탬벌레인 대왕 1부
크리스토퍼 말로우 지음, 김성환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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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에 강석주 번역본으로 읽은 후 오랜만에 다시 이 작품을 읽는다. 말로는 왜 유럽인도 아닌 티무르를 주인공으로 삼았고, 관객들은 탬벌레인 대왕의 승승장구한 정복에 열광하였을까. 단순한 이국적 호기심과 전쟁 영웅에 대한 찬미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1부에서 탬벌레인은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이어서 터키, 즉 강대한 튀르크 제국의 황제를 포로로 잡는다. 마지막 막에서 이집트 술탄과의 전쟁에서도 마저 승전하는 등 작품 전체에서 탬벌레인은 전쟁의 신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표면적 서사를 파헤쳐 가만히 들여다보면 독자는 기저에서 두 가지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제노크라테에 대한 탬벌레인의 사랑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평화롭게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녀를 향한 주인공의 열렬하고 지극한 애정은 점차로 그녀의 마음을 녹이고 이어서 그를 향한 숭배에 가까운 사랑으로 화답한다. 극 중에서 탬벌레인은 한결같다. 비록 조국인 이집트 술탄과 전쟁하지 말 것을 부탁하는 제노크라테의 청을 수락하지는 않지만, 술탄의 목숨과 파괴를 약속하는 장면에서 그녀를 향한 애정의 정도를 헤아릴 수 있다. 제노크라테 또한 3막에서 아기다스가 탬벌레인을 비난하자 오히려 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밝히며, 바자제스와 일전을 앞둔 대목에서 튀르크의 자비나 황후와 나란히 앉아서 서로 간 상대방을 향한 비난과 모욕적 언사를 아낌없이 주고받는다. 희극적 장면인 동시에 탬벌레인에게 동화되어 가는 그녀를 볼 수 있다.

 

1부의 중심 사건은 탬벌레인과 바자제스 간 전쟁과 포로가 된 바자제스를 모욕적으로 취급하는 탬벌레인의 행동이다. 작가는 두 제왕의 불가피한 충돌을 극적이고 중대한 사건으로 다루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과장하고 왜곡한다. 우선 당시 오스만 제국이 한창 발흥기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거대 세계 제국으로 불릴 수준은 아니었다. 극 중에서 기술되는 영토는 훗날 술레이만 대제 때 확장된 영역이었을 텐데 말로는 서슴없이 끌어다 사용한다. 이래야 탬벌레인이 맞닥뜨린 상대가 더욱 거물이므로 이를 무너뜨린 그의 강력함과 위대함이 돋보일 것이므로. 그리고 포로가 된 바자제스가 잔인하고 모욕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역사적 증거는 따로 없다. 일부에서 만들어낸 가공과 창작의 산물일 뿐이며, 실제로는 제왕에 어울리는 후한 처우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래서는 극의 갈등과 분쟁의 심화가 불가능하므로 말로는 탬벌레인이 그를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것으로 전개한다.

 

(탬벌레인) 신의 징벌이자 분노, / 온 세상의 유일한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라 불리는 나는, / 먼저 터키를 굴복시키고, 그다음에는 / 너희가 노예로 잡아 둔 기독교 포로들을 석방할 것이다. (P.108, 33)

 

유럽인에게 있어 탬벌레인은 적국이 아니다. 유럽을 침공하고 수많은 기독교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아랍과 튀르크, 유럽인들 자체의 힘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그들 세력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쑥대밭으로 만들어 정신적, 심리적으로 복수를 대행해 준 인물이다. 3막에서 탬벌레인은 스스로를 신의 징벌이자 분노로 칭하며 친기독교적 발언을 한다. 그가 유럽에서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인기를 끈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무자비한 폭력성과 잔인성은 전적으로 유럽의 적국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독자들은 탬벌레인의 강렬한 개성에 감탄하게 된다. 단순히 전쟁광, 정복자라고 치부하기에 그의 정신은 광활하다. 그는 자신을 신의 징벌이자 분노라고 일컫지만 자신이 신의 하수인임을 인정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신의 전능성을 부정하고 자신과 같은 영웅적 인간은 오히려 신과 대등하거나 신을 압도할 수 있다고 믿는다.

 

(탬벌레인) 그대의 왕을 버리고, 나와 손을 잡읍시다, / 그러면 우리가 전 세계를 정복할 것이오. / 나는 쇠사슬로 운명의 여신들을 단단히 묶어 놓고, / 내 손으로 직접 운명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소. (P.36, 2)

 

(탬벌레인) 제노크라테, 이집트가 설령 제우스 신의 땅이라 할지라도, / 나는 무력으로 제우스 신을 굴복시킬 것이오. (P.154, 4)

 

테리다마스가 페르시아를 버리고 그에게 투신한 계기가 바로 이것이니 인재의 가치를 알아보고 인정할 줄 알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 멀리 더 높은 이상을 향해 전진하려는 태도에 감복하였던 것이다. 일부 독자는 탬벌레인의 잔인성과 비인간성에 방점을 두고 비판적 인식을 보인다. 포로 바자제스에 대한 처우가 하나이고, 항복을 청한 다마스커스의 처녀들을 죽여서 성벽에 내건 행위가 제시된다. 후자는 전쟁의 본질을 모르는 나부랭이들의 삿된 발언이다. 전쟁은 기본적으로 비인간적이다. 고귀한 패전은 모순이다.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무조건 승리해야 한다. 다마스커스는 애초 흰 깃발을 내건 탬벌레인의 관대함을 거부하였고, 철저히 항전하다가 마침내 검은 깃발에 이르러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니 마지못해 항복을 요청하였다. 탬벌레인은 다마스커스를 예외로 인정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오히려 남은 정복을 위한 본보기로도 확실하게 해둘 유인이 더 크다.

 

(탬벌레인) 아름다움이 가지는 두 가지 힘을 다 생각하고 억제하기에, / 내 비록 태생은 미천하나, / 온 세상에 단지 내 미덕만이 영광의 총합이요 / 진정으로 인간을 고상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선포할 것이다. (P.176, 1)

 

탬벌레인은 무식하고 미천한 양치기가 아니다. 5막에서 그는 아름다움과 사랑의 본질에 대한 기나긴 감상과 견해를 읊조린다. 그는 아름다움, 미덕, 고상과 같은 추상적이며 도덕적 가치의 귀중함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삶의 지향점이 그것의 조화에 있음도 선포할 정도다. 그의 부하들이 그에게 절대적 충성심을 보여 주고, 제노크라테가 자신을 납치한 탬벌레인에게 진실한 사랑을 보여 주는 일련의 행동은 결코 일회적이거나 우연이 아니다. 즉 탬벌레인은 모두를 압도하고 존경과 두려움을 품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진정한 군주다. 정복사업이 성공적으로 일단락되자 그가 베푸는 엄숙한 장례식과 성대한 결혼식을 표방하면서 드러내는 관대함과 화합의 분위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기독교적 가치가 절대적인 중세의 정신과, 탬벌레인이라는 전대미문의 인생 개척자를 통해 보여 주는 적나라하지만 솔직한 인간의 본모습을 함께 제시하고 있어 천상에서 지상으로 가치의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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