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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 I-II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1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평점 :
이 책은 별도로 출간한 <멜랑콜리아> 1부와 2부를 한데 모아 수록하였다. 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불운한 삶을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에 마땅히 그러하는 게 옳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1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므로 1부와 2부를 연대순으로 재구성한다면, 1853년 뒤셀도르프가 1장, 1856년 가우스타 정신 병원이 2장, 2부인 1902년 스타방에르가 3장, 다시 1부의 마지막인 1991년 오사네가 4장에 해당한다. 1장과 2장의 화자는 라스 헤르테르비그 자신, 3장은 그의 누이인 올리네, 4장은 라스에 관한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작가 비드메다.
나는 그림을 잘 그리니까. 그들은 그림을 못 그린다. 그들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 (P.134)
노르웨이의 가난한 집안 출신인 라스는 그의 재능이 눈에 띄어 후원자의 도움으로 독일 뒤셀도르프의 예술 아카데미에 유학 온다. 그는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이 있다. 그의 눈에 다른 아카데미 학생들은 실력이 형편없다. 그가 작중에서 반복적으로 내뱉는 문장이 이를 보여 준다. 상대방 앞에서 거리낌 없이 내뱉는 비난성 발언에 더하여 그의 정신 착란 상태는 술집 말카스텐에 모여든 사람들이 그를 먹잇감처럼 노리고 우롱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라스를 희롱하는 동료 학생들의 행동은 일종의 집단괴롭힘이 분명하기에 독자로서는 분노가 치솟지만 한편 평소 그들을 향한 라스의 멸시적 태도를 알기에 양가적 감정을 갖게 된다.
내 사랑 헬레네가 피아노를 치고 있는 것이다. 헬레네 빙켈만과 하타르보그 출신의 라스는 연인이다. 그들은 이미 서로에게 연인이라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연인이다. (P.17)
라스가 실제로 그림을 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잘 못 그리는지 우리는 확인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라스의 머리와 입을 통해서만 작중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라스는 하숙집 딸 헬레네와 연인 사이다. 이 역시 작품 속에서 라스가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문장이다. 실제로 두 사람이 연인인지 아닌지 확실치 않다. 헬레네는 라스에게 사랑의 말을 하지 않으며, 라스의 애무 행동을 싫어하며 거부한다. 이 작품 속 모든 이야기가 그러하다. 우리는 독자적 관점을 가지지 못하며 오직 라스를 통해서만 알게 되는데, 문제는 라스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점이다. 즉 우리는 진실 여부가 불명확한 진술에 의존하여 소설 전반을 이해해야 하는 난관에 봉착한다.
라스의 모든 말과 생각을 뒤집어 해석한다면, 미친 젊은이가 자기 조카딸을 희롱하므로 빙켈만 씨가 그를 하숙집에서 내보내는 행위는 정당하다. 라스와 헬레나가 연인이 아님을 알고 있는 동료 학생들은 잘난 체하는 라스를 골려주기 위해 헬레네가 술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며 그를 속인다. 제 발로 순순히 나가겠다고 한 라스가 다시금 하숙집으로 돌아와서 못 나가겠다고 행패를 부리자 빙켈만 씨는 경찰을 불러 마침내 내쫓는다. 이 과정에서 헬레네는 단 한 번도 라스를 지키기 위한 일체의 발언과 행동을 보여 주지 않는다. 정말 연인이라면 생이별을 하느니 최후의 수단으로 하다못해 그녀와 도망이라도 치는 걸 택할 수도 있을 텐데, 하숙집을 떠나는 순간 영원히 그녀를 보지 못할 것로 자포자기한다. 오히려 자신이 쫓겨나게 된 계기가 헬레네의 부정한 음욕에 있을 거로 비난할 뿐.
빙켈만 씨는 헬레네를 방문 앞으로 질질 끌고 갔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빙켈만 씨가 내 사랑 헬레네를 내게서 앗아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빙켈만 씨는 내 사랑 헬레네를 데려갔다. (P.173)
라스는 작중에서 완전히 수동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하숙집에서 쫓겨날 때 그는 꿈틀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듯하지만 이내 현실에 순응한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빙켈만 씨와 당당하게 맞서는 온갖 그림이 그려지지만 현실에서 그는 빙켈만 씨의 한마디에 입을 다물고 만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이후 술집에서 수트 케이스를 든 채 바닥만 내려보는 행위에서도 다시 드러난다. 그의 모든 사고와 진술은 결국 그의 머릿속에서만 진행될 뿐 현실에서는 제정신이 아니고, 바보 같은 사람으로 보여질 뿐이다. 독자라면 주인공에 대해 공감과 동정심을 갖기 마련이지만 책을 읽는 내내 그것보다는 차라리 답답함과 짜증의 감정을 느끼게 됨은 결국 라스의 이러한 수동성과 무기력함에 유래한다.
하지만 내게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될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양손에 수트 케이스를 든 채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말해서도 안 된다. 나는 가만히 서서 어떤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P.213)
2장에 해당하는 정신 병원 장면은 두 가지를 확인시켜 준다. 먼저 헬레네를 향한 병적인 사랑의 마음은 그녀를 향한 극도의 원망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망상에 사로잡힌 라스는 헬레네를 창녀, 매춘부라고 욕한다. 이미 앞에서 그녀와 삼촌 빙켈만 씨를 의심하였던 것에서 더 나아간 셈이다. 이어서 세상 여자 모두로 확산한다. 그의 병적인 자위행위는 헬레네를 가질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인 동시에 그녀에 대한 징벌이다.
내 사랑 헬레네, 당신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 당신은 창녀. 나는 당신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온 힘을 다해서 당신 안으로 나를 밀어 넣어야 한다, 나는 두 다리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 자위행위를 하면 안 된다. (P.260)
그는 이제 자신이 그림을 못 그리는 화가가 되었다고 자조한다. 병원장은 미술 창작이 그의 정신에 부정적이라고 판단하여 금지한다, 건강해지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겠다며. 반면 그는 그림을 그려야 자신이 건강해진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자신의 건강은 점점 나빠질 뿐이라며. 자위행위에 대한 진단이 두 사람 간 시각차를 대변한다. 라스는 그림으로 자신의 격정을 표출할 수단이 없기에, 병원장은 그 자체가 광기의 표출이라고 보기에.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늙고 치매에 걸린 올리네는 그의 남동생 라스와의 추억을 회상한다. 앞에서 라스의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지만, 올리네의 진술도 마찬가지다. 늙고 가난하며 몸마저 아픈 그녀는 저녁거리를 얻어서 언덕 꼭대기의 집으로 힘겹게 올라가는 처지다. 정신마저 오락가락하여 오랜 과거의 기억은 생생한 반면 엊그제나 방금 전 일은 거의 기억도 못 하며, 대소변을 가리는 일도 이제 힘에 벅찰 지경이다. 그럼에도 어렸을 때 라스의 모습과 행동, 정신 병원에서 퇴원한 후 고향 땅에 돌아와 여전히 광인으로 살아가는 라스를 회상하는 그녀의 기억은 선명하다. 시그네로부터 남동생 쉬버트의 임종에 와달라는 요청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호의를 베푸는 알리다가 도대체 누군지 알지 못하는 올리네.
올리네는 이젠 정말 알리다가 누구인지 기억해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올리네는 알리다가 전혀 낯설지 않았고, 심지어 바닷가에 자리한 그녀의 집에도 가 본 적이 있다. 문제는 알리다가 누구인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 [......] 솔직히 말하자면 올리네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가물가물했다. 말이 나온 김에, 그녀는 누구일까? (P.442-443)
라스는 왜 바위에 앉아 눈물을 흘려야만 했는가. 라스를 하늘과 바다에 비유하는 올리네, 라스의 화풍을 “생명을 머금은 어둠, 빛을 발하는 어둠”(P.417)이라고 평했던 올리네. 우리는 라스에 관한 올리네의 진술을 어느 정도 믿어야 할까. 그것은 단편적이지만 라스의 삶을 정확히 알려주는 것인지 아니면 오락가락하는 올리네의 기억에 따라 머릿속에서 창작되고 변조된 기억의 왜곡일 뿐인지.
겨우 얻은 생선을 못 쓰게 되어 다시금 끙끙대며 언덕을 내려가 다시 얻는 올리네. 발이 아파 한 번에 못 오르고 중간에 쉬어야지만 간신히 걸을 수 있는 올리네. 화장실에 들르지 않으면 불안감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그게 현실로 드러나는 올리네. 두 번이나 깜빡한 후 시그네에게 끌리다시피 동생 쉬버트에게 갔지만 임종이 늦어버린 올리네. 작가는 왜 늙고 병든 올리네를 등장시켜 하루의 여정을 힘겹게 영위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가.
올리네도 자신이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들 모두가 마찬가지 아닌가. 자신이 나이 들어 풍을 맞아 반신불수가 된다거나 치매에 걸려 아무도 못 알아보고 대소변도 가릴 줄 모르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하지만 그게 엄연한 사실이자 인생의 모습이다. 혹자는 벽에 똥칠하더라도 살고 싶다고 하지만, 어디 그게 사람다운 삶이겠는가. 이 작품에서 올리네가 열심히 갈구하는 것, 즉 고통으로 가득한 삶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이 되고자 하는 바람은 오직 소박할 따름이다. 올리네가 드디어 평온하게 생을 마치게 되었음을 다행으로 여기지만, 솔직히 마지막 대목은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른다.
올리네는 자신의 숨결이 차분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갑자기 너무나 피곤해졌다. 온몸이 축 늘어짐과 동시에 너무나 평온해졌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생선 눈알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생선 눈알과 라스의 그림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평온함에 몸을 맡기며 벽에 몸을 기댔다. (P.514)
작품 전체에서 마지막 장에 해당하는 1부의 세 번째 장면은 소설가 비드메가 화자다. 이 장은 매우 짤막하며 작품 전체와는 동떨어진 배경과 내용을 담고 있다. 비드메는 라스에 관한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는 점에서 작가 자신의 형상화라고 볼 수 있다. 그가 난데없이 노르웨이 교회 사제와 만나고 싶어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가 대리 사제 마리아를 찾아가서 주고받는 이야기는 무슨 의미일까. 마리아가 설교를 들으러 자신의 교회에 오지 말라고 한 것과 대신에 오늘처럼 집으로 찾아오는 것은 환영한다는 말은 도대체 무엇일지.
퀘이커교 신자들도 의자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나? 나는 오리들처럼 땅에 앉아서 술을 마시는 줄 알았지. 퀙퀙.
난 퀘이커교 신자가 아냐.
젠장, 자네도 퀘이커교 신자잖아. 방금 자네 입으로 그렇게 말했으면서. (P.95)
집 안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이웃집 사람들마저 우리 집에 돌을 던지는구나. 정말 해도 너무해. (P.411)
그러고 보면 라스의 부모는 퀘이커 교도였다. 라스는 이로 인해 미술 아카데미 동료들에게 놀림을 받는다. 그가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퀘이커 의식에 참석한 기술도 나온다. 3장에서 외딴 섬에 살던 라스 부모 일가가 이웃 사람들의 박대에 참다못해 집을 허물고 육지로 이사를 감행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모든 게 4장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라스가 일찍부터 종교적 소수자, 계층적 소수자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리라. 이것이 라스의 마음과 의식에 형언할 수 없는 어떤 심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일까. 항상 세상을 향해 등을 돌리고 껍데기 속에 몸을 웅크리는 달팽이처럼, 그는 고개를 들고 세상을 바라보기보다는 언제나 땅바닥만 내려다보며 속으로만 무수히 말을 되씹는. 이러한 해석을 확대하면 결국 다수의 가해자와 소수의 피해자의 구도로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단지 종교적 영역을 넘어 병리학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라스의 정신이상은 배려와 치료의 관점에서 바라볼 사안이지만 작중 인물들에게 그것은 희롱과 배척, 감금의 대상일 뿐이다.
읽기 어려운 소설을 아니지만 결코 읽기 편한 작품도 아니다. 욘 포세로서는 이례적으로 상당한 분량을 자랑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전체 4부작 구성이라고 이해하면 편하다. 역시나 어둑어둑한 분위기에 늘어지면서도 긴박감을 놓치지 않고 있어 책에서 쉽게 손을 떼기 어렵다. 다만 특이한 점은 포세 특유의 구두법이 여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문장은 일반적인 맞춤법으로 끝맺는다. 이제껏 읽은 작품 중에서는 유일하기에 오히려 인상적이다. 그의 특징인 반복은 여전한데, 분량이 긴 만큼 반복의 정도도 한층 더하다. 집요하기에 차라리 집착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정도로 반복의 작품 진행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하나 더 반복의 대상이 주인공의 생각이며 반복과 심화가 상승 작용을 일으켜 화자의 자의식 과잉으로 비쳐질 정도라는 점에서 포세의 다른 작품과 다름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