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베토벤을 선물합니다
임현정 지음 / 페이스메이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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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에 관한 비교적 가벼운 책을 찾던 중 이 책을 읽게 되었다. 큰 부담 없이 읽어나갈 수 있으며 다소나마 지적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는 책으로서. 저자는 피아니스트다. 수년 전 화제를 일으켰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의 연주자다. 그런 저자가 연주자로서 베토벤에 대해 어떤 얘기를 풀어놓을지 궁금해서다. 저자의 글 쓴 의도 또한 내 기대를 부풀리기에 충분하였다.

 

나는 그의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자, 그러니까 피아니스트로서 베토벤을 논하고 싶었다. 더 나아가 그가 어떻게 영감을 주었는지, 삶 전반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는지 이야기하고 싶었다. 음악학자의 시선에서 베토벤을 사유하는 책은 많았지만 연주자의 입장에서 그를 조명한 책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P.4-5, 프롤로그)

 

이 책에서 가장 지적, 음악적으로 흥미로운 대목은 그의 피아노 소나타 작품들을 사랑, 인생, 자연과 같은 테마로 분류하여 몇몇 작품을 딱딱하지 않게 풀어 설명한 부분에 있다. 저자는 소나타 14, 24, 27번을 사랑에, 소나타 16~18번을 영웅의 부활 암시로, 소나타 15, 21번을 자연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한다.

 

필자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사이클이야말로 한 천재가 스스로의 삶의 모든 양상을 표현하고 거의 회화적으로 묘사한 내밀한 일기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피아노 소나타를 통해 때로는 숭고하게, 때로는 이상화되어, 그리고 자주 가슴에 사무치도록 현실적으로 삶의 모든 양상을 표현했다. (P.57)

 

물론 피아노 소나타 전체를 대상으로 삼은 게 아니므로 한계는 있지만, 확실한 점은 베토벤의 음악을 절대 고전으로 신격화하고, 엄숙하고 딱딱하여 일반인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존재처럼 떠받드는데 저자가 반대하는 모습이다. 저자는 이들 작품을 작곡가가 자신의 삶을 음악에 투영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기존의 감성과 형식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기에 베토벤은 새로운 길을 모색한 것이다.

 

피아니스트 임현정이 연주하는 베토벤 소나타 연주를 듣는다. 낯설면서 신선하다. 다소 급하게 느껴지는 건 그녀가 이 책에서도 말했던 템포 설정이 적용되어서이리라. 익숙하게 들어왔던 기존 대가들의 해석과는 방향이 다르다. 솔직히 나의 취향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개성적임은 인정하며, 과감한 시도는 좋게 생각한다. 예술을 위해 진지하게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게 연주자의 자세라면, 그 노력을 호오와 상관없이 열린 마음으로 대우하는 건 감상자의 몫이리라. 저자도 청자에게 이런 부분을 희망한다.

 

어떤 예술인을 평가할 때는 마음에 든다, 들지 않는다.’가 아니라 그가 최선을 다했는지, 정말 할 수 있는 만큼 탐구하고 파고 들어갔는지가 중요하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음악을 만들었다면 취향을 떠나서 진심으로 존중하고 인정할 수 있다. (P.107)

 

직전에 읽은 전기의 영향 탓인지 예술 영역이 아닌 베토벤의 인성 영역을 예찬하고 높이 평가하는 대목에서는 공감도가 떨어진다. 그가 개인적 난관을 극복하고 위대한 예술적 성취를 이룬 사실과 예술가로서의 평범하지 않은 말과 행동도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인다. 다만 예술가가 아닌 인간으로서 그가 타인에게 보여준 잘못 - 특히 조카의 양육권을 둘러싼 은 변호의 여지가 없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이 바로 베토벤에 대해서 오로지 긍정적 면으로 시종일관하였다는 점이다. 글쓴이가 베토벤에게서 받은 커다란 영향, 그리고 애초의 저작 의도가 달라서라는 점을 알면서도 한번 언급해 본다.

 

어두운 환경을 디딤돌 삼아 운명을 극복한 베토벤을 보면서, 나 또한 스스로 더 강해지고 성숙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P.87)

 

베토벤의 당당함은 나에게 인생의 방향을 가리켜주는 나침반이 되었다. 내가 베토벤을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조건없는 양심덕분이다. (P.205)

 

나는 베토벤의 끊임없는 투쟁을 보며 과연 행복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있는 그대로, 갖고 있는 그대로, 생긴 그대로 서로 사랑하고 존중한다면 행복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P.207)

 

베토벤의 삶과 음악 세계의 전부를 이 책에서 알게 되기를 기대했다면, 결과적으로 실망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지식 전달 위주의 목적으로 쓴 책이 아니다. 클래식 음악의 초심자를 대상으로 특히 베토벤이라는 인물의 삶을 음악과 연결하여 소개한다. 아울러 저자가 힘들었던 개인사를 극복하는 데 있어 베토벤이 미친 영향, 베토벤의 삶에서 저자가 찾아낸 장점 및 깨달음, 베토벤 음악의 성격과 올바른 해석 방법 및 연주자의 올바른 태도 등등을 군데군데 피력한다. 어찌 보면 베토벤이라는 인물을 매개로 한 저자의 수상록에 가까우며, 끝 대목은 거의 인생론과 유사하다. 베토벤을 통해 행복의 본질을 깨우쳤으니.

 

제아무리 구구절절하고 정묘하게 서술해 봤자 음악의 참된 아름다움은 직접 듣는 것만 못하다. 악곡의 주요 설명 대목마다 해당 음악을 직접 들어볼 수 있도록 연결되는 QR코드를 마련해 둔 점은 좋은 아이디어다. 베토벤의 음악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독자라면 매우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베토벤의 곡이 아닌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도 저자의 연주로 접할 수 있게 하였음을 언급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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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 - 로마편 3 델피시리즈 3
테렌스 지음, 최영주 옮김 / 동인(이성모)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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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읽은 <쌍둥이 메내크무스 형제 : 메내크미>와 같은 델피 시리즈의 하나다. 일반적인 번역본이 대체로 작품 본문과 작품해설, 작가 소개로 구성된 것과는 달리 작품해설을 작품 배경, 작품의 주제와 플롯, 작품 내용과 에피소드, 주요 등장인물 분석, 작품이해를 위한 질문 및 모범답안과 같이 세부적으로 나누어 수록하고 있다. 이 시리즈의 목적이 고전 희곡을 위한 안내서이자 학습서를 지향하고 있어서다.

 

테렌스는 그리스 원전을 보다 자유롭게 번안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희극관에 맞지 않을 경우 주제마저도 바꾸었다. 그는 그리스극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리스 원전에 필적할 만한 순수한 라틴 스타일을 창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 (P.13)

 

테렌티우스[영문명: 테렌스]는 플라우투스와 함께 로마 희극을 대표하는 작가다. 그의 희극은 순전한 창작이 아니라 그리스 신희극 작가인 메난드로스의 작품을 번안하는 방식인데 자신만의 독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자유롭게 번안하였다고 한다. 해설에 따르면 그의 작품 성향은 지적이며 우아하고, 도덕적인 어조에 주제 의식이 명확”(P.122)하지만, 이 작품은 오히려 플라우투스와 같은 소극 색채가 강한 게 특징이라고 한다.

 

희극은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자신의 작품을 비난하는 경쟁자에게 항의 및 경고하는 내용이며, 자신이 선대 작가의 글을 사용했지만 경쟁자처럼 글솜씨를 형편없지는 않다고 자부한다.

 

각설하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그 말입니다. 이 말을 잘 생각해보시고, 신인 작가가 옛 것을 갖다 쓰더라도 용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 이제 조용히 관극을 할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내시>의 의미를 한번 배워보시지요. (P.22, 프롤로그)

 

작품은 파이드리아와 카이리아 형제의 연애 사건을 소재로 한다. 파이드리아는 매춘부 여기서는 기생이라고 용어를 순화한다 타이스를 사랑하는데, 군인 쓰라소와 연적 관계이다. 파이드리아는 타이스에게 노예와 내시를 선물로 주고, 쓰라소 역시 타이스에게 팸필리아를 노예로 준다. 카이리아는 팸필리아의 미모에 우연히 매혹되어 자신이 내시인 척 변장하여 타이스의 집에 들어간 후 빈틈을 노려 팸필리아를 범한다. 여기까지만 보더라도 셰익스피어의 초기 희극 또는 플라우투스의 희극과도 분위기와 내용 전개가 다소간 차이를 보임을 알 수 있다.

 

이 극의 관전 포인트는 우선 타이스를 둘러싼 파이드리아와 쓰라소의 대치 구도이다. 타이스를 독점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쓰라소는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팸필리아를 다시 빼앗으려 드는 인물이다. 우직하지만 멍청하고, 군인이라고 하지만 의외로 비겁하다. 파이드리아는 순수하지만 소심한 성격인데 그의 진면모는 희극의 마지막 대목에서 드러난다.

 

(카이리아) (독백) 여기 아무도 없나? 없네! 누구 날 따라 오는 사람은 없어요? 그림자도 없네. 아휴 재미있어 죽겠다. 그래 죽을 수는 없지, 저승 간 사이 누가 요 재미를 망치면 어떻게 해. (P.66, 3막 제5)

 

카이리아는 형과 달리 적극적이며 실행력이 있다. 그의 과단성은 팸필리아를 범하는 나쁜 방향에서 먼저 발휘되는데 이때 떠벌리는 위의 대사를 통해 그의 경박한 면모를 알 수 있다. 다만 나중에 팸필리아와 약혼함으로써 단순한 욕정의 충족만이 아닌 사랑으로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팸필리아의 마음의 상처와 의사가 전혀 고려되지 않는 까닭은 그녀의 신분이 노예 나중에 아테네 시민임이 확인되지만 라는 시대적 배경이 작용해서다. 현대적 시각에서는 정당화하기 어려운 행위이자 해법이라고 하겠다.

 

<내시>의 희극성은 쓰라소와 그나소의 콤비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나소는 아첨꾼으로 쓰라소의 식객 노릇을 하고 있는데, 본인의 이해득실에 따라 잽싸게 쓰라소에서 파이드리아로 대상을 갈아타는 기민함을 보여준다.

 

파르미노와 피시아스는 시종 성실하고 주인에게 충직하다. 두 사람은 제법 재치도 있고 나름 정의감도 지니고 있다. 파르미노는 쓰라소와 그나소에 비판적이고, 피시아스는 카이리아를 용서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원인 제공을 한 파르미노를 골탕먹인다. 두 사람에 대한 주인의 태도가 천양지차인 점이 뜻밖이다. 파이드리아는 파르미노를 신뢰하고 존중하는 반면 타이스는 피시아스를 함부로 대한다.

 

(타이스) 왜 그렇게 꾸물거려, 건방진 여편네! (피시아스는 집으로 들어간다.) (P.86, 4막 제6)

(타이스) 나쁜 년, 왜 내게 얼버무리지? (P.95, 5막 제1)

(타이스) 못된 년 같으니, 넌 늑대에게 양을 지키라고 한 거야. (P.96, 5막 제1)

(타이스) 저리가, 미친 년! (P.99, 5막 제2)

(타이스) 입 닥쳐. (P.100, 5막 제2)

 

이 작품에서 가장 난해한 인물이 타이스다. 그녀는 매춘부답게 쓰라소와 파이드리아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데 능숙하다. 마음으로는 파이드리아를 사랑하지만 쓰라소의 넉넉한 재산도 놓칠 수 없기에. 충실한 피시아스를 항상 욕하며 무시하는 대목을 보면 직업에 걸맞은 그녀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팸필리아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라든가 쓰라소의 무력 시위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한 태도는 반전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은 다소 충격적이다. 쓰라소는 타이스를 단념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그녀 곁에 남아있을 수 있기를 바란다. 파이드리아는 이에 동의하는데, 낭비벽 있는 파이드리아와 타이스의 생활 자금을 쓰라소에게서 뜯어내자는 그나소의 꼬드김이 유효했다. 그러면서 그나소는 파이드리아와 한 편이 된다. 이쯤 되면 타이스를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이 파이드리아인지 쓰라소인지 헷갈릴 정도다. 개인적으로 쓰라소의 순박한 일편단심에 더 끌린다.

 

이 책이 원전 번역이 아니라 영문판 번역임은 척박한 학계 사정을 고려하면 불가피함을 인정할 수 있다. 그렇게라도 해서 좋은 고전이 출판될 수 있다는 게 어디겠는가. 하지만 편집과 교정의 미비는 참을 수 없다. 무엇보다 파이드리아와 카이리아 간 혼동이 난무하는 오류(P.124, P.132)를 버젓이 방치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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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서의 베토벤 - 퓰리처상 수상 작가가 바라본 베토벤의 삶과 음악
에드먼드 모리스 지음, 이석호 옮김 / 프시케의숲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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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은 바흐와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 작곡가다. 오래전부터 그의 주요 작품들을 다양한 연주로 반복하여 감상하지만, 그때마다 새록새록 듣는 재미를 안겨준다. 확실히 음악가로서의 그의 역량은 대단하여 괜히 최고의 음악가로 평가받는 게 아니다.

 

로맹 롤랑의 전기로 그의 삶을 대강 훑어보았지만 미진한 느낌이 드는 건 20세기 초에 쓴 글이다 보니 현대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어서다. 메이너드 솔로몬 또는 얀 카이에르스의 두툼한 본격적 평전은 쉽사리 도전하기 부담스러워 적당한 책을 찾은 게 모리스의 전기다. 저자는 전문적인 전기 작가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바 있다고 하니 작가로서의 기본 역량은 인정받은 셈이다. 책 뒤표지의 보통의 독자를 위한 이상적인 베토벤 평전이라는 광고 문구는 이 책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저자는 베토벤이 위대한 예술가인 건 맞지만 위대한 인간은 아님을 여러 자료를 인용하여 보여준다. 번역자도 이 점을 강조하고 싶었는지 원제에 없는 인간으로서의라는 문구를 표제에 추가하였다. 베토벤의 인간으로서의 면모와 음악 해석은 기존에 그의 비서였던 쉰들러가 남긴 글과 자료에 많이 의지하였다. 쉰들러가 사실은 베토벤의 삶을 조작했음이 연구 결과로 밝혀진 게 1970년대였다고 하니, 우리가 아는 베토벤의 모습은 실상과는 거리가 멀었던 셈이다. 음악의 성인으로서 또는 영웅으로서 베토벤을 신성시하는 견해는 오히려 베토벤의 참모습을 이해하는 데 적합하지 않으므로 저자는 베토벤을 성인화하는데 반대하며 쉰들러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성인전 작가라는 단어까지 사용한 마당에 이쯤 해서 안톤 펠릭스 쉰들러를 소개해야 하지 싶다. 쉰들러는 다른 물고기에 붙어 그 피를 빨아먹는 칠성장어처럼 어떻게든 위대한 사람들 가까이에 붙으려 하는 특색 없는 젊은이 가운데 하나였다. (P.304)

 

이 책은 베토벤의 치부까지도 가감 없이 독자에게 드러낸다. 인간 베토벤은 약점이 많은 인물이다. 육체적으로 잘 알려진 난청 외에 근시였고, 각종 질병에 일생토록 시달렸다. 그의 연인들과는 플라토닉한 사랑만 거듭한 채 결실을 이루지 못하고 정욕을 달래기 위해 사창가를 들락거렸다. 후반부에서 상세한 경과를 밝히고 있는 조카의 양육권을 둘러싼 제수씨와의 법정 소송은 치졸함과 추잡함의 극단을 보여준다. 그의 행동과 글을 보면 과연 그가 정신적으로 온전할까 의구심이 들 정도다. <장엄미사> 악보출판을 두고 벌이는 출판업자 간 다중 계약의 음모 또한 제아무리 생활고에 항상 시달린 베토벤이라고 하더라도 금전적으로 타락하였음을 변호하기 힘들 정도다.

 

1813년부터 1820년 사이에 베토벤이 겪었던 개인사에서처럼 병치레와 돈 거래, 가족 간의 알력 다툼, 개인적 기벽 등이 온갖 하나로 범벅이 되는 걸 보고 나면, 당시 그가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과연 정신을 꽉 붙들고 있었을지도 우리로서는 확신할 수 없다. (P.243)

 

그럼에도 우리는 베토벤을 비난하기보다는 그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음악가에 치명적인 난치병을 앓는 것도, 사랑하는 여인과의 행복한 삶 대신 외로움과 쓸쓸함 속에서 삶을 살아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므로. 오죽했으면 유서를 남겼고, 연인에게 보내고 싶은 편지는 부치지 못한 채 서랍 속에 묻었어야 했겠는가. 저자는 불멸의 연인의 정체에 관해 앞선 연구의 내용을 반영하여 소개하고 있으며, 못다 보낸 편지의 내용도 인용한다. 애절한 그의 심경이 참으로 안타깝고 저절로 동정심을 품게 한다.

 

누구도 베토벤의 육체적·정신적 괴로움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이는 없었다. 남들 몰래 써서 감추어두었다가 그가 죽고 나서야 발견된 두 점의 유명한 문서가 이를 뚜렷이 보여준다. 1802년의 하일리겐슈타트 유서1812년의 불멸의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그것이다. (P.15-16)

 

이 책은 한 유명한 예술가의 사생활을 파헤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 저자는 인간적 약점을 지닌 한 천재 예술가가 시련을 극복하고 시대 정신을 선도하며 예술사에 불멸의 명성을 남기게 되기까지의 여정을 차근차근 짚어나간다. 베토벤의 예술을 향한 저자의 찬미와 탄복은 한결같고 진정이다. 그는 개인적 위기와 사회적 혼란에도 굴하지 않고 그것을 음악으로 통합하고 승화하여 더욱 높은 예술의 지향점을 아로새겼다.

 

대조와 갈등은 베토벤 예술의 본질적 특성이다. 베토벤은 평생에 걸쳐 막대한 역경에 맞서 싸웠고 엄청난 용기를 발휘하여 끝내 이를 이겨냈다. (P.15)

 

베토벤 음악의 거대성이 가지는 역설은 그것을 시간이나 데시벨로 측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에 있다. [......] 한 마디로 베토벤은 현미경과 망원경을 넘나드는 공간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며, 소리의 세포를 빚어내는 솜씨와 소리의 대성당을 지어 올리는 솜씨가 나란히 확고했던 것이다. (P.20)

 

저자는 몇몇 작품에 대해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두고 소개 및 분석한다. <요제프 2세 장송 칸타타>는 처음 알게 된 작품인데 무려 6면에 걸쳐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어 이채롭다. 오페라 <피델리오>는 잇단 참패와 더불어 이를 극복한 마지막 성공까지를 기술하면서 음악의 순수성을 높이 평가한다. <장엄미사><교향곡 제9>의 성공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작곡과 관련한 보다 세부적인 사실을 알 수 있어 작품 이해에 도움을 준다.

 

우리는 왜 베토벤의 음악을 좋아하는가?

 

베토벤의 음악은 모차르트풍의 음악과는 달랐고 언제나 다정하고 즐겁지만도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거기에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는 사실이다. (P.102)

 

그의 음악 역시 듣는 이를 뜻대로 주무르려는 측면이 강하다. 언제나 서로 대조되는 주제나 화음 덩어리를 강제로 하나로 묶고, 억지로 떼어놓고, 다시 쪼개어 더욱 혼란하게 만들고, 그러고는 다시는 서로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으로 하나로 혼융시키는 음악인 것이다. (P.309)

 

베토벤의 음악이 하이든과 모차르트와 다른 점은 개개의 악곡마다 독자적인 개성이 분명하며 작품에 자신의 의지가 강력히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듣는 이는 누구라도 그의 음악을 들으면 잘 모르는 곡이더라도 아! 이건 베토벤 음악 같은데 하는 느낌을 갖는 게 이런 연유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넘치는 영감에서 샘솟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멜로디가 시종일관 음악 전체에 흘러넘친다.

 

베토벤의 음악은 모차르트만큼 항상 영감이 넘치고 풍요롭지는 않지만, 음악적 영감에 이성적 논리구조를 자연스럽게 결합하고 확장 및 발전시켜 청자로 하여금 음악을 듣는 와중에 사고와 의지를 끊임없이 인식하게끔 하는데 이게 강한 설득력을 발휘한다. 더욱이 중기의 음악이 구상화라면 후기의 그것은 추상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그의 음악은 한자리에 계속 머무르는 게 아니라 계속 변화 발전한다.

 

난청에다 지독한 근시였던 베토벤은 자신의 닫힌 감각 기관들에 대해 불평하곤 했지만, 그의 음악의 음향은 그가 침묵의 저편에서의 삶에 적응한 이후로 오히려 더욱 풍성해진 것이 사실이다. (P.295)

 

베토벤 개인의 삶에 있어 청력 상실은 불행이지만, 그의 음악 세계와 후세 인류에게 그것은 아마 축복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그가 보통의 음악가였다면 거친 역경에 맞서기보다 좌절하고 쓰러졌겠지만, 그는 맞서 싸우고 극복해낼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베토벤은 외면의 소리를 잃는 대신 내면의 소리를 얻었다. 구체성이 약해지는 가운데 추상성과 초월성이 뚜렷이 나타나게 되었다. 음에만 집중하였던 것이 음은 물론, 음과 음 사이에 대한 중요성이 인식되었다. 이런 위업을 성취한 음악가는 베토벤 이전에는 없었고, 이후에도 아직 없다. 그가 악성(樂聖)’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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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소동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종환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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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Much ado about nothing’이다. 대부분 이 책과 같이 헛소동이라는 표제로 번역하는데, 이상섭 번역본과 같이 괜히 소란 떨었네로 풀어서 번역하는 사례도 있다. 장소도 스페인 아라곤 왕국의 지배를 받는 시칠리아로 설정하고 있어서 셰익스피어 초기 작품의 일반적인 배경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등장인물 중 영주와 동생인 돈 페드로와 돈 존의 존재가 이를 보여 준다. 다만 주요 인물인 클라우디오와 베데딕은 이탈리아 본토 출신 귀족이며, 히어로와 베아트리체는 시칠리아 총독의 딸과 조카딸이므로 대체로 이탈리아는 조건에는 부합한다.

 

헛소동의 주인공은 클라우디오와 히어로다. 히어로를 향한 클라우디오의 일관되지 못한 사랑이 헛소동을 불러온다. 그런데 가만히 극의 내용을 살펴보면 실제 주인공은 베네딕과 베아트리체임을 알 수 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우선 두 사람의 대사가 월등히 분량 면에서 많다는 점, 클라우디오와 히어로의 극 중 행동이 매우 단편적이며 소극적인 반면 베네딕과 베아트리체는 극을 온통 휩쓸고 다닐 정도로 재기발랄하며 행동과 대사의 진폭이 크다는 점이다.

 

클라우디오는 히어로를 사랑함에도 구혼을 고백할 용기가 없어서 돈 페드로의 도움을 빌린다. 여기서 일차적인 오해의 빌미가 생긴다. 돈 존의 속임수에 빠진 클라우디오는 히어로의 정절을 섣불리 의심하며 성급하게 히어로에게 모욕을 가한다. 결정적인 오해의 순간이다.

 

(클라우디오) 어르신, 따님을 돌려드리겠습니다. / 이런 썩은 오렌지를 친구에게 주시다니요? / 그녀의 정절은 겉치레일 뿐입니다. (P.124-125, 4막 제1)

 

야경꾼들이 돈 존의 하수인을 체포하지 않았다면 그는 영원히 히어로를 원망한 채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클라우디오는 단순하고 순진한 성격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본인의 잘못으로 연인이 죽게 되었음을 자책하며 그녀를 향한 길고도 애절한 추도를 바치는 그의 모습에서 성실성이 잘 드러난다. 한편 히어로는 여주인공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극 중 비중이 약하다. 순결하고 지조 높은 점은 인정하겠지만. 두 사람의 재결합을 위한 수사의 역할이 <로미오와 줄리엣>과 비슷한 점이 흥미롭다. 물론 이 작품은 희극이므로 수사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지만.

 

(베아트리체) 누구냐고? 전하의 어릿광대랍니다. / 멍청한 바보 녀석이죠. 황당한 중상 비방이나 / 늘어놓는 놈이랍니다. 건달이면 모를까, / 아무도 그 광대 말에 즐거워하지 않아요. (P.44-45, 2막 제1)

 

(베네딕) 절대로 그런 여자와 결혼하지 않을 겁니다. / 그녀는 욕설을 퍼부어 헤라클레스조차도 / 고기 굽는 꼬챙이나 돌리게 만들 여자랍니다. / 헤라클레스의 곤봉을 쪼개서 / 불쏘시개로 쓸 그런 고약한 여자랍니다. (P.52, 2막 제1)

 

이 작품의 희극적 재미는 단연 베네딕과 베아트리체다. 상대방에게 한 치의 양보도 무릅쓰지 않기 위해 재치가 철철 넘치는 언어 공격을 주고받는 그들의 대사는 독자 입장에서도 지나치게 과격한 게 아닐까 우려가 될 정도다. 각자가 비혼 선언을 한 그들이지만 너무나 잘 어울려 보이기에 돈 페드로를 주도로 두 사람의 결혼 프로젝트가 가동된다. 제아무리 똑똑한 그들이라도 사랑의 사안에는 경험 부족이 드러난다. 특히 베아트리체의 돌연한 변심은 너무나 급작스러워 독자로서는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인상을 받는다.

 

(베아트리체) 내가 그렇게까지 거만하고 / 조롱을 일삼는 여자라고 비난받고 있나? / 그럼 이제 멸시하는 마음과는 이별이다! / 처녀의 자존심도 이별이다! 뒤에서 / 그런 비난을 듣는 한, 멋지게 살 수 없으니까. / 베네딕, 절 사랑해 주세요. 그럼 / 저도 당신을 사랑하겠어요. 사랑하는 / 당신 손으로 제 거친 마음을 길들여 주세요. / 당신이 사랑하면 저도 순순히 따르겠어요. (P.89-90, 3막 제1)

 

두 사람의 티격태격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부부의 연을 맺기로 결정하고 난 이후에도 여전하다. 상대방이 먼저 사랑의 마음을 품게 되었음을 인정하라고 말이다. 끝까지 독자에게 재미를 안겨주는 커플이다.

 

(베네딕) , 당신을 내 아내로 삼겠소. / 하지만 이 빛에 두고 맹세하지만, / 당신이 불쌍해서 아내로 삼는 거요.

(베아트리체) 거절하진 않겠어요. 하지만 / 오늘처럼 좋은 날에 걸고 맹세하지만 / 설득에 마지못해 당신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 버린 목숨 하나 구하는 셈치고... / 상사병으로 거의 죽을 지경이라고 들었으니까. (P.188, 5막 제4)

 

베네딕과 베아트리체가 고상한 귀족으로서 희극에 이바지한다면, 도그베리와 베르게스 및 야경꾼들은 평민 계층으로서 대놓고 희극적 대사를 뿜어낸다. 그들이 등장하는 장면(3막 제3, 3막 제5, 4막 제2, 5막 제1)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단어 오용(정반대의 단어 사용)과 자기 비하는 서민적이며 털털한 해학적 재미를 전해준다. 참으로 이 희극에서 관객이 체면 차리지 않고 마음껏 낄낄거릴 수 있는 유일한 대목이다.

 

(도그베리) 넌 경관이란 내 직분을 의심하느냐? / 너보다 나이 많은 나를 의심하지 않느냐? / 서기 양반이 여기 있으면 / 날 바보라고 기록하게 했을 텐데... / 여보게, 기록되진 않았지만 / 내가 바보라는 걸 기억해. / 내가 바보라는 걸 잊지 마, 악당 놈아, / 넌 아주 경건한 놈이다. / 그 증거가 차고 넘쳐. 난 아주 현명한 사람이다. (P.147, 4막 제2)

 

마지막으로 돈 존과 수하인 보라키오를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희극에만 존재하는 어리숙한 악당이다. 말로는 어떤 짓도 저지를 전형적 악한을 흉내 내지만 돈 존은 상황이 전개되자 잽싸게 도망치려다 의심을 유발하고 붙잡히며, 보라키오는 쓸데없이 자신의 악행을 늘어놓다가 역시 야경꾼에게 체포된다. 후기의 비극에 등장하는 용의주도하고 철저한 악인과 비교해본다면 이들의 미숙함과 한계를 쉽사리 파악할 수 있다.

 

종합하자면 이 작품은 클라우디오와 히어로의 오해와 착각이 빚어내는 소란보다는 베네딕과 베아트리체의 귀족적 재치, 도그베리와 야경꾼들의 서민적 해학이 빚어내는 희극적 묘미가 두드러지는 희극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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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아이들 - 히로세 다카시 평화소설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9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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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순전히 문학적 관점으로 헤아린다면 매우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할 수 있다. 작가의 목적은 반핵평화라는 자신의 주장을 많은 이들에게 전파하기 위한 것이며, 소설이라는 형식을 사용한 것은 많은 이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동일한 주장을 딱딱한 논설문이나 선전문 형태로 작성한다면 대중의 관심을 끌기는 어려울 테니.

 

나는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통해 핵발전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떤 비극 속으로 빠뜨려 가는가를 절실히 알리고 싶었다. (P.175)

 

원자력발전의 필요성과 관련해서는 찬반양론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고, 이는 정치적 이해득실과도 연계되어 있기에 문외한은 깊숙한 내막을 자세히 알기 어렵다. 이 책은 원자력발전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쓰인 글이므로 작가는 당연히 부정적 내용으로 기술한다. 저자 후기에서 작가는 이렇게 주장한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란 것도 알고 보면 원자·수소폭탄 산업을 경제적으로 성립시키려는 상당히 무리한 방법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P.173)

 

1986년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사고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의 발전소 간부인 안드레이 가족을 중심으로 방사선 피폭의 무섭고도 잔인한 효과를 그리고 있다. 지금이야 여러 통로로 피폭의 위험성이 대중에게 많이 알려졌지만 체르노빌 당시 또는 이 책이 간행된 1990년에만 해도 일반사람은 원자력의 안전성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던 시절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작품이 독자에게 주는 충격은 매우 강렬한 반응을 일으켰으리라. 타냐 또한 사고가 발생한 이후에야 비로소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발전소라는 말의 허구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것은 얼마나 무서운 직업이었단 말인가. 자신은 왜 좀 더 일찍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을까. 이렇게 끝날 줄 미리 알았어야 했다는 자괴감만이 지금 그녀의 마음속에 가득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반과 이네사를 지금과 같은 불행한 상황으로 이끈 것이 자신들이라는 생각까지 이르자, 그녀는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P.167)

 

소설은 두 개의 갈래로 뒤엉켜 전개된다. 하나는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뒤따른 피폭 효과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확산되고 심화되는 과정을 그린다. 위험성을 인지하기도 전에 방사능은 피폭자의 전신을 휘감는다. 신체는 방사능 수준에 따라 급격히 또는 서서히 돌이킬 수 없이 잠식당한다. 이네사는 무릎 관절의 약화로, 이반은 시력 상실로. 조그맣게 드러나는 붉은 반점은 내출혈의 악화라는 형태로 수많은 피폭자의 목숨을 앗아간다. 환경 변화에 예민한 체르노빌의 아이들이 속수무책으로 스러지고 마는 것이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은 소련 당국의 폐쇄적 통제 체제다. 사고의 축소와 은폐에 급급한 당국은 피난민들의 이동을 통제하고 강제 격리한다. 재빨리 피폭 지역을 벗어나야 함에도 비효율적 통제 체제에 순응하기를 요구하고 불응자는 처형도 꺼리지 않는다. 그들은 수만 명의 인명 피해가 나더라도 자신들의 실수와 약점이 노출되는 것을 막는 게 더욱 중요하다. 안드레이를 포함한 결사대, 그리고 수많은 소방대원이 무의미하게 발전소 진화를 위해 희생된 것은 무능력하고 낙후된 체제의 신경질적 발작이다.

 

그들의 체제는 사람들의 통제에 최적화된 체제이지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데는 소질이 없음을 이 소설은 다시금 보여준다. 통제의 용이를 위해 피폭자들은 부모와 가족이 생이별을 당하며, 타냐는 아이들의 소재와 현황도 파악하지 못한 채 병원들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아무런 보람없이. 아이들은 이미 지상에 없으므로. 타냐가 눈물을 흘리며 과거의 즐거웠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은 그것이 되찾을 수 없는 평화와 행복임을 깨달아서다.

 

눈물 속에 떠오르는 것은 단지 늠름했던 남편의 웃는 모습뿐이었다. 멀리 남편의 생생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갑자기 이미 십 년이나 지난 먼 옛날의 행복했던 시절이 타냐의 눈앞에 펼쳐졌다. 미래의 운명에 대한 아무런 걱정도 없이 개울가에서 온 가족이 행복하게 보내던 화창했던 날의 추억... (P.101)

 

물론 체르노빌의 비극은 소련 체제의 특수성에 기인하여 악화되었다. 개방화된 시민사회라면 피폭자의 관리와 치료는 더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졌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근본적 사안인 원자력발전의 안전성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인간의 기술에는 완벽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가능성을 최소로 낮출 것을 기대할 뿐.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소에서 체르노빌에서와 같은 치명적인 사고가 발생하였을 경우 더는 대한민국의 존속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방사능 낙진의 위험성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인간의 상상력이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된 생물이라면, 마땅히 신이 창조한 세계의 현상에 대해서 자연적으로 인식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고는 신이 창조한 세계의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가장 신비한 신의 창조물인 원자를 파괴하는, 즉 신이 창조한 세계를 파괴하는 현상이기 때문이었다. (P.149)

 

방사선 피폭의 위험성을 웅변하는 저자의 설명은 거의 종교적 울림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 대안은 무엇인가? 다카시는 원자력발전 없이도 전력 수요의 충족이 가능하다고 하며, 무진장한 천연가스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다만 문외한인 내 생각에도 천연가스 매장이 지역적으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지 않으므로 소위 석유 무기화처럼, 천연가스 무기화도 불가능하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지역적으로 균등하게 확보할 수 있는 환경적으로도 깨끗한 대체 발전 수단이 개발되지 않는 한 원자력발전에 대한 논란은 쉽사리 해소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은 불확실한 장래의 위험성보다는 당장 눈앞의 확실한 가능성에 무게를 두기 마련이다. 그때까지는 원자력 발전소가 안전하기를, 또한 친환경 대체 발전이 조속히 연구 개발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것이 나 같은 범인(凡人)들의 소박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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