괭이부리말 아이들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양장본
김중미 지음, 송진헌 그림 / 창비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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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TV 프로그램에 소개되어 유명세를 탄 창작동화다. 언젠가 한 번 읽어볼까 생각만 하다가 우연히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표제에 이끌려 처음엔 어느 시골 마을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전원적, 낭만적 작품으로 생각하였다. 착각이 깨지는 데는 첫 쪽 첫 줄의 단 한 문장으로 충분하였다.

 

괭이부리말은 인천에서도 가장 오래된 빈민 지역이다. (P.9)

 

괭이부리말은 인천 만석동 달동네의 별칭이다. 매립되어 육지가 된 고양이 섬(묘도)에서 이름이 나왔다고 한다. 동네 이름을 확인한 순간 예상했던 줄거리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갈 것으로 생각하였다. 한편으로는 우려도 들었다. 모름지기 동화라면 고정관념이 있다. 세계와 삶의 아름다움과 올바름이라는 긍정적 일깨움을 통해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훈을 주어야 한다는. 이것이 이 작품에서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 것인가.

 

확실히 작품의 전반적 기조는 어둡고 우울하고 슬프다. 등장하는 동네 가족들은 대체로 온전하지 못하고 불행하다. 숙자네 가족은 생활고와 아버지의 주취 폭력으로 엄마가 가출한다. 졸지에 어린 숙자가 살림을 꾸려나가는 처지가 되었다. 동준이네는 수년 전 어머니가 가출하였고, 최근에 아버지마저 돈을 벌러 나간다며 집을 떠났다. 동준과 형 동수는 아버지가 남겨둔 얼마 안 되는 돈으로 근근이 버틸 뿐이다. 동수는 패거리들과 어울리고 본드 흡입에 의존하는 등 상황은 악화된다.

 

동네 친구들 중에는 그렇게 어머니가 떠난 아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숙자는 친구들처럼 어머니를 지워 가는 연습을 하기로 마음 먹고 있었다. (P.62)

 

오죽하면 다시 돌아온 어머니의 귀가 사유가 임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숙자는 안심하고 기뻐한다. 어머니가 다시 가출하지 않으리라는 기대감으로. 숙자 자매와 동준의 천진한 일상으로 겨우 한줄기 길을 헤쳐나가던 작가는 돌연 영호를 등장시킨다. 괭이부리말의 주저앉은 사람들 가운데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앞길을 성공적으로 개척한 대표적 인물이 바로 영호와 김명희 선생님이다. 이 두 사람이 시간의 순서는 다를지언정 숙자네와 동준이네의 구세주 역할을 하며, 명환이와 훗날 호용이마저 보듬게 된다.

 

나두 고마워. 그리고 명희야, 꼭 고백하고 싶은 게 있는데, 아이들한테 내가 필요한 게 아니라 나한테 아이들이 필요해.” (P.179)

 

영호는 어쩌면 이 동네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개인적 이익보다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 더 강하고, 피붙이가 아닌 아이들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온정과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우여곡절은 있지만 그를 중심으로 두 가족이 함께 삶을 단단하게 여밀 수 있게 되었음은 순전히 영호의 내재적 힘 덕분이다. 물론 영호도 홀어머니의 죽음 후 천애 고아 처지에서 새로운 가족을 얻게 되었으니 일방적 시혜라고 할 수 없다.

 

어쩌면 단단한 빗장으로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있던 것은 동수가 아니라 명희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P.165)

 

동화의 한계는 김명희 선생님의 역할과 영호와의 관계에서 불가피하게 드러남을 알 수 있다. 괭이부리말 출신이면서 동네와 동네의 불량한 아이들에 호의를 갖고 있지 않은 명희야말로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그의 삶은 지긋지긋한 동네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치열한 분투로 점철되었고 마침내 떠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명희가 괭이부리말 출신으로서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보고 교사로서 비교육적 인식을 갖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괜찮다. 나아가 상처받은 아이들을 보듬고 숙자네와 영호네 식구들과 교류를 맺는 것까지도 인정한다. 그렇더라도 숙자네 집 다락방으로 이사 오는 설정은 개인적으로 과도하다는 생각이다.

 

작중 인물 가운데 숙자와 동준이가 초지일관 가장 긍정적이고 굳센 마음가짐을 지녔다고 평가하고 싶다. 두 아이가 없었다면 두 가족은 일찌감치 파탄에 맞닥뜨렸을 것이며, 영호나 명희는 아예 개입할 기회도 없었을 테니. 실은 동수는 동준이보다 마음이 여리다. 동수는 어려운 현실을 인정하고 버텨나갈 자신이 없어서 방황하였다.

 

작가는 이들의 삶이 녹록지 않을 것을 예고라도 하듯이 개심한 숙자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숙자네 식구를 한층 힘겹게 만든다. 동수의 회개와, 동수와 명환의 진로 설계로 드디어 어둠이 사라지고 밝은 새해를 맞이하려는 기대감도 잠시 성탄절 이브에 버림받은 호용이가 영호네 집에 들어온다. 비록 밑바닥에서 벗어났다고 하지만 그들이 더 낫고 행복한 삶에 이르게 될지 아니면 재차 나락으로 굴러떨어질지 작가는 섣부르게 보여주지 않는다.

 

안개는 쉽게 걷힐 것 같지 않았다. (P.191)

 

동수와 공원 노숙자가 만나는 장면의 마지막 문장이다.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안개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동수와 우리는 좀 더 밝은 앞날을 기대하고 싶다. 그래도 세상이 아직은 살만하다고 하려면 이들이 계속 불행해서는 안 될 것이므로. 마침 민들레 새싹도 움텄고, 눈부신 햇살이 동수가 다니기 시작한 공장을 비추는 가운데 노래를 흥얼거리는 동수가 이 작품의 대미를 장식하게 됨은 의미심장하다.

 

, , , , 봄이 왔어요......”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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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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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세 번째 이 책을 읽는다. 자그마한 판형에 백 쪽을 겨우 넘기는 분량, 게다가 시종일관 흥미롭고 이채로운 내용 전개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실체를 잡기 어려운 작품으로 인상에 남았다.

 

이 소설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누구를 주인공으로 볼 것이냐에 달려 있다. 표제처럼 좀머 씨가 주인공이라면 특이한 행적을 보이고 소멸해 간 사나이를 향한 주의 환기와 독자의 고민을 요하는 문제소설로 볼 수 있고, 화자가 주인공이라면 좀머 씨와의 조우를 통해 인생의 어려운 시절을 견디고 꿋꿋하게 자라는 성장소설로 여길 수 있다. 내용 전개가 화자의 입을 통해 진행된다는 점, 좀머 씨보다는 화자의 삶과 사건이 차지하는 분량이 더 많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개인적으로는 후자에 표를 던지고 싶지만, 작가가 굳이 표제를 달리하였다는 점, 좀머 씨가 던지는 화두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자도 외면하기 어렵다.

 

내 머리 속에는 내가 자동차 창문을 통해 보았던 반쯤 벌린 입과 공포에 질린 커다란 눈동자의 얼굴, 빗물로 범벅이 된 좀머 아저씨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 그런 얼굴은 뭔가 겁에 질린 얼굴이었어. (P.43)

 

화자와 독자 모두가 좀머 씨에 주목하는 대목은 그가 날씨와 관계없이 일 년 내내 줄기차게 걸어 다니는 점이다. 워낙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일 수 있고 걷기가 그의 일생의 최고 취미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기대는 어린 화자의 목격과 진술로 산산이 부서진다. 공포에 쫓기는 불쌍한 사람, 그것이 좀머 씨의 실체다. 작가는 좀머 씨의 신상에 대해 별다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저 좀머 씨가 전쟁(아마도 제2차 세계대전이리라) 직후 이 마을에 정착했다고 한 줄 던져놓을 뿐이다. 여기서 좀머 씨의 행동 배경에 대한 희미한 추측이 가능하다.

 

수년 후 좀머 씨와 좀 더 유의미한 조우를 하는 화자의 시선을 통해 독자는 화자와 더불어 좀머 씨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어린 화자는 자전거, , 피아노 교습, 코딱지가 불러일으킨 사고와 세상을 향한 분노로 자살을 결심한다. 나 또한 청소년 시절에 죽음을 추구하던 경우가 있다. 지금 보면 대수롭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생사를 가를만한 중대한 사안이었다. 이 작품에서의 어린 화자 또한 감정의 격렬함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일생을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사람”(P.94)의 진정한 절망의 모습을 목격한 화자에게 자신의 고뇌와 분노는 우스울 뿐이다.

 

아니 그것은 한숨이 아니었다. 한숨을 쉬면 뭔가 홀가분해지는 듯한 소리가 나지만 그것은 뭔가 고통스러운 신음에 가까웠고, 홀가분해지고 싶은 갈망과 절망이 엉켜서 가슴에서부터 배어 나오는 깊고 참담한 소리였다. (P.92-93)

 

이 소설은 전체적으로 화자와 좀머 씨가 그리는 인생의 그래프가 정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화자는 어린 시절에 기쁨보다 슬픔, 즐거움보다 분노가 더 컸고 일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양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이내 불쑥 정상적인 삶의 성장 과정을 따른다. 화자는 스스로 최고의 시절”(P.98)을 보내고 있다고 자부한다. 반면 좀머 씨는 세월 다 보낸 사람”(P.98)이다. 그의 존재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서히 잊히고 외면당한다. 쇠퇴의 끝은 소멸이다. 호수 한가운데를 향하여 단호하고 고집스럽게 걸어 들어가는 좀머 씨의 마지막 장면은 비극적이기보다는 차라리 영웅적이다. 공포와 불안에 휩싸여 멈추지 못하고 절망에 압도당한 채 일생을 죽음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분투하던 좀머 씨. 그가 마침내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감내할 수 있었던 용기.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그 말뿐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 말뿐이었다. (P.35)

 

작가는 자칫 경직되고 엄숙하기 그지없을 이야기를 동화 속 사건처럼 별것 아닌 듯 담담하게 풀어낸다. 화자에 얽힌 여러 일화-헛된 꿈이 되고 만 카롤리나와, 분노 폭발로 이어진 피아노 교습 등-는 작품 시종일관 밝고 해학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처럼 표면상 보이는 흐름의 영향으로 좀머 씨의 비극도 독자는 비교적 충격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럼에도 좀머 씨의 외침은 가볍지 않다. 그것은 차라리 세상을 향한 구원의 부르짖음이 아니었을까.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공포와 절망에서 자신을 놔두지 말고 꺼내달라는. 죽음을 감내하고 호수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용기를 그가 진작 삶을 향해 보여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렇기에 좀머 씨의 비극은 역설적으로 화자의 성장과 어우러져 삶의 소박함과 소중함을 한층 두드러진 존재로 보이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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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깨와 백합 그리고 독서에 관하여 쏜살 문고
존 러스킨.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유정화.이봉지 옮김 / 민음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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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러스킨과 프루스트가 각각 쓴 글을 담고 있다. 프루스트의 글은 러스킨 글의 번역본에 대한 서문 성격이므로 엄밀히 말하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먼저 러스킨의 글 <참깨와 백합>1864년에 행한 두 차례 대중강연의 원고 모음집이다. 각기 도서관과 학교(아마 여학교?) 설립 기금 모금을 위한 강연으로서 내용은 차이가 있지만, 교육과 계몽이라는 면에서 공통성을 지닌다. 편의상 두 번째 강연에 해당하는 <백합: 여왕들의 화원>을 먼저 살펴본다.

 

오늘날 현대사회라면 남녀평등과 동등한 교육은 너무나 당연하기에 별다른 울림이 없지만, 존 러스킨의 시대만 해도 보편적인 사고는 아니었다. 러스킨은 불평등한 당대 여성관을 비판한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와 스콧 등 위대한 고전 작가들이 구현한 여성상을 통해 남성과 비교해 여성이 열등하지 않다는 점을 드러내며 여성의 고유 가치를 발현하기 위해 동등한 수준의 교육 필요성을 열변한다. 학교 설립의 정당성이 여기에 있다. 여기까지 보면 러스킨은 매우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이상을 품은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그에게도 여전히 시대적 인식의 한계를 찾아볼 수 있음은 다소 아쉽다.

 

남편의 지식은 근본적이며 진보적이어야 하는 반면 아내의 지식은 일상에 유익하도록 일반적이고 우수해야 합니다. [......] 여성은 남성과 동일한 언어나 학문을 배우되 남편과 그의 절친한 친구들이 느끼는 즐거움을 공감할 정도로만 익혀야 합니다. (P.111)

 

근본적으로 러스킨은 여성의 역할을 가정 내로 국한하여 인식한다.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 국가적 역할 수행을 위한 교육이 아니다. 남편의 지적 수준에 어울리고,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가는데 필요한 교육이다. 오늘날 이런 생각을 표명한다면 당장에 남녀 차별주의자 또는 시대에 뒤떨어진 인물로 논박을 당하기에 십상이다.

 

<참깨: 왕들의 보물>은 독서의 가치와 중요성을 다룬 글이다. 독서는 예나 지금이나 권장될뿐더러 여러모로 좋은 평가를 받는 행위다. 우리가 생각하는 독서의 의의는 무엇보다 지식 습득에 있다. 물론 지혜와 깨달음도 중요한 목적이며, 단순한 여흥도 무시할 수 없는 동기임을 인정해야 하리라. 러스킨은 독서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제시한다.

 

저자 나름의 소박한 인간적 방식으로 그의 내면에 있는 진실한 영감을 총동원해서 쓴 그의 기록이며 비문입니다. 책이란 바로 이런 겁니다. (P.28)

 

아무 책이나 읽는다고 해서 독서가 아니라는 것. 이에 따르면 교훈과 지적 자극을 줄 수 있는 책을 읽어야만 독서라고 할 수 있으리라. 상식과 흥미 위주의 책은 해당이 없다.

 

문명국의 의회에서 강세나 음절을 한 번이라도 틀리게 발음하면 그것으로 영영 교양 없는 사람 취급을 받고 마는 거지요. (P.34)

 

여러분에게는 생각할 권리는 없고 단지 사실을 더 많이 배우려고 노력할 권리만 있습니다. (P.48)

 

여기서 우리는 러스킨이 우아함과 고상함의 미덕을 중시함을 알 수 있다. 저자의 귀족적, 신사적 속성에 대한 집착의 일면을 엿볼 수도 있다. 지적 수준이 어느 정도 올라오기 전까지는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라는 취지는 이해하면서도, 비판적 독서의 가치를 부정하는 대목에서는 쉽사리 동의하기 어렵다.

 

시대를 초월하여 현인과 학자와 지적 대화를 교류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독자의 사고를 일깨우고 확장할 수 있다는 게 독서의 크나큰 미덕임은 부인할 수 없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도 충분한 독서를 통해 상류 사회에 속한 사람 못지않게 자신의 가치와 역량을 발전시킬 수 있다. 저자는 이것이 인생에서의 진정한 출세라고 단언한다.

 

인생에서 진정한 출세를 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들뿐입니다. 가슴은 점점 더 부드러워지고 피는 뜨거워지고 머리는 명민해지며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평강의 정신을 얻는 사람들이지요. 이런 생명을 그들 안에 소유한 사람들이야말로, 오직 이들이야말로 이 세상의 진정한 군주이며 왕입니다. (P.74-75)

 

러스킨의 독서론에 대해 프루스트는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러스킨의 견해에 탄복하며 많은 부분 공감하면서도 그는 독서의 가치에 과도한 무게감을 싣는 데 반대한다. 독서는 완결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며.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명작을 읽거나 동서양의 고전을 읽을 때 독서 행위 자체로 끝나서는 안 된다. 정서적 감동을 받거나 지적 자극을 느꼈다면 그것이 무슨 의의를 지니는지 되새김질하고 한 단계 더 나아갈 욕망을 품어야 한다. 그래야 독서가 교양적 삶에 가치를 지니게 된다. 독서는 정답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 책에서 정답을 구하려고 하며 아무런 독자적 사고도 하지 않는다면 세뇌에 불과하다. <논어>에도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어떠한 독창적 활동도 하지 않는 그의 정신은 책 속에서 자신을 더욱 강화해 줄 자양분을 분리해 낼 수 없다. 이렇게 통짜 그대로 들어온 책은 그의 정신 속에 동화되지 못하는 까닭에 삶의 원칙이 되지 못한 채, 이질적 객체이자 죽음의 원리가 되고 만다. (P.169)

 

프루스트가 더욱 중시하는 것은 독서 자체보다 독서 행위의 의미다. 저자는 앞단에서 본인의 어린 시절 독서 행위의 추억을 회상한다. 무슨 책을 읽었는지, 그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당시 그 책을 읽었다는 추억을 간직한 경우가 많은데 저자는 이를 가리킨다.

 

어린 시절의 독서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책 내용 자체보다는 그 책을 읽었던 시간과 장소의 이미지들이라는 주장은 충분히 증명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글에서 나 역시 그러한 독서의 마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P.152)

 

사실 독서에 정답은 없다. 러스킨처럼 고전류만 진정한 책으로 간주하고 독서의 의미를 엄격하게 적용할 수도 있지만, 실용서와 에세이 같은 책을 읽는 것도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지혜뿐만 아니라 교양, 지식 그리고 정서적 감흥 등 모든 것이 독서의 효용가치에 해당한다.

 

프루스트의 지적은 러스킨에 대한 전면적 반박이 아니다. 그는 러스킨과 달리 고전 독서에서 독자적 사고의 중요성을 인식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읽었을 때 오독이 많더라도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본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다음에 재차 도전할 계기로 삼을 수 있으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프루스트가 강조하는 독서 행위의 흐뭇한 추억을 책의 유형에 관계없이 대다수 사람은 가슴 한켠에 간직하고 있다. 독서 행위와 이를 둘러싼 시간과 장소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프루스트의 견해에서 문득 그의 대작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은 무엇보다 러스킨과 프루스트의 독서관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 유익하다. 아울러 양자가 강조하는 지향점이 공통점과 아울러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는 사실, 그 차이점은 결코 옳고 그름의 영역이 아니라 독서와 독서 행위의 본질, 독서에서 우리가 구하고자 하는 목적과 독자의 수용적 태도에 대한 견해의 차이다. 이는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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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다음 이야기 2 - 제2의 전국 시대, 중원을 지배한 오랑캐 황제들
신동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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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은 그래도 1권의 혼란스러움보다는 상대적으로 낫다. 북조의 경우 무수한 왕조가 난립했던 극도의 혼란기를 일차적으로 전진(前秦)이 정리하였으며, 전진 멸망 후 잠시 어수선한 상황을 재차 수습한 게 북위(北魏). 북위가 이후 동서로 나뉘고 각각 북주와 북제로 이어지는 과정은 그렇게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다. 남조의 경우는 더욱 단순한데, 동진에 이어 송, , , 진이 순차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새 왕조의 개창 과정이 대개 평화롭지 않기에 혼란과 살상이 수반되지만 어쨌든 단일 왕조이므로 북조에 비해서는 따라가기가 용이한 편이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왕조 교체사를 접하다 보면 비슷한 유형이 반복되어 일어나는 걸 알 수 있다. 한 왕조의 후반부에 이르면 혼군 또는 암군이 나타나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족 간 다툼과 권신의 발호가 잇따르는 가운데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권신이 결국 명목뿐인 왕좌를 찬탈한다. 북조도 그렇지만 남조의 왕조 교체가 대부분 이런 패턴을 따른다.

 

일찍이 춘추전국 시대를 다룬 책을 보면서 국가 간 전쟁에서 수십만 병사를 생매장하는 등의 잔혹 행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 적이 있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역사를 훑다 보니 이 시대에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된다. 한족과 호족의 대립이 시대적 틀을 구분 짓기에 동족이라는 인식이 약하며 이로 인해 잔혹 행위가 일반화된 측면도 있다. 게다가 유학이라는 사회이념마저 무너지다 보니 권력자의 기분 여하에 따라 인명은 그야말로 파리목숨에 불과하다. 사치, 살인, 고문, 강간에 갖은 패륜 행위 등 인간이 떠올릴 수 있는 온갖 악행을 이 시대에 한꺼번에 목도할 수 있다. 중국사의 여러 분열 시기 중에 위진남북조 시대가 단연코 가장 어지러운 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난세에는 언제나 영웅이 등장한다. 이때의 영웅은 <삼국지연의>의 조조처럼 간웅(奸雄)이어야 하지 유비 같은 정인군자형의 영웅은 나오기도 어렵고 오래 버티지도 못한다. 시대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2권만 하더라도 남조에서 송의 개창자 송무제 유유와 송문제, 양의 창건자 양무제 소연, 북조에서 북위의 태무제와 효문제가 대표적이다. 모두 시대를 풍미한 걸출한 인물들이지만 공과가 극명하기에 그들을 위대한 영웅이라 기리기 어렵다. 개인적으로 남연(南燕)의 모용덕을 기억하고 싶다. 단명한 왕조이고 세력도 약하였기에 자체로서는 주목받기 어렵지만, 창건자 모용덕이 혼돈의 시기에 덕정을 베풀어 백성을 안정시킨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항상 그러하지만 그가 더욱 오래 살았거나 계승자가 다소나마 더 현명하였다면 남연의 수명이 그리 짧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유유는 크게 안심하며 성 위로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북벌의 거동은 이로써 중지됐다. 무수한 인명을 희생하며 관중을 손에 넣었다가 이내 다시 잃은 것은 유유의 일생에서 최대 실패작에 해당한다. (P.55-56)

 

송무제 유유가 동진의 명장으로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의 두 가지 실책을 지적한다. 먼저 유유는 동진을 평정한 후 북벌을 감행하여 후진(後秦)을 멸망시키고 장안과 낙양을 점령하였다. 이른바 중원을 차지하였으니 민심을 수습하고 세력을 공고히 하였으면 이후 역사는 다르게 전개될 수 있었지만, 그는 빨리 황제가 되려는 욕심에 얼른 도성으로 복귀하고 말았다. 이로써 북벌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또한 동진을 뒤엎고 새 왕조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유유는 동진의 황제를 살해함으로써 이후 하나의 악습의 시조가 되었다. 후환을 없애겠다는 단순한 의도였으나 후대에서는 더욱 확장하여 황제뿐만 아니라 왕실과 씨족 전체를 도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니 책임을 면하지 못하리라.

 

송문제는 원가지치(元嘉之治)’라는 수식어로 알 수 있듯이 혼란의 시대에 나름 30년 가까이 안정기를 구축한 군주다. 이때가 송의 최전성기였는데 시호로 알 수 있듯 그는 문치(文治)의 임금이었다. 말년의 그는 북벌을 가볍게 생각하고 북위를 공격하다가 일패도지하고, 후사 문제로 자식에게 시해를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처럼 현명한 군주가 나이 들어 판단력이 흐려져 비명횡사하는 사례는 후대의 양무제도 있다. 양무제는 양나라의 개창자이다. 그는 거의 50년 가까이 재위에 있었는데 86세에 궁궐에서 굶어 죽었다. 일단 그렇게 노년에 이르기까지 군주 노릇을 할 수 있었다는 게 놀랍고, 사실상 양나라의 건국과 패망에 동시에 연관된 인물이라는 점이 안타깝다. 노망이 날 때까지 옥좌를 유지하지 않고 태자에게 일찌감치 양위하고 자신은 상황이 되어 아들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관리하였다면 자신의 삶과 양나라의 운명은 달라졌으리라. 문득 조선의 영조가 떠오른다.

 

북위는 중국 역사상 매우 중요한 왕조다. 북위가 없었으면 북주, 북제도, 당도 없었다. 북위의 포용성은 남북조 이후의 왕조가 대제국으로 존립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나아가 북위가 없었다면 한족과 이적은 영원히 융합될 길이 없었다. (P.63)

 

전진이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한 왕조가 북위다. 북위는 난립했던 여러 나라를 병탄하여 북중국을 통일하였다. 본격적인 남북조 시대를 이룩한 것이다. 북위 태무제의 강력한 무력을 실감하는 동시에 내치를 전담한 최호의 피살은 역시 토사구팽을 떠오르게 한다. 그의 효용 가치가 없어졌다고 판단했기에 거리낌 없이 제거하였으리라. 태무제가 영토 면에서 북조를 통일하였다면, 효문제는 한화 정책을 통해 한족과 호족을 통일하려고 노력하였다. 풍태후의 섭정 기간을 그의 업적에 포함하는 게 온당한지 의론이 갈릴 수 있겠으나 낙양 천도와 한화 정책은 그의 큰 업적이다. 당대의 시각으로서는 평이 엇갈리고 공과가 명확하지 않을 수 있겠으나 중국 역사 전체로 보아서는 획기적인 결정이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효문제 탁발굉이 이룬 업적은 한족 학자들이 아무리 폄훼할지라도 결코 훼손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후대인들은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탁발굉이야말로 남북 민족이 하나로 융합해 현대의 중국 민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당대 최고의 인물이라는 게 21세기 중국 학계의 일반적인 평이다. (P.182)

 

북위의 이주씨 일족과 고환, 남조 양나라의 후경이 수행한 역할은 결과적으로 유사하다. 전자는 북위를 무너뜨리고 동위와 서위 분열을 촉진하였고, 후자는 양나라가 멸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외부의 침략에 나라가 무너진 게 아니라 내부의 분열로 당당한 국가가 일거에 무너지고 말았다. 더욱이 후자의 경우 양무제가 후경의 투항을 받아들였으면서도 적절한 통제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탄압하려는 시도에서 그의 도발을 촉발하였으니 양무제의 횡사는 누구를 원망할 수 없다.

 

주목할 것은 후경의 난을 계기로 소륜과 소절, 소역을 비롯해 왕승변, 왕림 등 모두 북조를 향해 스스로 번국으로 칭한 점이다. 이는 분열 시대에는 한족 중심의 강남이 정통성을 잇는다는 이른바 강남정삭(江南正朔)’의 신화를 무너뜨린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종전의 정통이 부용으로 전락하고, 비정통이 일약 정통이 되는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P.347-348)

 

저자는 후경의 난이 남북조 시대에서 중대한 변곡점이 되었다고 강조한다. 우선 양나라의 내홍을 틈타 북주와 북제가 야금야금 양나라의 영토를 차지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서위(西魏)는 형주와 촉 땅을 점령하여 영토적으로 양나라는 물론 북제도 압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양나라를 이은 진나라는 양자강 이남의 동쪽 지역을 차지한 소국으로 쪼그라들어 다시는 세력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또 하나 양나라의 왕족들이 저마다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와중에서 든든한 배후를 기대하며 북제와 북주의 신하로 자처한 점이다. 원래 동진 이후부터 남조의 한족 국가가 정통이었다면 이제 정통이 오랑캐 국가인 북조로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영토와 정통에서 일대 우위를 점한 북조 국가, 특히 북주(北周)와 계승 국가인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게 된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임금이 성군 또는 명군인데 나라가 패망하는 경우는 없다. 대개 왕국의 마지막 임금은 폭군, 혼군 또는 암군이거나 나이 어린 명목상의 군주인 경우가 많다. 남조 제나라의 임금들은 하나같이 암울하였으며 진후주 진숙보는 암군으로 악명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솔직히 진나라의 멸망은 진선제 진욱이 앞당긴 요인도 있다. 그는 자국의 역량을 알지 못한 채 북주의 꾐에 빠져 북제 공격에 동참하였으니, 참으로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이치를 모른 셈이다.

 

저자는 남조 국가의 잇따른 몰락 원인을 노장사상과 불가사상의 횡행으로 해석한다. 도가와 불가는 개인적 차원의 수양에서라면 올바른 삶을 가꾸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국가 통치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여러 사람이 한데 어울려 사는 사회와 국가에서는 질서유지와 생계보전이 중요하다. 모두가 선약을 복용하거나 풀뿌리를 캐어 먹고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위진남북조 시대는 유학이 통치이념인 한나라를 뒤이은 시대임에도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혼란과 악행이 빈발하였다. 여기에는 외부 요인인 호족의 침입도 한몫 크게 하였지만, 남조의 몰락은 이처럼 이념적, 도덕적 퇴행의 영향도 크다. 지나치게 교조적이고 완고하였던 유가사상에 대한 반발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저자는 이 시대를 단순히 혼돈과 퇴폐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대신에 새로운 질서 수립을 향한 과도기적 혼란으로 해석한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위진남북조 시대 역사를 새롭게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의의를 상기한다. 1권에서 이미 밝혔듯이 저자는 기존 한족 중심의 왜곡되고 폄훼된 중화주의 역사가 아니라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각에서 중국사를 바라보면 전혀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제언한다. 중국사는 한족만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 따라서 중국 지역에 출몰한 여러 민족과 왕조들의 지분을 공정하게 배분하고 인식하는 것, 그것은 비단 중국사뿐만 아니라 역사 해석에 있어 기본적 태도일 것이다.

 

한족 중심의 기존 사서를 거꾸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야만 중국사가 한족의 역사가 아닌 북방 민족의 역사라는 사실을 확연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역사적 진실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중국사를 한족의 역사가 아닌 조선족과 몽골족 및 만주족 등 북방 민족 전체가 함께 만든 동아시아의 역사로 봐야 하는 이유다. (P.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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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를 입은 비너스 펭귄클래식 61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지음, 김재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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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소한 작가의 낯선 작품이다. 이 소설은 작품 자체보다 이후 작가의 이름에서 파생된 한 심리학적, 병리학적 용어로 대중에게 더 낯익다. 마조히즘, 즉 피학성애라는 변태성욕에 빠진 남성과 그의 주인으로 군림하는 여성의 이야기다. 작품을 읽다 보면 어쨌거나 적절한 명칭을 붙였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작가로서는 기분 나쁘고 불만을 품겠지만 말이다.

 

그래, 그렇게 해줘요. 아주 거만한 모습을 보여 줘요. 폭군이 되어줘요.” 나는 극히 격앙되어 소리쳤다. (P.54)

 

그렇게 오만해져 봐요.” 나는 소리쳤다. “발로 나를 밟아줘요.” (P.77)

 

나를 때려줘요.” 나는 애원했다. “무자비하게 때려줘요.” (P.81)

 

제베린이라는 한 신사가 반다라는 젊은 여인을 알게 되었는데, 친분을 나누다 보니 그의 독특한 성적 취향을 반다가 거부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이른바 정상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제베린의 되풀이되는 피학 욕구는 그녀에게 잠재된 가학적 본능을 일깨우고 양자는 채찍의 휘두름과, 자발적 노예 학대 행위를 통해 그들만의 사랑을 지속해 간다.

 

나는 당신을 더욱더 깊이 사랑할 겁니다. 당신이 나를 학대하면 학대할수록 나는 더욱더 미친 듯이 당신을 사모하고 숭배할 겁니다. 지금까지 내게 한 당신의 행동은 나의 피에 불을 붙여 주고 온 감각을 도취하게 만들었습니다.” (P.130)

 

이것이 마조히즘의 본질이다.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동물성 또는 야수성으로 인해 가학성애, 즉 사디즘은 어느 정도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고통과 학대에서 쾌감을 얻는 심리상태는 쉽사리 동감하기 어렵지만, 순전한 상상으로 치부하기 어려움도 알고 있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다양하므로. 사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제베린을 다분히 일반적 사람과는 다르게 묘사하고 있다. 실제 여인이 아니라 돌로 된 비너스상에 애정을 품는다든가, 사춘기 시절 친척 아주머니에게 호되게 매질을 당해 남자다운 태도를 포기한 전례가 있다. 무엇보다 제베린은 남달리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이다.

 

당신도 알겠지만 나는 아주 예민한 사람입니다. 내 경우엔 모든 것이 상상력에 기반하고 있으며 모든 것이 거기서 자양분을 섭취하지요. 나는 조숙했으며 극히 민감했어요.” (P.69)

 

이런 요인들이 한데 섞여 그의 성적 취향을 형성하였지만 이를 실현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피학은 가학을 전제로 하는데, 자신에게 기꺼이 학대를 가할 여성을 찾는다는 건 너무나 어려운 과제다. 여기서의 반다처럼. 더구나 비정상적인 애정 관계에 보수적인 유럽 문화도 한몫하였으리라. 두 사람이 만나고 마조히즘 행위를 실현하는 무대가 카르파티아 산속의 조그만 휴양지”(P.22)로 유럽 본류와는 지리적, 문화적으로 다른 곳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마조히즘과 사디즘의 동전의 양면이다. 한 쌍이 상반되는 성애 감각을 지녀야 행위로 성립 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제베린에 호응하는 반다도 흥미롭다. 미모의 젊고 부유한 과부인 그녀는 제베린의 구혼에 유보적 태도다. 자신이 진정으로 내키지 않는데 굳이 한 남자에게 성적으로 종속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그녀의 애정관은 보면 볼수록 파격적이면서 독자적이다. 당대로서는 이상하고 마뜩잖게 여겨질 의견을 반다는 서슴지 않는다. 아마 이런 점에서 그녀가 쉽게 제베린의 바람을 실현시켜 줄 수 있었으리라.

 

물론 그녀도 처음에는 주저하였음을 작가는 보여준다. 그녀는 거듭해서 제베린에게 경고한다. 그의 피학 욕구가 점차 그녀의 피를 끓어오르게 만들고 있으며, 그녀 또한 억제하지 못할 가학 욕구가 강해지고 있음을 말이다. 전통적 모럴과 배치되는 욕망이므로.

 

! 당신은 정말이지 여자를 철저하게 타락시킬 남자군요!” (P.67)

 

너는 내 기질 속에 잠들어 있던 위험한 성향을 일깨운 거야.” (P.84)

 

난 너 따위 인간을 조소하고 경멸해. 나같이 돼먹지 못하고 변덕스러운 여자한테 눈이 멀어 자신을 노리갯감으로 내놓다니! 넌 이제 내 애인이 아니야. 생사가 내 기분 여하에 달린, 노예일 뿐이야.” (P.146)

 

반다를 향한 제베린의 애정은 한결같지만, 반다의 태도는 조금씩 달라진다. 제베린은 애정이지만, 반다는 스스로를 노예로 만드는 남자에게 애정을 잃는다. 그녀가 진정 바라는 남성상은 제베린 유형이 아니라 나중에 나오는 젊은 그리스 남자다. 여성을 압도하고 지배할 수 있는 거친 수컷으로서의 남성. 자신을 지배할 수 있고 그에게 소유 당하고 싶은 남성. 이른바 나쁜 남자 또는 B형 남자에게 이끌리는 여성의 일면이리라.

 

나는 그 사람을 반드시 소유하고 싶어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죠? 그가 나를 원한다면 나는 그의 아내가 되고 싶어요.” (P.197)

 

여자란 무릇 우러러볼 만한 남자를 원하거든.“ (P.209)

 

제베린에 대한 반다의 감정은 처음엔 분명 진정이었다. 처음엔 부탁을 들어주려는 마음과 일종의 호기심으로 시작하여 일시적 쾌감을 느꼈겠지만, 계속해서 자신에게 무릎 꿇고 노예 취급당하며 채찍 맞기를 소망하는 남자에게 지속 가능한 애정을 품기는 힘들었으리라. 그리스 남자와 합작하여 제베린에게 처절할 정도로 매질을 가한 행위는 훈육적 의도가 아예 없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안점이 아님을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다.

 

돌연 나는 끔찍할 정도로 분명하게 홀로페르네스와 아가멤논 이후로 눈먼 열정과 욕망이 남자들을 어디로 이끌었는지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배반하는 여자의 덫, 그물 속이고, 고난과 예속과 죽음이다.

나는 꼭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P.224)

 

우리는 흔히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변태 성애라 지칭한다. 변태는 올바르고 바람직한 정상적인 성애를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사랑의 감정과 행위에 있어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일까. 단순히 개인적, 사회적 도덕 감정에 저촉하는지 여부를 적용하면 괜찮은가. 이의 위배는 교정과 훈육의 대상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사랑은 미덕이나 이익 같은 것을 따지지 않는다. 사랑은 사랑하고 용서하고 모든 것을 참는다. 그것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우리를 이끄는 것은 달콤하고 멜랑콜리하고 신비로운 힘이다. 그때 우리는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기를 그친다. 우리는 그저 그 신비로운 힘에 이끌려 떠돌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묻지 않는다. (P.104)

 

작가는 사랑의 맹목성을 인정한다. 이성과 도덕률로 사랑을 제어할 수 있었다면 인류 역사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며, 문학과 예술은 무미건조한 장르로 낙후되었으리라. 그렇기에 채찍질에도 황홀감을 느끼며 더 많은 학대를 갈구하는 제베린을 섣불리 비판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녀의 초상화를 그린 독일 화가는 반다를 마녀로 부르는데, 비난보다는 경외와 찬탄, 그리고 저항할 수 없는 매혹을 압축한 표현으로 봐야 한다.

 

19세기 후반에 이런 내용의 소설을 썼으니 확실히 센세이셔널하다. 요즘이야 워낙 자극적인 내용이 각종 매체에서 난무하는 시절이지만, 작가의 표현은 전혀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다. 사드 후작과 달리 자허마조흐는 이 작품 하나로 불후의 명성을 얻었다. 비록 자신으로서는 사디즘과 나란히 불리는 것에 불만스럽겠지만 값어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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