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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깨와 백합 그리고 독서에 관하여 ㅣ 쏜살 문고
존 러스킨.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유정화.이봉지 옮김 / 민음사 / 2018년 12월
평점 :
이 책은 러스킨과 프루스트가 각각 쓴 글을 담고 있다. 프루스트의 글은 러스킨 글의 번역본에 대한 서문 성격이므로 엄밀히 말하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먼저 러스킨의 글 <참깨와 백합>은 1864년에 행한 두 차례 대중강연의 원고 모음집이다. 각기 도서관과 학교(아마 여학교?) 설립 기금 모금을 위한 강연으로서 내용은 차이가 있지만, 교육과 계몽이라는 면에서 공통성을 지닌다. 편의상 두 번째 강연에 해당하는 <백합: 여왕들의 화원>을 먼저 살펴본다.
오늘날 현대사회라면 남녀평등과 동등한 교육은 너무나 당연하기에 별다른 울림이 없지만, 존 러스킨의 시대만 해도 보편적인 사고는 아니었다. 러스킨은 불평등한 당대 여성관을 비판한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와 스콧 등 위대한 고전 작가들이 구현한 여성상을 통해 남성과 비교해 여성이 열등하지 않다는 점을 드러내며 여성의 고유 가치를 발현하기 위해 동등한 수준의 교육 필요성을 열변한다. 학교 설립의 정당성이 여기에 있다. 여기까지 보면 러스킨은 매우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이상을 품은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그에게도 여전히 시대적 인식의 한계를 찾아볼 수 있음은 다소 아쉽다.
남편의 지식은 근본적이며 진보적이어야 하는 반면 아내의 지식은 일상에 유익하도록 일반적이고 우수해야 합니다. [......] 여성은 남성과 동일한 언어나 학문을 배우되 남편과 그의 절친한 친구들이 느끼는 즐거움을 공감할 정도로만 익혀야 합니다. (P.111)
근본적으로 러스킨은 여성의 역할을 가정 내로 국한하여 인식한다.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 국가적 역할 수행을 위한 교육이 아니다. 남편의 지적 수준에 어울리고,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가는데 필요한 교육이다. 오늘날 이런 생각을 표명한다면 당장에 남녀 차별주의자 또는 시대에 뒤떨어진 인물로 논박을 당하기에 십상이다.
<참깨: 왕들의 보물>은 독서의 가치와 중요성을 다룬 글이다. 독서는 예나 지금이나 권장될뿐더러 여러모로 좋은 평가를 받는 행위다. 우리가 생각하는 독서의 의의는 무엇보다 지식 습득에 있다. 물론 지혜와 깨달음도 중요한 목적이며, 단순한 여흥도 무시할 수 없는 동기임을 인정해야 하리라. 러스킨은 독서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제시한다.
저자 나름의 소박한 인간적 방식으로 그의 내면에 있는 진실한 영감을 총동원해서 쓴 그의 기록이며 비문입니다. 책이란 바로 이런 겁니다. (P.28)
아무 책이나 읽는다고 해서 독서가 아니라는 것. 이에 따르면 교훈과 지적 자극을 줄 수 있는 책을 읽어야만 독서라고 할 수 있으리라. 상식과 흥미 위주의 책은 해당이 없다.
문명국의 의회에서 강세나 음절을 한 번이라도 틀리게 발음하면 그것으로 영영 교양 없는 사람 취급을 받고 마는 거지요. (P.34)
여러분에게는 생각할 권리는 없고 단지 사실을 더 많이 배우려고 노력할 권리만 있습니다. (P.48)
여기서 우리는 러스킨이 우아함과 고상함의 미덕을 중시함을 알 수 있다. 저자의 귀족적, 신사적 속성에 대한 집착의 일면을 엿볼 수도 있다. 지적 수준이 어느 정도 올라오기 전까지는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라는 취지는 이해하면서도, 비판적 독서의 가치를 부정하는 대목에서는 쉽사리 동의하기 어렵다.
시대를 초월하여 현인과 학자와 지적 대화를 교류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독자의 사고를 일깨우고 확장할 수 있다는 게 독서의 크나큰 미덕임은 부인할 수 없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도 충분한 독서를 통해 상류 사회에 속한 사람 못지않게 자신의 가치와 역량을 발전시킬 수 있다. 저자는 이것이 인생에서의 진정한 출세라고 단언한다.
인생에서 진정한 출세를 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들뿐입니다. 가슴은 점점 더 부드러워지고 피는 뜨거워지고 머리는 명민해지며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평강의 정신을 얻는 사람들이지요. 이런 생명을 그들 안에 소유한 사람들이야말로, 오직 이들이야말로 이 세상의 진정한 군주이며 왕입니다. (P.74-75)
러스킨의 독서론에 대해 프루스트는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러스킨의 견해에 탄복하며 많은 부분 공감하면서도 그는 독서의 가치에 과도한 무게감을 싣는 데 반대한다. 독서는 완결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며.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명작을 읽거나 동서양의 고전을 읽을 때 독서 행위 자체로 끝나서는 안 된다. 정서적 감동을 받거나 지적 자극을 느꼈다면 그것이 무슨 의의를 지니는지 되새김질하고 한 단계 더 나아갈 욕망을 품어야 한다. 그래야 독서가 교양적 삶에 가치를 지니게 된다. 독서는 정답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 책에서 정답을 구하려고 하며 아무런 독자적 사고도 하지 않는다면 세뇌에 불과하다. <논어>에도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어떠한 독창적 활동도 하지 않는 그의 정신은 책 속에서 자신을 더욱 강화해 줄 자양분을 분리해 낼 수 없다. 이렇게 통짜 그대로 들어온 책은 그의 정신 속에 동화되지 못하는 까닭에 삶의 원칙이 되지 못한 채, 이질적 객체이자 죽음의 원리가 되고 만다. (P.169)
프루스트가 더욱 중시하는 것은 독서 자체보다 독서 행위의 의미다. 저자는 앞단에서 본인의 어린 시절 독서 행위의 추억을 회상한다. 무슨 책을 읽었는지, 그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당시 그 책을 읽었다는 추억을 간직한 경우가 많은데 저자는 이를 가리킨다.
어린 시절의 독서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책 내용 자체보다는 그 책을 읽었던 시간과 장소의 이미지들이라는 주장은 충분히 증명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글에서 나 역시 그러한 독서의 마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P.152)
사실 독서에 정답은 없다. 러스킨처럼 고전류만 진정한 책으로 간주하고 독서의 의미를 엄격하게 적용할 수도 있지만, 실용서와 에세이 같은 책을 읽는 것도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지혜뿐만 아니라 교양, 지식 그리고 정서적 감흥 등 모든 것이 독서의 효용가치에 해당한다.
프루스트의 지적은 러스킨에 대한 전면적 반박이 아니다. 그는 러스킨과 달리 고전 독서에서 독자적 사고의 중요성을 인식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읽었을 때 오독이 많더라도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본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다음에 재차 도전할 계기로 삼을 수 있으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프루스트가 강조하는 독서 행위의 흐뭇한 추억을 책의 유형에 관계없이 대다수 사람은 가슴 한켠에 간직하고 있다. 독서 행위와 이를 둘러싼 시간과 장소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프루스트의 견해에서 문득 그의 대작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은 무엇보다 러스킨과 프루스트의 독서관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 유익하다. 아울러 양자가 강조하는 지향점이 공통점과 아울러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는 사실, 그 차이점은 결코 옳고 그름의 영역이 아니라 독서와 독서 행위의 본질, 독서에서 우리가 구하고자 하는 목적과 독자의 수용적 태도에 대한 견해의 차이다. 이는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