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탬벌레인 대왕 2부
크리스토퍼 말로우 지음, 김성환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0년 5월
평점 :
1부는 탬벌레인이 페르시아, 튀르크, 이집트를 정복하는 승승장구의 여정을 그렸다. 사실 역사적 사실로만 보자면 1부에서 전부 다루었기에 2부는 불필요하다. 1부가 비교적 역사에 근거하였다면, 2부의 이야기는 작가의 순전한 상상과 역사의 자유로운 편집에 기반한다. 2막에서 헝가리의 왕 지기스문트와 나톨리아의 왕 오르카네스의 동맹과 배신이 그러하다. 오르카네스는 자신이 마치 훗날 술레이만 대제인 것처럼 발언한다.
(오르카네스) 잠깐, 지기스문트, 그대는 내가 / 마치 거대한 지구가 / 대포로 천상의 축을 중심으로 흔들리듯 / 비엔나의 성벽을 뒤흔들어 / 대지 위에 무너뜨린 바로 그자였다는 사실을 잊었단 말이오? (P.16-17/1막 1장)
오르카네스를 주축으로 한 튀르크의 왕들은 힘을 모아 다시금 탬벌레인에게 도전하지만 처참하게 패배하고 포로가 되어 마차를 끄는 인간 말 신세로 전락한다. 탬벌레인의 세 부하, 테켈레스, 우섬카사네, 테리다마스는 각각 페즈, 모로코, 알제리의 왕이 되는데, 이들은 자신의 왕국에서 다시금 정복사업을 벌여 스페인, 아프리카 전역, 우크라이나까지 정복했다고 탬벌레인에게 보고한다. 모두가 허구다. 탬벌레인의 마지막 정복이 바빌론이라는 것조차도.
자 그러면 작가는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탬벌레인이 허황한 세계 정벌을 계속하도록 만들었을까 궁금하다. 아마도 예정에 없던 2부를 불가피하게 집필하다 보니 억지로라도 즉,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탬벌레인이 계속 전쟁을 벌이게끔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2부가 1부와 다른 대목은 사랑하는 아내 제노크라테와 맏아들 칼리파스를 연달아 잃는 데 있다. 항상 전진과 승리만 거둔 탬벌레인으로서는 난생처음 겪는 상실이자 아픔이다. 특히 1부에서 제노크라테를 향한 일편단심의 사랑을 보였던 만큼 그녀의 죽음은 탬벌레인에게 치명적이었으리라. 그는 아내의 죽음에 울분을 참을 수 없어 마을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리고 신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탬벌레인) 구름보다 더 높게 진지를 쌓아 올려라. / 그리고 대포로 하늘의 성벽을 부수고, / 빛나는 태양 궁전을 난타해서, / 뭇별들이 빛나는 창공을 두려움에 떨게 하라. / 음탕한 제우스 신이 그녀를 천상의 여왕으로 삼고자, / 나의 사랑을 여기서 낚아채 가 버렸으니 말이다. (P.71, 2막 4장)
이에 반해 장남의 죽음은 비교적 가볍게 다루어진다. 일국의 군주이자 영웅으로서 자신의 명예를 잇지 못할 아들을 스스로 죽인다. 비정한 아버지라고 할 수 있겠지만 거시적 차원에서 보면 탬벌레인을 탓하기 어렵다. 칼리파스가 극 중에서 보여 준 행동과 대사를 보면 분명 나약할뿐더러 비겁하기조차 하기 때문이다. 전리품이 될 적국의 후궁을 취할 생각을 하고, 군막에 누워서 자신은 후계자이므로 몸을 소중하게 보전해야 한다는 발언을 본다면 확실히 동생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칼리파스) 내가 나가서, 아무런 손해나 이익이 되지 않는다 해도, / 내가 해를 입을 수 있다. 아바마마의 왕위를 이어 / 내가 갖게 될 모든 재산으로도 절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말이다. / 카드놀이나 해야겠다. 페르디카스! (P.127, 4막 1장)
말로는 이 희곡에서 종교와 관련하여 몇 가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우선 탬벌레인을 반튀르크, 친기독교적으로 간주하는 당대의 인식을 수용한다. 이 점은 1부와 2부 모두 동일하다는 점에서 튀르크 세력에 대한 크고 뿌리 깊은 적개심을 확인할 수 있다. 5막에서 시민이 바빌론의 총독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대사에서도 드러난다.
(시민) 여기에는 아직도 그루지야의 기독교도가 있고, / 그[탬벌레인]가 그들의 상황을 항상 불쌍히 여기고 구해 준즉, / 각하께서 그들을 보내시면, 그도 용서해 줄 것입니다. (P.163, 5막 1장)
지기스문트는 오르카네스와 동맹을 맺지만, 오르카네스가 탬벌레인과 맞서기 위해 후방이 약해지자 신에게 한 맹세를 저버리고 후방을 급습한다. 배신에 대한 오르카네스의 분노와 저주는 참다운 기독교인이라면 뼈저릴 정도다. 결국 소수의 병력으로 맞선 오르카네스에게 참패하고 지기스문트는 전사하고 마는데, 양자 모두 신의 응징이라고 해석한다.
(오르카네스) 기독교도들이 그렇게 교활할 수가, / 아니, 존귀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 인간의 심장이 그렇게 배신할 수 있단 말인가? / 그렇다면 만일 기독교도들이 말하듯, 그리스도가 있다 한들, / 그들의 행위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다. (P.56, 2막 2장)
압권은 탬벌레인이 바빌론을 점령한 후 마호메트를 향한 신성모독을 행하는 장면이다. 그는 코란과 이슬람 신전에서 발견한 모든 책을 불살라 버리고, 마호메트에게 도전하고 모욕한다. 이 대목만 보면 마치 탬벌레인은 독실한 기독교도처럼 여겨질 정도다.
(탬벌레인) 자, 병사들아, 마호메트는 지옥에 있다. / 그는 탬벌레인의 말을 듣지 못한다. / 그러니 경배할 다른 신을 찾아보아라. / 만약 있다면,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이시다. / 그분만이 유일한 신이시며, 그분 외에는 없으니라. (P.175, 5막 1장)
역사적 사실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데, 티무르는 신실한 무슬림이었다고 한다. 그가 튀르크를 정복한 이유는 종교와 무관하다. 작가가 이런 무리수를 둔 이유는 그만큼 튀르크에 대한 유럽인들의 반감이 강력하다는 반증이다. 유럽의 존망을 위협하던 튀르크를 무찔렀으니 그야말로 기독교도로 삼고 싶을 정도가 아니겠는가.
작품해설에 따르면 1부를 탬벌레인의 상승, 2부를 그의 추락으로 해석한다. 2부에서 아내, 아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항상 행운만 충만하던 1부에 비하면 2부에서 탬벌레인은 여러 불행에 맞닥뜨린다. 하지만 이를 그의 추락이라고 간주하는 게 적정할지 의문이다. 군사적인 면에서 그는 여전히 막강하다. 오르카네스의 도전, 바자제스의 아들 캘러파인의 재도전, 바빌론의 정복 등 그의 앞에는 오로지 승전뿐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든든한 후계자가 있다. 임종을 앞두고 탬벌레인은 차남 아미라스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이 못다 이룬 세계 정복을 과업을 성취하길 기대한다. 그는 죽음에 임박해서도 전진과 정복이라는 야망을 결코 놓지 않는다.
(탬벌레인) 나는 태양처럼 황금빛 갑옷을 입고 마차를 타고 / 정복한 왕들 무리를 이끌고 거리를 누빌 것이다. / 내 투구는 다이아몬드로 반짝이며, / 하늘에 춤추는 세 겹의 깃털을 꽂아서, / 내가 셋으로 나뉜 온 천하의 황제임을 알리도록 하겠다. (P.155, 4막 3장)
탬벌레인의 진면목은 자신이 신의 징벌이자 대리인으로 세계를 정복하지만, 신에게 맹종하는 처지가 아니라 신 앞에서 당당함을 잃지 않는 세상의 지배자를 선포함에 있다. 탬벌레인의 신은 하나가 아니다. 아내가 죽었을 때, 자신이 중병에 걸렸을 때 그는 제우스 신에게 도전한다. 그에게 제우스 신은 신성불가침의 존재가 아니다. 여차하면 자신이 제우스 신처럼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마호메트를 무시하고, 제우스 신과 대등하며, 하나님과 제우스 신을 동일시하는 탬벌레인.
르네상스가 무엇인가. 종교로부터의 자유, 고전으로의 회귀가 대표적 특징이라고 할 때 탬벌레인만큼 르네상스 정신을 체현한 인물이 달리 있는가. 이 작품을 탬벌레인이라는 허황한 인물의 상승과 추락이라는 비극으로 해석하는 건 온당치 않다. 신 중심에서 벗어나 인간의 무한한 힘과 자신감, 욕망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탬벌레인은 인간성 그 자체를 한치의 가감 없이 오롯이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대의 전형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죽음조차도 그의 욕망을 꺾을 수 없고 아들들을 통해서 계속 전진하기를 바라는 인간적 영웅으로서.