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청소일 하는데요? - 조금 다르게 살아보니, 생각보다 행복합니다
김예지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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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펼치기 전까지는 이 책이 만화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둘째 아이 학교의 권장도서라고만 알고 있었을 뿐. 표제를 보고는 아, 청년층의 고민과 현실비판이 담긴 책이라고만 생각하였다.

 

누구나 꿈과 직업이 일치하는 미래를 이상으로 삼기 마련이지만, 그런 행복한 삶을 갖는 행운을 누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는 자의 반 타의 반 꿈을 가슴속 깊이 집어넣고 생활인으로 살아간다. 숨겨둔 꿈을 꺼내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는 삶도, 어떻게든 중간에 꿈을 실현해 보려고 노력하는 삶도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백수는 차츰 집안에 은거하게 된다. 친구도 친척도 대하기에는 위축감이 들고 그들의 관심과 뒷담화가 부담스럽다. 마냥 부모에게 의존하는 캥거루족이 되기에 십상이다. 어른이란 자신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다. 작가가 여타 동년배와 차별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작가는 20대의 나이에 어머니의 권유를 좇아 청소일에 뛰어든다. 작가라고 결정에 이르기까지 고민이 없었겠는가. 사회적 시선은 차치하고라도 자신의 꿈과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까지.

 

그래서 전 이김보단 견딤을 택했어요. / 이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선택을. / 하지만 이기질 못한다면 / 자신의 판단에 믿음을 가지고 견뎌보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P.124)

 

작가는 솔직하다. 생활을 위해 청소 일을 시작하지만 4년여가 지난 지금에도 자존감과 외부의 시선에 초연하지 못하다. 어쩌면 작가가 중간에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청소 일의 가치와 실용성은 결국 자기 위안의 목적인지도 모른다. 청소 일을 쓱쓱 하다 불현듯 흑흑흑 흐느끼는 장면(P.157)은 가장 압축적이고 상징적이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말은 진부하면서도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작가 또한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의 많은 부분이 자신의 직업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다. 어쨌든 작가는 현실에 주저앉지 않았다. 청소 일을 하는 틈틈이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양립하려 노력하였다. 청소 일이 자아실현의 욕구마저 충족시키지는 못하므로.

 

청소 일이 하기 싫었을 때 / 4년을 헛되이 보낸 건 아닌가 고민이 들 때 / 남들과 다른 게 무서울 때 /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 내가 필요해서 시작했고 좋은 것들도 결국 얻었다. / 확실한 건 4년이 헛된 것이 아님을 알았다. (P.65)

 

작가가 부끄러움과 타인의 시선을 염두에 두고 청소 일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과연 이렇게 일러스트레이터로서 만화책을 출간할 수 있었을까? 가장 서글프고 무서운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선택이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부모와 세상을 원망하고 비난하는 삶의 모습이. 경제적 자립이 없으면 인격으로서 자존감 수립은 불가능하다.

 

청소일을 하는 자신을 숨기지 않고 떳떳이 드러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리하여 자신의 체험을 비로소 작품 제재로 그려낼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을 때 작가는 비로소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떨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뭐 하는 사람일까? / 결론적으로 청소 일도 하고 / 그림도 그리는, / 두 가지 일을 하는 사람이죠. (P.32)

 

작가가 자신의 체험을 구구절절하게 글로 썼다면 이토록 호응을 얻지 못하였으리라. 많은 청년층이 공유하는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를 만화라는 부담스럽지 않고 상대적으로 친숙한 형식을 통해 풀어놓는다. 여기에 청소일을 하는 20대 여성 작가라는 독특함도 대중의 호기심을 끌었으리라.

 

작가가 언제까지 청소일을 할지는 알 수 없다. 자신의 말마따나 이 책 한 권의 출간으로 인생이 확 바뀌지는 않겠지만,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계기는 되었다.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성공을 거두고 안정적 기반을 다질 수 있을 때까진 여전히 작가는 청소 일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 그 결과가 어찌 되더라도 작가의 노력에 응원의 박수를 더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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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에는 자로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종환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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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견상 루시오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이 희곡은 의외로 셰익스피어의 보기 드문 문제극으로 분류된다. 이 극의 어떠한 요소가 문제극으로 자리 잡는데 기여했는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표제의 번역명이 분분하다. 이 책을 포함한 여러 곳에서는 자에는 자로로 번역하지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말을 말로 되는 되로’, ‘법에는 법으로’, ‘푼수대로 받는 보응등으로 번역하는 사례도 제법 있다. 속뜻은 동일하다. 주는 대로 받는 법이니 타인에게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다.

 

(공작) 백성들에게 방종의 여지를 줬던 것은 / 내 잘못이었소. 방종을 가만두고 보면서 / 그걸 이유로 그들을 때려잡고 / 처벌하는 것은 폭정일 것이오. / 그동안 악행을 묵과하고 / 처벌하지 않은 것은 그것을 조장한 것이나 / 다름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P.29, 13)

 

이 작품에서 경고의 대상은 앤젤로 경이다. 공작 대리로서 느슨해진 시민 윤리를 강화하기 위한 시범사례로 연인에게 혼전임신을 시킨 클로디오에게 사형판결을 내린다. 오랜 기간 사문화된 법령을 부활하여 적용한 그의 행위에 대해 지나치다고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제법 있지만, 앤젤로의 공명정대하고 이성과 절제의 평소 인품 자체는 모두가 인정한다. 이사벨라의 탄원에도 그는 단호하다. 이대로 사형이 집행되었다면 작은 파문으로 종결되었을 테고, 수사로 변장하여 지켜보던 공작도 그의 처분에 만족감을 품었으리라.

 

(앤젤로) 내가 그런 죄를 범했다면 당신도 / 그 죄를 경감해 줄 수 없을 것이오. / 하지만 말해 주시오. 그에게 벌을 내린 내가 / 같은 죄를 범할 경우에는, / 나에게 이 재판의 예를 적용하여 / 사형선고를 내리겠다고... (P.43, 21)

 

(공작) 그분의 삶이 / 그 엄한 조처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좋겠지요. / 하지만 그러하지 못하면 앤젤로 경은 / 자기 자신에게 선고를 내린 셈이랍니다. (P.132, 32)

 

클로디오의 죄목이 성도덕 위반이라면, 앤젤로가 더더욱 자신의 성도덕 준수에 엄격해야 함이 마땅하다고 상식은 말한다. 타인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려면 자신도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앤젤로는 이사벨라에게 어두운 제안을 한다. 오빠를 구하려면 자신에게 몸을 바치라는. 나중에 스스로도 자책하는 이 하나의 언사로 그는 통치자로서 자신의 도덕적, 법적 정당성을 상실한다. 이후 그의 행동은 부정한 욕망 달성을 위한 후속 조치일 따름이다. 권력자가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흔히 자행하는 권력형 부정의 모습이다.

 

앤젤로의 몰락을 초래한 이사벨라와 마리아나의 베드 트릭과 클로디오의 목 바꿔치기는 수사로 변장한 공작이 기획한 작전이다. 공작은 앤젤로에게 권력을 맡겨서 자신의 부재 동안 그가 나라의 기강을 확립해 주길 기대하였다. 자비롭고 현명한 공작이 자기 손에 피를 묻힐 수는 없을 테니. 한편 공작은 앤젤로를 백 퍼센트 신뢰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한시적이지만 권력을 손아귀에 움켜쥔 앤젤로가 권력의 맛에 취해 변하지 않을까 유심히 지켜본다. 일찍이 앤젤로가 사생활에서 문제가 있었음을 알면서도.

 

(공작) 하지만 나는 보고 싶소. / 권력이 어떻게 사람을 변하게 하고 /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자들이 / 어떻게 변하는지를... (P.30, 13)

 

이 작품의 전반적 사건 전개와 진행은 결국 공작의 의도에 따른 것이다. 그는 교묘한 책략으로 앤젤로의 위선과 부정을 폭로하고, 이사벨라와 클로디오를 구하려고 한다. 앤젤로를 완전히 버릴 생각은 없다, 어쨌거나 그는 유능한 수하이므로 목숨을 살려주고 마리아나와 짝지어준다면 세인에게 칭송받고 당사자의 절대적 충성을 끌어낼 수 있으므로. 이를 위해 공작은 극 중에서 종횡무진 활약한다. 수사로 변장하여 이사벨라에게 조언하며, 공개 재판에서는 수사와 공작의 이중 배역을 연기한다.

 

공작은 이 연극의 주연배우이자 총연출가이므로 독자에게 신과 같은공작의 능력과 자비로움, 그리고 앤젤로의 부정한 권력과 대비되는 정의로운 권력의 효과를 극대화하여 보여 준다. 이 작품이 문제극인 까닭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군주를 미화하고 있음에도 독자는 금방 알아차린다. 군주와 권력의 자의성과 부정 취약성을.

 

(이사벨라) , 선한 공작님께서 앤젤로 경에게 속았어! / 그분이 돌아오셔서 그분께 말씀드릴 수 있다면, / 앤젤로의 행동을 폭로하겠어요. /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해도 말입니다. (P.109, 31)

 

(공작) 자신도 저지를 수 있는 죄를 두고 / 남을 잔인하게 정죄하는 자에게 치욕이 있으리라! / 너무나도 수치스러운 앤젤로, / 세상의 죄를 제거해야 할 자리에 있으면서 / 스스로 죄의 씨앗을 가꾸다니! / , 겉으로는 천사처럼 보이지만 / 그 뱃속에 뭘 숨기고 있는지 알 수가 없군! (P.133, 32)

 

공작의 이중성은 루시오와 이사벨라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난다. 루시오를 향한 공작의 반감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는 수사로 변한 공작 앞에서 공작에 대한 근거 없는 험담과 거짓 사실을 유포하며, 나중에는 공작 앞에서 수사에 대한 비방을 늘어놓는다. 앤젤로는 물론 옥중의 사형수마저 풀어주는 마당에 공작은 루시오를 용서하겠다고 하면서도 일구이언으로 그에게 창녀와의 결혼을 끝까지 명령한다.

 

(공작) 나에 대한 비방은 용서하겠다. / 네놈에 대한 다른 처벌로 면제해 주겠다.

[......]

(공작) 군주를 비방한 대가로 당연한 벌이다. (P.217, 51)

 

앤젤로의 타락은 그가 이사벨라에게 흑심을 품어서다.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이용하여 수세에 몰린 처녀의 정조를 유린하고자 하는. 이사벨라는 수녀가 되기 위한 절차를 밟다가 오빠를 구하기 위해 부랴부랴 수녀원에서 나왔다. 사랑과 결혼의 세속적 욕망보다는 신앙에 대한 간구의 정도가 크다고 봐야 한다. 오빠의 사건이 일단락되었으니 그녀는 다시 수녀원에 들어가는 게 자연스러운 순서다.

 

(공작) 아름다운 그대 때문에 이러는 것이니 / 손을 이리 주고 내 사람이 되겠다고 말하시오. / 그럼 클로디오는 이제 내 처남이오. (P.215-216, 51)

 

(공작) 이사벨라, 그대가 / 귀를 기울여 기꺼이 들어준다면, / 그대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일 하나를 제안하겠소. / 나의 것은 당신 것, 당신 것은 / 내 것이 될 것이오. (P.218, 51)

 

공작은 그녀에게 뜻밖의 제안을 한다. 자신과의 결혼을 요청하는. 절대권력을 틀어쥐고 우월적 지위에 있는 신과 같은 인물인 공작, 조금 전 자신의 수치와 오빠의 사형을 직전에서 구해준 은인인 공작. 공작의 요청은 이사벨라의 의사와 관계없이 거부할 수 없는 지상과제의 명령으로 간주될 뿐이다. 그렇다면 앤젤로와 공작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는가? 작가는 이사벨라의 대답을 굳이 기술하지 않았다. 결론이 너무나 자명하므로.

 

마지막으로 <작품 해설>에서 공작 평가 부분을 인용한다.

 

공작은 사실 이 작품에서 마음대로 자신을 은폐하고 가장하며, 또한 적절한 시기가 오면 본모습을 드러내 전지전능한 힘을 과시하는 신과 같은인물이다. 오직 그만이 진실을 독점하고 상황을 독점한다. 공작은 때가 되면 모든 사건의 종결자로서 사면을 통해 권력의 자비로운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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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 셰익스피어 전집 34
윌리엄 셰익스피어, 신정옥 / 전예원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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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희곡 중 소위 문제극으로 분류되는 작품이다. 전설적인 트로이 전쟁으로 작품 배경으로 삼고 있는 이 희곡은 희극에도 비극에도 속하지 않는다. 사랑에 배반당하는 트로일러스, 아킬레스에게 살해당하는 헥토르를 보면 비극적 색채가 강하지만, 트로일러스는 침몰하지 않으며 헥토르의 죽음은 그를 더욱 빛나게 한다. 이 작품은 참다운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개를 보이고 있는 동시에 뚜렷한 주인공이 부재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표제 그대로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를 주인공으로 보기에는 작품 내 분량과 비중 면에서 취약하다. 헥토르, 율리시즈, 아킬레스, 아가멤논 등 전쟁의 주역이 차지하는 역할이 크다. 앙상블 희곡에 가깝다.

 

(율리시즈) 대 아킬레스 장군입니다, 장군이야말로 / 우리 군의 원동력이요, 귀감이라고 받들어 모시고 있으나, / 그 허황된 명성에 지나치게 도취하여 / 자만심으로, 군막 안에서 우리의 작전을 / 비웃고 있습니다. (P.46, 13)

 

이 작품의 중요한 관전 포인트는 전쟁과 사랑이다. 독자가 흔히 기대하는 트로이 전쟁의 신화화된 전사와 영웅의 이미지는 여기에 없다. 아킬레스는 오만함의 극치이며, 아이잭스, 즉 아이아스는 단순하고 멍청하다. 헥토르는 전쟁에 탐탁해하지 않지만 조국의 명예를 위해 싸움에 나선다. 작가는 아킬레스의 영웅성을 약화시키려고 유명한 서사시의 내용을 수정한다. 아킬레스는 헥토르와 정당한 대결을 벌여 쓰러뜨리지 않는다. 무장을 벗고 쉬고 있는 헥토르를 무참히 살해한다.

 

(헥토르) 나는 무장을 풀고 있다, 그런데도 네 멋대로 하느냐, 그리스 놈아.

(아킬레스) 내리쳐라, 이 사람들아, 내리쳐. 내가 찾던 그놈이다. / (헥토르를 살해한다) / , 다음엔 일리움 성, 네가 쓰러질 차례다. 트로이여, 망해라. / 여기 너의 심장이, 너의 근육이, 너의 뼈가 누워 있다. (P.213-214, 59)

 

광대 서사이테스는 그의 특권을 활용하여 등장인물을 마음껏 희롱하고 조롱한다. 광대의 재담 속엔 진실이 숨어 있는 게 셰익스피어 작품의 특징이다. 그의 주된 목소리를 귀기울여 보면 전쟁에 대한 강력한 환멸과 비난, 냉소를 알아차릴 수 있다. 여자 하나 때문에 발발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전쟁. 박진감 넘치는 전투 장면도, 위용을 자랑하는 영웅도 부재하고, 음모와 비열함, 어리석음이 주도하는 전쟁은 누구도 찬성하지 않으리라. 이렇듯이 반전 메시지로 해석하는 게 충분히 타당한 작품이다.

 

(서사이테스) (방백) 온통 속임수, 사기, 협잡투성이다. 모든 문제가 화냥녀과 오쟁이꾼에서 일어난 일이다-다툰다고 파당을 짓고, 피를 흘리며 죽기 살기를 마다하지 않고 아주 알맞은 명분이군. , 그런 명분에 농가진(膿痂疹)이나 걸려라, 전쟁과 색욕으로 모두가 작살나는 거다! (P.82, 23)

 

연인의 만남과 밀당, 그리고 약속에 이르는 과정은 흥미로우면서도 유쾌하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은 현실과 상충하여 금방 깨어지기 일쑤다. 크레시다의 마음은 얼마나 절실하고 자신만만했던가.

 

(크레시다) 하늘이 두 조각나도, 가지 않겠어요. 숙부님. / 전 육친의 정 같은 건 없어요. / 제겐 친척이니, 애정이니, 혈족이니, 영혼도, 사랑하는 / 트로일러스님 만큼 소중한 건 없어요. , 신성한 신들이시여. / 제가 트로일러스님을 떠난다면, 크레시다의 이름을 모든 부정한 것의 / 끝장으로 삼아주십시오! (P.143, 42)

 

연인의 변심은 누구도 원치 않지만 언제라도 생길 수 있는 법이다. 트로일러스는 크레시다의 배신에 치를 떨지만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으리라. 트로이에서 그리스로 신원이 이관된 마당에 적국의 왕자를 계속 사랑한다는 건 더 이상 현명한 행동은 아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듯이 그녀의 변심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다만 불가피성을 인정하더라도 예상보다 빨랐던 점이 그녀에 대한 한가닥 아쉬움이라고 할까. 트로일러스가 준 정표를 새 애인을 유혹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한다는 점도 부정적 평가를 더한다.

 

(율리시즈) 아니, 못써요, 저런 여잔! / 눈으로도 말을 하고, 뺨도 입술도 그렇고, / 아니, 발마저도 얘기를 하고 있으니, 음탕한 기질이 / 그 여자의 사지 몸통에 곳곳에 배여 있어요. / 저렇게 어중간한 여잔 입심 좋고, / 상대방보다 먼저 자기가 꼬리를 치고 / 호색적인 자에게는 음탕한 생각에 / 가슴속을 열어 보이고 달려드니 / 기회만 있으면 몸을 내놓고 / 기꺼이 노리갯감이 되는 음탕한 계집들이요. (P.158-159, 45)

 

이러한 점 때문에 크레시다는 극중에서 매춘부 또는 화냥년 취급을 받는다. 율리시즈는 대놓고 크레시다를 폄하하는데, 이전까지 그녀에 대한 묘사나 대화에서 일체의 언질도 없는 마당에 갑작스럽게 박한 평가는 편견일지 예지일지 궁금하다. 그나저나 두 연인을 연결시켜 준 판다러스는 무슨 죄인가? 양자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여 추진하였던 정사가 졸지에 어그러지고, 끝내는 뚜쟁이 취급마저 당한 그의 회한은 처절한 울림을 남겨준다. 이래서 중매는 함부로 서는 게 아니라는 교훈이랄까?

 

(판다러스) 유곽의 문간을 지키는 뚜쟁이 형제자매들, 지금부터 두 달만 기다려라, 내 유언장을 써줄 것이니.

지금 만들어줄 수도 있지만, 이런 골칫거리가 있으니, 윈체스터의 매독에 걸린 창녀들이 왁왁 대면 말이지. 그때까지는 나도 땀을 빼며 매독치료나 하면서 쉬어야겠다.

그때가 되면 여러분에게 나의 병이나 유산으로 주리다. (P.219, 511)

 

이 작품을 전후하여 셰익스피어는 4대 비극을 포함한 걸작을 연달아 집필한다. 이 시기에 그가 집중적으로 묻고 파헤치고자 하는 것은 인간성의 본원적 모습이다. 인간의 내면은 획일적이지 않으며, 고귀함과 저열함, 순수함과 더러움, 사랑과 증오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결과에 무관하게 의도의 선함만을 중시할 수 없으며, 의도는 외면하고 결과가 인정해서도 안 된다. 여기서 작가는 아킬레스를 낮추고 헥토르를 띄우며, 크레시다를 본래부터 화냥끼가 있는 여자로 격하시키는 듯하지만 그것이 결코 그들의 참모습이 아님을 독자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복잡다단한 존재이며, 인간사는 정해진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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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의 대학교 - 기업의 노예가 된 한국 대학의 자화상
오찬호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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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부제 : 기업의 노예가 된 한국 대학의 자화상

 

2015년에 출간된 책이다. 이상한 일이다. 저자가 다루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안은 현재 시점에도 전혀 진부하지 않은데, 7년이 경과한 지금은 거부감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취업사관학교? 대학의 최고 기능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인력 양성에 있다.

대학이 영어를 숭배할 때? 글로벌 캠퍼스로 발전을 위해 영어의 중요성은 여전하다.

대학은 완전한 기업이다?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하지 않은 대학은 도태가 마땅하다.

죽은 시민을 만들어내는 대학? 경쟁에서 뒤처진 자들의 불평불만에 불과하다.

 

4차 산업혁명이니 메타버스 혁명이니 하며 숨 가쁘게 변화하는 사회 경제 환경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저자가 제기한 의문에 딱하다는 반응을 보일 수 있겠다. 지금이 그런 한가한 논의나 하고 있을 때인가? 까딱 잘못하면 우리나라가 경쟁국에 뒤처져 이류국가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 있는데. 정부도, 기업도, 대학생들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이리라. 지금은 적자생존의 시대이므로 상대방을 밟고 올라서는 건 당연하며 무한경쟁만이 자신의 생존을 담보할 수 있다. 분초 단위로 쪼개가며 자기계발과 경쟁력 강화에 매진하고 있는 게 아닌가.

 

대학과 기업’, 총장과 ‘CEO’는 어색한 조합일 수 있지만, 지금은 명예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렇게 세상은 변했다. (P.144)

 

저자가 말하는 대학과 우리가 생각하는 대학은 명칭은 동일하지만 전혀 다른 성격의 존재다. 저자의 대학은 동서양의 고전적 대학(大學) 개념의 본질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나, 현대의 대학은 기능성을 강조한다. 전문대와 기술대만 실용성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모든 대학이 다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국내만 해도 200개에 가까운 4년제 대학이 존재하는데 이들이 모두 저자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이들 모두에게 저자의 주장을 수용하라고 요구하는 게 마땅한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여기가 대학인가?”(P.114)라는 탄식의 대상이 되고, 잃어버린 사색에 안타까워할 만한 대학을 한정해 놓고 볼 때 저자의 주장은 비로소 힘을 얻게 된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생각하는 참다운 모습의 대학이 일부나마 구현되려면 대학의 숫자가 설립 자유화 이전으로 줄어들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학의 인플레는 대학생의 인플레를 유발하였고, 전문대나 실업계 고교 졸업자들의 사회적 인식을 한층 하향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대다수의 직업군이 대학졸업자의 학력 수준을 진정으로 요구하는가 반문하고 싶다.

 

선택과 집중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모두가 대학 졸업증을 취득하려고, 나아가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려고 목매달며 교육체계 자체가 왜곡되어 버린 마당에 대학 자체에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늘어난 대학의 옥석을 가린다며 시도된 이러저러한 대학평가와 인증은 평가지상주의를 초래하여 평가 유불리 여부가 모든 대학행정의 판단기준이 되어 버렸다. 국내 대학 중 평가에 초연할 수 있는 대학은 기껏해야 서울대 정도라고 할 뿐이니 여타 대학은 평가결과에 목숨을 걸고 경쟁한다.

 

상대평가가 늘어날수록, 남을 제압해야 하는 토론에 길들여질수록, 정치를 위험요소로 인식할수록, 다양성을 경험할 구조를 파괴할수록 대학은 특정한 가치로 무장된시민만을 배출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들을 죽은 시민이라 부른다. (P.195)

 

등록금 인상 억제 정책 시행 이후 대부분의 대학가는 피폐해졌다. 명분은 그럴듯하지만 등록금 외에 고정적인 수익원을 확보한다는 건 국내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정책이다. 재원의 한계에 부딪힌 대학이 기업으로부터 기부금 확보에 눈 돌리고, 내부 지출의 효율성을 강화하려는 모습은 당연한 반응이다. ‘대학의 기업화는 정부와 사회의 요구 때문에 권장되고 가속화되었다. 대학평가 순위를 향상하고 우수교수 유치를 위한 재원 마련에 목마른 대학이 기업에 손 벌리지 않으면 학교발전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마저 포기하겠다는 의미인데, 다른 대안이 없는 상태라면 비난할 수 없는 참혹한 현실이다.

 

나는 대학을 고발 대상이 아니라, 우리를 이상한 방향으로 채찍질하는 저질스럽고 졸속적인 신자유주의시대를 비판적으로 봐야 할 증거로 제시할 뿐이다. (P.21)

 

저자는 이 책에서 오로지 앞을 향해 진격하는 대학의 적나라한 양태를 까발리고 비판하고 있지만, 그의 눈은 대학의 진격을 유도하고 강요하는 사회체제와 이념 자체에 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학령인구 급감에 따른 대학 숫자의 과다와 대학 부실화가 근년 들어 화두가 되고 있다. 부실대학 정리 방향은 수도권 소재 대학과 지방소재 대학, 상위권대학과 중하위권 대학 등 이해관계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모두가 생존에 급급한 마당에 삶의 질을 고민하자는 말은 배부른 소리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종의 다양성을 줄이는 대학의 진격은 필연적으로 구성원들의 생각을 공동화한다. 식단의 다채로움이 소멸되듯 대학과 그 구성원의 다채로움도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P.236)

 

집단지성은 다양성이 보장되고 여론이 성숙했을 때 가능하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교육은 집단사고가 아니라 집단지성을 지향해야 한다. (P.240)

 

그럼에도 이 책에 담긴 저자의 고발과 주장은 음미할 가치가 있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만장일치이므로 직진하는 대신, 과연 그것이 올바른 길인지 혹시라도 모두가 놓친 요인은 없는지 재검토하는 노력은 유의미하므로.

 

이 책의 목적은 대안이랍시고 경쟁보다 협력이라는 고도로 낭만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협력이 배제된 경쟁이 얼마나 끔찍한 모습인지를 공유하는 것이다. (P.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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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네시아에서 온 아이 라임 청소년 문학 40
코슈카 지음, 톰 오구마 그림, 곽노경 옮김 / 라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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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잠길 운명에 처해 있는 인도양과 남태평양의 섬나라에 대한 뉴스를 접한 적이 있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러한 상황에 놓이게 된 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천재지변을 다룬 소설이라면 으레 재해 자체에 초점을 맞춰 흥미진진하게 전개하지만, 여기서 작가는 철저히 사람들, 특히 한 가족에 집중하고 있다. 특별히 극적이고 자극적인 전개와 표현도 자제하며 작가는 나니네 가족이 맞닥뜨린 상황과 점차 벗어나는 과정을 매우 차분하고 나직한 어조로 기술하고 있다. 분량과 비교해서 무게감이 한층 느껴지는 까닭이다.

 

수몰된 섬 사람들은 섬을 떠나고 낯선 땅에서 힘겹게 정착하는 현실에 충실하다. 친숙한 공간을 빼앗긴 상실감, 소중한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떠나야 하는 슬픔, 말도 통하지 않는 생소한 곳에서 수중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맨땅에서 일어서야만 하는 막막함. 작가는 이것에 대한 관심을 나니네 가족을 통해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섬의 수몰을 가져온 자연재해의 본질을 직시하게 된 것은 에필로그-‘우리는 기후 난민’-에 이르러서다. 인식의 확장이라고나 할까.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은 그동안 묶여 있던 밧줄을 푸는 작업이란다. 나니야, 이 섬을 버려야 해. 종려나무, 야자수, 레몬나무, 고운 모래... 이 모든 것들은 등 뒤에 남겨 둬야 한단다. (P.15)

 

해수면 상승과 폭우로 섬이 가라앉을 위기가 목전에 도래한 시점, 망설이던 나니네 가족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남들처럼 자신들이 살던 섬, 즉 고향을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는 길을. 다리가 불편하여 거동을 못 하는 나니의 외조부와 외조모는 떠날 수 없다. 떠나지 못함은 섬에 남아있음을 가리키며, 이는 조만간 수몰될 섬과 운명을 같이함을 의미한다. 오로지 나니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부모를 죽음 앞에 놓아두고 떠나야 하는 나니 엄마의 심정은 당사자 외에는 알 수 없다. 허망하게 할아버지를 영원히 떠나보내게 된 세메오의 심정은 누군들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나니야, 세메오야! 이런 도움이 필요하면 억지로라도 얻어 내야 해. 아픔 속에 웅크리고 있지만 말고 슬픔에서 벗어나렴. 뭔가 멈춰버렸다는 생각이 들면 그곳에 시선을 두고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삶은 결코 끝나지 않아. 너희가 서로 이어지게 놔두면 삶은 네 주위 어디든 있어. (P.102)

 

이 작품에서는 나니 외조부가 나니에게 전해준 두 종류의 물건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먼저 세 가지의 물건은 추억과 소통의 상징물이자 교감의 매개체이다. 나니의 외조부가 쓴 편지는 내용 및 의미 차원에서 더욱 깊은 호소력을 지닌다.

 

편지 속에서 외조부는 헤어짐의 불가피성과, 추억의 불멸성, 삶의 지속성 그리고 형제애적 인류애의 가치를 담담히 외손녀를 위해 풀어놓는다. 특히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려 애쓰고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은 작가가 지향하는 바가 더 깊고 넓음을 알게 해 준다.

 

네가 육지에서 어떤 선한 분을 안아준다면 네가 포옹한 사람이 바로 네 외할아버지인 거야. 육지의 어떤 할머니한테 따스하게 미소를 짓는다면 네 미소를 받은 사람이 바로 네 외할머니인 거지. 세상은 이렇게 서로서로 통하는 거란다. (P.107-108)

 

할아버지의 편지를 함께 읽으면서 나니와 세메오는 서로 공감하며 슬픔을 누그러뜨리고 한 가족으로 새로 탄생하게 된다. 새로운 형제를 배려하는 뜻에서 편지의 자구를 수정하는 나니의 따뜻함은 아이답지 않은 마음씨라고 하겠다.

 

슬픔과 아픔을 극복한 두 아이는 나중에 자신의 조부모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회신한다. 작가는 이렇게 글을 통하여 생사와 시공간을 초월한 세대 간 소통을 시도하는 동시에 파도 전설 이야기를 둘러싼 사람들의 제각각 견해를 통해 사람과 바다, 그리고 섬에 대한 대상의 확장을 보여준다. 그것이 자연스레 에필로그로 이어져 독자는 무심코 간과했던 사안의 본질에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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