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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의 대학교 - 기업의 노예가 된 한국 대학의 자화상
오찬호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부제 : 기업의 노예가 된 한국 대학의 자화상
2015년에 출간된 책이다. 이상한 일이다. 저자가 다루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안은 현재 시점에도 전혀 진부하지 않은데, 7년이 경과한 지금은 거부감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취업사관학교? 대학의 최고 기능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인력 양성에 있다.
대학이 영어를 숭배할 때? 글로벌 캠퍼스로 발전을 위해 영어의 중요성은 여전하다.
대학은 완전한 기업이다?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하지 않은 대학은 도태가 마땅하다.
‘죽은 시민’을 만들어내는 대학? 경쟁에서 뒤처진 자들의 불평불만에 불과하다.
제4차 산업혁명이니 메타버스 혁명이니 하며 숨 가쁘게 변화하는 사회 경제 환경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저자가 제기한 의문에 딱하다는 반응을 보일 수 있겠다. 지금이 그런 한가한 논의나 하고 있을 때인가? 까딱 잘못하면 우리나라가 경쟁국에 뒤처져 이류국가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 있는데. 정부도, 기업도, 대학생들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이리라. 지금은 적자생존의 시대이므로 상대방을 밟고 올라서는 건 당연하며 무한경쟁만이 자신의 생존을 담보할 수 있다. 분초 단위로 쪼개가며 자기계발과 경쟁력 강화에 매진하고 있는 게 아닌가.
대학과 ‘기업’, 총장과 ‘CEO’는 어색한 조합일 수 있지만, 지금은 명예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렇게 세상은 변했다. (P.144)
저자가 말하는 ‘대학’과 우리가 생각하는 ‘대학’은 명칭은 동일하지만 전혀 다른 성격의 존재다. 저자의 대학은 동서양의 고전적 대학(大學) 개념의 본질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나, 현대의 대학은 기능성을 강조한다. 전문대와 기술대만 실용성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모든 대학이 다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국내만 해도 200개에 가까운 4년제 대학이 존재하는데 이들이 모두 저자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이들 모두에게 저자의 주장을 수용하라고 요구하는 게 마땅한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여기가 ‘대학’인가?”(P.114)라는 탄식의 대상이 되고, 잃어버린 ‘사색’에 안타까워할 만한 대학을 한정해 놓고 볼 때 저자의 주장은 비로소 힘을 얻게 된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생각하는 참다운 모습의 대학이 일부나마 구현되려면 대학의 숫자가 설립 자유화 이전으로 줄어들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학의 인플레는 대학생의 인플레를 유발하였고, 전문대나 실업계 고교 졸업자들의 사회적 인식을 한층 하향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대다수의 직업군이 대학졸업자의 학력 수준을 진정으로 요구하는가 반문하고 싶다.
선택과 집중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모두가 대학 졸업증을 취득하려고, 나아가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려고 목매달며 교육체계 자체가 왜곡되어 버린 마당에 대학 자체에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늘어난 대학의 옥석을 가린다며 시도된 이러저러한 대학평가와 인증은 평가지상주의를 초래하여 평가 유불리 여부가 모든 대학행정의 판단기준이 되어 버렸다. 국내 대학 중 평가에 초연할 수 있는 대학은 기껏해야 서울대 정도라고 할 뿐이니 여타 대학은 평가결과에 목숨을 걸고 경쟁한다.
상대평가가 늘어날수록, 남을 제압해야 하는 토론에 길들여질수록, 정치를 위험요소로 인식할수록, 다양성을 경험할 구조를 파괴할수록 대학은 ‘특정한 가치로 무장된’ 시민만을 배출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들을 ‘죽은 시민’이라 부른다. (P.195)
등록금 인상 억제 정책 시행 이후 대부분의 대학가는 피폐해졌다. 명분은 그럴듯하지만 등록금 외에 고정적인 수익원을 확보한다는 건 국내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정책이다. 재원의 한계에 부딪힌 대학이 기업으로부터 기부금 확보에 눈 돌리고, 내부 지출의 효율성을 강화하려는 모습은 당연한 반응이다. ‘대학의 기업화’는 정부와 사회의 요구 때문에 권장되고 가속화되었다. 대학평가 순위를 향상하고 우수교수 유치를 위한 재원 마련에 목마른 대학이 기업에 손 벌리지 않으면 학교발전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마저 포기하겠다는 의미인데, 다른 대안이 없는 상태라면 비난할 수 없는 참혹한 현실이다.
나는 대학을 ‘고발 대상’이 아니라, 우리를 이상한 방향으로 채찍질하는 “저질스럽고 졸속적인 신자유주의” 시대를 비판적으로 봐야 할 증거로 제시할 뿐이다. (P.21)
저자는 이 책에서 오로지 앞을 향해 진격하는 대학의 적나라한 양태를 까발리고 비판하고 있지만, 그의 눈은 대학의 진격을 유도하고 강요하는 사회체제와 이념 자체에 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학령인구 급감에 따른 대학 숫자의 과다와 대학 부실화가 근년 들어 화두가 되고 있다. 부실대학 정리 방향은 수도권 소재 대학과 지방소재 대학, 상위권대학과 중하위권 대학 등 이해관계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모두가 ‘생존’에 급급한 마당에 ‘삶의 질’을 고민하자는 말은 배부른 소리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종의 다양성’을 줄이는 대학의 진격은 필연적으로 구성원들의 생각을 ‘공동화’한다. 식단의 다채로움이 소멸되듯 대학과 그 구성원의 다채로움도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P.236)
집단지성은 다양성이 보장되고 여론이 성숙했을 때 가능하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교육은 ‘집단사고’가 아니라 ‘집단지성’을 지향해야 한다. (P.240)
그럼에도 이 책에 담긴 저자의 고발과 주장은 음미할 가치가 있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만장일치이므로 직진하는 대신, 과연 그것이 올바른 길인지 혹시라도 모두가 놓친 요인은 없는지 재검토하는 노력은 유의미하므로.
이 책의 목적은 대안이랍시고 ‘경쟁보다 협력’이라는 고도로 낭만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협력이 배제된 경쟁’이 얼마나 끔찍한 모습인지를 공유하는 것이다. (P.2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