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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세 번째 이 책을 읽는다. 자그마한 판형에 백 쪽을 겨우 넘기는 분량, 게다가 시종일관 흥미롭고 이채로운 내용 전개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실체를 잡기 어려운 작품으로 인상에 남았다.
이 소설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누구를 주인공으로 볼 것이냐에 달려 있다. 표제처럼 좀머 씨가 주인공이라면 특이한 행적을 보이고 소멸해 간 사나이를 향한 주의 환기와 독자의 고민을 요하는 문제소설로 볼 수 있고, 화자가 주인공이라면 좀머 씨와의 조우를 통해 인생의 어려운 시절을 견디고 꿋꿋하게 자라는 성장소설로 여길 수 있다. 내용 전개가 화자의 입을 통해 진행된다는 점, 좀머 씨보다는 화자의 삶과 사건이 차지하는 분량이 더 많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개인적으로는 후자에 표를 던지고 싶지만, 작가가 굳이 표제를 달리하였다는 점, 좀머 씨가 던지는 화두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자도 외면하기 어렵다.
내 머리 속에는 내가 자동차 창문을 통해 보았던 반쯤 벌린 입과 공포에 질린 커다란 눈동자의 얼굴, 빗물로 범벅이 된 좀머 아저씨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 그런 얼굴은 뭔가 겁에 질린 얼굴이었어. (P.43)
화자와 독자 모두가 좀머 씨에 주목하는 대목은 그가 날씨와 관계없이 일 년 내내 줄기차게 걸어 다니는 점이다. 워낙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일 수 있고 걷기가 그의 일생의 최고 취미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기대는 어린 화자의 목격과 진술로 산산이 부서진다. 공포에 쫓기는 불쌍한 사람, 그것이 좀머 씨의 실체다. 작가는 좀머 씨의 신상에 대해 별다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저 좀머 씨가 전쟁(아마도 제2차 세계대전이리라) 직후 이 마을에 정착했다고 한 줄 던져놓을 뿐이다. 여기서 좀머 씨의 행동 배경에 대한 희미한 추측이 가능하다.
수년 후 좀머 씨와 좀 더 유의미한 조우를 하는 화자의 시선을 통해 독자는 화자와 더불어 좀머 씨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어린 화자는 자전거, 개, 피아노 교습, 코딱지가 불러일으킨 사고와 세상을 향한 분노로 자살을 결심한다. 나 또한 청소년 시절에 죽음을 추구하던 경우가 있다. 지금 보면 대수롭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생사를 가를만한 중대한 사안이었다. 이 작품에서의 어린 화자 또한 감정의 격렬함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일생을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사람”(P.94)의 진정한 절망의 모습을 목격한 화자에게 자신의 고뇌와 분노는 우스울 뿐이다.
아니 그것은 한숨이 아니었다. 한숨을 쉬면 뭔가 홀가분해지는 듯한 소리가 나지만 그것은 뭔가 고통스러운 신음에 가까웠고, 홀가분해지고 싶은 갈망과 절망이 엉켜서 가슴에서부터 배어 나오는 깊고 참담한 소리였다. (P.92-93)
이 소설은 전체적으로 화자와 좀머 씨가 그리는 인생의 그래프가 정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화자는 어린 시절에 기쁨보다 슬픔, 즐거움보다 분노가 더 컸고 일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양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이내 불쑥 정상적인 삶의 성장 과정을 따른다. 화자는 스스로 “최고의 시절”(P.98)을 보내고 있다고 자부한다. 반면 좀머 씨는 “세월 다 보낸 사람”(P.98)이다. 그의 존재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서히 잊히고 외면당한다. 쇠퇴의 끝은 소멸이다. 호수 한가운데를 향하여 단호하고 고집스럽게 걸어 들어가는 좀머 씨의 마지막 장면은 비극적이기보다는 차라리 영웅적이다. 공포와 불안에 휩싸여 멈추지 못하고 절망에 압도당한 채 일생을 죽음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분투하던 좀머 씨. 그가 마침내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감내할 수 있었던 용기.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그 말뿐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 말뿐이었다. (P.35)
작가는 자칫 경직되고 엄숙하기 그지없을 이야기를 동화 속 사건처럼 별것 아닌 듯 담담하게 풀어낸다. 화자에 얽힌 여러 일화-헛된 꿈이 되고 만 카롤리나와, 분노 폭발로 이어진 피아노 교습 등-는 작품 시종일관 밝고 해학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처럼 표면상 보이는 흐름의 영향으로 좀머 씨의 비극도 독자는 비교적 충격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럼에도 좀머 씨의 외침은 가볍지 않다. 그것은 차라리 세상을 향한 구원의 부르짖음이 아니었을까.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공포와 절망에서 자신을 놔두지 말고 꺼내달라는. 죽음을 감내하고 호수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용기를 그가 진작 삶을 향해 보여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렇기에 좀머 씨의 비극은 역설적으로 화자의 성장과 어우러져 삶의 소박함과 소중함을 한층 두드러진 존재로 보이게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