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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평점 :
십여 년 전 독서가를 풍미하고 ‘OO사회’란 유행어를 낳은 유명한 철학책이다. 문고판 크기에 130면이 안 되는 얄팍한 저작, 게다가 원저는 80면에 못 미치고 강연 원고가 2부로 추가된 구성이니 문고 또는 소책자라고 하는 편이 적당하다. 분량상으로는 얄팍하나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깊이 있는 논의 거리를 담고 있다.
저자 주장의 요지는 간결하고 논거는 일목요연하다. 핵심적 주장을 변용하여 반복하고 있으므로 저자의 의견을 이해하는데 큰 무리는 없다. 개인적으로 이해한 수준 내에서 거칠게 정리하자면,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하였고 사람도 ‘성과주체’가 되었다.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외부로부터의 강제 없이 자유의사에 따라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할 수 있음’의 과도한 긍정성은 신경성 폭력 현상을 낳는데, 그게 현대사회의 특징인 우울증, 주의력결핍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과거의 면역학적 도식으로 파악하면 안 된다. 성과사회의 함정을 개인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자아 피로, 분열적인 피로에 빠진 개인은 창조적 역할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활동 과잉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우리-피로, 근본적 피로, 즉 무위의 피로를 회복해야 하며, 이러한 미래사회가 피로사회다.
“근본적 피로”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탈진 상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근본적 피로는 오히려 특별한 능력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영감을 준다. 그것은 정신이 태어나게 한다. (P.68-69)
무위를 향해 영감을 불어넣는 저 “오순절의 모임”은 활동사회의 반대편에 놓여 있다. 한트케는 거기 모인 사람들이 “언제나 피로한 상태”라고 상상한다. 그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피로한 자들의 사회이다. “오순절-사회”가 미래사회의 동의어라고 한다면, 도래할 사회 또한 피로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P.73)
이 책이 획기적인 이유는 현대사회의 고질적 본질을 명쾌하게 분석하고 정리하였다는 점이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역자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P.7)라고 밝혔다. 분초 단위로 쪼개서 쉼 없는 자기계발, 멀티태스킹과 시테크, 다이어트와 아름다운 외모 가꾸기 등 사회적 인정을 향한 무한 질주를 하도록 스스로를 옭아매는 긍정성의 과잉이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우리는 모두 암암리에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항상 뭔가를 하지 않으면 세상에 뒤처지고 낙오될 것 같은 심리적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는 게 현대인들이다.
역설적이게도 활동과잉은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형태의 행위로서 어떤 자유로운 행동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다. 그것은 긍정적 힘의 일방적 절대화가 낳은 결과이다. (P.54)
현대사회에서 자기 긍정, 활동적 삶, 세계를 향한 재빠른 주의는 모두가 높은 평가를 받는 개념들이다. 그래야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자신의 성과를 극대화하고 소위 성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자발적 강제, 활동 과잉이 후기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특성이라고 간주한다. 외부적 규율은 효율성이 일정 단계에 도달하면 무용지물이 된다. 효율성을 한층 극대화하려면 주체의 자발성에 기대야 한다. 스스로의 자발적 의사로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자유의지는 실은 강제하도록 규정지어진 성과사회의 산물이므로 사실상 진정한 자유가 아닌 셈인 것이다.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 그것은 자기 착취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P.103)
언뜻 볼 때 ‘피로사회’는 현대사회의 병리적 증상을 상징하는, 다소간 부정적 뉘앙스의 표제로 생각하였다. 결론을 보니 완전히 오해한 셈이다. 현대의 성과사회가 부정적이고, 피로사회는 미래에 지향해야 할 긍정적 의미로 저자는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긍정성과 부정성은 이 책에서 어감과 실제 의미가 배치된 채 계속 사용되고 있다. 우리는 흔히 긍정성은 바람직하고, 부정성은 바람직하지 않은 걸로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저자의 주장처럼 현대사회의 병리현상의 기저에 과도한 긍정성이 개입되어 있음을 우리는 미처 알지 못한다. 현대사회의 사고구조는 개인의 선택에 따른 정신적, 육체적 노력을 착취보다는 발전의 개념으로 수용한다.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P.29)
2부에 실린 <우울사회>의 주장도 원저와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저자는 나르시시즘과 우울증의 현상과 본질을 분석하여 성과사회의 주권자는 호모 리베르를 자처하지만 사실은 호모 사케르라고 분석한다. 성과사회의 호모 사케르가 살아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죽지도 않는 존재라는 게 더욱 암울하다.
저자가 인용, 분석 및 비판하는 아렌트, 에랭베르, 아감벤, 벤야민, 한트케 등의 논의는 내게 머나먼 존재이다. 그나마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가 –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 친근하게 여겨진다. 바틀비처럼 탈진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주체적 삶을 회복해야 하는데, 사색적 능력을 통해서 가능하다. 저자는 ‘깊은 심심함’이라는 용어를 통해 과잉 주의에 대비되는 깊은 주의의 의의와 중요성을 강조한다. 깊은 심심함 가운데 사색적 삶을 통해 무조건적 긍정성의 과잉 자극의 흐름을 차단하고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부정성의 요소, 즉 아니라고 말하는 행위, 머뭇거림, 분노, 부정적 감정 등이 역설적으로 이를 가능케 하는 수단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사색적 삶은 오히려 몰려오는, 또는 마구 밀고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며, 시선을 외부의 자극에 내맡기기보다 주체적으로 조종한다. 아니라고 말하는 주체적 행위를 통해 사색적 삶은 어떤 활동과잉보다도 더 활동적으로 된다. (P.48)
오랜만에 철학 서적, 깊이 음미하고 헤아리는 진지한 유형의 독서. 버겁지만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