애를 알고 싶어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그의 삶과 음악의 연관성을 보다 체계적으로 조감하고 싶다는 바램과, 겉으로 드러난 그의 삶의 참모습을 다시금 살펴보고 싶다는 것

 

베토벤을 일컬어 흔히 악성(樂聖)’으로 일컫는다. 9개의 교향곡, 7곡의 협주곡, 32개의 피아노 소나타, 16개의 현악사중주곡, 7개의 피아노 삼중주곡, 10개의 바이올린 소나타, 5개의 첼로 소나타 등 그가 남긴 거의 모든 곡은 자체로 서양음악사에서 우뚝 섰으며 후대에 미친 영향력 또한 거대하다. 그가 남긴 족적이 너무나 명확하므로 일반인들은 그의 천재성에 감탄하고 존경하지 그가 난청(難聽)이라는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인 장애를 극복한 인물이라는 점을 자칫 간과하는 때가 많다.

 

말이 나온 김에 베토벤 작품 목록에서 Op.1(삼중주 세곡)만이 1796년 이전에 발표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자. Op.2, 즉 첫 피아노 소나타 세 곡은 17963월에 나왔다. 그러니까 베토벤의 작품 전체가 귀먹은 베토벤이 작곡한 것이라는 얘기다. (P.30, 각주)

 

위의 글에서처럼 베토벤의 주요한 거의 모든 작품은 난청 이후에 작곡한 곡들이다. 자신에게 난청이 생겼다고 가정해 보자. 많은 사람은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한 삶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정상적인 직업을 갖기 어려우며, 사교적인 생활도 포기해야 하며, 스스로 자신 속으로 위축된 채 인생의 비참함을 한탄하며 지내기에 십상이다. 요즘도 그러할진대 1800년 전후 베토벤이 살던 시대를 떠올려보자. 게다가 그는 음악가다. 귀가 들리지 않는 음악가는 매우 이율배반적 인상을 풍긴다. 그러면 그가 남긴 음악 유산이 결코 범상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을 위해 고통받았던 위대한 영혼들을 말이다. 이 총서 유명인들의 삶은 야심만만한 자들의 오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불행한 이들을 위해 펴낸 것이다. (P.11)

 

저자는 초판 서문에서 이 책의 저작 의도를 분명히 한다. 그는 이 책이 학문을 위해 쓴 책이 아니”(P.8)라고 개정판 서문에서 다시 한번 강조한다. 저자는 오히려 전기 작가들이 쓴 일반적인 베토벤의 전기에 비판적 견해를 나타낸다. 그에 따르면 그것은 세밀한 자료들의 죽은 문장에 지나지 않는다. 전기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본질적 요소인 인물을 독자에게 생생하게 살아있는 존재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놓쳤다고.

 

로맹 롤랑의 이 책에 대해 여러 비판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베토벤을 역경을 극복한 영웅이라는 이미지로 지나치게 미화하였기에 인간 베토벤의 실체를 오히려 가리고 말았다며. 여기에 대해서 저자는 일찌감치 항변하였다.

 

나는 결코 베토벤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그를 비난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그의 면모 전체를 그리려 할 뿐이다. 베토벤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가 지닌 강력한 균형의 자연적 저울을 형성하는 이 과도한 대조를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P.208-209, 부록: ‘1800, 서른 살 베토벤의 초상’)

 

저자는 베토벤을 찬양한다. 때로는 그의 굴곡진 운명에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며 그가 삶에서 금전 면에서나 애정 면에서 행복을 성취하지 못하였음에 더없이 감상적 표현도 아끼지 않는다. 이것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으나 베토벤의 생애를 들여다볼 때 동정적이고 감상적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음악가 베토벤이 아닌 인간 베토벤은 딱한 삶을 살다 갔으니.

 

난 혼자였지. 완전히 혼자였어.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세상에 나서볼 수도 없었다. 나는 추방된 자처럼 살 수밖에 없었단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가까이 가면 남들이 내 상태를 눈치챌까 봐 말할 수 없는 불안에 휩싸였지. (P.92,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상황이 조금 나아지리라는 희망만 있을 뿐. 이 병만 아니라면 벌써 그리로 갔겠지! ! 이 병에서 놓여나기만 하면 온 세상을 내 품에 안을 텐데! (P.111, ‘베겔러에게 보낸 편지’)

 

고작 서른 살 무렵에 자살을 각오하고 유서를 남긴 심정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야심만만하고 음악으로 세상을 정복하리라는 자신감을 지닌 그의 앞날이 이렇게 비참함에 빠졌을 줄 어찌 알았을까. 난청 장애가 남긴 영향과 후유증은 이렇게나 심대하였다. 사랑의 동반자라도 있었다면 상황이 나아졌을 텐데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그는 독신의 처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였다. 경제적으로도 음악적으로도 그는 현실은 밝지 않았다. 우리는 베토벤이 슈베르트와는 달리 죽을 때까지 음악계의 거장으로 비교적 여유로운 삶을 살았다고 착각하는데 저자는 그렇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그는 매우 가난하였고, 당대인들은 그의 작풍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그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고, 조카를 둘러싼 가족사도 어수선하였다.

 

그런 베토벤이 인류문명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엄청난 성취를 이루고 후대에 영원한 유산을 남겼으니 그를 영웅이라고 칭하지 않으면 누가 영웅의 자격이 있겠는가. 저자는 오히려 반문할 것이다. 그로서는 찬미의 문장으로 끝맺음을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어떤 정복이 이만하겠으며, 보나파르트의 어떤 전투가, 아우스터리츠의 어떤 태양이 이 초인적 노력의 영광, ‘정신이 일찍이 이뤄낸 가장 혁혁한 이 승리의 영광만 하겠는가. 가난하고 장애가 있으며 외롭고 고통으로 점철된 듯한 불행한 남자, 세상이 그에게 기쁨을 주길 거부하니 스스로 환희를 만들어내 세상에 가져다준 한 인간의 정신이 말이다. (P.87)

 

이 책은 베토벤의 생애를 다룬 본문 외에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와 친우들과 주고받은 편지들, 음악과 비평에 대한 베토벤의 단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본격적인 전기 문학은 아니며, 그의 삶을 세세하게 포괄하기에는 분량적으로 짧은 편이다. 이러한 한계를 참작하면 거인 베토벤의 삶을 조망하기엔 충분하며, 독자는 저절로 저자의 감상에 젖어들게 된다.

 

한편 부록으로 로맹 롤랑의 다른 저서 중 일부 대목인 <1800, 서른 살 베토벤의 초상>을 수록하여 다른 번역본과 차별화를 꾀하고 보다 심층적인 이해를 도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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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도끼 사계절 1318 문고 18
게리 폴슨 지음, 김민석 옮김 / 사계절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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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현실에 머무를 때 비해 고난을 겪을 때 사람은 한층 빨리 성숙해진다. 옛사람이 교육적 목적에서 일부러 자식을 집 밖으로 내보내서 머물게 하는 것도, 멀리 여행을 보내는 것도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브라이언의 사례도 의도치 않았지만 같은 결과를 거두었다. 캐나다 삼림지대에 불시착하여 어린 로빈슨 크루소가 된 채 생존을 위해 홀로 분투하였다. 아무것도 모른다면 울먹이던 철부지 소년은 수십 일 만에 당당히 홀로 설 수 있는 성숙한 소년이 되었다.

 

구사일생으로 호수에서 헤엄쳐 나와 거처를 만들고, 불을 피우고, 열매를 따 먹고 활과 작살을 만들어 물고기와 새를 사냥하기까지 브라이언의 눈앞에 닥친 현실은 가혹하다. 불시착에서 입은 부상, 지독한 모기떼의 습격, 큰 사슴의 막무가내식 습격과 무시무시한 회오리바람까지. 거대한 늑대와 곰과의 조우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며, 스컹크의 강렬한 방귀는 오히려 해학적인 느낌마저 자아낸다. 모두가 브라이언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상황임에도.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해야만 했다.

동기 부여를 해야지. 내 자신이야말로 지금 내가 가진 전부야. 뭔가를 해야만 돼.’ (P.56)

 

브라이언이 끝내 생존에 성공하고 구조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자포자기하지 않고 행동에 나선 덕택이다. 그로서는 절망에 빠지고 자기연민에 좌절한 채 죽음을 기다릴 이유가 충분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를 거부한다. 육체적 활동에 집중하게 되자 침울하며 부정적 사고에서 헤어나올 수 있게 되었으며, 실패를 통해 배우고 지속적으로 실력을 향상할 수 있게 되었다.

 

자기 연민이 단지 나쁘다거나 틀렸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자기 연민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소리내어 울다가 그쳤을 때,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리는 계속 아팠고, 주위는 아직 어두웠고, 여전히 혼자였다. 자기 연민으로 인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P.81)

 

아무런 도구 없이 불을 피운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도구를 만들고 사냥을 한다는 것도 더군다나 경험 없는 소년으로서는 더욱 난감한 과제이다. 춥고 배고프고 아프고 힘들 때 사람은 더없이 나약하고 의기소침하게 마련이다. 세상은 온통 잿빛으로 보인다. 브라이언 또한 그런 비참한 기분을 겪고 흐느껴 운다, 그게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비록 브라이언은 자기연민이 쓸모없다고 말하지만 자기연민의 효과도 분명히 있다. 극도의 불안과 긴장 상태에서 울음을 촉발하여 마음이 안정되자 그는 비로소 현실로 돌아와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고 생각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으니.

 

세상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토록 간절히 구조를 기다리던 그를 무심한 비행기는 외면하고 그는 자살할 생각에까지 이를 정도로 절망에 빠졌다. 겨우 심신을 추스르고 장기전에 대비하여 거의 숙달된 경지에 이르러 홀로 사는 삶에 익숙해졌을 때 뜻하지 않게 구조의 손길이 다가온다. 불시착한 비행기 동체에서 간신히 건진 생존 키트의 풍성한 내용물도 미처 써먹기도 전에 말이다. 그의 반응이 덤덤하고 차분함에 오히려 구조자가 당황할 정도였다.

 

비행기가 브라이언을 발견하지 못하고 거 버리고 난 뒤 브라이언은 달라졌다. 좌절한 채 어쩔 줄 몰라하던 브라이언은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새사람으로 바뀐 게 한 가지 진실이었고, 다시는 죽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또 하나의 진실이었다.

브라이언은 새사람으로 거듭 태어났다. (P.118)

 

새롭게 거듭난 브라이언을 확인할 수 있었던 사건은 큰 사슴과 회오리바람의 습격이다. 이의 결과로 그는 몸을 심하게 다쳤고, 기껏 일구었던 거처의 모든 것이 날아가 버렸다. 과거의 그였다면 다시 절망에 빠져 극단적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는 더는 철부지 소년이 아니다. 그는 야생에서 홀로 살아남은 강인한 소년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 정말 달라. 나를 칠 수는 있지만 쓰러뜨릴 수는 없어. 날이 밝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거야. 나한텐 아직 손도끼가 있어. 처음 불시착했을 때도 손도끼밖에 없었어. 덤벼, 덤비라고! 이게 전부야? 큰 사슴과 회오리바람으로 나를 치는 게 전부야?’ [......] ‘글쎄,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야. 모든 게 달라졌어. 난 변했어. 이제 나는 억센 사나이란 말이야. 난 지금 어느 때보다도 강인해.’ (P.150)

 

브라이언은 야생에서 문명으로 돌아왔다. 다시 예전의 그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다. 그러기에 그는 너무 성장하였다. 홀로 살아남기 위해 애썼던 그의 모든 노력, 즉 감정과 생각, 행동은 그의 몸에 습관처럼 배었다.

 

많은 변화들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브라이언은 무슨 일이 일어나면 신중하게 살펴보고 나서 반응하는 능력을 얻었다. 그런 능력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브라이언은 사려 깊은 사람이 되었는데, 그 때 이후로 말하기 전에 충분히 생각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P.183-184)

 

사고로 죽은 줄 알았던 자식의 살아온 모습에 부모의 심정은 말할 나위 없다. 이혼한 브라이언의 부모 또한 모처럼 정다운 부부처럼 가족 재회의 기쁨을 누린다. 그리고 다시금 이전으로 돌아간다. 브라이언은 아버지에게 말하려고 하였던 어머니의 비밀, 즉 자동차에 타고 있던 남자와 어머니에 관한 내용을 결국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어린이가 아니다. 부모가 헤어질 수 있고, 어머니가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와 사랑하는 관계가 될 수도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자신이 조정할 수 없는 어른의 세계이다. 브라이언이 자연의 세계를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이 세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브라이언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상당 부분 행운의 덕분이다. 계절적으로도 한겨울이 아니었다는 점도 작용하였다. 그리고 손도끼의 지분도 절대적이다. 그와 항상 함께했던 손도끼의 도움으로 브라이언의 야생 생활이 가능하였다. 로빈슨 크루소도 마찬가지지만 사람은 어쨌든 도구의 인간이라는 점을 도외시할 수 없다. 도구 없이는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다. 도구의 힘으로 불을 피우고 물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브라이언이 갖게 되었던 희망.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손도끼였으니 이 작품의 표제로서는 합당한 자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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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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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전 독서가를 풍미하고 ‘OO사회란 유행어를 낳은 유명한 철학책이다. 문고판 크기에 130면이 안 되는 얄팍한 저작, 게다가 원저는 80면에 못 미치고 강연 원고가 2부로 추가된 구성이니 문고 또는 소책자라고 하는 편이 적당하다. 분량상으로는 얄팍하나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깊이 있는 논의 거리를 담고 있다.

 

저자 주장의 요지는 간결하고 논거는 일목요연하다. 핵심적 주장을 변용하여 반복하고 있으므로 저자의 의견을 이해하는데 큰 무리는 없다. 개인적으로 이해한 수준 내에서 거칠게 정리하자면,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하였고 사람도 성과주체가 되었다.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외부로부터의 강제 없이 자유의사에 따라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할 수 있음의 과도한 긍정성은 신경성 폭력 현상을 낳는데, 그게 현대사회의 특징인 우울증, 주의력결핍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과거의 면역학적 도식으로 파악하면 안 된다. 성과사회의 함정을 개인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자아 피로, 분열적인 피로에 빠진 개인은 창조적 역할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활동 과잉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우리-피로, 근본적 피로, 즉 무위의 피로를 회복해야 하며, 이러한 미래사회가 피로사회다.

 

근본적 피로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탈진 상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근본적 피로는 오히려 특별한 능력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영감을 준다. 그것은 정신이 태어나게 한다. (P.68-69)

 

무위를 향해 영감을 불어넣는 저 오순절의 모임은 활동사회의 반대편에 놓여 있다. 한트케는 거기 모인 사람들이 언제나 피로한 상태라고 상상한다. 그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피로한 자들의 사회이다. “오순절-사회가 미래사회의 동의어라고 한다면, 도래할 사회 또한 피로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P.73)

 

이 책이 획기적인 이유는 현대사회의 고질적 본질을 명쾌하게 분석하고 정리하였다는 점이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역자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P.7)라고 밝혔다. 분초 단위로 쪼개서 쉼 없는 자기계발, 멀티태스킹과 시테크, 다이어트와 아름다운 외모 가꾸기 등 사회적 인정을 향한 무한 질주를 하도록 스스로를 옭아매는 긍정성의 과잉이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우리는 모두 암암리에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항상 뭔가를 하지 않으면 세상에 뒤처지고 낙오될 것 같은 심리적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는 게 현대인들이다.

 

역설적이게도 활동과잉은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형태의 행위로서 어떤 자유로운 행동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다. 그것은 긍정적 힘의 일방적 절대화가 낳은 결과이다. (P.54)

 

현대사회에서 자기 긍정, 활동적 삶, 세계를 향한 재빠른 주의는 모두가 높은 평가를 받는 개념들이다. 그래야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자신의 성과를 극대화하고 소위 성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자발적 강제, 활동 과잉이 후기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특성이라고 간주한다. 외부적 규율은 효율성이 일정 단계에 도달하면 무용지물이 된다. 효율성을 한층 극대화하려면 주체의 자발성에 기대야 한다. 스스로의 자발적 의사로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자유의지는 실은 강제하도록 규정지어진 성과사회의 산물이므로 사실상 진정한 자유가 아닌 셈인 것이다.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 그것은 자기 착취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P.103)

 

언뜻 볼 때 피로사회는 현대사회의 병리적 증상을 상징하는, 다소간 부정적 뉘앙스의 표제로 생각하였다. 결론을 보니 완전히 오해한 셈이다. 현대의 성과사회가 부정적이고, 피로사회는 미래에 지향해야 할 긍정적 의미로 저자는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긍정성과 부정성은 이 책에서 어감과 실제 의미가 배치된 채 계속 사용되고 있다. 우리는 흔히 긍정성은 바람직하고, 부정성은 바람직하지 않은 걸로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저자의 주장처럼 현대사회의 병리현상의 기저에 과도한 긍정성이 개입되어 있음을 우리는 미처 알지 못한다. 현대사회의 사고구조는 개인의 선택에 따른 정신적, 육체적 노력을 착취보다는 발전의 개념으로 수용한다.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P.29)

 

2부에 실린 <우울사회>의 주장도 원저와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저자는 나르시시즘과 우울증의 현상과 본질을 분석하여 성과사회의 주권자는 호모 리베르를 자처하지만 사실은 호모 사케르라고 분석한다. 성과사회의 호모 사케르가 살아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죽지도 않는 존재라는 게 더욱 암울하다.

 

저자가 인용, 분석 및 비판하는 아렌트, 에랭베르, 아감벤, 벤야민, 한트케 등의 논의는 내게 머나먼 존재이다. 그나마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친근하게 여겨진다. 바틀비처럼 탈진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주체적 삶을 회복해야 하는데, 사색적 능력을 통해서 가능하다. 저자는 깊은 심심함이라는 용어를 통해 과잉 주의에 대비되는 깊은 주의의 의의와 중요성을 강조한다. 깊은 심심함 가운데 사색적 삶을 통해 무조건적 긍정성의 과잉 자극의 흐름을 차단하고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부정성의 요소, 즉 아니라고 말하는 행위, 머뭇거림, 분노, 부정적 감정 등이 역설적으로 이를 가능케 하는 수단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사색적 삶은 오히려 몰려오는, 또는 마구 밀고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며, 시선을 외부의 자극에 내맡기기보다 주체적으로 조종한다. 아니라고 말하는 주체적 행위를 통해 사색적 삶은 어떤 활동과잉보다도 더 활동적으로 된다. (P.48)

 

오랜만에 철학 서적, 깊이 음미하고 헤아리는 진지한 유형의 독서. 버겁지만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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